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말

삼하 23:1-7; 묵시록 1:4-8; 요한 18:33-37

 

오늘은 세상 달력에 의하면 11월의 마지막 주일이지만, 교회력에 따르면 한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지키는 신앙의 달력은 세상의 한해와 시간의 길이는 같지만, 그 중심에 예수님을 두고 있기에 11일에 새해가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탄생 곧 성탄절을 기다리는 대림절 첫 주일이 첫날이 되기 때문입니다. 올해는 122일이 새해를 여는 첫 주일이 됩니다. 이 첫 주일을 향린교회에서는 여러 해 전부터 아기 예수를 품었던 어머니 마리아를 생각하며 여성목회자나 여성신학자를 초청하여 말씀을 듣고 성례를 행하는 전통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의 카이로스]

 

복음서가 기록된 헬라어에는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이라는 세상 시간과 때의 임박이라고 하는 하늘의 부름을 듣는 시간을 구분하여 씁니다. 세상 시간을 말하는 물량적 시간을 뜻하는 단어는 크로노스입니다. 여기서 영어 단어의 달력을 뜻하는 calendar 라는 단어의 어원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늘의 부름을 깨닫는 질적 시간을 뜻하는 헬라어는 무엇이지요? kairos입니다. 흔히 우리말 번역으로는 위기라고 번역합니다만, 위기도 위험하다는 뜻과 기회라는 뜻이 함께 포함되어 있듯이, 이는 하느님이 인간의 실존을 뒤흔드는 자기 성찰의 시간입니다만, 인간은 이 카이로스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립하는 깨어 있는 현존(現存)이 되든지 아니면 정말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는 상실의 실존(失存)이 되든지 하는 것입니다. ‘때가 찼다,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에서 그 때를 지금으로 인식하고 다가왔다를 여기로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때는 또 올 것이다, ‘다가왔다아직은 여유가 있다로 해석하고 결단을 미루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며 개인이 담당해야 하는 책임의 영역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래서 모두 인생의 마지막 말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무엘하의 본문은 다윗이 죽음을 앞두고 남긴 유언의 말이고,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빌라도 총독과 얘기를 주고받는 이야기이고, 요한묵시록은 성서 맨 마지막 책으로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어 죽음을 앞두고 이 세계의 마지막을 그리는 일종의 긴 유언입니다. 사무엘서는 사무엘의 어머니가 되는 한나의 얘기로 시작하고 있고, 처음 몇 장은 사무엘 예언자와 사울 왕이 잠시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이 책의 중심 인물은 다윗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울왕과 다윗왕에 대한 성서의 기록이 너무 다른 것에 대해 놀랍니다. 이 책에서는 사울왕은 처음 왕으로 부름 받았을 때의 겸손한 모습과는 달리 하느님의 뜻에 거역하고 권력 욕망에 집착하는 세속의 인간, 악령에 사로잡힌 반 야훼의 인간으로 묘사됩니다. 하기 싫다는 사람 억지로 불러내어 왕으로 앉혀 놓고, 밑에서 흔들어대는 것은 무엇인가? 하고 약간의 불만을 갖습니다만, 이 이스라엘 역사를 기술한 후대의 사가들이 다윗의 편을 드는 남 왕국 출신들임을 알게 되면, 북쪽 출신의 사울을 좋지 않게 설명하는 저의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도 남북이 갈려 있어 천안함이나 연평도 같은 사건에 대한 서로의 시각이 완전히 반대가 되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성서 역사 이야기를 통해 볼 때, 역사 평가에 대한 시각의 차이는 앞으로 우리나라가 통일이 된 이후 천년 이천년의 세월이 흘러간다 하더라도 결코 끝나지 않을 일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같은 이념과 경제와 정치 체제의 한 정부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백성들이라 하더라도 전라도 사람들과 경상도 사람들의 차이가 큰 것을 이해한다면 이념과 체제가 전연 다른 남과 북의 차이라고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다만 성서 독자인 우리들이 보다 깊은 신학적 이해를 통해 신앙과 이념을 구별할 줄 아는 비판적 안목이 중요하듯이, 신문에 났다고 다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배후를 뚫는 시대적 통찰력을 갖는 일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성서 또한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이 인간 역사와 사회의 산물이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는 책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하느님의 말씀이란 바로 이러한 성서의 문자를 넘어서서 단어와 단어, 행간과 행간, 책과 책, 1성서와 2성서를 관통하는 구원의 큰 물줄기를 말하는 것이지, 성구 한 구절 혹은 한 사건의 이야기를 두고 한 말이 아닌 것입니다.

 

다윗의 일생을 총 정리한 오늘의 본문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남긴 마지막 말이다. 야곱의 하느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자요, 이스라엘의 수호자가 귀여워하시는 자, 이새의 아들 다윗의 말이다. 야훼께서 나에게 영감을 주시고 당신의 말씀을 내 혀에 담아주셨다. 백성을 정의로 다스리는 자가 곧 하느님을 두려운 줄 알고 왕 노릇할 자이다. 그렇게 할 때에 대대로 이어지는 나의 왕실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 두려운 줄 모르는 자들은 버림을 받을 것이다.” ‘야훼께서 나에게 영감을 주시고 당신의 말씀을 내 혀에 담아주셨다는 이 표현은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혀 하늘의 말을 선포할 때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너무 지나칩니다. 후대의 역사가가 다윗의 왕조가 영원할 것이라는 신학적 해석이 가미된 유언이지, 다윗 자신의 유언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수많은 정치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가 저지른 잘못이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충성스런 부하 우리야 장군이 전쟁터에 나가 싸울 때에 그는 그의 아내와 간통을 했고 이를 감추기 위해 그를 전쟁터에서 홀로 보내 죽게 만들고 결국은 그의 아내 밧세바를 자신이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로인해 그 둘 사이에 태어난 첫 아들은 태어나자마자 죽었습니다. 그 이후 부전자전이라고 결국 그의 배다른 아들들은 권력의 쟁투 속에서 모두 살해당했고, 아들 압살롬은 아버지의 권력을 탐내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그래 한 밤중에 그는 맨발로 궁에서 쫓겨 가야 했던 아픔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참회와 회개라는 신앙의 눈으로 본다면 그의 유언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만, 역사의 눈으로 본다면, 그의 말을 그대로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윗과 오늘의 이스라엘]

 

다만 그가 후손들에게 남기고자 했던 백성을 정의로 다스리는 자가 곧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자이고 이렇게 할 때만이 그 왕실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라는 유언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과연 정의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할 때, 이 또한 사람에 따라 전연 다른 답변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남북이 대립하고 있는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세계 안에서 가장 위험한 분쟁 지역은 팔레스타인입니다. 다행히 지난 일주일간의 가자지역의 전투가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낳고 휴전으로 멈추어지긴 했습니다만, 팔레스타인 문제는 시한폭탄과 같아 언제 다시 터질지 모릅니다.

 

유럽 전역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성서를 근거로 자기네 조상들이 살았던 땅이라고 하여 2차 세계대전 직후 혼란의 틈을 타 영국과 미국의 힘을 빌려 무려 2천년동안 대대로 살아온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내어 쫓고 나라를 만들어 살고 있으니 거기에 어떤 해결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한쪽이 다른 한쪽을 완전히 몰아내는 일은 종족 학살밖에 없는데, 그러한 야만을 저지를 수는 없으니 이제는 싫든 좋든 양쪽이 함께 손잡고 함께 살을 맞대고 살아가야하는 일은 하늘의 명령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한 연못에 한 마리의 물고기가 죽어 썩게 되면 다른 물고기가 살지 못하듯이 양쪽이 함께 죽는 것은 세상의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38선이 동양의 대륙세력과 서양의 해양세력이 맞부딪히는 긴장의 경계선을 만들듯이, 팔레스타인의 가자나 서안지구 또한 유럽의 기독교세력과 중동의 이슬람세력이 맞부딪히는 긴장의 경계선이 되어 있습니다. 38 철책선과 팔레스타인 장벽은 바로 지구라는 땅덩어리를 탱탱하게 긴장하게 만들고 분열시키는 두 개의 원점입니다.

 

[한반도와 팔레스타인]

 

며칠 전 팔레스타인의 문제를 다룬 기록영화를 보았습니다. 베를린 필하모닉과 시카고 심포니의 지휘자를 역임한 이스라엘 출신의 다니엘 바렌보임과 팔레스타인 출신의 세계적 석학인 에드워드 사이드가 협력하여 시리아 요르단 등의 출신의 젊은 음악가들과 이스라엘 출신의 젊은 음악가들을 반반 섞어 웨스트이스턴 디반 교향악단을 만들어 세계를 다니며 연주하는 이야기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단원들이 갈등과 오해를 조금씩 극복해가면서 인류애를 실천하고 수준 높은 음악을 창조해내는 매우 감동적인 실화입니다.

 

사실 우리는 팔레스타인의 현실에 대해 정확하게 모를 때가 많습니다. 아무리 명동과 남이섬을 다녀간 외국인 관광객이 올해 천만을 넘어 섰다 해도 철책선을 다녀오고 북쪽을 가서 저들의 실상을 눈으로 보고 저들의 얘기를 직접 들어보지 않는 한 남북의 분단 현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듯이 우리가 아무리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온다 하더라도 그곳의 실상은 누군가가 정확히 말해주지 않는 한 알 수가 없습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도 우리나라와 같이 철조망과 장벽에 둘러 싸여 있어 서로에 대한 정보나 신뢰가 전연 없습니다.

 

한쪽은 미국을 배경으로 한 핵과 미사일과 전투기로 무장한 무자비한 식민지 지배자로 다른 한쪽은 박격포와 자살 폭탄자라는 테러리스트로 서로를 바라보는 이 현실은 우리의 현실과 하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남과 북에 있는 사람이 정부의 허락 없이 연락이라도 하는 날에는 국가보안법에 걸려 처형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 또한 그러합니다. 우리는 최소한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에 속해 있는 요르단 강 서안지구에 있는 도시들은 그 안에서 서로 오고가는 일이 쉬울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은 이스라엘 군대가 이 도시들을 갈기갈기 찢어놓았습니다. 예를 들면 현재 수도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라말라라는 도시에서 남쪽으로 약 60킬로 떨어진 헤브론이라고 하는 도시로 팔레스타인 사람이 여행을 하고자 할 때, 그가 통과해야 하는 이스라엘 검문소가 무려 736개나 되고 45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9시간이 걸립니다. 자가용이 없는 사람은 11번의 버스를 갈아타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아마 2,3일이 걸리겠지요.

 

저도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바렌보임을 뛰어난 지휘자로만 알았는데, 이 영화를 보면서 그의 평화를 위한 용기와 담대함에 대해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평화활동으로 인해 이스라엘 정부가 후원하는 울프상을 받게 되는데, 문화부장관을 비롯한 정부 각료들이 여럿 출석한 자리에서 그는 수상의 소감을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1952년 이스라엘이 독립한지 네 돌이 되던 1952년 열 살의 나이로 부모님을 따라 예루살렘에 이주하였습니다. 독립선언문에는 이스라엘의 건국이념이 나타나 있는데, 거기에는 자유와 정의 복지 실현을 위해 신앙 인종 성별에 관계없이 모든 국민에게 평등한 사회적 권리와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고 종교 사상 언어 교육 문화의 자유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선언문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남의 땅을 점령하고 거기에 사는 백성을 힘으로 지배하는 것이 독립선언문의 정신에 부합하는가? 독립이라는 미명하에 다른 사람들의 기본권을 희생하는 것은 정당한 일인가? 우리가 겪은 고난과 박해가 이웃 나라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일에 면죄부를 부여하는 것인가? 이제부터는 지금까지의 군사력에 의존하는 비현실적인 분쟁해결 방식을 버리고 사회정의와 평화에 입각하여 인도주의적인 해결을 찾아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이에 문화부장관이 단상에 올라 수상의 자리를 이용해서 정치적 발언을 하였다고 비난을 하자, 다시금 단상에 오른 바렌보임은 자신은 정치적 발언을 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독립선언문의 정신에 기초한 평화를 얘기한 것 따름이라고 얘기하자 청중들은 둘로 갈라져 한쪽은 야유를 그리고 다른 한쪽은 박수를 칩니다.

 

저는 우리나라라면 특히 이명박 정권하에서는 바렌보임같은 진보적인 인물이 결코 정부가 후원하는 상을 받는 일이 있을 수도 없다는 점에서 이스라엘 정부에 점수를 주지만, 현재 이스라엘 정부가 취하고 있는 군사적 점령 방식은 동물적인 방식입니다. 그런데 이 군사적 점령 방식에 하나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 성서에 나오는 다윗 왕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히브리성서에 등장하는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 메시야는 다름 아닌 다윗과 같은 위대한 왕이 다시 와서 이스라엘을 강대한 제국으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가끔 우리나라도 광개토대왕과 같은 사극을 보노라면 우리나라의 국경선이 그때와 같이 저 멀리 만주 저 북방까지 확대되는 그런 희망을 품기도 하지만, 그러나 지금 그런 일이 이루어지려면 대규모의 살상이 이루어져야 가능하니 이것이 얼마나 허망한 꿈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이 땅의 나라와 하느님 나라]

 

흑백의 이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적을 타도하는 길만이 자신이 살아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합니다. 지금도 광화문에 가 보세요. 여기저기 연평도 사건 2주기를 맞아 북한을 군사적으로 타도하는 길만이 우리가 나아갈 길이라고 주장하는 현수막이 펄럭이고 언론 또한 이를 부추깁니다. 대선을 앞두고 있어 그런지 더욱 열을 내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그런 군사적 대국을 이루는 길이 곧 메시야 왕국의 도래라고 믿고 있었고, 제자들 또한 그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예수께서 왕위에 오르면 누가 오른편에 누가 왼편에 앉을 것인가를 놓고 서로 논쟁하였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 안에 들어가 채찍을 들어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 쫓자 당시 종교권력가들은 이를 핑계 삼아 예수가 정부 전복을 꾀했다고 로마 총독에게 국가반란죄로 고소를 합니다. 이에 빌라도가 심문을 합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인가?” “너는 도대체 무슨 일을 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 만일 내 왕국이 이 세상 것이라면 내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다인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했을 것이다. 내 왕국은 결코 이 세상 것이 아니다.” ‘내 왕국은 결코 이 세상 것이 아니다라는 말에서 신앙의 오해가 일어납니다. 예수께서 꿈꾸시는 하느님의 나라는 이 세상, 이 우주 너머 저 멀리 이 세상과 전연 관련이 없는 그런 나라를 말하는구나 하는 오해입니다. 그래서 쉽게 나오는 말이 예수 천당 불신 지옥입니다. 여러분은 내 왕국이 이 세상 것이 아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기도할 때에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게 하시며, 하늘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하라고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의 나라와는 다르지만,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곳은 다름 아닌 이 땅,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세상 안의 일임을 분명히 밝힌 것입니다.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 라는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과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오게 해 주십시오라는 예수님의 말씀과는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내 왕국은 결코 이 세상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지, ‘내 왕국은 이 세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이 세상 것이라고 말하는 의미는 세상적 방식, 세상적 통치 질서나 가치 혹은 이념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세상은 당시의 로마제국을 말하는 것이고, 그래서 이 세상 것이란 빌라도가 믿고 있는바 세상 평화는 로마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강력한 군사력에서 나온다고 철혈통치 방식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로마제국에 대한 거부였지, 세상에 대한 거부는 아니셨습니다. 요한복음은 분명 맨 처음부터 하느님과 함께 하셨던 진리의 로고스는 인간 구원을 위해 세상 안으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다고 말하고, 하느님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고 전제를 내렸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추구하신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나라는 이 세상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는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 진리 편에 선 사람은 내 말을 귀담아듣는다.’ 는 매우 모호한 말씀으로 답변하십니다. 그래 오늘 본문에는 이 구절이 빠졌습니다만, 빌라도는 이 얘기를 듣자 진리가 무엇이냐?’ 라는 질문을 던지고 예수는 이에 침묵합니다. 그러나 당시 요한복음을 담지하고 있었던 그 공동체 구성원들은 이 답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 답은 요한복음 146절에서 이미 선포되었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느님께로 갈 자가 없다.”

 

[, 진리, 생명]

 

우리 또한 빌라도처럼 진리가 무엇인가를 묻습니다. 대체로 진리를 우리는 하나의 참다운 이치 혹은 깨달음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나는 진리이다라고 하셨지, ‘내 하는 말이 진리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진리는 삶 그 자체입니다. 예수 안에 거하는 삶이 곧 진리입니다. 예수를 믿고 예수를 따라 그와 함께 행동하는 것 그것이 진리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 그분의 말 한마디의 뜻을 이해하는 것 그건 진리가 아닙니다. 다만 진리를 향한 하나의 시작일 따름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건 그건 신앙이 아니고 십자가를 질 때에 참 신앙이듯이 예수를 믿고 예수를 따라 행동하는 것 그것이 진리입니다. 생명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은 오래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길 또한 걷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어떻게 살고, 어디를 향해, 누구와 함께 걷는가가 중요합니다. 예수와 함께 걷는 삶, 예수와 함께 사랑과 용서와 긍휼로 가득 찬 그런 세계를 이루는 일 자체가 생명이요, 길이요, 진리인 것입니다. 빌라도는 이를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예수와 반대편이 되는 로마 제국의 가치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는 진리에 대한 또 하나의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진리를 안다는 것, 그건 곧 진리를 깨닫는다는 것인데, 그건 곧 자유로움이라는 것입니다.

 

요즘 날씨도 추운데, 철탑에 올라가 저항하는 노동자들이 이곳저곳 계속 생겨나고 있습니다. 울산 현대차 공장에도 평택 쌍용차 공장에도 겨울의 세찬 바람을 맞아가며 14만 볼트가 흐르는 송전탑 30미터 고공에 올라가서 항의를 하고 있습니다. 길거리에서 천막을 치고 농성을 해도 40일을 굶어도 정부도 자본주들이 꿈쩍을 하지 않기에 약자가 택한 길입니다. 법원이 비정규직은 잘못 되었으니 정규직으로 전환하라고 해도, 국정조사를 하라는 국민들의 요구가 있고, 23명의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가족들이 목숨을 끊어도 이 정부는 처음 출발할 때 재벌 편을 들더니 끝까지 재벌과 함께 하겠다는 것입니다. 처음 약속을 저버리지 않고 비리를 저질러도 자기 사람 내치지 않는다 해서 청와대 안에서는 의리 있는 인간으로 말해질지 모르지만, 이건 깡패집단이 취하는 논리이지 자유민주 시민사회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논리입니다. 그는 분명 살아서나 죽어서나 무엇이 이 나라의 지도자로 행동했어야 옳았는지를 분명 깨닫게 될 것입니다. 문이 닫힌 후에 이를 갈고 후회한다고 하는 성서의 구절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닫는 그때가 분명 올 것입니다. 노동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노동자들이 존중받는 사회야 말로 진정 우리가 나아가야 할 일류사회요 경제 민주화가 이루어지는 복지사회입니다.

 

시인 서정흥은 이렇게 읊었습니다.

 

누가 나 대신 들녘에서 땅을 갈고 있습니다.

누가 나 대신 공장에서 옷을 만들고 있습니다.

누가 나 대신 땡볕에서 집을 짓고 있습니다.

누가 나 대신 도로에서 길을 닦고 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한 게 없는데

날마다 구수한 밥을 먹고 ]

날마다 따뜻한 옷을 입고

날마다 편안하게 잠을 자고

날마다 길을 걸어갑니다.

 

누가 나 대신 이른 새벽부터 밤늦도록

때론 밤을 새워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누가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인생의 깨달음이란 다른 게 아닙니다. <‘누가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야 말로 진정한 깨달음입니다. 여기서 이 누가가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 더 나아가서 자신을 헤치고자 하는 적과 원수임을 안다면 그 이상의 생의 깨달음은 없겠습니다.

 

예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길은 함께 걷는 것이고 생명은 함께 나누는 것이며 진리는 함께 사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성서의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신앙의 한해를 마감하는 이 카이로스의 주일에 한 가지를 제안하고자 합니다. 그건 다윗이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말을 남겼듯이, 사도 요한이 로마의 원형경기장 안에서 사자의 밥이 되어 갈기갈기 몸이 찢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가 누구인지를 밝혔듯이, 예수께서 당시의 통치자 빌라도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참 인생인지를 말하였듯이, 여러분 또한 나의 삶이 곧 끝날 것임을 가정하고 마지막 말, 곧 유언장을 써보시기를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물론 저의 비밀 서랍에는 여러분이 쓰신 유언장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미 쓰셨다 할지라도 이 한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대림의 계절에 다시 한 번 써보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죽었다가 다시 살면 모든 세상이 새로워지고 모든 관계 또한 새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유언장 쓰기]

 

우리는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젠가는 갑니다. 오늘 밤일수도 있고, 십년 후일수도 있습니다. 어제도 한 가족이 자동차 사고로 모두 죽었다는 뉴스, 접촉사고로 서로 얘기하던 두 운전사가 이를 보지 못한 고속버스에 치여 모두 사망한 뉴스를 들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나일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 인간다움이 아닐까요. 준비 없이 어느 날 그냥 가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흔적을 남기는 일은 중요합니다. 장례식장에서 말씀을 인도할 때마다 아쉽습니다. 자식들은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그 자리에 모인 하객들에게 들려주는 말은 왜 남기지 않았을까? 왜 장례를 주례하는 목사에게 목사님 이 말을 전해주세요.’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지 않았을까? 장례식장에서의 유언 한마디는 설교 백번과 같은 효력을 갖기에 하는 말입니다.

 

유언장을 길게 쓸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가가 아닌 누구를 위하여 살아 왔는지를 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질구레한 기억들을 남길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하느님이 어떻게 관여하였는지를 말하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주로 감사의 얘기가 되겠지요. 물론 필요하다면 용서를 구하고 참회의 얘기도 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향린교인들의 장례식장의 자리가 좀 더 풍성해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냥 왔다가는 크로노스의 장소가 아니라, 사람의 변화가 일어나는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 만나 포옹하는 카이로스의 자리가 되기를 고대합니다. 그러려면 여러분이 유언장을 작성해서 목회자에게 맡겨놓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장례식장은 기쁨과 눈물이 있는 부활의 증언이 살아 있는 천국으로 변할 것입니다.

 

나가는 길에 죽음을 준비하는 명상의 글과 유언장을 한부씩 받아 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다가오는 대림절을 통해 진정 살아있는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유언장을 작성하셔서 헌금함에 넣어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써야 할지 전연 감을 잡기 힘드신 분은 아예 세 가지 은혜라고 제목을 써놓고 글을 써보시기 바랍니다.

 

일본의 전자제품 회사인 내셔날사를 창립하여 세계적인 부호가 되었던 마쯔시타 고노스테라는 분이 94세의 고령일 때 그 회사의 직원과 이런 대화를 나눕니다 회장님은 어떻게 하여 이처럼 크게 성공하셨습니까?” 마쯔시타가 말하길 나는 세 가지 하늘의 은혜를 입고 태어났다네. 가난 속에 태어났기 때문에 부지런히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고, 약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건강의 소중함도 일찍이 깨달아 지금 아흔이 넘었어도 겨울철 냉수마찰을 한다네. 또 초등학교 4학년까지밖에 공부하지 못하고 중퇴했기 때문에 항상 모든 사람들을 나의 스승으로 받들어 배우는데 노력하여 많은 지식과 상식을 얻었다네. 불행한 환경이 나를 이만큼 성장시켜주었다고 생각되어 늘 감사하고 있다네.”

 

행복을 누리려면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감사할 것이 없으면 찾아서라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요즘 삶이 팍팍하다고 여기시나요? 그렇다면 유언장을 써보시기 바랍니다. 송명희 자매는 중증 뇌성마비로 온 몸이 뒤틀리고 입이 뒤틀려 있어 알아듣기 힘든 말로 이렇게 자신의 삶을 노래합니다.

 

나 남이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누군가 그에게 미국에 가서 치료를 받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지만, 하느님이 주신 이대로가 좋다고 답을 할 만큼 그는 하느님의 사람이요 진리 안의 자유인이었습니다. 멋들어진 말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주위의 분들에게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와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느님의 딸과 아들로 누렸던 기쁨에 대해 한마디를 남겨주시면 그게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큰 위로와 힘이 되는 것입니다. 자녀손들이 잘되기를 원한다면 한마디를 남겨주세요. 못된 청개구리도 유언은 지킨다잖아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가르쳐 주시고 떠나는 것이 인간의 도리가 아닐까요.

 

끝으로 <죽음을 예비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느님의 나라가 저희 것이니라>는 죽음의 향린 묵상집 처음에 실려 있는 톨스토이의 글을 읽어드립니다.

 

죽음을 떠올린다는 것은 곧,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 죽음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항상 의식하면서, 조용히, 기쁘게 살아가야 한다.

 

죽음을 완전히 잊은 생활과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 죽음을 의식하는 생활 사이에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우리의 삶이 육체적 분야에서 정신적 분야로 이행하면 할수록 죽음은 점점 두렵지 않게 된다. 완전히 정신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죽음의 공포 따위는 있을 수 없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