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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영성
욥기 23:1-9, 16-17; 시 22:1-15; 히 4:12-16; 마르코 10:17-31
인생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를 내리라고 한다면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그러나 ‘인생은 고난이다’라고 하는 정의에 많은 사람이 동의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인도의 한 작은 왕국의 왕자였던 고타마 싯다르타는 인간의 생노병사 곧 태어나고 나이 먹고 병들고 죽는 모든 것 곧 인생 자체가 고통임을 알았고, 이 고통이 마음의 욕망과 집착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깨달아 알아 이를 끊는 일이야 말로 붓다가 되는 진리의 길이라 선포했습니다. 성서는 하느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보기에 좋았다고 선포하고 나서 인간이 하느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교만의 욕망으로 인해 인간세계에 죄가 들어왔고, 여기에 고통이 함께 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선포합니다.
[고난과 인생]
근 50년에 걸쳐 가깝게 만나는 친구들 몇 명이 있습니다. 정치나 사회 문제에 관련해서는 저와 의견이 달라 가끔 다투기도 하지만, 그래도 포도주와 친구는 오랠수록 맛이 있다는 서양의 속담에서와 같이 만나면 괜히 즐거운 친구들입니다. 지난 목요일 아침 그중 한명이 작은 수술을 받아 병원에 입원을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전화로 안부를 주고받았는데, 그날 저녁 그 친구의 아들이 미국 유학 중에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성실히 살아왔고, 부부간에 교회 봉사도 잘하고 신앙심도 깊은 친구인데,.. 무어라고 위로할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전화도 받지 않아 위로의 문자 몇 줄 보냈습니다.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어떨까? 저 친구처럼 깊은 침묵 속에 빠져들어 말을 잃지는 않을까? 아니면 하늘을 향해 삿대질을 해가며 소리를 칠까? 그 충격으로 나는 얼마나 헤매고 그리고 나서 교인들에게 뭐라고 얘기할까? 여전히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우리의 주님이시라고 당당하게 선포할 수 있을까?
도대체 그 친구는 인생에 무슨 욕망과 집착을 가졌기에 사랑하는 아들을 잃어야만 했을까? 고난을 통해 사람이 성숙해진다고 말들 하지만, 그래 친구가 이 아픔을 통해 인생의 깊은 깨달음을 얻은들 그게 어쨌다는 말인가? 해골바가지 속의 물이야 그걸 발로 차든 모르고 마시든 나 혼자만으로 끝나는 일이니 어찌 되었든 상관이 없지만, 도대체 그 20대의 팔팔한 청춘이 갑작스레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할 이유는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모세의 율법시대라면 누군가가 조상의 죄 값이라도 치러야 했다고 말할 수가 있겠지만, 이미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조상이 신 포도를 먹었다고 그 후손의 이빨이 시린 그런 죄의 상속 논리는 이미 끝났다고 선포하지 않았던가? 아니 그리고 죄가 좀 있기로 서니 생명과 맞바꾸어야 할 만큼의 죄는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자기 자식이 끼어 있다면 좀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요즘 많은 사람들은 비록 수십 명을 이유 없이 죽인 막가파식의 악질이라도 사형만은 안 된다고 주장하는데, 과연 그가 죽어야 할 죄 값은 무엇이었다는 말인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심장마비이니까 그냥 우연이었다고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우연이었다고 말할까?
그래서, 우연히 그 아들이 친구와 부인 사이에 태어났고, 그 부부는 우연히 똥치우고 밥 먹이고 공부시키고 우연히 군대 보내고 우연히 유학 보내고 우연히 사라진 것인가? 인생은 우연의 연속인가? 죽음을 찬양하여 온 염세 철학자인 쇼펜하우어도 잠을 잘 때, 혹시 누가 자신을 살해할까봐 총을 침대 머리맡에 두고 잤다고 하지 않는가? 어찌 인생을 우연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기쁘고 좋은 일은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슬프고 비극적인 일을 우연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는가?
[고난의 근원]
욥기는 이런 인간의 가장 핵심적인 고난의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해답을 시도한 책입니다. 히브리 성서에서 지혜문학으로 분류되는 욥기를 몇 줄로 요약한다는 것은 마치 박경리의 장편소설 <토지> 열권의 책을 A4 용지 한 장으로 줄이는 것처럼 매우 잘못된 일이지만, 지금은 그렇게 요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1장 1절, “우스라는 곳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욥이었다. 그는 완전하고 진실하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악한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이어 말하기를 가진 재산도 많아 동방에서 으뜸가는 사람이었고, 게다가 집안은 화목하기 그지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지나친 행운은 불행의 시작이라는 독일 속담과 같이 뭔가 전운이 감돌기 시작합니다. 욥의 이야기를 하다 갑자기 장면이 바뀌어 하늘이 등장합니다. 야훼 하느님과 사탄이 서로 대화를 합니다. 야훼 하느님이 묻습니다. ‘어딜 갔다 오느냐?’ ‘예 인간들이 사는 땅을 여기저기 둘러보고 오는 길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네가 악이라고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욥을 보았겠구나.’ 기다렸다는 듯이 사탄이 이렇게 말합니다. ‘아 그야 당신께서 불꽃같은 눈동자로 항상 지켜주시기에 불행을 겪어보지 못해서 그렇지요. 그도 불행을 겪는다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인간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은 욥의 신앙을 믿고 사탄의 도전을 받아들입니다. 인간 편에서 본다면 인간이 하느님과 사탄의 내기 대상이 된다는 일은 너무나 불쾌한 일이지만, 하늘에서 그리 하겠다는데 제가 그 이상 뭐라 불평하겠습니까? 그래 갑자기 욥은 그 많던 재산을 일시에 도적떼에 빼앗기고 수많은 종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고 그리고는 열 명이나 되는 자식들도 생일잔치를 벌이다가 갑작스레 불어온 광풍으로 집이 무너져 몰살을 당하고 맙니다. 이 소식을 들은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야훼께서 주셨던 것, 야훼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야훼의 이름을 찬양하리라.”
글쎄요? 현실에서 이렇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한 명의 자식을 불의의 사고로 잃어도 부모의 애간장은 찢어질 수밖에 없고, 남은 생을 눈물과 하느님에 대한 고발과 의심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왔으니, 하느님께서 거둬가셨다’고 하는 고백은 어떻게 보면 매우 신심 깊은 고백이지만, 다른 편으로 보면 숙명론적인 고백입니다. 비극이 일어난 직후에는 쉽게 고백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세월이 흘러가면 ‘그래 이미 일어난 일, 어떡하겠나 하며 현실을 수용하고 나면 이런 신앙고백은 전연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1라운드는 사탄이 졌습니다.
사탄이 하느님께 재도전합니다. 그에게 고통이 수반된 불치의 병을 안기다면 그는 분명 당신을 저주할 것입니다. 그래 욥은 또 다시 하느님과 사탄의 실험 대상이 되어 욥의 온 몸에는 독한 피부병이 생기게 되고 그는 잿더미에 앉아 토기조각으로 온 몸을 긁어대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마음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자 사탄이 아내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당신은 아직도 요지부동이군요. 하느님을 욕하고 죽으시오.’ 그러자 욥은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았는데, 나쁜 것이라고 하여 어찌 거절할 수 있단 말이오.’ 이쯤 되면 노자의 도덕경의 초월이나 공자의 논어의 중용과도 비교할 수 있는 새옹지마의 지혜이지요. 그런데 이런 발언은 신학이나 교리적으로는 문제가 됩니다. 하느님은 선하신 분이라 그 안에서는 결코 나쁜 것이 나올 수가 없는데, 지금 욥은 나쁜 것도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라고 하는 고백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하는 질문은 오랜 세월 풀리지 않는 숙제입니다. 그리스 신화는 판도라의 상자를 말하고 성서는 선악과를 말하지만, 철학이나 신학에서 여전히 풀지 못하고 있는 신비의 질문입니다. 과학은 말할 것도 없구요. 무신론자인 리차드 도킨스는 아예 종교가 악의 근원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종교를 없앨 수도 없지만, 종교가 없어진다고 해서 사람들이 선해질 것이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고난과 죄의 상관관계]
고통 속에서 나날을 보내던 욥은 더 이상 참고 견디기가 어려워 생일을 저주하게 되고 자신을 찾아온 세 명의 친구들과의 대화와 논쟁을 통해 욥기의 이야기를 전개해 갑니다. 4장부터 27장에 이르기까지 논쟁이 이어지는데, 이는 고난에 대한 당대의 종교적 가르침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세 친구의 주장은 욥 네가 당하는 고통에 이유가 있다, 인간의 모든 고통은 죄의 결과에 따른 인과응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세 번째 친구 엘리바즈가 이렇게 말합니다. “자네가 올바르게 산다고 하여 그것이 전능하신 분께 무슨 대단한 일이 되겠는가? 자네가 흠없이 산다고 하여 그것이 하느님께 무엇이 유익이 되겠는가? 인간은 모두 하느님 앞에서 죄인이 아닌가? 그러니 자네 죄를 회개하게나? 그러면 하느님께서 용서를 하실 것이네.” 마치 검사가 피의자에게 죄를 고백하라고 그러면 용서를 받을 것이라고 채근되는 모습입니다.
흔히 우리는 기도할 때 그렇게 말합니다. 알고도 지은 죄 모르고도 지은 죄, 우리는 죄인입니다.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구체적으로는 알지 못하지만, 무조건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솔직한 것 같지만, 어떻게 보면 무책임한 발언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 고백으로 악을 제거하기 위한 모든 실천 행동은 중지되고 마니까요. 죄인이 하면 무얼 하겠으며,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대부분의 기독교 교인들은 이 너도나도 죄인이다라는 틀에 갇혀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몸은 그대로 죄악 속에 있으면서 입으로만 구원해달라고 하는 신앙의 모순을 지난 2천년동안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졸지에 피의자로 몰려 억울하기 짝이 없는 욥은 계속되는 검사 친구들의 종용에 더 이상 견디질 못하고 마치 제우스로부터 불과 지혜를 훔쳐 인간에게 준 프로메데우스처럼 하느님께 도전장을 내밉니다. “그가 어디 계신지 알기만 하면, 당장에 찾아가서 나의 정당함을 진술하겠네. 반증할 말도 궁하지는 않으련만, 그가 무슨 말로 답변하실지를 꼭 알아야겠네. 내 진술을 듣고 나면 그는 분명 나의 옳음을 인정하게 될 것이네,” 법정에 선 욥은 자신의 무죄를 확신하고 승소를 확신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재판관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앞으로 가보아도 보이지 않고 뒤를 돌아보아도 보이지 않는구나. 왼쪽으로 가서 찾아도 눈에 뜨이지 아니하고 오른쪽으로 눈을 돌려도 보이지 않는구나”
[신의 부재]
욥은 결백을 주장하지만,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줄 재판관이 보이지 않는다고 소리칩니다. 세상에 억울해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재능회장도 한진중공업 사장도, 쌍용자동차 사장도 회장도 모두가 억울하답니다. 재벌이 자기 딸이 운영하는 빵집에만 수수료를 대폭 인하해주고 나서도 벌금을 내라고 하니 억
울하답니다. 하여간 세상은 억울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의 재판관은 분명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이 모든 것을 판결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느님이 자리를 비운 것입니다. 법정의 가운을 벗어 놓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점심을 먹으러 간 것도 아니고, 잠시 휴식을 취하러 가신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질 않습니다. 인류 역사 그보다도 더 오랫동안 전연 나타나질 않습니다. 왜 전능하신 하느님은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주시지 않는 것일까요? 무엇이 무서워서 숨어 계시는 것일까요? 인간들과의 말싸움에서 지기라도 할까봐, 대답할 말이 궁해서 숨은 것일까요? 아니면 그 어떤 때를 기다리는 것일까요?
‘꽃피는 고래’라는 장편소설의 작가 김형경은 ‘내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기 위해 정해둔 규칙’이라는 항목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징징거리지 않기. 변명하지 않기. 핑계대지 않기. 원망하지 않기. 그 네 가지만 안 해도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하지] 재판관인 야훼 하느님은 왜 정당한 재판을 받기를 원하는 욥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일까요? 애당초 자신을 제물로 삼아 사탄과 내기를 한 것이 잘못되었음을 알았기 때문일까요? 자식들이 억울해하며 땅을 치고 가슴을 치고 엄마에게 달려들 때, 엄마는 왜 침묵하는 것일까요? 뭐라고 한마디라도 하면 좋겠는데,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 눈물만 흘릴 뿐, 아무 말이 없습니다. 왜 그렇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 이렇게 하느님 어디 계시냐고 저항하던 욥의 마지막 말은 해석이 어려운 구절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가슴이 철렁 내려 앉고 전능하신 분 앞에서는 간담이 서늘해지는구나. 차라리 온통 어둠에 싸여, 나의 얼굴이여, 흑암 속에 묻혀라.” ‘나의 얼굴이여 흑암 속에 묻혀라’는 무슨 뜻인가요? 하느님이 정녕 안나타나시니 나의 항소장을 포기하겠다는 의미인가요? 그렇게도 해석이 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23장 말씀을 보면 그렇게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전능하신 분께서 어찌하여 재판날을 밝히시지 않는가? 그와 가까운 자에게 어찌하여 그날을 감추시는가? 악한 자들은 지계표를 멋대로 옮기고 남의 양떼를 몰아가다 제 것인 양 길러도 좋고 고아들의 나귀를 끌어가고 과부의 소를 저당잡아도 되는가. 가난한 사람들을 길에서 밀쳐 내니 흙에 묻혀 사는 천더기들은 아예 숨어야 하는가?” 부당한 현실을 강경한 어조로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흑암 속에 묻혀라’를 자신의 정당함을 포기하겠다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여전히 욥은 침묵하시는 야훼께 나와서 뭔가 얘기를 들어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영어성경에서 다른 번역본은 이 마지막 구절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어둠이 비록 나를 쌓고, 흑암이 나의 얼굴을 덮을지라도...‘
부당한 현실을 고발하며 도대체 역사의 주인이라는 야훼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하며 하늘을 향해 항거의 목소리를 높이는 오늘 본문은 욥기 23장입니다, 그런데 야훼 하느님은 38장에 가서나 입을 여십니다. 뭐라 얘기하시는지 그때까지는 참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 주 본문이 38장이니까 그때 가서 뭐라고 하시는지 들어보기로 하지요. 마음이 급하신 분들은 오늘 집에 돌아가서 읽어보시구요. 가능하면 욥기 전체를 읽어보고 오시면 좋겠습니다.
[고난과 믿음 사이에서]
시편 22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외치신 말씀으로 너무나 유명합니다. “나
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엘로이 엘로이 라마짜팍타니!) “살려달라 울부짓는 소리 들리지도 않사옵니까? 나의 하나님, 온종일 불러봐도 대답 하나 없으시고, 밤새도록 외쳐도 모르는 체하십니까? 나는 사람도 아닌 구더기, 세상에서 천더기, 사람들의 조롱거리, 사람마다 나를 보고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빈정됩니다. 어려움이 닥쳤는데 도와줄 자 없사옵니다. 가슴 속 염통도 촛물처럼 녹았습니다. 깨진 옹기 조각처럼 목이 타오르고 혀는 입천장에 달라붙었습니다.” 바로 이어지는 시편 23편의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바로 앞뒤로 붙어있는 시이지만, 이 두시의 주인공의 반응은 전연 딴판입니다. 한 사람은 깨진 옹기 조각처럼 목이 타오른다고 말하고 다른 한 시인은 생기가 넘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시편 23편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합니다. 축복과 번영의 복음의 수혜자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23편이 아닌 22편의 연속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기독교 맞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없는 부활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대체 예수의 십자가는 죽음의 상징이고 패배의 상징인데 거기에 구원이 임한다고 하는 의미는 무슨 의미인가? 이 풀리지 않는 질문을 안고 히브리서 본문 말씀을 묵상해보았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 피조물치고 하느님 앞에 드러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눈앞에는 모든 것이 다 벌거숭이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익히 아는 말씀이고 지당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씀은 단지 기록된 문자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은 그 시작에서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여기서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십자가에서 살해를 당하신 무력한 그 분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 앞에서 무력해집니다. 십자가가 로마제국의 극형이기 때문에가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이 거기에 매어 달려 “엘로이 엘로이 라마 짜팍타니!” 하며 신음하기 때문입니다.
[벌거숭이?]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벌거숭이가 된다는 것은 놀라운 권능 앞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는 포기와 체념을 뜻하지 않습니다. 만약 포기와 체념이라면 이는 세상 권력자들의 총과 칼 앞에서 굴복하는 것과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서의 벌거숭이는 체념이나 포기와 달리 해방이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벌거숭이가 되는 이유는 세상의 옷을 벗고 하늘의 옷으로 덧입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논리 전개의 어려움을 겪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선다는 것, 그건 십자가 위에서의 참을 수 없는 고통, 그리고 사람들의 침뱉음과 조롱을 통해 낮아지고 낮아져서 자유와 해방의 영으로 나아가는 것인데, 이것이 어떻게 논리적으로 가능한가? 여기에 신앙의 비밀이 있고 논리의 비약이 있는데, 이를 말로 설명해야 하는 일에 어려움을 느꼈습니다.
먼저 <닉 부이치치>라는 사람의 유튜브 영상을 통해 설명해보자 합니다. 이미 보신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호주인으로 태어나면서부터 팔다리가 없고 왼쪽에 조그마한 오리발같은 것만 붙어 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일들을 다 시도한다. 넘어졌다가 일어서는 모습은 매우 감동적이다. 그는 지금 행복전도사로 세계를 다니면 일하고 있다.)
우리는 이 영상을 통해 십자가로 귀결되는 하느님 앞에서 벌거숭이가 된다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습니다. 어린 학생들이 그를 포옹하면서 깊은 눈물을 흘립니다. 그 앞에서 삶이 어렵다, 힘들다, 죽고 싶다는 등등의 말들은 한갓 사치스러운 푸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성공이니 실패니 하는 말들도 그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저 십자가의 예수 앞에 선다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거기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자신의 죄로 인한 것도 아닙니다. 닉 앞에선 학생들 모두가 무력해지듯이,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무력해지고 벌거숭이가 되는 것입니다. 닉은 왜 자신의 수치와 약점을 대중 앞에 드러내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을 통해 학생들이 무엇이 진정한 삶의 목적인가를 깨닫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왜 하필이면 로마제국의 십자가 처형을 통해 우리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일까요? 석가나 공자나 노자나 마호메트와 같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우리를 깨우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처형이라는 가장 극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것은 가장 극적인 방식으로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자유함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고, 모든 세상적 명예와 집착으로부터 해방을 받도록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율법이 정한 여러 가지 계명을 힘써 지켜온 사람입니다. 그가 자신의 종교적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진정 그것으로 마음의 확신이 서지 않아서 그랬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라오너라는 예수님의 초청을 듣고 근심하며 떠나갔다는 얘기를 보면 그는 자신의 종교적 의를 보여주려고 했다고 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가진 재산을 다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어야만 예수를 진정 따르는 사람이 된다는 전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는지요? 그러면 그 이후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됩니다. 당장 어디 가서 잠을 자고 한 끼의 식사는 어디서 해결할 것인지. 저는 여기서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간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물론 이는 문자로만 본다면 엄청난 과장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배경에는 이런 얘기가 숨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금요일 저녁 주위가 어둑어둑해지면, 양각나팔 소리가 울리면서 안식일이 시작됩니다. 모든 성문은 닫히고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활동을 제외하고 모든 활동은 정지가 됩니다. 곡식을 가는 행위는 물론 불을 만드는 행위도 안됩니다. 그런데 안식일이 이미 시작되었음에도 몇날 며칠을 광야 길을 걸어온 이방인 상인들에게까지 이를 무리하게 적용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들을 성 밖에서 추위에 떨도록 내벼려 둘 수는 없습니다. 이 또한 고아와 나그네와 이방인을 돌보라는 율법에 말씀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이때,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오는 비상문이 하나 있는데, 이 문은 너무 좁아 속칭 바늘문이라 불립니다. (이를 고증하는 문헌이 없지만, 제가 30년 전 예루살렘 방문시 유대인 안내자가 말한 내용입니다.)
문이 좁아 낙타 위의 짐을 모두 내려야 하고, 낙타마저도 무릎을 꿇고 기어서 통과해야 합니다. 여기에 부자가 구원받는 길이 있습니다. 바늘 문을 통과한다는 것은 단지 자선의 행위를 뜻하지 않습니다. 자선의 행위를 넘어서는 존재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예수 안에서 새가족]
마지막 말씀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복도 받을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실현하기에는 너무나 까마득한 얘기라 그냥 지나치고 맙니다.
어제 오후부터 예배영성공동체 회원 8명이 서울역 근처에 있는 기장 예가교회에서 훈련과 배움을 갖고 있습니다. 몇 시간을 함께 하였지만, 어제는 서너시간 예가의 짝궁들과 함께 교회 청소와 공동식사 준비를 하고 교육을 받고 그곳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 교회는 자신들의 월급을 모두 내어놓고 함께 공유하는 진정한 생활공동체로 살아가고 있고, 교회 조직 또한 새 가족이라는 조직 하나만 있습니다. 등록교인이 되면 세상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달님이니 독립군이니 하는 본인이 원하는 새 이름을 갖습니다. 그리고 남편과 아내 자녀들은 모두 혈연을 떠나 새로운 가족들로 구성이 됩니다. 소수의 새 가족들끼리 식사하고 그들끼리 한주간의 밀린 대화를 나눕니다. 부모님들도 교회 문을 들어서면 어린 자녀들에게 난 더 이상 너의 엄마나 아빠가 아니라고 합니다. 새엄마나 새 아빠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1년에 서너번은 1박2일로 이 새가족들끼리 한 아파트 안에서 생활까지 한다고 합니다. 때로는 한 달씩 아파트를 바꿔 생활을 하기도 합니다. 한 가족원이 직장을 잃으면 다른 가족들이 먹여 살립니다.
지금의 모습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14년 전 예가교회가 시작한 목표입니다. 예수 안에서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숫자는 베들레헴처럼 작지만, 그러나 정말 힘이 있는 교회이고 사랑이 넘치는 교회입니다. 저도 얼마 전부터 분가 이후 향린교회를 보다 알차게 그리고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분가 가족들이 새로운 교우 관계를 만들어내듯이 향린교회 또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낼 방식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분가는 또 하나의 향린교회를 탄생시키는 일에만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제 60주년을 맞는 향린교회를 어떻게 새롭게 변화시켜 나아갈 것인지를 고민하는 가운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안으로부터 거듭나는 진정한 환갑(還甲), 남산 향린원에서 시작했던 오늘의 생활공동체를 꿈꾸었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는 것은 모든 교인들이 일 년에 서너 번 토요일 오후, 교회에 나와 건물 청소도 하고, 공동식사 준비도 하고 생일 파티도 열면서 서로를 위한 기도와 사랑 나눔으로 이어지는 예수 안에서의 새로운 가족 관계를 만들어 보는 일입니다. 지금같이 일요일 예배 후 신도회나 부서에 한정되어 끼리끼리 만나 대화하고 식탁을 같이 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들로부터 어르신들에 이르기까지 세대와 성과 젠더를 넘어선 모두가 어우러진 새로운 가족을 만들고 싶습니다. 아니 만들고 싶다가 아니라 이는 나를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기존의 것을 버리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라는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저는 이것이 오늘 마르코복음 본문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우리가 현세에서 누리는 백배의 복이라 생각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우리 안에 힘이 있어야 합니다. 이 힘은 숫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국악찬송가 가사처럼 말씀 따라 산다는 일, 그건 신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건 하늘나라 바늘귀로 들어가는 해방의 영성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