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고백하는 희망

1 사무 2,1-10 ; 1사무 1,4-20 ; 히브 10,11-14, 19-25; 마르 13,1-8

한 문 덕 목사

[우리가 겪는 위기 상황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제1성서와 복음서의 본문은 모두 위기 상황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위기를 한 번도 겪지 않고 평생을 살면 좋겠지만 살다보면 다양한 이유로 여러 가지 층위의 어려움에 직면하게 됩니다. 몇 주 전 조 목사님의 하늘뜻펴기를 통해 본 룻기의 이야기는 기근이라는 자연재해 때문에 이주민이 되어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룻기 바로 전에 나오는 판관기는 외부 부족들의 공격에 늘 시달리면서 언제든 식민지 백성으로 추락할 수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위기상황들을 묘사합니다. 오늘 제1성서에 등장하는 한나의 이야기는 개인적으로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아이를 출산하지 못하는 여인이 겪는 수모와 슬픔, 아픔과 고통에 대한 이야기이자, 국가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세계질서의 변화 속에서 한 국가의 존망을 결정짓고 이끌어갈 지도자를 배출하는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나의 이중 삼중의 아픔]

결혼이 삶의 제1순위도 아니고, 설사 결혼을 했다손 치더라도 각자의 자아실현과 삶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자녀의 출산은 얼마든지 뒤로 미룰 수 있고, 또 자녀를 낳지 않을 자유도 누리고 있는 현대인의 눈으로 볼 때 한나의 이야기는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근대 이전의 인류에게는 개인의 생존 뿐만 아니라 가족의 생존과 존속이 중요한 것이었고, 특히 결혼한 여성에게는 아이를 출산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역할로 여겨졌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의 경우 평등한 토지 분배와 관련하여 땅의 대물림은 혈연으로 이어지는 가족별로 가능했고, 자녀가 없는 경우 땅을 유산으로 물려받을 수 없기 때문에 한나가 잉태를 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한나의 생계까지도 위협받는 말할 수 없는 불행이자 괴로움이었습니다.

한나의 고통은 이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매년 야훼의 신전에 올라갈 때마다 엘카나의 다른 아내, 브닌나가 한나를 괴롭혔다고 나옵니다. 브닌나 입장에서는 이해할 만도 합니다. 왜냐면 엘카나의 마음이 한나에게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제사를 지낼 때에 희생제물의 기름기는 불에 태워 하느님께 올리고, 사제가 자신의 몫을 차지한 뒤 나머지는 식사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엘카나도 제사를 지내고 나서 제물들을 나누었는데, 브닌나와 그 자식들에게는 제 몫에 따라 제물을 나누어 주고, 한나에게는 좋은 부위로 갑절로 챙겨주었습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번역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아무튼 이런 편애로 인해 브닌나는 한나를 괴롭힙니다. 한나 입장에서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그 현실자체의 괴로움에다가 그것을 빌미로 공격당하는 이중의 괴로움이 있었던 것이지요.

또한 고대인들은 현대인들보다 음식을 잘 먹지 못했습니다. 특히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축제에나 가능했습니다. 남들은 모두 즐기고 신나는 축제의 시간에 고통을 당하는 한나의 마음은 아마 만 갈래로 찢어졌을 것입니다. 상대적 박탈감이 더욱 심해졌을 것입니다. “왜 울기만 하오? 왜 먹지도 않고 슬퍼만 하오? 내가 당신한테는 아들 열보다도 낫지 않소?”라는 남편의 위로도 전혀 소용이 없습니다. 박완서 선생의 <한 말씀만 하소서>(세계사, 2004.)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박완서 선생이 전도유망하던 26세의 젊은 아들을 잃고 통곡 대신 미친 듯이 끄적거렸던 일기를 책으로 낸 것인데,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내 아들이 죽었는데도 기차가 달리고 계절이 바뀌고 아이들이 유치원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까지는 참아줬지만 88올림픽이 여전히 열리리라는 건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내 자식이 죽었는데도 고을마다 성화가 도착했다고 잔치를 벌이고 춤들을 추는 걸 어찌 견디랴. 아아, 만일 내가 독재자라면 88년 내내 아무도 웃지도 못하게 하련만. 미친년 같은 생각을 열정적으로 해본다.”

한나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가는 그녀가 기도하는 모습에서 느껴집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곤경에 빠진 사람이 자신의 불행을 호소하기 위해 야훼가 계신 성전에 나아가 하느님의 응답을 기다리곤 했습니다. 물론 하느님의 응답은 제의를 담당하는 사제를 통해서 주어집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한나가 야훼께 나아가고 사제 엘리가 응답해 주지요. 보통 곤경에 처한 이는 성소로 나아가서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곤경을 호소합니다.(시편 77편 참조) 그런데 오늘 한나는 얼마나 괴롭고 힘든지 입에서 소리가 나오질 않습니다. 마음에 사무쳐서 울먹이고 입술만 움직일 뿐 소리조차 낼 수 없었지요. 보통 곤경에 처한 이들이 기도해서 문제가 해결되면 하느님께 감사하고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제물을 바치는 데, 한나는 기도해서 얻은 그 아이를 바칩니다. 그 정도로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고통 발생의 복잡한 양상]

제가 한나가 겪는 위기와 고통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우리네가 겪는 고통의 층위가 복합적이고 다양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한나의 경우, 여성으로 아이를 갖지 못하는 고통, 그것이 생계 문제로 이어지는 고대의 가부장적 사회의 문화, 적대자의 조롱과 괴롭힘, 상대적 박탈감 이렇게 겹겹이 쌓인 고통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인 식욕마저 빼앗고 맙니다. 그런데 이런 이중삼중의 고통은 한나만이 겪는 한 개인의 독특한 체험만은 아닙니다. 사무엘을 얻은 한나가 드리는 감사찬양을 보지요. “배불렀던 자는 떡 한 조각 얻기 위하여 품을 팔고, 굶주리던 사람은 다시는 굶주리지 않게 되리라. 아이 못 낳던 여자는 일곱 남매를 낳고 아들 많던 어미는 그 기가 꺾이리라. ~~ 야훼께서는 땅바닥에 쓰러진 천민을 일으켜 세우시며 잿더미에 뒹구는 빈민을 들어 높이셔서 귀인들과 한 자리에 앉혀 주시고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 당신을 따르면 그 걸음걸음을 지켜 주시지만 불의하게 살면 앞이 캄캄해져서 말문이 막히리라. 사람이 제 힘으로는 승리하지 못하는 법, 야훼께 맞서는 자는 깨어지리라.” 한나의 이야기는 가난한 자, 힘 없는 자, 불의한 자들에 의해 폭력을 당한 자, 제 힘으로만은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었던 이들의 위기와 고통, 어려움과 소망을 대변합니다.

동시에 현대의 눈에서 비판적으로 한나의 이야기를 살펴보자면 가부장적 체제라는 왜곡된 사회의 부조리가 한 개인 여성에게 어떤 고통을 주는 지 우리는 알 수 있고, 동시에 우리 모두는 또한 시대의 아들딸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하기도 합니다. 브닌나와 한나의 적대관계는 권력 가진 남자가 두 여인을 아내로 삼을 수 있었던 가부장적 사회에서나 벌어지는 일이고, 그 문제의 해결이라는 것이 결국 그 시대의 제약적 조건하에서 이루어지니까요.

1960년대에 가난한 농부에게 시집을 온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시아버지, 시어머니, 시누이, 시동생들 틈바구니에서 맏며느리로 온갖 고생을 다합니다. 남편이라도 싹싹하면 다행인데 고리타분하고 눈치코치가 없습니다. 시집살이(요즘은 시월드(World)라고 부르는)에서 당한 이야기를 풀어놓으라면 수도 없겠지만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농촌에는 아침이면 외양간의 소를 끌어다가 줄을 길게 늘여서 산에 묶어 놓습니다. 그러면 소는 산에서 풀을 뜯으며 하루를 보내지요. 아침에 남편이 소를 산에 묶어 놓고, 저녁까지 일하느라 아내가 소를 다시 끌어다가 외양간에 넣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소가 바뀐 것입니다. 남의 집 소를 끌어 온 것이지요. 이 일을 두고 남편과 시댁 식구들이 온갖 구박을 합니다. 촌으로 시집 온 여인이 내 집 소와 남의 집 소를 구별하기란 정말 힘들지요. 그런데 그걸 이해해 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서럽고 억울하지만 당할 수밖에. 그런데 복수할 좋은 기회가 왔습니다. 시아버지 생신이라 동네분들을 초청했습니다. 음식 담을 그릇이 모자라서 동네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는 그릇을 빌려왔지요. 저녁이 되어 생일잔치를 모두 마치고 뒷정리에 설거지를 끝낸 아내가 남편을 부릅니다. “여보, 이리 와 보세요. 여기에 있는 그릇들 중에 우리 그릇 좀 골라 봐요.” 남편이 알 턱이 있나요. 아내는 남편에게 지난 번 소 사건을 말하면서 한바탕 퍼부어 댑니다. 속이 조금은 시원해 지지요. 그러나 이렇게 한다고 해서 시월드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사회 깊숙이 무젖어 있는 가부장적 편견과 억압이 쉽게 뒤바뀌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한나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날의 사회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 상황도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여러 가지 원인과 관계가 얽혀서 한 개인에게는 큰 어려움으로 다가 오게 된다는 것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복잡한 문제에 쉬운 해결 또한 없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복잡한 문제를 단번에 쉽게 해결하려다가는 오히려 그 시도가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한나의 고통에 남편 엘카나의 위로가 소용 없었듯이 큰 고통에 섣부른 위로는 도리어 상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냥 두 손 놓고 가만히 있어야 하나요?

[위기의 마르코 공동체]

오늘 복음서의 본문은 마르코 교회공동체가 해체될 상황까지도 염두에 두어야 할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삶과 활동을 말보다는 행동으로 생생하게 보여주는 마르코 복음서에 유독 예수님의 말씀을 모아 놓은 두 장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비유장이라고 불리는 4장, 오늘 본문인 13장입니다. 4장은 마르코 공동체가 처한 위기 상황에 대한 예수의 직접적인 위로의 말씀이자 동시에 가르침입니다. 4장은 예수께서 시작하신 하느님 나라 운동이 거대한 저항에 부딪혀 침체 국면에 빠진 절망적인 상황을 타개하려는 노력을 보여줍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서 실패도 따르지만 놀라운 성공이 올 것이니(4:1-9) 희망을 가지라고 합니다. 또 저절로 자라는 씨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서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 나라는 차츰 차츰 자라 열매를 맺을 것이며(26-29), 현재는 미미해 보이는 하느님 나라가 결국은 온 민족의 쉼터가 될 것이라는(30-32)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13장은 묵시문학 양식을 띠고 있는데, 온 세상의 파국을 말하는 묵시문학의 형태는 미래에 대한 예언보다 현재의 고통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마르코 공동체가 심각한 위기상황에 처하게 될 쯤 세상은 뒤숭숭하였습니다. 기원후 61년 한해 사이에 포에니 전쟁에 대한 나쁜 소문이 57회나 로마에 전해졌고, 61년에는 라오디게아에서, 62년에는 폼페이에서 큰 지진이 있었습니다.(13:8)

66년 5월, 총독 플로루스가 예루살렘 성전금고에서 17달란트를 요구하자 예루살렘의 천민들이 반 로마 봉기를 일으켰고, 로마 군인들은 무지막지한 유혈진압으로 봉기를 막으려고 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6월에 로마 황제를 위한 매일 제물 봉헌을 전격적으로 중지하고 본격적으로 봉기합니다. 가이사랴에 주둔하던 로마 군인과 이방인들은 즉각 시내에 살던 유대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고 한 시간도 안 돼 2만 명 이상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봉기는 이두매아와 갈릴래아, 베레아로 이어졌고 12월 유대인들은 주변의 이방인 도시를 공격하여 계속 점령해 나갔습니다. 시리아 총독 갈루스가 진압에 나섰다가 오히려 유대군에게 대패하는데, 67년 초 황제는 57세의 노련한 장군 베스파시아누스를 진압군 책임자로 파견합니다. 그는 아들 티투스와 함께 6만 여명의 군인을 동원하여 진압에 나서서, 67년 가을에는 갈릴래아를 점령하고 이어 68년 봄에 베레아와 서부 유대가, 70년 가을에 예루살렘이, 74년에는 마지막 남은 마사다가 점령되고 맙니다. 70년 8월 29일 하느님의 도성 예루살렘 성전은 타버리고 벽만 남았는데, 그 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명령에 따라 벽마저 허물어져 버렸습니다.(13:2)

유대-로마 전쟁기간 동안 팔레스티나 일대는 아수라장이었습니다. 로마군의 거친 탄압에다가, 헬라인 등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의 보복, 유대군 내부의 내분으로 인해 약탈과 살인이 빈번하였고, 이 때 죽은 유대인만 110만 명이 넘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의 분위기는 뜨거웠습니다. ‘조국독립’이라는 찬란한 대의명분을 내건 애국자들의 깃발이 펄럭이는데다, 무엇보다도 “때가 됐다”는 유대인 특유의 ‘대중 메시아 운동’이 만개했기 때문이지요. 이제 세상의 종말이 되어 하느님이 우리 원수들이 우리에게 행한 대로 그들에게 복수하실 것이니 자신을 따르라는 자칭 그리스도들이 여기저기 등장했습니다. 실제로 봉기를 주도한 세력 중의 하나인 열혈당의 지도자 므나헴은 메시아를 자처했으며, 또 다른 지도자 시몬 바르 기오라는 다윗처럼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기도 하였습니다.(13:5-6)

전쟁과 지진, 흉년! 이런 재앙들은 한 개인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지요. 목숨이 왔다 갔다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다는 사실은 마지막으로 의지할 정신이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지켜 주시는 하느님의 성전이 무너진 것이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마르코 교인들은 이중삼중의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이들이었기에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에게 이중적으로 시달렸고 그들은 지방 공회 앞에서, 로마 법정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다가 매를 맞고 죽음을 맞이했을 뿐만 아니라, 가족들에 의해 배신을 당해 죽임을 당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위기의 상황에서 마르코 교회지도자는 교인들에게 어떻게 하늘뜻펴기를 했을까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위기 극복 하기]

누구나 어려움을 겪으면 그것을 피하고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됩니다. 그래서 빨리 문제를 해결하고자 신속하고 쉬워 보이는 해결책을 선택하기 쉽습니다. 누군가가 나타나서 도와주겠다면 금방 그 사람의 말에 넘어갑니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에서 발생한 문제라면 자신이 책임지려고 하기 보다는 타인이나 주변환경에 문제의 원인이 있다고 돌려 대면서 자신은 쏙 빠집니다. 이도 저도 안 되면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물질적, 환경적 어려움이 정신의 타락과 나태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오늘 마르코 공동체는 이런 모든 유혹을 물리칩니다. 우선 이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성전의 파괴가 곧 종말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이런 일들이 고난과 진통의 시작일 뿐(8절) 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코 공동체는 열혈당원들의 부추김에 휘둘려서 전쟁의 칼날을 휘두르지 않았습니다. 여기 그리스도가 있다, 저기 그리스도가 있다고 하여도 쉽게 그들에게 넘어가지 않습니다. 모든 환난을 피해 급박하게 도망 다녀야 했음에도 이런 환난을 참고 견디면 구원이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간직하고, 견뎌냅니다. 진정한 종말의 때는 아들의 권한이 아니기에 아무도 알 수 없으니 끝까지 깨어 조심하는 자세를 견지하였습니다.

지난 10월에는 정의평화를 위한 기독인 연대가 주최하는 제 11기 평신도 아카데미가 “누가 우리의 구원자가 될 것인가?” 라는 주제로 우리교회에서 있었습니다. 그 때 경제분야의 강사로 오신 한성대 김상조 교수는 대선 정국에서 모든 후보가 경제민주화를 말하면서 각종 공약을 얘기하지만 그 누구도 믿지 말라는 얘기를 하였습니다. 경제 민주화는 대선정국에서 남발되는 선명성이 짙은 구호로만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세계경제의 위기 속에서 진정한 경제 민주화가 되려면 결국은 국민 한명 한명의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래서 희망은 대선 후보나 캠프의 공약보다도 국민들에게 있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구원자가 저기 있다.” “내가 그리스도다.” 하는 사람들에게 속지 말라는 마르코 복음서의 경고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마르코 공동체가 이 환난을 인내하면서 깨어 정신을 차리는 것이 가능했던 것은 스승 되시는 예수가 그들에게 복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평화를 가져온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이 복음이 아니라 예수가 복음이며 그들의 스승이었기 때문입니다. 마르코 공동체는 예수의 제자로써 예수를 따르려는 신앙을 견지합니다. 이들은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공회 앞에 선 것처럼(9절) 예수께서도 공회 앞에 서셨고(14:55; 15:1), 우리가 공회와 죽음에 넘겨진 것처럼(19, 11, 12절) 예수께서 공회와 죽음에 넘겨지셨다.(14:44, 65; 15:1, 15) 우리가 매 맞은 것처럼(9절) 예수도 매를 맞으시고(14:65), 우리가 담대히 증거한 것처럼(11절) 예수도 자신을 증거하신다(14:58-65). 우리가 가족들로부터 배신당한 것처럼(13절) 예수도 자신의 제자들로부터 배신을 당하시고(14:46), 우리가 주위의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듯이(13절 앞부분) 예수께서도 주위의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다(15:20-32). 예수께서 끝까지 견디셔서 마침내 하느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으셨듯이(14-16장), 그리스도인들이 끝까지 견디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13절 뒷부분).”

[휘장을 뚫고 새로운 살 길을 열어 주시는 예수를 따라]

히브리서 저자는 고백합니다. 예수께서는 휘장을 뚫고 새로운 살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신 분이라고. 그 분 덕분에 우리의 나쁜 마음씨가 없어지고, 우리의 몸이 깨끗해졌다고. 한나는 자신의 어려움을 하느님 앞으로 들고 나갑니다. 마르코는 예수의 삶과 활동을 하나의 모델로 삼고 그것을 따릅니다. 이런 행위들이 그들에게 삶의 위기를 극복하는 계기를 마련해 줍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에 속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어려움을 극복했던 방식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불리는 교회도 유한성을 지닌 사람들의 모임이기에 여러 가지 내외적 상황에 따라 위기가 찾아옵니다. 새로운 공동체가 생기기도 하지만, 오랜 전통의 역사를 가진 교회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 있습니다. 질적 양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하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늘 어려움에 시달리는 교회도 있고, 침체를 거듭하다가 한 명 한 명 교회를 떠나고 해체되기도 합니다. 교회에 위기가 닥쳐 올 때, 서로 한 마음이 되면 좋은데 그것도 쉽지 많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인들 한명 한명은 다양한 믿음의 색깔과 삶의 경험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히브리서의 말씀대로 서로 격려해서 사랑과 좋은 일을 하도록 마음을 써야 하지만, 그게 말대로 그리 쉬운 것은 아닙니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교사들이 가평에서 수련회를 하면서 교사교육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제 “교사들의 자기 이해” 시간에 했던 워크샵의 결과물입니다. 내향적인 사람들과 외향적인 사람들을 서로 나누고 각자 상대방의 단점과 자신들의 장점을 써 보라고 하였습니다. 외향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신들의 장점은 “활발하다.”, “즐겁고 신나고 낙천적이고 재미있다.”, “솔직하고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폭이 넓고, 뒤끝이 없다.” 등등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내향적인 사람들이 본 외향적인 사람들의 단점은 이런 것들이 나왔습니다. “입만 살았다.”, “실속 없다.”, “즉흥적이다.”, “정신 사납다.” “잘난 척 한다.”, “오지랖이 넓고 참견이 심하다.” 등등. 자신들이 생각한 장점들이 타인이 보기에는 이러한 단점들로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고 그 사람의 진면목과 달리 자신이 가진 성향에 따라 다른 이를 판단하기 쉽습니다.

또 다시 두 편으로 나눠서 각 모둠에게 2천만원의 돈을 주고 3박4일의 여행을 한다면 어떻게 할지 계획을 세워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계획을 세우시겠습니까? 이것은 판단형(Judging)의 사람들이 모인 모둠에서 세운 계획서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이러 사람들은 분명한 목적과 방향이 있으며 기한을 엄수하고 철저히 사전 준비를 하지요. 그럼 다른 한 쪽을 볼까요? 이 쪽은 인식형(Perceiving)의 사람들었습니다. 보시면 바로 아시겠지요. 크루즈 배 한 대를 빌리고, 요리사만 구하고 나면 끝입니다. 우리는 서로 이렇게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히브리서 저자가 우리에게 충고한 대로 자주 모여야 합니다(25절). 나에게는 없어서 미처 내가 인식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 내 방식대로 상대방을 재단했던 것을 깨닫고 상대방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알아가야 합니다. 자주 모여 만나지 않기 때문에 소문만 무성하고, 그 소문에 억측이 더해져서 기분만 상하는 일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확인해도 각자 다른 성향과 경험과 해석 때문에 차이가 생기는 법인데, 소문으로 사람이나 사건을 판단해서 되겠습니까? 모여서는 서로 격려해서 사랑과 좋은 일을 하도록 마음을 써야 합니다(24절). 나의 장점으로 상대방의 단점을 보완하고, 상대방의 탁월한 점으로 나의 부족한 점을 채워가서 더 큰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제가 이 자리에서 아무리 강조한다고 해서 말대로 되지는 않지요. 삶이 말로 다 되는 것이 아니고, 또 다양한 생각과 주장과 경험들이 부딪히면서 생긴 마음의 상처와 생채기는 쉽게 아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히브리서 저자는 확고한 믿음과 진실한 마음가짐으로 하느님께로 가까이 나아가자고 청합니다. 우리에게 약속을 주신 분은 진실한 분이시니 우리가 고백하는 그 희망을 굳게 간직하자고 합니다(23절). 한나가 했던 일이고 마르코 공동체 또한 했던 일이지요.

[희망인 예수를 바라보고 한 걸음 나아가자]

희망은 어디에서 옵니까? 희망은 미래로부터 옵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으로부터 생깁니다. 그것은 진실한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시간들을 보내면서도 의연한 자태를 보여주었던, 자기를 베고 찍고 상처를 내는 자들을 향해서도 향기를 발하는 향나무와 같은, 남들이라면 몰락을 발견하게 될 자리에서 행복을 느끼고, 극기가 즐거움이 되며, 십자가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보았던, 히브리서 저자에 의하면 단 한번의 죽음으로 모든 죄를 영원히 없앴던 예수에게서 옵니다. 희망은 여러분 자신의 경험에서, 여러분의 머리 속에서, 여러분의 마음의 성찰 속에서 이 모두를 아우르는 여러분의 과거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가슴에 손을 얹고 진정으로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겪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한나와 같이, 마르코 공동체와 같이 히브리서 저자와 같이 하느님 앞으로 나아갔던 적이 있는가? 아니면 나의 모든 지식과 경험과 판단을 동원해서 그 문제를 풀려고 했던가? 우리 마음 속까지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 앞에 나를 내어 놓았던가? 한나는 사무엘을 하느님께 바침으로써 아이를 낳지 못하던 그 상태 즉 아이를 갖지 못하던 이전의 상태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께 나아감으로써 자신이 겪은 슬픔에서 헤어 나올 수 있었습니다. 마르코는 예수를 따름으로써 성전이 무너지는, 다시 말해 세계가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정신을 차리고 인내하며 새로운 세계를 다시 꿈꿀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감으로써 영원의 자리에서 오늘을 살필 수 있었습니다(12, 14절).

자! 이제 우리도 나를 얽매는 과거에서 떠나, 미래로부터 희망의 약속으로 오시는 하느님께 나아갑시다. 그 약속을 믿고 향린교회를 위하여, 이 사회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사랑을 나누고 좋은 일을 해 봅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고 하느님은 우리를 통하여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실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파송사]

평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예수께서는 휘장을 뚫고 새로운 살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십니다.

그러니 확고한 믿음과 진실한 마음가짐으로

하느님께 가까이 나갑시다.

우리가 고백하는 희망을 굳게 간직하고

서로 격려해서 사랑과 좋은 일을 합시다.

자주 모입시다. 그래서 더 큰 우리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