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예물, 산 예배

1:1-18; 시편 146: 히브 9:11-14; 마르코 12:28-34

 

성서 66권 중 여성 이름을 제목으로 갖고 있는 책이 두 권 있는데, 오늘의 본문이 담겨 있는 룻기와 한 달 전 본문으로 다루었던 에스더서입니다. 이 두 책은 여성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차이도 큽니다. 우선 에스더는 유대인이지만, 룻은 비유대인 이방인입니다. 에스더서에는 하느님, 야훼라는 이름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룻기는 모두 네 장으로 된 짧은 책이지만, 18번이나 등장을 하고 1장에서만도 7번이나 등장합니다. 에스더서는 이방의 나라에서 유대인들이 모두 몰살당할 위기 속에서 구출 받음과 동시에 적을 무찌른다고 하는 유대민족주의적인 냄새가 짙게 풍기는 책이지만, 룻기는 유대민족주의를 넘어서 범민족주의 혹은 탈민족주의적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이 두 책은 둘 다 역사적인 얘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본래 히브리 성서에서는 케투빔이라는 성문서 분류에 들어가 있으며, 아가서, 전도서, 애가서와 함께 유대교의 큰 명절에 한 권씩 읽어오고 있으며 룻기는 오순절 축제 때에 읽습니다.

 

[룻기의 저자?]

 

룻기의 대강의 줄거리는 이러합니다. 베들레헴에서 두 아들과 함께 살던 부부가 흉년이 들자 이웃나라 모압으로 피난을 갑니다. 그곳에서 두 며느리를 봅니다. 그런데 그만 남편과 두 아들이 병들어 죽고 세 여인만 달랑 남습니다. 이때 시어머니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결심을 하고, 두 며느리들에게 각각 집으로 돌아가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을 권유합니다. 당시 풍습대로 한다면 나오미가 또 다시 결혼을 해서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과 결혼을 해야 하지만, 나오미 또한 이미 늙었으니 그러기에는 너무 무리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며느리는 울면서 집으로 돌아갔는데, 둘째 며느리 룻은 이를 거부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님, 어머님 가시는 곳으로 저도 가겠으며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제 겨레요 어머님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입니다. 죽음 밖에는 아무도 저를 어머님에게서 떼어내지 못합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본문의 간추린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할만한 단어가 나오는데, 첫째는 두 아들의 이름이 마흘론과 길룐입니다. 이 이름의 의미는 질병과 허약함을 뜻합니다. 본래 병약한 상태로 태어난 것이지는 알 수 없지만, 약한 몸이라고 한다면 이름이라도 강하게 살라는 뜻으로 지어야 하는데, 이름 자체가 이 사람들의 운명을 말한다는 점에서 사실보다는 문학적 표기에 가깝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관심을 가질만한 단어 하나가 있는데, 나오미가 며느리들에게 각각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할 때, 오늘 본문에는 친정집으로 돌아가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본래 히브리어는 어미의 집입니다. 친정집과 어미의 집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성서는 보통 아비의 집으로 표현하는데, ‘어미의 집이라고 부른다는 점에서 룻기의 저자는 여성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성서학자의 입장에서 볼 때, 지나친 의역이 본래의 뜻을 나타나지 못한다는 점이 공동번역성서에 대한 불만입니다.

 

나오미와 룻 두 과부가 함께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데, 이때 사람들이 나오미가 돌아온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나오미는 자신의 삶이 너무 비참하여 자신을 더 이상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 불러달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나오미라는 이름은 기쁨과 환희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고향을 떠날 때는 그런 꿈과 희망이 있는 여인이었지만, 지금 그는 전혀 그렇지 못한 비극과 고통의 한 많은 여인으로 변해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이후 생활력이나 어떤 배경이 없던 이 두 여인이 걸어가야 할 길은 뻔했습니다. 더구나 시어머니는 나이도 많습니다. 며느리 룻이 생활을 책임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베들레헴은 말도 생활 습관도 아는 사람도 전혀 없는 낯선 땅입니다. 사회적 약자 중의 약자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결국 반전을 거듭하여 시아버지와 혈연관계로 가까웠던 보아스라는 청년, 그는 당시 베들레헴 여인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사람인데, 이 사람과 극적인 사랑을 나누고 결혼을 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다윗의 할아버지가 되면서 모압 여인 룻이 다윗의 외증조할머니가 되었다는 해피엔딩의 이야기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룻기의 사회역사적 배경]

 

다윗과 연계된 이런 줄거리와 1절에서 영웅들이 세상을 다스리던 시대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판관시대를 말하기에 70인 역 그리스어 성서에서는 룻기를 판관기와 열왕기서 사이 곧 역사서로 취급하였습니다만, 학자들은 이 이야기의 실제적인 배경은 바벨론 포로 이후 시기로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빌론 포로기 이후 예루살렘 지역의 남아 있던 유대인들은 그 지역의 여러 이방 여인들과 결혼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온 귀향민들 가운데 에스라 느헤미야와 같은 지도자들이 나타나 그곳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야훼 하느님만을 섬길 것을 요구하면서 이방여인들과 결혼한 사람들은 모두 그 아내와 자식을 돌려보내라는 명령을 모세 율법에 근거해서 선포하였기 때문입니다. 성서에는 이들이 헤어질 때에 일어나는 슬픔의 기록은 없고, 누가 그런 일들을 행했는가 하는 남성들의 이름만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여성들과 아이들이 담당해야 했던 아픔에 대해서 성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저자 룻기는 과연 이러한 율법과 교리에 근거한 유대민족주의가 야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유일한 구원의 길인가를 묻고 이에 대한 반론으로서의 제 삼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남한도 백 오십만에 가까운 외국인들이 살아가는 다인종 다문화의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는 앞으로 점점 더 심화되어 갈 것이고 20년 후면 초등학교 5명 중 한명이 이렇게 다문화 가정의 아이일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English only 라는 구호를 내거는 백인우월주의자들이 있듯이 남한의 일부 보수주의적인 사람들이 다인종 다문화정책을 비판하기도 하고, 우리에게는 아직도 남북한의 통일이라는 큰 과제가 있기에 <민족>이라는 이념적 주제를 계속 붙들고 갈 수 밖에 없는 현실입니다만, 지구촌 시대에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넘어 다문화 가정이 계속 늘어나는 일은 필연입니다.

 

그런데 다인종 혼인사회에서 만약 히틀러같은 독재자가 나타나 순수 혈통을 따지면서 외국인과의 혼인을 불법화시킨다면 이는 가정파탄이라는 엄청난 불행을 가져올 것이고 그 후손들이 겪는 정신적인 트라우마는 후에 엄청난 사회적 부담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이천 오백년 전 유대사회에는 실제 이런 일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의 사회가 종교사회이기에 이방 여인과의 결합은 곧 이방 종교 이방신을 숭배하는 것과 같은 일로 여겨지던 사회였습니다. 솔로몬도 단지 이방여인들과 결혼을 한 것이 아니라, 궁 안에 그들을 위해 이방 신전을 지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방 여인들도 얼마든지 야훼 하느님을 고백할 수 있고 유다민족의 일원이 될 수 있다고 선언한 책이 바로 룻기입니다. 이런 탈유대민족주의 관점에서 구원을 얘기하고 있는 제1성서의 책이 또 하나 있는데, 그건 요나서입니다.

 

요나서는 룻기보다 더 극적이지요.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남왕국 유다마저 함락시키려고 예루살렘 성을 에워쌓았다가 갑작스레 철수한 철전지 원수 니느웨 사람들의 구원을 다루고 있습니다. 단순히 구원받았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요나의 외침을 듣자말자 왕으로부터 가축에 이르기까지 모두 금식을 하고 베옷을 입고 회개를 하였다는 전설같은 얘기를 전하면서 이제 회개해야 할 대상은 유대사람들이라는 도발적인 얘기를 하는 것이 요나서입니다. 룻기에도 그런 역발상의 얘기가 나오는데, 바로 룻은 유다민족과 계속 다투고 한때는 자신들을 식민지로 삼아 지배하기도 했던 원수의 나라 모압 출신의 이방여인이요 게다가 과부였지만,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었다는 여인으로 말하고, 2성서 마태오복음 1장에 등장하는 예수 족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는 그래서 단순히 유대인들의 어머니가 아닌,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정통 선조로 이름을 올리게 된 것입니다.

 

룻기나 요나서는 당대의 선민사상에 젖어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당당히 성서의 한 책으로 선정하였다는 점에서 유대선민사상과 더불어 탈민족주의적인 노력이 꾸준히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이 부분이 유대교를 단지 한 민족의 종교에 머물지 않고, 기독교라는 세계종교로 발돋움하게 하였다고 봅니다.

 

[룻기의 내용과 형식의 아름다움]

 

또한 룻기에는 당시 사회에서 가장 가난하고 힘없는 자로 살아가야 했던 힘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존해갈 수 있었는지에 대한 복지체제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늘 나오미의 얘기에 근거하여 보면 한 여인이 시집을 오면 남편이 죽더라도 시동생과 결혼하여 집안의 대를 이어갈 수 있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이는 다른 남자들로부터 오는 폭력이나 굶주림으로부터 보호를 받도록 할뿐더러 여성의 권리를 보장하는 법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개인주의가 발달한 오늘날의 사고에서 본다면 매우 불합리한 일로 보이지만, 혈연공동체를 중시했던 옛 사고에서 본다면 이는 매우 타당한 일입니다. 또 형제가 없다하더라도 가장 가까운 친척이 그와 결혼하여 그를 돌보아야 할 사회적 관습법이 있었다는 것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습니다. 만약 우리 주위에 한국인 남편이 갑자가 사망하여 홀로 살아가는 동남아시아 여인이 있다고 할 때, 우리 사회 복지 체제에 이 여인을 구원해줄 방식이 있을까요? 룻기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아름다움의 이야기입니다.

 

신학적으로 룻기 전체를 바라본다면 이는 1장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음으로 생존의 위협뿐만이 아니라, 자손이 하나도 없고 그럴 희망도 끊어져버린 한 유대여인이 이방 며느리를 통해 생존의 위협에서 벗어날뿐더러 자신의 대를 이어가는 손자까지 얻었다는 점에서 삶의 비극과 고난을 반전시킨 곧 인간 역사 배후에 계시는 야훼 하느님은 찬양받으실 분이다라고 하는 신앙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룻기는 판관기와 열왕기서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이는 실제 역사로 본다면 에스라 느헤미야 보다 더 뒤에 놓여 있어야 할 책입니다. 그러나 일종의 실수이긴 하지만, 판관기와 사무엘서 사이에 끼여 있는 사실은 생명평화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의미가 퍽이나 큽니다. 여호수아서로부터 역대기까지를 흔히 신명기적 사가에 의해 편집된 역사서라고 부릅니다. 여러분 여호수아서로부터 역대기까지의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입니까?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의 끝없는 전쟁과 정복의 이야기, 판관시대의 나라간의 식민지 지배와 해방 전쟁의 이야기, 이후 왕을 세움으로 부족과 부족의 작은 싸움이 아닌 이제는 국가와 국가간의 더 큰 전쟁의 이야기, 게다가 왕권을 중심한 권력 암투로 인한 남북 왕조의 갈라짐과 계속 이어지는 형제 다툼의 이야기 곧 여호수아서로부터 역대기 전체에 이르는 이야기는 한마디로 말한다면 마초 남성들이 벌리는 폭력과 전쟁, 증오와 피의 이야기입니다. 이 남성들의 폭력의 긴 역사 이야기 중간에 두 여인이 주인공이 되어 펼치는 사랑과 희망, 연대의 이야기가 바로 룻기인 것입니다. 내용을 넘어 그 형식에도 깊은 신학적 아름다움이 있는 책입니다.

[
남한 사회의 차가운 현실]

 

오늘날 우리 남한사회를 보면 너무나 절박하고 어두운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시청 앞 오른쪽 대한문에는 24번째의 죽음을 막기 위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김정우지부장의 26일째의 목숨을 건 단식투쟁이 있고, 그 건너편 시청 앞 왼편에는 4년간의 끈질긴 투쟁을 벌이고 있는 재능교육 해고자들의 천막농성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반도 저 남쪽에서는 대법원 판결에 따라 현대자동차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며 송전탑 위에서의 10일째의 고공 농성을 벌이는 노동자들이 있으며, 강정에서는 오늘도 해군기지건설을 강행하는 전쟁 세력들에 의해 평화지킴이들이 계속 목조임과 팔꺽임을 당하면서 끌려나오는 일이 하루에도 열 댓 번씩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거기다 우리 사회 저 후미에서는 소리없이 자신의 한 많은 삶을 끊는 자살자들이 오늘도 어김없이 50명이나 됩니다. 저마다 소리치다 소리치다 메아리는커녕 이제는 한숨조차 낼 기운이 없고,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아 참담한 마음으로 자신의 목에 밧줄을 걸거나 아니면 고층 아파트 창문 밖으로 자신의 몸을 내어던지는 비극이 다반사처럼 일어나고 있습니다. 대선이다 뭐다 세상은 시끄럽고, 조금 있으면 징글벨의 성탄의 노래들과 휘황찬란한 성탄 축하의 불빛들이 서울 거리를 둘러싸겠지만, 생존경쟁의 폭력과 차가움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도 룻기와 같은 사랑과 희망의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남성적 인간들이 만들어낸 폭력과 권력 쟁투의 어둠이 짙게 깔려 있다하더라도, 야훼 하느님의 손길이 함께 하는 여성적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사랑과 희망 연대의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크레인에 올라간 김진숙위원을 지지하는 전국에서 모여든 희망버스와 같이, 작가와 출판사, 시민들이 함께 나선 대한민국 출판사상 초유의 재능기부 프로젝트를 통해 책의 인세, 판매 수익금을 고스란히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에게 전하는 공지영작가의 의자놀이와 같은 사랑 나눔의 이야기들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영국의 한 광고회사가 큰 상품을 내걸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딘버러에서 영국의 수도 런던까지 가장 빠른 시간에 갈 수 있는 방법을 묻는 퀴즈를 냈습니다. 비행기에 기차에 그것도 자동차로 어디까지 갔다가 기차로 갈아타는 등, 그것도 새벽 몇 시에 출발해야 한다는 등등의 갖가지 답들이 제시되었습니다만, 퀴즈 일등상을 탄 답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간다.”였습니다.

 

여기에 우리 인생의 해답이 있습니다. 이 사랑은 단지 남녀간의 에로스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사랑은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이런 사랑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사랑만 갖고는 부족합니다. 오히려 이 사랑이 최상의 가치가 될 때, 인생은 더 불안하고 더 불행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사랑을 찾아야 할까요?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

 

오늘 마르코복음은 이 사랑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가치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한 율법학자가 예수께 묻습니다. “모든 계명 중에 어떤 것이 첫째가는 계명입니까?” 예수님께서 답변하시기를 첫째가는 계명은 이것이다. 하느님은 유일한 분이시니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또 둘째가는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질문은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 물었는데, 예수님의 답변은 첫째와 둘째로 구분해서 두 개를 답하셨지요. 그러면서 이 둘을 하나의 묶음으로 해서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고 답하신 것입니다. 사실 첫째가는 계명은 하나여야 하는데 예수님은 이 둘을 하나로 해서 첫째가는 계명을 큰 계명으로 바꾸어서 답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율법학자가 왜 하나만 얘기하시지 두 개로 말씀하시느냐고 시비를 삼지 않고 이 둘을 합하여 마음과 지혜와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라고 예수의 마음을 꼭 집어 결론을 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매우 흡족해하시면서 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고 칭찬하십니다

 

사실 이 율법학자의 얘기는 성서 전체의 핵심 사상이자 예수님의 말씀을 한마디로 종합한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하나라고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만, 여전히 예수께서 하느님 사랑을 첫째 계명이요 이웃사랑을 둘째 계명으로 둘로 구분하신 것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신학자 불트만의 견해에 따르면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정의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은 보이지 않으니까요. 또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고 절대적인 하느님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개미가 인간에 논할 수 없는 것처럼 논리상 불가능하니까요. 그런데, 이 말을 뒤집어서 인간학은 신학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을 얘기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곧 이웃 사랑이다. 여기에 우리는 동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보이지 않으니까 보이는 이웃을 통해 이를 증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뒤집어서 이웃사랑은 곧 하느님 사랑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이웃사랑은 얼마든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이 될 수 있지만, 이웃 사랑이 하느님 사랑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이웃사랑이 중요하긴 하지만 이 사랑이 절대화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이웃을 위한다고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생각하지 못한 또 다른 이웃에게 해를 가져다주는 경우도 종종 발생합니다.

 

[이웃 사랑, 내 몸 사랑]

 

흔히 우리는 내 몸을 사랑하는 것은 이기적인 행동이라 말하고 이는 하느님 사랑에 역행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 사랑을 얘기할 때, 그 사랑의 한계와 조건은 이웃 사랑이고, 이웃 사랑을 얘기할 때, 그 사랑의 한계와 조건은 자기 몸 사랑이라고 하는 이 역설과 모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자기 몸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의 자기 사랑은 긍정적인 자기 사랑과 부정적인 자기 사랑 두 종류가 있습니다. 생명을 타고난 모든 자연들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자기를 보호하고 키우려는 본능적인 자기 사랑이 있습니다. 이는 생명의 본질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서 처음 사랑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타고 나면서부터 이웃사랑을 배우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자기 몸 사랑을 통해 이웃 사랑의 소중함을 터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능에 기초한 자기 몸 사랑은 매우 자연적인 일이며 생명이 생명을 낳아가는 자연의 법칙입니다. 자기를 학대하는 사람이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율배반입니다.

 

종교인들 가운데 이런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인도나 네팔에 가면 벌거벗은 몸에 빨간 색칠을 하고 체인을 칭칭 자기 몸에 감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종교인들이 있습니다. 대중들로부터 감탄을 받습니다. 저는 이 분들이 산속에서 조용히 요가를 한다면 이해할 수 있지만, 대중들에게 보여주려고 한다는 점에서 저는 이 동기가 매우 잘못되었다고 보고 있고, 그래서 거룩을 가장하는 가식과 위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느님은 생명의 어버이로써 우리 인간들이 가장 자연스런 모습으로 더불어서 기쁘게 살아가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반면 남을 누르고 자기 몸짓을 키우려는 욕망적인 자기 사랑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자기 몸 사랑입니다. 곧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이 자기 사랑은 자신이 공동체의 한 부분임을 철저하게 인식하는 낮아짐의 자기 사랑입니다.

 

본훼퍼목사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이웃을 주신 까닭>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다른 사람을 내 마음에 드는 형상을 따라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유로운 창조에 따라 당신의 형상에 따라 그들을 지었습니다. 그 형상이 때로 우리들에게 낯설지 모릅니다. 우리들에게 다른 사람을 형제자매로 이웃 사랑의 대상으로 주신 것은 그들을 지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머리 위에서 창조주 야훼 하느님을 발견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왜 예수께서는 나의 이웃이 누구입니까? 하는 질문에 너와 오랫동안 함께 하고 마음과 생각을 같이 하는 친한 사람이다. 혹은 너와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고 답하지 않았을까요? 이게 사전에 나온 이웃의 정의가 아닌가요? 그런데 예수께서는 나의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는 질문에 생명부지의 사람 그것도 길에서 강도 만나 피 흘리는 사람이라고 했을까요? 그리고 그 피 흘리는 사람도 돕고자 하는 사마리아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을 개라고 여기며 무시하고 경멸하는 평소에도 미워할 수밖에 없는 원수 유다인입니다. 그런데 그가 내 몸같이 전적으로 사랑해야 할 이웃이라는 것이고 그의 형상 속에 하느님의 형상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서는 왜 유다인들에게 다윗의 조상 중의 한 사람을 하필이면 저들과 가장 적대 관계에 있던 모압의 한 이방 여인었음을 주장하고 있을까요? 지금 이 경우의 이웃은 모두 고통을 수반하고 있습니다. 그냥 이웃이 아닙니다.

 

[이웃의 아픔과 공감능력]

 

우선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듯이 타자를 상대화하는 일이 먼저 있습니다. 자기 몸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기 몸을 타자화해야 합니다. 자기를 자기 몸과 분리시켜서 보아야 합니다. 거울 앞에 서서 머리맵시와 옷맵시가 어떠한가 하는 그런 바라봄이 아니라, 자기를 자기되게 하는 몸에게 진정 감사할 줄 아는 그런 타자화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건강할 때는 자기 몸에 감사하지 않습니다. 자기 몸이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마구 씁니다. 그러다가 몸에 이상이 생기고 병이 생기면 아프고 괴롭습니다. 그러다 문득 자기가 자기 몸을 함부로 사용하고 감사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고통을 통해 타자화가 일어나고 거기서 비로소 자기 몸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런 깨달음에 이르면 이웃의 고통을 그냥 지나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게 자기 고통과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공감 혹은 연민이라고 말하지요. 사람에 따라서 타인의 고통을 자기화하는 공감지수가 매우 높은 사람들이 있고 무감감해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체로 고통을 많이 겪은 사람일수록 공감지수가 높은 것입니다.

 

우리도 인간인지라 365일 매일 매순간 한시도 빼어놓지 않고 누군가를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 몸 사랑하는 것도 평소에는 잊어버리고 살고, 이웃 사랑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살고 하느님 사랑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삽니다. 그러나 고통이 임할 때에 자기 몸이 아파할 때, 이웃이 아파할 때, 그리고 하느님이 아파할 때 우리는 사랑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언제 아파할까요? 인간들이 한 부류의 사람들이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누르고 소외시킬 때에 아파하십니다. 히브리 노예들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할 때, 그들의 고통의 소리에 견디지 못한다고 야훼 하느님은 토로하십니다. 어제는 제주강정에서 시작한 생명평화대행진이 마무리하는 날이었습니다. 해군기지건설로 마을이 아파하고 자연이 아파합니다. 쌍용차와 현대차와 재능교육과 콜텍의 해고노동자들과 비정규직들이 아파합니다. 사대강과 강원도 골프장과 원전으로 인해 온 생명들이 아파합니다. 하느님이 아파하고 계십니다. 이는 한 개인의 회개가 아닌 인간 집단의 회개가 필요합니다.

 

[아픔 안에서 하나 되는 십자가 사건]

 

사랑한다는 것은 아픔을 함께 나누는 일입니다. 자신과 타인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아픔 안에서 하나되는 일입니다. 성서는 바로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가 당하는 십자가 위에서의 그 고통을 참지 못하고 하늘과 땅, 신과 인간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그 순간 십자가 위에서 하나 되는 그 사랑을 말합니다. 아가페 사랑을 말합니다. 어머니가 자식이 차에 치이려는 순간 모든 것을 잊고 자기 몸을 던지듯이 고통 속에서 자기 몸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성화하고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으로 성화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 사랑이 왜 이웃 사랑에 근거하고 이웃 사랑은 왜 자기 몸 사랑에 근거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은 모두 아픔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마르코 복음서 기자는 율법학자의 입을 빌려 무엇이 참된 하느님 사랑이며 무엇이 참된 이웃 사랑인지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을 예배하는 근본이 어디에 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 이 구절의 참된 의미는 번제물과 희생제물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고통의 의미 없이 곧 참된 감사의 의미 없이 바쳐지는 번제물과 희생제물의 무용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아침에 교회를 향해 나오실 때, 그 마음에 지난 한 주간을 하느님 앞에 나아가 감사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하는 절박한 마음을 갖고 나왔는가? 오늘 여러분이 헌금을 드릴 때, 그냥 의무감에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고통과 이웃의 고통과 하느님의 고통을 생각하며 진정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렸는가? 하는 물음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시골에 홀로 계시는 어머니가 계십니다. 서울에 사는 외아들이 사업에 성공하여 용돈도 풍족히 드리고 모든 일에 부족함이 없도록 최신 김치냉장고에 벽tv에 고가의 물건을 사서 보냅니다. 어머니가 말합니다. 아들아 내가 바라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너의 마음이란다. 너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를 원한단다. 그러나 아들에게는 그 시간이 아깝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다 돈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그는 엄마의 원을 어쩔 수 없어 시골에 내려옵니다. 그런데 마음은 서울에 있습니다. 엄마와 함께 밥을 먹으면서도 시선은 신문 주식기사에 가 있고, 손가락은 핸드폰에 가 있습니다. 그건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사랑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핸드폰도 꺼야 하고 서울을 향한 모든 생각도 꺼야 합니다. 그래서 엄마의 고독한 고통과 하나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에 오면 핸드폰을 끄라는 것은 그냥 예배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 아닙니다. 여러분 스스로의 진정한 예배를 위함입니다. 몸은 여기에 마음은 바깥에 그것이 바로 현대인들의 깊은 병입니다. 예전 아프리카에 선교사가 파송을 받아 갔는데, 그만 폭풍우로 인해 예정 날짜보다 삼일이나 늦게 도착했습니다. 그래 짐을 지고 가는 원주민들에게 빨리 가자고 재촉합니다. 숲속을 빨리 걷던 원주민들이 그만 걸음을 멈추고 그냥 멍하니 서 있습니다. 다시 재촉합니다. 빨리 가자고, 시간이 급하다고. 그러자 그들 가운데 한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너무 빨리 걷는 바람에 우리 영혼이 뒤쳐져 있다, 우리 영혼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여러분의 영혼은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 아시는가요?

 

우리가 온 마음을 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면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지금 어디쯤에 와 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나의 영혼의 자리를 아는 사람은 이웃의 세미한 아픔의 소리도 알아챌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는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이 자리가 바로 그런 자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부탁합니다. 서로 사이좋게 지내십시오. 서로 사랑하십시오. 깊은 정을 나누는 친구가 되십시오. 자기 방식만 고집하지 마십시오. 자기보다 다른 이들이 잘 되도록 도우십시오. 스스로의 이익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자기를 잊으십시오. 그리스도 예수의 방식으로 자신을 생각하십시오. 주님은 하느님과 똑같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거기에 연연하지 않으셨습니다. 조금도 아깝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때가 되자, 주님은 하느님으로서의 특권을 제쳐두고 종의 신분을 취하셨습니다.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사람이 되셨을 뿐만이 아니라 사람을 섬기는 사람의 아들, 종이 되셨습니다. 여기에 자유의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