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과 섬김]

38:1-7, 34-41; 5:1-10; 마르코 10:35-45

 

지난 주 욥기의 얘기를 시작하면서 하느님과 사탄의 내기에 어쩔 수 없이 말려든 욥이 당한 인생의 고난을 얘기하고, 나면서부터 팔다리가 없는 장애인으로 태어나 행복전도사로 살아가고 있는 닉부이치치의 동영상을 보았는데, 큰 고통을 경험한 교우님께서 지난주 하늘뜻펴기를 통해 귀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하늘뜻펴기라는 것은 전 교인들을 대상으로 하지만, 한 주 한 주 말씀에서 진정한 깨달음을 얻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그 소수는 다름 아닌 백 마리의 양 가운데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입니다. 대중 강연과 하늘뜻펴기의 차이가 그러한 것 같습니다. 목회자는 겉으로 드러나는 열렬한 박수보다는 따뜻한 마음이 담긴 개인적인 메시지를 받을 때에 더 큰 보람을 느낍니다.

 

지난 주 하늘뜻펴기를 간단히 정리하면 동방의 의인이요 큰 부자라 불리던 욥은 갑작스레 모든 재산과 10명의 자식을 불시에 다 잃게 되고 이후 극심한 피부병에 걸려 기와조각으로 자신의 몸을 긁어대는 죽기보다 더한 고통을 겪게 됩니다. 이때 사랑하는 아내마저도 그렇게 고통 속에서 살아가느니 차라리 하느님을 저주하고 죽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가시 돋힌 말을 합니다. 사면초가에 처한 욥에게 친구들이 찾아옵니다. 처음에는 위로하는 듯 말을 시작하더니만, 조금 지나지 않아 하느님은 공평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니, 자네에게 분명 죄가 있어서 생긴 일이니 회개하라는 얘기를 합니다. 원인 없는 결과가 어디 있느냐, 공의로우신 하느님이 실수할 수가 있느냐는 세상 논리이자 종교윤리의 잣대를 갖다가댑니다. 욥은 정말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자신이 의인이라 함부로 자처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는 누구보다도 진실로 하느님만을 경배해 온 사람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놓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 정말 억울하구나, 하느님이 어디 계신지 알기만 하면 당장 찾아가서 나의 정당함을 진술하고 싶구나,”며 하늘을 향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억울함을 들어줄 하느님이 재판석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신 부재의 현실. 여기까지가 지난주 욥의 이야기였습니다.


[
갑작스런 반격]

 

욥기 1장 처음에 잠시 등장한 야훼 하느님은 그 이후 37장에까지 걸친 긴 이야기 속에 계속 침묵을 지켜왔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잠잠할 때 의기양양해지지요. ‘당신이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왜 그렇게 했습니까? 입이 있으면 말 좀 해보세요.’ 3자가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몰아세웁니다. 그래도 상대방이 입을 떼지 못하면 우리는 게임은 끝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 자신의 의를 주장하던 욥이 이긴 듯이 보입니다. 그런데 계속 듣기만하시던 하느님이 38장에 이르러 갑작스레 입을 떼십니다. 그런데 그게 또 욥의 입장은 한 치도 고려하지 않는 엄청난 얘기입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부질없는 말로 나의 뜻을 가리는 자가 누구냐? 나 이제 물을 터이니 알거든 대답해 보아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그렇게 세상물정을 잘 알거든 말해 보아라, 누가 이 땅을 설계했느냐? 누가 땅에 줄을 치고 금을 그었느냐?” 갑작스런 반격에 욥은 당황합니다. 그것도 인간이 대답할 수 있는 그런 주제가 아닙니다. 욥은 개인적인 비극을 갖고 논쟁을 벌이는데, 갑작스레 땅의 기초가 등장하고 세상물정이 등장합니다.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욥을 이제는 하느님이 더욱 구석으로 몰아넣습니다. “그 누가 세상의 주춧돌을 놓았느냐? 그 때 새벽별들이 떨쳐 나와 노래를 부르고 모든 하늘의 천사들이 나와서 합창을 불렀는데, 너는 구름에 호령하여 물을 동이로 쏟아 땅을 뒤덮게 할 수 있느냐?” 마치 산길을 함께 걷다 다리가 부러진 어린 아들이 아픔을 견디지 못해 아버지는 도대체 무얼 하셨느냐?고 항의할 때, “야 네가 태어날 때, 그때는 온 나라가 전쟁 중이었지, 여기저기 포탄이 떨어지고 사람들이 살려 달라 아우성 쳤지.”

 

일종의 동문서답,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얘기가 아닙니까? 지금 욥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삶의 고통을 당하고 있고, 세상은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 비참한 상황에서 오직 하느님께만 자신의 옳음을 증명해줄 수 있는 유일한 통로로 믿고 도움의 손을 내밀었는데, 자신의 고통에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고 묻는 하느님은 과연 정당한 자세입니까? 물론 말은 맞지요. 그러나 상황이 전연 다르지 않습니까? 혹 여러분은 교회에 와서 그런 경험을 당하지 않나요?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병 혹은 자녀 문제로 인한 고민을 안고 이에 대한 위로와 희망을 찾기 위해 예배에 참여했는데, 목사가 전하는 하늘뜻펴기는 신자유주의를 얘기하고 FTA를 얘기하고 통일을 얘기하고 원론적으로 말이야 맞지만, 뭔가 핀트가 어긋나다고 생각이 들지 않으셨나요?

 
우리 인간들은 모두 하느님을 자기 식 곧 신을 인간화하여 이해하고 있습니다
. 성서의 하느님은 인간화된 하느님입니다. 우리들의 인식의 틀 속으로 넣지 않으면 이해가 되지 않으니까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지만, 그건 참 신이 아니지요. 인간편에서 본다면 어쩔 수 없지만, 하느님 편에서 본다면 자기들 멋대로 입맛에 편한대로 이해하고 있으니 어처구니가 없는 일입니다. 예를 들면 인도네시아에 해일이 일어나 수만 명의 희생자가 일어났을 때, 모 목사는 예수 안 믿어서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해일이나 지진이 일어나는 것이 신의 뜻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
믿음의 플라시보]

 
여러분 믿음이 좋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시나요
? 어떤 경우에 저 사람은 참 믿음이 좋은 사람이야하고 얘기를 합니까? 흔히들 기도가 유창하거나 성서 구절에 대한 일방적인 확신을 가진 사람을 두고 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욥을 향한 하느님의 당혹스러운 질문이 담긴 오늘의 말씀을 읽으면서 아무렴 내가 믿는 하느님은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참으로 위대하신 분이시지. 그럼, 사람은 하느님 앞에 하찮은 존재이지, 그러면서 자신의 고민과 문제를 일시에 덮어버리려고 합니다. 인간의 고통의 문제, 더구나 의인의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의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삶의 고통을 하느님 찬양으로 즉각 대체해버리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이냐 하면 욥기의 30장이 넘는 긴 물음의 여정을 빼버리는 것입니다. 곧장 답으로 달려가 버리는 것입니다. 믿음이 일종의 가짜 약에 의한 플라시보 효과나 지나치면 아편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의는 이 땅의 힘 있는 자와 힘없는 자 사이에 일어나는 정의의 문제가 아닌
, 형이상학적인 의,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라는 모호한 개념으로 탈바꿈하게 되고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라는 성서 구절에 근거해서 고로 나 또한 죄인이다라는 죄의 고백과 함께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하느님께 전가하는 책임부재의 구멍으로 숨어들어가고 맙니다. 결국 선악과의 열매를 따먹은 죄의 추궁에 대해 아담은 당신이 짝으로 정해준 하와가 주었다.’고 하와는 당신이 만든 뱀 때문이다.’라고 하는 에덴의 원죄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원죄는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 먹은 일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원죄는 행동에 대한 책임을 창조주 하느님께 전가하는 무책임성, 혹은 노예성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어차피 인간에게 자유가 주어졌다면 그 자유는 그 어떤 경계선을 넘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경계선을 넘는 일이 없다면 그것 또한 자유라 말하기 힘들겠지요. 문제는 그 경계선을 넘은 것이 아니라, 경계를 넘은 후에 일어났던 결과를 통해 이를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책임성 회복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입니다.

 
[유신에
다시 맞서는 목요기도회]

 
지난 주 목요일에는 종로
5가 기독교회관에서 유신과 다시 맞서는 목요기도회가 있었습니다. 유신 헌법 40주년을 맞아 불행했던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증언자로 인혁당조작 사건으로 사형을 당한 우흥선씨의 부인인 강순이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생사람을 간첩으로 몰아 면회 한번 안 시키고, 말은 공개재판이라고 하면서 가족 한명씩만 참석시킨 군사재판, 국가전복을 꾀한 중대한 간첩이라고 하면서도 간첩행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묻지 않고, 누구 몇 번 만났느냐만 묻는 검사, 증거가 불충분해 사형은 없을거라고 말하더니, 대법원 판결이 나기도 전에 사형집행 준비가 시작된 이상한 사형 판결. 가족분들은 평생을 주위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살았지요. 친구와 친지들로부터 외면당하고 간첩의 자식이라고 초등학교 친구들이 목에 밧줄을 묶어 끌고 다녔다고 하지요. 지난 38년 하늘을 향해 도대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수없이 항의하여 왔습니다. 누구의 죄인가요? 어린 딸이 아버지의 시신을 보겠다고 우겨다짐을 해서 보았는데, 그때 그 딸이 주위에 서 있는 사람들을 향해 당신들이 아버지를 죽였다고 말했다고 하던데, 그렇지요 우리가 모두 죽인 것입니다. 이 죽음을 간단히 독재정권으로만 그 책임을 100% 돌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잘못에 누구보다 깊은 관련이 있는 한 대선 후보는 이 인혁당 문제를 처음에는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고 운운하더니 끝내는 여론에 밀려 잘못되었다고 마지못해 한마디를 했습니다
. 으로서의 독재자와 로서의 아버지를 구별하지 못하는 미성숙한 인간, 나아가서 아버지가 하신 일이니 정당하였다고 믿는 역사의식부재의 딸이 올해 대선의 강력한 후보로 얘기되고 있는 나라의 현실이 정말 부끄럽습니다. 얼마 전 택시운전사에게 운을 떼었더니, 왜 아버지의 죄를 딸에게 전가시키느냐고 그러더군요. 그러면 김일성의 죄도 아들에게 전가시키면 안되지요, 더군다나 손자에게는 말도 안되구요. 전에는 곳곳에 625전쟁 납북피해가족 신고하여 보상받으라는 현수막이 펄럭이더니 이제는 625전쟁 피해 신고하여 보상받으라는 애매모호한 현수막이 곳곳에 펄럭입니다. NLL 서해북방한계선 문제도 이미 김영삼정부 때에 국방부장관이 그건 우리 쪽에서 그 이상 배가 올라가지 말라고 일방적으로 그어 놓은 한계선이지 국경선이 아니라고 명확하게 밝혔음에도 여전히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40
년이 지났지만, 박정희독재시대의 정치논리, 그저 어떻게 하면 국민의 마음속에 북한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 일으켜서 표를 몰아갈까 하는 애들 장난만 계속하고 있습니다. 정책대결은 간데없고 적개심을 유발하는 불필요한 논쟁만 계속되는 것이 오늘의 우리 정치현실입니다. 인혁당간첩 조작 사건이 또 다시 일어나도 눈만 껌뻑껌뻑... 정부가 하는 일이니 뭔가 있었겠지... 내 코가 석자인데... 내가 알게 뭐야 하는 얼빠진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이 그렇게 말합니다. 자신들도 해고당하기 전에는 FTA 신자유주의 그런 거 전연 관심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해고를 당하고 보니 이게 자신들의 문제와 직접 관련이 있다는 걸 늦게야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NLL 문제 국민 다수는 개인과 관련이 없다고 여기지요. 그건 정치인들의 문제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다가 이런 일로 티격태격하다 전쟁이 일어나고 그래서 포탄이 날아오고 자식이 총에 맞아 피를 흘리고 나서야, 그제서야 NLL 문제가 국가간의 문제도 아니고 정당정치 놀음판의 주사위가 아니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교회는 신앙집단이지 정치집단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던 사람들도 자기 발등이 찍히고 나서야 왜 교회에서 정치사회적 이슈에 얘기를 해야 하는지, 왜 예수께서 그냥 돌아가시지 않고, 로마의 십자가형을 받고 돌아가셨는지를 깨닫습니다.

 
[
깨어 일어날 때]

 
요즘 경제민주화란 말이 대선판을 좌지우지하고 있습니다
. 그런데 900만에 가까운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경제민주화가 되면 뭐가 달라질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얘기하는 내용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경제학자들의 탁상공론에 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걱정하는 보다 큰 이유는 경제민주화란 단어 속에는 경제성장을 위해서라면 민주화든 통일이든 뭐든지 뒤로 미룰 수 있다고 하는 유신의 논리가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경제파시즘 시대에 살고 있는데, 이 경제파시즘의 껍질을 한거풀 벗겨내면 그 안에 정치파시즘이 숨어 있는 것을 사람들이 잘 눈치를 못 채고 있습니다. MB 대통령은 경제를 살리겠다는 논리 하나로 대통령이 되었는데, 경제는커녕 정치 나아가 공직자의 도덕성과 사회윤리까지 국가는 온통 파탄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대한문에는 이미 열흘을 넘어 무기한 단식 농성에 들어간 쌍용자동차 노조지부장도 계시고
, 울산에서는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해고자 두 분이 50미터 높이의 송전철탑에 밧줄로 자신의 몸을 묶은 채 대법원에서 판결한 대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4일째 농성을 하고 있습니다. 법이 판결을 해도 정부는 이를 집행할 의지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재벌 앞에서는 벙어리신세입니다. 왜요 꿀을 잔뜩 처먹었거든요. 앞으로도 꿀단지는 계속 더 들어올게 있구요.

 
얼마 전에 북한 귀순병사로 인해 철책선이 뚫렸다고 사단장 이하 연대장 대대장 중대장 모두 직위가 해제된 것으로 보도가 되었습니다
. 저는 이 기사를 보면서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3년 전 천안함이 폭파되었을 때, 정부는 남쪽으로 잠입한 북한군 잠수정에서 쏜 미사일 때문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일로 인해 해군의 어느 누구도 옷을 벗었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도대체 46명이나 죽은 천안함 사건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더니, 죽은 사람 한 명도 없는 귀순병 발자국소리 제대로 듣지 못했다고 노크소리 제대로 듣지 못했다고 사단장까지 책임을 묻는 이런 정부의 이중성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게 바로 천안함의 비밀을 밝혀주는 실체가 아닐까요?


저는 우리 국민이 그동안 속을 만큼 속았으니 이제는 정신을 차릴 때가 되었다고 보는데
,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서 인간과 돼지는 유전적으로 얼마나 흡사한지 그 결과를 알아보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역사의 걸음은 공짜가 없구나. 때로는 빨리 가는 것 같아도 결국은 제 길을 걸어가고야 마는구나, 피의 희생이 따르지 않는 민주화는 결국 하나의 물거품에 불과한 것이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
인생은 탐구의 대상]

 
우리는 의인의 고난의 문제 나아가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이 구조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을까요
? 학자들마다 이런 저런 답변을 내어놓지만, 그건 부분적인 해결책, 결코 완전한 해결책이 아님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우연히 예전에 읽었던 책을 들고 밑줄이 그어진 한 문장을 읽었습니다. “인생이란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라기보다는 탐구되어야 할 신비이다. 인생은 머리를 짜서 고안하여 우리의 생각대로 바꿔갈 수 있는 그런 대상이 아니라, 깊이를 알 수 없는 신비라는 얘기인데, 어찌 보면 이 또한 오늘의 부당한 현실을 슬쩍 넘어서려는 피안의 답변으로 들리지만, 저는 이 답이 그래도 우리 신앙인들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자세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신앙을 답으로만 이해하지 않고 질문으로 안고 가자는 얘기입니다.

 
미국 진보교회의 대명사였던 뉴욕 리버사이드교회의 담임목사였던 슬로안 커핀이 대학시절
, 가까웠던 친구 세 명이 졸음운전으로 한꺼번에 죽어 비통한 마음과 깊은 질문을 안고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그때 목사는 욥이 열 명의 자식을 한꺼번에 잃고 난 이후의 고백을 인용합니다.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야훼께서 주셨던 것, 야훼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야훼의 이름을 찬양할지라.” 이 소리를 들은 커핀은 종교의 거룩을 빙자한 너무나도 상투적이고 가식적인 태도에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저 놈의 목사의 얼굴에 침을 뱉고야 말겠다고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작은 소리가 그 어디에서 들려왔습니다. “커핀, 그래 무슨 구절이 그렇게 역겨운건가?” 처음에 그는 도로 가져가신다는 두 번째 구절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답변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야훼께서 주셨다는 첫 번째 구절이 자신의 머리를 때렸습니다. 순간, 그는 자신이 이 세상에 주인으로 온 것이 아니라, 단지 손님으로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인생을 답으로서가 아니라 질문으로 안고 가자는 얘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탐구의 대상인 신비로움으로 여길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풍성해질 수 있을 것임은 분명합니다.

 
오늘 히브리서를 읽었던 초대 교인들은 사는 일 자체가 너무 버거웠습니다
. 사면팔방으로 밀려들어오는 핍박으로 인해 그들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선한 사람들이 로마제국의 폭력으로 인해 계속 희생당하고 있었습니다. 어려울 때 의지하고 그래도 좀 편하게 살아보려고 야훼 하느님을 믿기 시작했는데, 이게 더 큰 고통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래 교회 공동체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지도자들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래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 예수께서는 인간으로 계실 때에 당신을 죽음에서 구해 주실 수 있는 에게 큰소리와 눈물로 기도하고 간구하셨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마음을 보시고 그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겪음으로써 복종하는 것을 배우셨습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고난을 당하셨고 유혹도 받으셨고 이를 통해 복종을 배우셨고 이 복종을 통해 하느님의 뜻이 결국은 이루어졌다는 얘기입니다. 힘들어 죽겠는데 복종하라. 이게 말이 되는 얘기입니까? 그리고 이 복종도 그냥 복종입니까? 십자가를 지는 온전한 자기 헌신의 복종입니다. 물론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자신을 넘어서는 어떤 절대자의 도우심을 바라는 것 아닙니까? 혼자 할 수 있다면 저는 혼자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혼자 힘으로 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하느님의 부르심에 귀를 기우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
사제의 특권과 책무]

 
여기에 오늘 본문에서는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 히브리서 기자가 전제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건 예수님이 대사제였듯이, 우리들은 그분 옆에선 사제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영예로운 직무는 자기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얻는 것이라는 것이고 이 부르심은 고통 가운데서도 하느님께 기도하며 경외하는 가운데 오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논리적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고 믿음의 도약이 필요합니다. 닉부이치치의 얼굴이 누구보다도 평화롭고 그 자태가 누구보다도 당당한 것은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남을 지배하려는 욕망이 숨어있습니다
. 예수님과 함께 3년을 살아온 제자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을 앞둔 그날,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조용히 예수를 찾아와 소원이 하나 있으니 꼭 들어달라고 말합니다. 선생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임할 때에 저희 형제 한 사람은 우의정, 또 한 사람은 좌의정으로 삼아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시는 영광을 이 땅의 권력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이때 예수는 너희들이 과연 내가 받을 고난의 세례를 함께 받을 수 있다는 말이냐? 그들은 할 수 있다고 답을 하지만, 그 고난이 어떤 것인지를 그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 얘기를 들은 남은 제자들은 모두 화를 냈습니다. 함께 일했으면 그 열매를 함께 나누어야지, 너희 형제 둘이서 독차지 하겠다는 말이냐? 다른 제자들 모두 도기니개기니였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 누구든지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
종의 지도력]

 
목숨을 바치자고 하는 얘기는 감히 하지 않겠습니다
. 그러나 우리가 정말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섬김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요즘은 일반 회사에서조차 종의 지도력곧 영어로 말하면 servant leadership 이란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우리가 남의 발을 씻어주는 일까지는 못할지언정 서로를 향해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가까우면 손을 따뜻이 잡아주며 마음을 담은 얘기를 통해 상대방의 기도 제목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고자 하는 노력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교회 안에서 어떤 섬김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보고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하기를 바랍니다. 사람을 섬기려면 아내나 남편부터 섬기는 연습을 해야 하듯이, 세상을 섬기려면 교회 안에서부터 섬김의 연습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냥 왔다돌아가지 마세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복종의 의미를 깨달으시고 서로간의 복종을 통한 섬김을 행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내가 겪는 고난의 의미가 담겨 있음을 깊이 성찰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음 주 우리는 세분의 장로를 선출하는 투표를 하게 됩니다
. 장로의 역할은 교회의 지도자로서 매우 다양한 일을 감당합니다. 교회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사안들뿐만이 아니라 교인들 개개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에 관해서도 함께 고민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는 일이 별로 없다고 말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일해 보면 그 일이 간단치 않음을 깨닫습니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큰 소리로 돌지만 우리가 전연 이를 느낄 수 없듯이 장로님들 또한 매일매일 부단히 교회의 일을 갖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장로님들에게 수고하신다는 격려의 말을 자주자주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다음 주 뽑힐 세분의 장로님들을 위해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누가 섬김의 리더쉽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깊이 헤아리기 바랍니다.

 
그리고 장로후보자가 되신
6분들은 장로의 직분을 단순히 힘든 고난의 일이다라고만 여기고 피하려 하지 마시고, 이 섬김의 고난을 통해 자신의 구원을 완성해가는 거룩한 길로 받아들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마늘이나 파를 그냥 먹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이를 적절히 사용하면 음식의 맛, 곧 인생의 맛, 신앙의 기쁨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오늘 제목을 고난과 섬김이라고 했습니다. 잘못 읽으면 섬김은 고난스러운 일이지만, 믿음으로 이겨 나가자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고난과 섬김은 정비례의 관계가 아닌 반비례의 관계임을 말하고자 하는 뜻에서 정했습니다. 고난을 이겨날 수 있는 길이 섬김에 있음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교우 여러분 모두가 장로 직분을 한 번씩 감당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 세상적인 의미에서 꼭 장로를 성공한다는 의미로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같이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곧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준다는 말씀을 장로 직분을 해보면 알게 된다는 의미에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섬김을 위해 꼭 장로직분을 해야 한다는 의미도 아니고, 또 장로가 된다고 해서 누구나 이 섬김의 기쁨을 얻게 된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다만 장로가 되어 일을 해보면 대체로 종된 지도자가 된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냥 섬기라고 하면 잘하지 않으니까, 기분나면 하고 기분나지 않으면 하지 않게 되니까,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직분을 주는 것입니다. 명예가 아니라 믿음의 재료로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담임목사로서 부탁을 드립니다
. 여러분이 처음 회사에 입사를 하면 부장 이사를 다 꿈꾸듯이 교회에 등록을 할 때에는 기회가 되면 신도회장도 해보고 부장도 해보고 장로도 경험해 보아야겠다고 하는 거룩한 꿈을 갖기를 바랍니다. 이건 결코 권력이나 명예를 향한 욕망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그런 권력도 주어지지 않고, 다른 교회에서처럼 그리 명예스럽지도 않습니다. 섬김의 훈련을 한번 하여 보시라는 의미에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게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의 기도와 말씀으로 자신을 훈련하지 않고서는 결코 얻어지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연예인이나 정치인들이 누리는 반짝 인기와는 전연 다르지 않습니까?

 
[
풍뎅이의 비밀]

 
사막에는 물이 없습니다
. 그런데 사막에 사는 여우나 다른 짐승들뿐만 아니라 개구리 풍뎅이까지도 삽니다. 어디에서 물을 구할까요. 그 비밀은 이슬에 있습니다. 여우는 새벽에 바위위의 이슬들을 먹고 살아갑니다. 개구리는 자기 머리와 눈 근처 내린 이슬을 두 손으로 씻어서 핥아먹습니다. 뱀은 제 몸을 굽혀 돌려서 등에 내린 이슬을 혀로 핥아먹습니다. 그러면 풍뎅이는 어떻게 이슬을 먹을까요? 풍뎅이의 입은 등까지 돌아가지 않습니다. 예 서로 다른 풍뎅이의 등에 있는 이슬을 먹습니다. 그러면 혼자 사는 풍뎅이는 어떻게 이슬을 먹을까요? 사막을 연구하는 특수 전문팀이 촬영한 장면을 보면 풍뎅이는 자기 몸에 내린 이슬을 먹기 위해 머리를 땅까지 낮게 내립니다. 최대한 낮게 그리고 기다립니다. 그러면 등에 맺혀 있던 이슬이 머리쪽으로 주르르 굴러옵니다. 창조의 원리이자 삶의 원리입니다. 고난을 이겨내는 길은 자신의 머리를 낮추는 일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말하기를
그리스도인은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은 자유인이다. 그러나 이는 모든 이를 섬기는 자유이다.” 작은 일에서부터 자신을 훈련시키고 그럼으로 자신의 인격을 보다 성숙하게 만들어가는 교우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섬김으로 고난을 이겨내고 섬김으로 믿음의 승리자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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