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린공동체주일 강단교류

나 하나의 수고와 희생으로

시편 127 ; 룻기 3,1-5; 히브 9,24-28; 마르 12,38-44

이 병 일 목사

네 가지 본문의 주제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공통적으로 엮일 수 있는 것은 ‘수고와 희생’이고 신학적으로는 ‘고엘’입니다. 고엘은 ‘도움을 줄 수 있는 가까운 사람’을 의미합니다. 성서에서는 ‘친척’(민 5:8), ‘대속자’(욥 19:25), ‘기업을 무를 자’(레 25:25; 룻 2:20) 등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는 친족으로서의 올바른 권리와 의무에 관한 제도인데, 고대 히브리 사회에서 발견되는 독특한 제도로써 혈연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되었고, 한 혈연 공동체 내에 속한 구성원들이 서로의 생명과 재산과 가문을 보호해 주기 위한 상보(相保)제도였습니다.

룻기는 사사시대, 즉 이스라엘의 가나안의 평등과 해방 공동체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땅을 잃고 떠돌던 한 가족의 남자들이 다 죽고 시어머니와 함께 모압인 여인 룻이 베들레헴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둘은 다른 사람들이 추수를 한 밭에서 이삭을 주워 모아서 나름대로 끼니를 때울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땅을 되찾고 가문을 잇기 위해서는 시어머니인 나오미가 아들을 낳거나, 며느리인 룻이 그래야 합니다. 둘 다 과부인 이 가족에게 아들을 낳아 대를 이을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가까운 친족의 남자 중에서 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책임이 있는 사람을 ‘고엘’이라고 합니다(룻기 2:20; 3:2). 그 사람이 바로 보아스였는데, 엘리멜렉의 땅을 대금을 지불하고 도로 찾아주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을 책임지고, 아들을 낳게 하여 잃어버린 땅을 되찾아 주는 고엘이 되었습니다.

“기업을 무를 자”란 가난한 혈족의 땅을 도로 사주고, 친족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으면 미망인의 시댁에 입양시켜 전 남편의 대를 잇게 하는 책임을 지닌 사람을 말합니다. 보아스는 룻을 좋게 여겼습니다. 보아스는 자기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으니 그에게 한번 물어보고 결정하겠노라고 하였습니다. 다음날, 보아스는 성읍의 장로 열명을 증인으로 청하고, 가장 가까운 친족을 불러 기업 무를 자에 대한 의사를 타진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거절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보아스는 기쁜 마음으로 룻과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보아스는 엘리멜렉의 땅을 대금을 지불하고 도로 찾아주었습니다.

룻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웃의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찾아와 축하하며,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주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이 집에 자손을 주셔서, 대가 끊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늘 기리어지기를 바랍니다. 시어머니를 사랑하는 며느리, 아들 일곱보다도 더 나은 며느리가 아기를 낳아 주었으니, 그 아기가 그대에게 생기를 되찾아 줄 것이며, 늘그막에 그대를 돌보아 줄 것입니다.”(룻기 4:14-15) 나오미는 아이를 입양하였고, 이웃 여인들이 그 아이에게 오벳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후일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으며, 다윗에게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였습니다.

보아스의 아버지는 살몬인데, 살몬은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정탐꾼을 보냈을 때에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살몬은 여리고를 점령한 후 정보를 주고 목숨을 지켜주었던 기생 라합과 결혼하여 보아스를 낳았습니다. 보아스의 7대조 할아버지는 베레스인데, 베레스는 야곱의 아들 유다가 다말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입니다. 룻은 다말과 라합에 이어서 고엘에 의해서 성서의 아담으로부터 예수님에게 이르는 족보에 속한 이방여인이 되었습니다.

‘고엘’은 친척이나 친족이면서도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위해서 수고와 희생을 감수하면서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룻은 ‘고엘’ 되었고, 보아스는 ‘고엘’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때에 따라서 누군가의 ‘고엘’이 되거나 누군가에 의해서 ‘고엘’이 됩니다. 우리네 삶은 혼자서만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성서에는 고엘의 다양한 사례가 나옵니다. 고엘은 가난한 형제가 빚 때문에 종으로 팔려갈 경우에 친척이 빚을 갚아서 해방시키고(레 25:47-55), 형제가 토지를 팔았을 경우에 친척이 일정기간이 지난 후 그 값을 치르고 토지를 돌려받고(레 25:23-28), 형제가 죄를 지었을 경우에 친족이 그 형제의 죄 값을 무를 의무를 지고(민 5:8), 친족 중 한 사람이 살해되었을 때에 가까운 친척이 보복을 할 수 있고(민 35:19), 형제가 자식이 없이 죽었을 경우 가까운 형제 순으로 남겨진 미망인과 결혼하여 가문이 존속되게 합니다(창 38장; 마가 12:18-27 부활논쟁). 이렇게 적극적이지 않더라도, 우리가 알거나 깨닫지 못할 때에도 우리는 누군가의 수고와 희생을 전제로 살고 있으며, 오늘도 나의 행위로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며 삽니다.

성서 전반을 흐르는 내용 중에 하느님을 이스라엘의 고엘이라 하고, 예수님을 우리의 고엘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환난에서 건지시며(창 48:16), 대적의 손에서(사 41:14) 건져주시는 구원자입니다. 또한 하느님은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의 구원자이며(잠 23:11), 잃어버린 생명을 영생으로 다시 얻게 하시는 분(욥 19:25)입니다. 신약성서 곳곳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희생제물로 드려서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그들의 죄를 없이하여 구원하였다고 합니다. “자기를 희생 제물로 드려서 죄를 없이하시기 위하여 시대의 종말에 단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히 9:26)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자기 몸을 제물로 바치셨고, 두 번째로는 죄와는 상관없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셔서 구원하실 것입니다.”(히 9:28)

많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고엘이 되고 고엘의 역할을 하면서 수고와 희생을 하지만, 예수님은 자기의 목숨을 희생함으로써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고엘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서 살기 위해 애씁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각자위심이 만연한 우리의 상황은 어떠합니까? 예수님이 경계하라고 가르친 바리새파 사람들의 행위가 오늘 우리의 모습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 모습은 이렇습니다. “그들은 예복을 입고 다니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한다. 회당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에 앉기를, 식탁에서는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겉치레로 길게 기도한다.”(마가 12:40) 예수님의 이 비판은 종교적인 것만이 아니라 사회-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삶 전반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또한 오늘날에는 바리새파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여기에 해당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늘 우리의 삶을 성찰해야 합니다. 종교적 위선으로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서 행동하고, 그 권위와 권력을 이용해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를 자행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빙자해서 그 사랑을 가장 구체적으로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착취합니다. 경건과 믿음을 빙자해서 자신들의 치부를 채웁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사람들을 “더한 심판을 받을” 사람들이라고 혹독하게 책망합니다.

예수님은 그 중에서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는 것을 이어지는 이야기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마가복음 12:42-44(가난한 과부의 헌금)에서 가장 큰 오해는 예수님이 생활비의 전부를 바친 가난한 과부를 칭찬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이 과연 가난한 과부를 칭찬한 것인가요?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헌금함에 동전을 넣은 모든 사람들보다 이 가난한 과부가 더 많이 넣었다. 왜냐하면, 모두가 그들에게 넘치는 것을 넣었지만, 이 여자는 궁핍한 데서 가진 것 전부 곧 그녀의 생활비 모두를 넣었기 때문이다.”(마가 12:43-44)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만일 지금 이 본문이 헌금을 강조하기 위한 이야기라면 제자들에게만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금과 은은 고사하고 두 벌 옷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헌금을 하려고 해도 할 돈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헌금을 이렇게 하라.”고 말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미 모든 것을 다 버린 사람들에게 무엇을 헌금하라고 하겠습니까. 또한 예수님이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앞으로 너희들이 교인들을 관리할 때에 그들에게 이렇게 헌금을 하도록 가르치라.”고 할 리도 만무입니다. 또한 가난한 과부가 자기의 생활비 전부를 바친 것을 부자들이 상대적으로 적게 드린 것이나 조금 바치면서 생색을 내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부자들이 거들먹거리면서 동전 주머니를 쏟아 부었다.’고 각색하기도 합니다. 부자들이 많이 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런 부자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마태복음에서는 이 본문이 아예 빠져있고, 누가복음에서는 간략하게 서술하면서 예수님이 누구에게 이 말씀을 했는지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서 “많은 부자들이 많이 넣었다.”고 합니다. 문맥상으로는 부자들도 할 만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제자들이건,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건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그들은 어떤 생각을 먼저 했을까요? ‘아, 저 여자가 생활비 전부를 헌금했으니 나도 헌금을 그렇게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떠오를까요? 아니면 ‘아니, 그렇게 생활비 전부를 헌금 해 버리면 그 여자는 무얼 먹고 산다는 말인가?’라는 생각이 떠오를까요? 당시의 유대인이라면 당연히 첫 번째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느님 계명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고아와 과부는 특별 보호 대상입니다. 요즘 말로 생활보호대상자나 차상위 계층입니다. 하느님이 특별히 과부를 돌보라고 말씀하신 것을 잘 알고 있는 유대인들이 “그 과부가 가진 생활비 전부를 헌금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잘 했다, 나도 그 여자를 본받아 헌금을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대개가 “도대체, 그렇게 헌금을 해버리면 그 여자는 무엇을 먹고 산단 말입니까? 그 여자가 누구 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도와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에는 연보궤가 있었습니다. 성전의 바깥뜰인 여인의 뜰에는 각각 다른 용도가 표시된 열세 개의 나팔 모양을 한 연보궤가 늘어서 있었는데 성전에 예배하러 왔던 사람들이 성전 입구에 서 있는 이 연보궤에 연보를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여기에서 연보는 오늘날의 헌금과는 다른 성격입니다. 당시에 ‘헌금’이라고 번역된 말(γαζοφυλάκιον)이 “국고, 보고, 기금, 모금”이라는 뜻인데,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기금이었습니다. 우리말의 “연보(捐補)”는 단순히 돈을 바친다는 의미의 헌금보다는 원어의 뜻을 더 잘 살려서 번역한 것입니다. ‘연’은 “버린다, 주다, 바치다, 내놓다, 기부하다”라는 뜻인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림으로 타인에게 내 놓거나 바치거나 기부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보’는 원래 “깁다, 고치다, 보태다, 돕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연보는 “자기 것을 버려서 헤어지고 떨어진 곳을 기워준다.”는 뜻이 됩니다. 이렇게 구제를 목적으로 하는 기금이나 모금의 형태가 구약성서의 십일조의 의미와 가장 가깝습니다.

성서의 여러 곳에서 십일조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당연히 하느님의 몫을 하느님께 바치는(돌려드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십일조를 바치는 일은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하느님의 계명을 철저하게 지키겠다는 약속이면서, 모든 계명을 지키는 표준(시금석)입니다. 십일조는 신앙생활의 가장 근본적이며 기초적인 행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신앙인의 자랑이 아니라 당연히 지켜야할 의무입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십일조는 우리의 생명을 포함하여 우리를 살 수 있게 하는 모든 것을 주신 하느님께 대한 감사이며, 그 모든 것을 주신 하느님께 그 중의 일부를 드리면서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언약과 의무를 다하겠다는 다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바치는 십일조를 비롯한 헌금은 신앙의 표현임과 동시에 자기의 소유를 약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행동입니다. 단순히 교회의 확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인 생명들을 살리고 약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을 과부의 생활비를 삼키는 사람들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해짐으로써 사회적으로 위축된 사람들을 돕기 위한 십일조의 조항을 더 세분화하고 첨가함으로써 지키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공동체 안에서 봉사하는 사람이나 약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일으켜 주어 하느님 앞에 서게 하는 정의와 자비와 인의를 실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죄인으로 몰아 세워서 하느님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 바치는 조항을 확대하였으나, 그것을 사용하는 목적이나 정신은 무시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율법의 세부조항들을 추가하여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정말로 중요한 율법의 정신인 정의와 자비와 신의를 꿀꺽 삼켜버렸다고 책망하였습니다. 바로 앞에서 언급한 율법학자들은 거의 모두가 레위인이었기에 십일조를 받았는데 마땅히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들에게까지 전달되어야 할 십일조를 자신들이 다 챙겼습니다. 당시에는 일부 소수가 십일조를 독점하였기에 같은 레위인이라도 권력을 쥐지 못했던 레위인들은 거의 거지 신세로 살아가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이 과부의 가산을 삼킨다고 비판했습니다. 게다가 그 기금으로 혜택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얼마 되지도 않는 생활비 전부를 기금으로 내 놓아야 하는 현실이야말로 비판을 받아 마땅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따로 불러서 한 말씀은 가난한 과부의 생활비까지도 구제비로 내놓아야 하는 현실을 비판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고 그러한 행위를 권장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이제부터는 가난한 과부와 같은 사람들이 더 이상 없게 하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과부의 생활비를 삼키는 율법학자들이나 많이 넣음으로써 자기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부자들을 비판한 것입니다. 기꺼이 고엘이 되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수고와 희생을 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들에게 돌아갈 몫까지 자기의 것으로 삼는 사람들과 그러한 상황을 그대로 용인하는 사회를 비판한 것입니다.

고엘은 공동체에 속한 구성원들이 서로의 생명과 재산과 가문을 보호해 주기 위한 제도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엘이 되어 하는 수고와 희생은 혈연에 의한 가족이나 친척의 경계를 넘어갑니다. 제도적 종교의 틀도 넘어갑니다. 예수님께서 새로운 가족의 의미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의 어머니이며, 누가 나의 형제들이냐?” “보라!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자매]들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내 형제이며, 자매이며, 어머니이기 때문이다.”(마가 3:33-35) 종교적 의미가 아니라 사회적 의미에서 하느님의 뜻을 행하다가 고난 받는 사람들, 이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구조로 인하여 소외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기꺼이 고엘이 되어 수고와 희생을 감당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일입니다. 가족과 교회와 직장, 그리고 나라와 민족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하는 고엘의 수고와 희생은 꼭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뜻과 그 뜻의 행함이 새로운 가족의 전제이듯이, 우리의 수고와 희생이 헛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이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이 열심히 일하며 수고합니다. 그러나 그 수고가 다른 사람의 몫의 재산을 빼앗고, 다른 생명을 파괴하는 일이라면 궁극적으로 헛된 수고입니다. 생명과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종교적으로 경건하고 정치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하더라도 그 하는 일의 수고가 하느님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헛수고입니다. “주님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집을 세우는 사람의 수고가 헛되며, 주님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된 일이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눕는 것, 먹고 살려고 애써 수고하는 모든 일이 헛된 일이다.”(시편 127:1-2) 우리가 하는 수고와 희생이 하느님의 뜻을 위한 것이고 그 수고와 희생에 하느님이 함께 하실 때에 그것이 진정한 고엘입니다.

돌이켜 생각해 봅시다. 지금 나는 어떠한 수고와 희생을 하고 있는지? 내가 감당하고 있는 수고와 희생은 누구를 위한 것이며, 무엇을 위한 것인지? 우리가 살아 있는 한 무엇인가를 계속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수고와 희생의 방향이 중요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거의 모든 사람이 한 방향을 향해서 달려가면서 수고와 희생을 하고 있습니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에서 토끼가 여유롭게 잠을 자고 있는 동안에 거북이가 목표지점에 먼저 도착했다고 해서 거북이가 빠르다고 인정하거나 거북이에게 전보를 맡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평등하고 공정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판을 바꾸든지 경기규칙을 바꾸어야 합니다. 개인의 성공에 함몰되어 공동체적 가치를 망각했던 행태를 바꾸는 ‘가치 전환’, 무기력과 패배의식에서 벗어나 시민 활동과 정치에 적극 참여하여 99퍼센트가 힘을 발휘하는 ‘권력 이동’이 필요합니다. 게다가 불공정한 게임이나 불평등한 경쟁을 하지 않고서도 모두가 함께 장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하느님의 고엘, 예수님의 고엘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가는 길이 좁은 길일지라도 하느님이 함께 하시면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시편의 내용처럼 모두가 편안하게 잠잘 수 있고, 우리의 아이들이 우리의 미래에 대한 하느님의 선물이고 상급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식이 짐이 아니라 진정으로 우리의 미래를 짊어질 수 있는 든든한 고엘이 되는 세상을 만들어 갑시다. 이 땅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수고와 희생이 모두에게 하느님의 고엘이 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고엘이 되어 더 이상 가난하고 억울하게 고난당하는 사람들이 없는 세상 만드는 일에 함께 합시다. 오늘 향린교회와 향린공동체가 이 세상에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의 고엘이 되어, 우리가 하는 모든 수고와 희생이 헛되지 않고 열매를 맺는 날들이 오기를 빕니다. 그날에 이곳이 하느님 나라가 될 것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평안하십시오. 자유인으로 삽시다.

불공정한 게임과 불평등한 경쟁이 만연한 세상 속에서도

하느님의 고엘을 실천하며

공동체를 위하여 수고와 희생을 하는 사람들,

예수님의 고엘을 따라서 하느님 나라를 만드는 사람들,

우리가 바로 그 사람들이 되어 당당하게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