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028_교회개혁주일 / 눈을 뜨고 따라나섰다.

욥기 42:1-6, 10-17 시편 34:1-8, 19-22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 7:23-28 마르코의 복음서 10:46-52

찬66장, 다 감사드리세 / 찬620장, 여기에 모인 우리 / 국악찬송 141장 우리들은 작은 예수



[1987년에 읽은 욥기, 2012년에 읽는 욥기]
 

성서일과 순서에 따라 욥기를 읽게 되면서, 옛날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때입니다. 연일 가두투쟁이 한창이었습니다. 일제히 구호를 외치며 찻길로 뛰어나갔다가 경찰, 백골단들이 덮쳐오면 후다닥 인근 상점으로 도망가고, 최루탄, 지랄탄, 사과탄 때문에 눈물, 콧물 범벅인 채로 정신없이 뛰다 다시 모여 도로를 점거한 채 앉아서 집회를 했습니다. 어디선가 날아온 빵과 우유로 끼니를 떼우며 늦은 밤이 되어서야 학교로 돌아가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말이 되어 교회에 가면 나의 일상은 온데간데 없이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누구도 호헌철폐, 독재타도에 대해 이야기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은혜충만, 성령감화를 간구하고 할렐루야 삼창을 하면서 맹목적으로 위정자와 나라를 위해 기도를 하는 교회가 너무 낯설어져서 계속 나가야 할지 말지를 고민했습니다. 혼란스러움과 함께 온갖 신앙적 질문이 물밀듯이 밀려왔습니다. 어느 날인가 너무 괴로워서 제가 속해 있던 부서 담당목사님께 신앙상담을 요청했습니다. 목사님은 딱히 무언가를 말씀해주시기 보다, 그저 안쓰러워하셨습니다. 그러다 제 고민에 도움이 될 거라며 욥기를 읽어보라고 하셨습니다. 의인이 고난 받는 이유에 대해 욥기를 읽어보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즉시 눈을 크게 뜨고 욥기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읽어봐도 의인이 왜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잘 와 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답답해졌습니다. 하느님은 과연 정의로운 분인가? 라는 질문이 20대 초반의 제 가슴을 가득 메웠습니다.  

2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하늘뜻펴기 준비를 위해 꼼꼼히 읽어본 욥의 이야기는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욥기에는 당시 유대인이나 고대 근동인들은 물론 예수탄생 이후 신약시대에도, 아니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뿌리 깊이 내려있는 뿌린대로 거둔다라는 ‘인과응보’의 논리가 바닥에 깔려있습니다.
신명기 28장를 보면 야훼께서 하신 말씀을 귀담아 들어,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그의 모든 명령을 성심껏 실천하면 축복을 받고, 말씀을 듣지 않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온갖 저주가 너희를 사로잡을 것이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축복과 관련해서는 14절에 걸쳐서 설명하고 있는데 저주에 대해서는 무려 54절에 걸쳐 구체적인 사례까지 들고 있습니다. 장애, 가난, 병, 재난, 재산의 손실을 비롯하여 입맛이 떨어지는 이유는 말씀대로 실천하지 않아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모여 있는 우리들에게는 각자 수많은 사연들이 있습니다. 나는 완전 축복을 많이 받았어! 라고 자랑할 사람보다, 무슨 죄 때문에 이런 어려운 일을 겪나...하며 하느님은 정말 살아 계신가? 라며 탄식하는 분들이 더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야훼 하느님의 말씀대로 실천하지 않은 죄가 하나도 없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제일 큰 계명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인데, 실제 우리 삶에서는 하느님과 이웃보다는 그 외에 사랑할 것이 엄청나게 많이 있다는 것을 매일 느끼며 삽니다. 그러니, 욥처럼 나는 죄 지은게 없노라며 하느님께 구구절절히 자기변론을 펼칠 만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가뜩이나 대부분의 교회가 주일성수와 십일조, 주의 종에게 무조건 순종하기를 교인의 주요 실천 목록인 것 처럼 주입식 교육을 시키는 마당에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다보니 그저 매일 죄지으러 태어난 사람들 마냥 주눅이 들어 도대체 하느님을 쳐다보기조차 힘든데, 욥은 어디서 저런 깡다구가 생겨서 하느님과 맞장을 뜨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계와 고정화된 틀을 깨고 이웃에게로]

그러나, 욥의 이야기는 아무런 죄 지은게 없어도 고난을 당하는 이가 존재하는 우리네 세상사를 보여줍니다. 욥은 변론을 통해 모든 일은 인과응보에 따라 이루어진다 라는 통념이 깨지고, 민족적인 배타주의나, 교리와 율법도 해체됩니다. 욥은 단순히 자기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입을 다물고만 있을 수 없는, 가슴이 메어 하소연하고 마음이 아파 울부짖지 않을 수 없는’(욥 7:11) 사람들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무고한 사람들이 죄를 뒤집어 쓰는 경우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어제는 살인범으로 지목된 지적장애인이 5년동안의 옥살이 후 재심에서야 무죄가 선언되었다는 기사를 보았는데, 인혁당사건과 같이 사형당한지 33년이나 지나서야 무죄가 선언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억울하게 갇혀있지만, 가난 때문에 무고함을 입증해줄 변호사에게 의뢰도 못하고, 돈을 맡기고 가석방되는 보석을 신청하기도 어렵습니다. 제주 교도소에서 일하시는 분 이야기가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분들 80%는 가난한 분들이라는 겁니다.  

법정에 가서 무죄를 증명하는 것도 녹록하지 않습니다. 저도 재판을 받고 있지만 검찰이 기소한 내용에 반박하기 위해서는 증거자료를 모으는 것에서부터 일일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한글을 읽지 못하는 경우, 불리할 수 밖에 없습니다. 법적인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을 한다고 해도 판사에게 통 할런지 여부는 뚜껑을 열어보기 전까지 알 수 없습니다. 제주해군기지건설공사의 시작부터가 사기극이고, 공사과정은 온통 불법, 탈법, 편법이 동원되고 있지만, 판사가 자신의 양심대로 해군기지 건설 자체가 부당하다며 피고인들에게 무죄를 선고하기에는 많은 부담을 갖고 있습니다.
판검사도 그렇지만, 재판 과정 중에 증인으로 출석하는 경찰과 공사현장 관계자들도 가관입니다. 욥이 친구들의 말을 들으면서 얼마나 속이 답답하고 억울했을까 하는 맘이 듭니다. 증인선서에서 위증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더군요.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그나마 보지 않은 것들을 지침에 따라 증언을 해야하니, 위증으로 고발할 거리들이 줄줄이 나왔습니다. 위증을 하고 있다는 증거가 도리여 검사가 제출한 증거자료에 생생하게 나오기도 했습니다. 

선하고 신실한 욥이 하느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성실함을 지닌 이유를 사탄은 세상이 말하는 축복을 다 누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갖고 있는 것을 다 잃으면 하느님을 부인할 것이라고 확실하게 믿고 있었지요. 결과적으로 욥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무죄를 끝까지 증명하려고 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결코 하느님을 부인하거나 버리지 않았습니다. 물질적인 축복과 신실한 신앙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욥이 증명해 줍니다.
무죄를 주장한 사람은 이를 증명하는 과정에서 나에서 출발하여 무죄한 이웃들, 고통 받는 이웃들, 그리고 이웃들을 등쳐먹고 있는 무리들을 실체를 알게 되면서 시야를 넓히게 됩니다. 그래서 ‘악당들의 밭에서 무엇을 좀 거두어 보고 악인의 포도밭에서 남은 것을 줍는 가련한 신세’, ‘죽어 가는 자의 신음소리와 얻어 맞아 숨이 넘어갈 듯 외치는 소리가 도시마다 사무치는데 하느님은 그들의 호소를 들은 체도 아니하시네’ (욥 24;6,12)라며 탄식 합니다 .
반면, 너는 죄인이야, 죄인이야, 그러니 네가 받는 고통은 받아 마땅해 하던 사람들은 점점 더 자기만의 작은 울타리 속에 빠져 완고해져만 갑니다. 그러면서도 마치 스스로가 하느님이 된 양 행세를 합니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솔직하지 못하다는 책망을 받습니다. 위증을 했으니까요.


무죄를 주장하는 과정 속에서 몸부림 치던 욥은 자신의 한계와 고정화된 틀을 깨고 이웃으로 지경을 넓혀가던 끝에 하느님을 직접 대면하는 깊은 성찰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한평생을 살면서 인간사 희노애락의 모든 경험을 하기는 어렵습니다만, 경험해보지 않았다고 해서 이웃의 삶의 자리를 함부러 판단해서는 안되는 것이고, 설사 경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이웃의 삶을 자기 기준만으로 판단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대부분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나름의 판단잣대를 갖고 있지만, 내 경험, 내 판단의 기준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사람은 겸손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부질없는 말로 당신의 뜻을 가리운 자, 그것은 바로 저였습니다. 이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을 영문도 모르면서 지껄였습니다’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
이 짧은 고백 속에 욥의 여정이 담겨 있습니다. 그동안 신실한 인간의 표상이었던 욥 자신이 알았던 하느님은 ‘귀를 타고 들어오는 소문으로만’ 안 하느님이었고, 이제야 직접 당신을 대면하고 경험하게 되었다는 고백을 합니다.
이 깨달음에서 뉘우침이 나오게 됩니다. 뉘우침은 나의 한계, 나의 틀을 발견하고, 이제껏 돌아보지 않았던 이웃들을 발견하고 경험하게 되면서 터져나오는 회개입니다. 나의 고통만이 아닌 이웃의 고통을 공감하는 것은 인간의 한계와 경험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마음을 품는 일입니다. 이 깨달음이 하느님을 눈으로 보게 했습니다.
여기에 도달하기 까지 욥은 그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왜 이런 부당한 고난이 찾아오는지, 일일이 하느님께 따졌습니다. 이런 씨름과 질문이 우리를 가두고 있는 껍질을 깨는데 필요합니다. 

 
그런데 왜 여전히 많은 교회들은 하느님이 시키지도 않은 변호인과 중재인 역할을 자처하는 엘리바즈처럼 친구과 이웃에 대한 공감능력은 상실한 채, 억울한 일을 당한 당사자에게 그저 기도합시다, 인내하십시오 라고 하는 것일까요? 하느님의 뜻은 혼자만 다 알고 있는 양, 고통스러워 하는 이에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조건 없는 용서와 사랑입니다 라는 식의 말을 무책임하게 내뱉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욥이 고발하는 ‘고아들의 나귀를 끌어가고 과부의 소를 저당잡고, 가난한 사람들을 길에서 밀쳐 내’는(욥기 24) 사람들에게 오히려 갑절의 복을 빌어주면서도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사람, 억울한 사람들의 일에는 가급적 개입을 하지 않으려고 발뺌을 합니다.
하느님과 씨름한 끝에 하느님을 뵙는 체험, 그로인한 전율이 담긴 신앙고백 없이, 말잔치만무성하기 때문에 교회들은 흔들릴 수 밖에 없습니다. 


[웨스터민스터 신조와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신앙고백]


기독교사에는 시대마다 중요한 회의들이 있었고, 이를 통해 여러 신앙고백들을 공포했습니다. 사도신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니케아 신조를 비롯하여, 각 지역, 각 교단의 신앙고백이 담긴 고백서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종교개혁의 근본신앙을 담고 있다는 웨스터민스터 신조는 한국 장로교회들의 신앙고백서의 기초가 됩니다. 1643년 영국 의회가 신학자를 소집하여 만든 것이기 때문에 국가종교라는 틀 속에서 다양함보다는 획일적인 통일을 시도한 것이라 의회에 보고가 되고 통과가 되었다는 한계가 있지만, 이 신앙고백은 무려 1163회 이상 모여, 5년 이라는 기간을 거쳐 작성되었다고 합니다. 33개의 신앙고백문과 함께 세례 교육을 할 때 달달달 외우게 만드는 신앙요리 문답도 만들어졌습니다. 몇몇 부분은 동의가 되지 않습니다만,  신앙요리문답에는 '사도들이 제정한 것도 아니요 정경처럼 여길 것도 아니지만 기독교 신앙의 요약이란 점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고 있고 초대교회 때부터 수집되어 왔다'로 교리의 정의가 인상적입니다. 종교개혁 이후에도 교리가 복음을, 교리가 성서의 가르침을 넘어서는 불변의 진리처럼 강요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향린교회도 신앙고백이 있습니다만, 저희 교회가 속해 있는 한국기독교장로회의 경우, 초창기의 교단 신조는 이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반영했습니다. 그러다 1972년 새로운 신앙고백을 공포하게 되는데 서문에서 웨스터민스터 신조에 대해 역사적 신학적 연구와 비판을 거쳐 다시 만들었다 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을 기념하면서 특히 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 교회개혁주일이라고 명명한 만큼 이 신조들에서 교회를 무엇이라고 고백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에서 교회란, 보편적인 무형교회와 유형교회로 교회로 구분됩니다.  택하심을 입은 자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 모여왔고, 모여 있고, 장차 하나로 모일 이, 참된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자들로 구성되며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이며 하느님의 집과 권속입니다. 교회의 주요임무는 순수하게 복음의 교리를 가르치고, 성례를 시행하며, 공적 예배를 집행하는 것인데, 일부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사단의 공회가 될 만큼 타락했다 라는 내용도 있습니다.


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비판적으로 연구한 한국기독교장로회는, 교회란 ‘그리스도에게 부르심을 받아 믿음과 사랑과 희망으로 연합된 자의 공동체이며, 그를 머리로 하는 몸으로서 그의 부활로부터 세계 종말까지 이 역사 안에 살면서 선교의 사명을 수행하는 주체다. 교회는 남녀, 연령, 종족, 사회의 계층, 문화적 차이를 넘어 모든 인류를 포함하고 인간적 요소와 제한 속에서도 거룩한 목적을 수행하며....교회는 세상과 구별이 되나 세상에서 분리되지 않는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선교의 사명, 차이를 넘어, 세상과 구별되면서도 세상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하느님의 선교에 대한 입장이 명시하고 있습니다.
반면,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과 합동은 교단은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을 약간의 문구 수정을 통해 그대로 차용하고 있습니다.


신앙고백이 영원불변하게 고정화 되어 있다면 거기서부터 문제가 시작됩니다. 새로운 신앙고백으로 갱신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갱신에 대한 열정이 있는지 없는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 별다른 갱신의 의지가 없으면서도, 종교개혁주일을 연간계획에 따라 기념하지요. 그런데 얼마 전에 개최되었던 각 교단 총회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졌습니까? ‘가장 순결한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사단의 회가 될 만큼 타락’한 모습을 아주 잘 보여주었습니다.

[4개 교단 총회 이모저모와 갱신의 의지]


매해 교단총회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에서는 교단총회 참관 결과보고서를 내놓습니다.
올해도 고신, 통합, 합동, 기장 등 이 4교단 총회를 참석한 후 분석을 했습니다. 민주주의 질서를 잘 지켰느냐, 선거 및 의결과정은 공정했냐, 총대들의 참여자세는 어땠냐 등의 항목이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고신과 기장의 점수가 다른 두 교단에 비해 높았습니다. 용역을 동원하여 기자 및 참관단 출입을 차단하거나, 총무가 가스총으로 총대들을 위협하고, 선출된 총회 임원들이 노래주점과 여성도우미 등의 추문과 연루되는 등 가장 쇼킹했던 교단은  늘 장자 교단이라고 목에 힘을 주던 합동측 이었습니다. 거의 모든 항목에서 점수가 제일 낮습니다. 물론 합동측 내에도 내부적으로 갱신을 위한 몸부림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부패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든 견고한 성을 무너뜨리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습니다.

공대위에서 평가의 기준으로 삼은 내용 중, 오늘날 교회와 각 교단의 갱신의 의지를 가늠할 수 있는 꼭지는 양성평등과 목회자 납세입니다. 그러나 4교단 모두 50점 밑입니다. 고신이나 합동측 모두 여성목사 안수를 허용하지 않는데 고신이 8점을 얻었습니다. 여전도사님들로 하여금 은급제도에 가입하도록 홍보해달라는 청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은급운영에 어려움이 있었나봅니다. 양성평등위원회가 있는 기장의 점수는 몇 점일까요? 38점입니다. 그러니 조직조차 없는 교단과 지교회의 성평등 지수는 바닥을 칠 수 밖에 없습니다.


참관단에 의해 교인들을 폄하하고, 총회 석상에서 ‘헌금을 적게 내는 노회가 자꾸 발언해서 회의가 늦어진다’는 식의 농담이나, 독단적인 의사진행 등이 빈번하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인터넷으로 생중계되는 총회에서조차 민주주의 질서나, 의결과정의 공정성이 잘 지켜지지 않는데, 지교회로 가면 얼마나 심각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을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총회 내용을 기독인들이나, 비기독인들에게 공개해도 부끄럽지 않냐는 질문에 한국기독교장로회는 88점이라는 높은 점수를 받았지만, 실제 얼마전 총회를 다녀온 분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소수가 발언을 독점하거나, 아실만한 분들이 성평등 관련 의제에 있어서 대놓고 반대한다거나, 농담도 아닌 농담을 한다거나, 그 문화에 젖어있지 않은 사람들 눈에는 너무나 생경한 풍경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 와중에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예장 통합이 한기총에서 탈퇴하기로 했고, 고신은 1년을 유보하기로 했다는 소식입니다. 기독교대한 감리회는 목회자의 자녀 또는 자녀 배우자가 같은 교회에서 연속하여 목회자로 일할 수 없도록, 부모가 장로로 있는 교회에서 자녀나 자녀의 배우자가 담임목회자가 되는 것 제한하는 교회 세습 방지법이 63%의 찬성으로 통과되어 11월부터 시행될 예정입니다.
한쪽에서는 세습금지법을 제정했는데, 한쪽에서는 보란 듯이 세습을 통과시킨 교회가 있습니다. 중대한 범죄에 속하는 성폭력을 일으키고도 사과는 커녕 새 교회를 개척하여 비난을 받고 있는 목회자도 있습니다.


[연약한 인간 대사제와 영원히 완전하신 대사제] 



오늘날 교회들의 부패한 모습은 여러 가지 예로 설명될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성직자들에게 많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얼굴에 침 뱉기이고, 저 역시도 자유롭지 못한 문제이기는 하지만요. 목사안수 받을 때의 신앙고백에서 끊임없이 갱신을 해나가야 하는데, 오히려 퇴행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오늘 읽은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예수는 거룩하고 순결하고 흠도 죄도 없고 하늘보다 더 높으신 대사제이며 영원히 완전하신 분이지만, 율법을 따라 대사제가 된 사람들은 죽기 마련이며, 자기들의 죄를 용서받으려고 희생제물을 드린 다음에야 백성들의 죄를 처리하는 연약한 인간이라고 대조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맞습니다. 성직자들 역시 연약한 인간임에 분명합니다. 문제는 성직자들이 스스로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기 보다는 거룩하고, 순결하고 흠도 죄도 없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하느님께 기도할 때, 또 필요에 의해 교인들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호소하기도 합니다만, 진정성 있는 고백보다는 말 뿐 일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성직자가 교회를 사유화 하는 교회세습에 앞장 서겠습니까? 교회를 사유화 한다는 것은 목사 자신을 회사 창업주쯤으로 알고, 장로나 부교역자들을 회사 임원으로, 교인들은 맘대로 해도 되는 말단직 사원쯤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요?

결국 오늘날 교회 부패의 문제에는 하느님이 아닌 맘몬을 섬기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총회장 선거 과정만 보더라도, 억대의 선거비용을 교회 예산으로 충당한다거나, 목사 개인이 시시때때로 꺼내 쓰면서도 투명하게 보고하지 않는 비자금이 묵인되거나, 고급 차, 고급 주택에 자녀들의 해외유학 비용까지 감당하고도 모자라 은퇴할 때의 퇴직금에서 ‘억,억’ 소리가 나는 것을 보면, 말은 하느님을 섬기는데, 실제로는 맘몬에 영혼과 가슴을 다 제물로 바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맘몬을 숭배하는 가짜 기독교는 예수의 복음 대신에 무조건적인 긍정적 마인드를 통해 탐욕스러움을 극대화해도 좋다고 가르칩니다. 주일성수를 하고 내라는 헌금을 꼬박꼬박 대신 가능한 많이 내면서 믿음을 갖고 구하면 무조건 다 받게 된다고 주입시킵니다. 이런 가짜 기독교에서는 가난한 것,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 경쟁에서 낙오되는 것, 사회적인 구조악의 피해를 입는 것, 차별행위를 당하는 것 등은 그저 모두 개인의 무능력이요, 죄의 결과일 뿐 입니다. 인과응보의 논리가 있어야 죄의식을 고취시키기 쉽기 때문에 가난한 자, 아픈 자, 잃은 자, 차별받는 자, 핍박받는 자는 늘 희생양이 됩니다. 그래야 교인들이 고분고분 순종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예배의식, 헌금, 그리고 지극히 사적인 영성만 남기고 생명, 정의, 평화, 사랑의 구체적인 가르침과 실천이 빠지니 그저 가난하고 고난 받는 이웃은 일시적으로 생색낼 필요가 있을 때만 도와주는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근본원인이 뭔지 알아보고 해결하려 하기 보다는 임기응변식으로 땜질만 하려고 합니다. 그게 더 쉬우니까요. 이웃은 무슨 이웃입니까. 그저 남이죠. 남.


예수 시대의 대제사장급들도 상당한 재산과 특권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재산을 세습했습니다. 호화로운 고급 주택에서 살았습니다. 심지어 가족묘도 멋지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부를 누리다 못해 자손대대로 물려주기 위해서 지배세력과 결탁했습니다. 요즘과 꼭 같습니다. 예수 시대에도 여전히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던 인과응보 논리로 식민지배는 유대민중들의 죄의 결과라고 정당화시키면서, 권력있는 자들의 죄는 쏙 빼놓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지배자들의 불의 때문이라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따지고, 저항했습니다. 그 결과 십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교회 갱신을 향한 몸짓-평신도 운동과 작은교회 운동]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기장의 신앙고백의 표현을 빌리자면, 믿음과 사랑과 희망을 증거해야 하고, 거룩한 목적을 수행해야 합니다. 세상과 구별되어야 하는 이유는, 세속적인 가치, 권력, 자본과 결탁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세상에서 분리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교회는 종교성을 지니고 있는 동시에 사회적으로도 공공성을 지켜야 하는 집단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만 하느님 나라여서는 안되고, 이 사회 전체가 하느님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는 교인만이 아닌 모든 사람들이 공생하는 세상을 위해 이바지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복음은 결코 개인 한사람에게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신앙고백의 갱신을 위한 교회 개혁은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요? 교단, 목회자, 심지어 신학교 등등 기존의 조직과 기구들이 맥을 못추고 자정능력을 상실한 상태입니다. 두 가지만 이야기 하겠습니다. 하나는 평신도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작은 교회 운동입니다.
향린교회에는 평신도 교회 전통이 있습니다. 현재 향린이 지향했던 평신도 교회 전통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이곳저곳에서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여전히 유효합니다. 교리와 교회 정치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권력을 잡은 소수에 의해 독점되어 있는 구조를 해체하기 위해서는 평신도 운동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평신도 신학, 즉 목회자들만이 전유물로 여겨져 온 신학 훈련이 필요 합니다. 신학화 작업을 스스로 해내지 못하면 목회자만 신학자가 될 수 있다는 특권의식을 넘어서기 힘듭니다. 지금은 종교개혁시대 처럼 성직자들만 라틴어를 하는 시대와는 다르지 않습니까? 성직자가 딱딱한 것을 잘 씹어서 영양분만 쏙쏙 공급해 줄 거라는 기대와 환상에서 깨어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작은 교회 운동은 그간에도 종종 말씀드려왔듯이, 초대형 메가 교회가 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하는 작은 교회가 아니라, 애초부터 많고, 큰 것을 지향하지 않고 작은 교회에서 가능한 것을 실천하는 운동을 말합니다. 규모가 크다보면 내 몸집 유지하는데 집중하게 되고, 큰 몸집에 걸맞는 외형에만 신경쓰기 쉽습니다. 대신 작은 교회들은 각자의 색깔을 발하면서 내실있는 연대활동을 해나갈 수 있습니다. 같은 시간에 예배를 드리면서도 한주간 저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조차 알 수 없는 소통의 부재를 더 이상 용인해서는 안됩니다. 교회 안팎의 역할을 10%, 20%의 사람만이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은사대로 공동분담 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장을 염두에 두고 조직 관리를 위해 획일적인 기준으로 사람들을 조직화 하는 것을 지양해야 합니다.


물론, 평신도 신학이나, 작은 교회 운동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습니다.
평신도 신학은 무슨, 먹고 살기에도 바쁜데, 왠 공부냐! 라는 항의가 있을 수 있고, 말은 작은 교회가 좋다고 해도, 결국 너~무 작아서 망하는 교회가 얼마냐 많냐, 어느 정도 규모는 있어야지 라며 최소 300명, 500명은 되야지 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교리의 재생산과 반복이 아닌 성서연구를 통한 신학화 작업은 상상력을 키워주는 그래서 갱신의 불을 지펴주는 밑거름이 됩니다. 실제 작은 공동체를 지향하는 교회들은 공동체 형성에 필요한 공부를 함께 모여서 꾸준히 합니다.  
작은 교회가 망하는 이유는 초대형교회를 모방하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지만, 또 다른 이유로는 서로를 너무 잘 알아서 깨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교회에서는 서로 대면대면 지낼 수 있는데, 서로의 숟가락, 밥그릇 수까지 알다보면 자기 자신의 품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실제 이웃교회 탐방을 하면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적당히 폼잡고, 적당히 점잖은 척, 나이스한 척 해야 되는데 간격이 좁혀지는 만큼 개개인의 욕망이 드러나면서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도 이기적인 사람인지, 말은 정의와 평화의 사도인데, 실제 몸에 폭력성이 베어있어서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다보면, 서로 성숙은 커녕 앙숙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면 알수록, 제대로 깊이 있게 알수록 서로를 존중하고 스스로 겸손해 지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겸손함은 비굴함과는 다릅니다. 자존감은 갖되, 한계가 많은 나의 울타리을 넓히고 깊이 품을 줄 아는 너른 품으로 성숙해져야 합니다. 그 품이 있어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가능해 질테니까요. 


[자비 베푸소서! 눈을 뜨게 하소서!]


자, 이제 우리가 잘 아는 바르티메오의 이야기로 가서, 그의 부르짖음을 되새겨 봅니다.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여러 사람이 꾸짖었지만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바르티메오의 목소리는 더욱 크게 울려 퍼집니다. 눈이 보이지 않고 가난하기 짝이 없어 거지라고 불리우는 바르티메오는 이 땅의 가난하고 억울한 이웃입니다. 눈이 보이지 않았던 바르티메오가 눈을 뜬 치유의 사건은 바르티메오 개인에게 내린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시력이 살아난 것은 내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기 위한 시력 회복이 아니었습니다.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바르티메오의 바램은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여러분과 제 자신의 바램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중심을 꿰뚫어 볼 줄 아는 눈. 문제의 본질을 파악할 줄 아는 눈. 우리를 둘러싼 모든 사건의 현장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할 줄 아는 눈.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라고 묻는 예수의 질문에 물질의 축복, 가족의 성공, 무병장생 등의 리스트를 들이댈 게 아니라, ‘제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라고 간청해야 합니다.

여기에 외형만 번지르르한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겹쳐 봅니다.
정작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라는 간절함이 터져나와야 할 곳은 교회입니다. 욥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라고 고백했듯이 우리들이 안다고 말하는 하느님은 그저 소문으로만 어디선가 주워들은 하느님일 수가 있다는 겸손한 공동고백이 필요한 때입니다.
무고한 자의 고난, 그리고 이에 대한 항의는 하느님의 의를 드러나게 합니다. 그동안 왜곡되고 채색되어 통념 속에 갇혀계셨던 하느님의 본모습을 드러나게 합니다.  눈을 뜨고 싶다는 간절함이 우리를 살릴 것입니다. 그 간절함으로 눈을 떴을 때 그제서야 우리는 진정으로 예수를 따라 나서는 길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60년을 준비하며, 탈/향을 꿈꾸는 향린 공동체와 그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도 ‘눈을 뜨고 따라나서는’ 치유의 기적이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파송사]


편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이 몸을 속속들이 다 아시는 하느님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 삶에 그분의 자리를 비워두십시오.
그 빈자리가 예수를 따라 살려는
우리의 의지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삶으로 이어가는 신령과 진정한 예배 속에서
하느님의 사람답게 당당하게 한 주를 살아내십시오.


[참고도서]
구스타보 구티에레즈 지음, 제3세계 신학연구소 번역실 옮김, 무고한 자의 고난과 하느님의 말씀-욥기, 나눔사, 1989
아돌프 폰 하르낙, 오흥명 옮김, 기독교의 본질, 한들출판사, 2007, 236-262쪽
잭 넬슨 폴마이어, 한성수 역, 예수를 배반한 기독교, 한국기독교연구소,  2012, 267-28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