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시편 25,1-10 ; 예레 33,14-16 ; 1데살 3,9-13; 마태 4,1-11

배 현 주 목사

반갑습니다. 우리 사회의 중요한 도전들과 늘 씨름하면서 귀한 신앙적 응답을 하시는 향린교회에서 오늘 주님의 말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 기쁘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 기현상 중의 하나가, 교회생활에 열심일수록 사회에 대한 관심과 의식 수준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기현상이 난무하는 시대에, 우리 사회의 문제에 대한 관심과 참여를 통해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자 노력하시는 향린교회가 더욱 힘을 얻으실 수 있기를, 그리고 샘솟는 기쁨과 뜨거운 사명감으로 신앙의 여정을 힘차게 지속하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사회는 20세기 후반부 산업화, 민주화 시대를 거쳐서 지금 무한경쟁의 세계화시대에 진입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세계화가 이루어지면, 그리고 돈을 버는 방식을 불문하고 일단 경제 강국만 되면 모두가 잘사는 선진국가가 되는 듯한 화려한 구호가 난무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는 속에 내일의 주인이 되어야 할 청년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삶의 무의미함과 무력함에 빠져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신빈곤 시대라는 용어가 우리에게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전통적 빈곤이 노인, 아동, 장애자 등 사회적 노동을 전적으로 할 수 없는 계층과 관련된 현상이라면, 신빈곤계층은 노동을 할 능력과 의사가 있지만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청년실업층, 일을 하고 있지만 열악한 노동조건 때문에 소득이 빈곤선에 머무는 저소득노동층, 미래를 예측하고 계획할 수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들로 주로 구성되고 있습니다. 요즘 돈이 없어서 결혼도 연애도 못하겠다는 청년들 이야기도 들립니다. 참 안타깝고 서글픈 우리 시대의 자화상입니다.

다음 세대들이 풍성한 생명을 누리며 살아갈 권리를 박탈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는 원자력 대국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질주하고 있습니다. 마치 원전이 없어지고 탈핵사회가 도래하면 동굴로 복귀해서 촛불을 켜고 살아야 되는 것이 아니냐는 막연한 두려움이 만연해있습니다. 심지어 후쿠시마 사태 이후에도 우리 사회에는 ‘우리 원전은 안전하다’는 근거없는 확신과 기술만능주의가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세계 최고의 핵발전소 밀집도의 국가이고, 그 간 국내 핵발전소에서 그동안 발생했던 사고와 안전 문제들은 큰 사고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들이었다는 사실이 이제 점차 알려지고 있습니다. 내년 WCC 개최장소인 부산 벡스코도 고리원전에서 30 Km 반경 내에 있습니다. 지난 5월 국회에서 발표된 고리/영광원전 사고피해 모의실험 결과에 의하면 고리원전 사고시 부산으로 바람이 부는 경우를 가정했을 경우, 급성사망이 최대 4만 8천여명, 암사망은 85만명까지 발생할 수 있으며, 경제적 피해액은 최고 628조까지 증가한다고 합니다. 땅 덩어리가 좁은 한국입니다. 어디서건 한번 사고가 나면 원전에서 멀다고 하는 수도권 역시 피폭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핵발전소 산업의 현황을 지켜보면 누구나 착잡한 심정이 될 것입니다. 세계에 소문이 날 정도로 자녀들의 교육에 열을 올리면서, 동시에 100만년 방사선을 내뿜을 핵폐기물을 유산으로 남겨준다는 것은 얼마나 자가당착입니까? 너도나도 기후변화를 염려하는 시대에 정부가 표방하는 ‘저탄소 녹색성장’의 주요정책이 기후변화의 대안이 될 수 없는 핵발전이라는 사실, 그리고 핵발전이 값싸고 청정하고 지속가능하며 안전한 에너지원이 될 수 없다는 과학자들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2030년까지 핵발전소를 계속 지어서 원자력발전 비중을 59%로 확대하고자 한다는 사실을 얼마나 많은 시민들이 인식하고 있습니까?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원자력 홍보기관인 한국원자력문화재단에 국민의 전기요금 3.7%를 일괄 배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시민들은 알고 있습니까? 이러한 재원을 재생가능 에너지 연구 개발에 투자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지 않겠습니까? 과거에 발생했던 핵발전소의 대형 사고들에 대해서 우리는 숙지하고 있었습니까? 작년 후쿠시마 발전소의 대재난이 한반도에 미친 영향에 관해서조차 시민들은 그 전모를 알 권리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수년에 걸쳐 밀양 주민들이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는 외로운 투쟁을 하다가 올해 초 이치우 어른이 분신자살로 항거하셨는데, 이러한 비극적 죽음이 수도권과 대도시에 전력을 공급하는 시스템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은 자각하고 있습니까? 70대 80대의 할머니들 할아버지들께서 용역들에게 능욕을 당하면서 한 겨울에 산에 오르며 밀양 땅을 죽음의 송전탑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버티고 계신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까. 민주화되었다는 우리 사회에서 핵산업은 비민주적이고 불투명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핵에 관한 한 지금 우리 사회는 계몽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지속가능한 에너지, 생명과 평화의 에너지에 관해서 사회 구성원들의 지혜를 동원한 사회적 성찰과 토론이 필요한데요, 풀뿌리 민주주의가 성장해야 이러한 질 높은 사회적 문화가 정착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국적 기업들이 자유롭게 국경을 넘어 활보하면서 국민경제, 서민경제, 지역경제에 무관하게 이윤을 극대화하는 세계화시대, 그리고 과학기술공학체제(Technocracy), 군산복합체, 성장중독증에 걸린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함께 지속시키는 핵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강도 만나 쓰러진 이웃들의 신음 소리들이 진동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한국교회는 푯대를 잃은 배가 되어버렸습니다. 개교회 성장제일주의, 물량주의, 기복주의, 사사화, 집단이기주의, 그리고 반지성주의 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에서 개인과 사회를 위한 신앙적 비전을 발견하지 못하는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교회의 가부장적인 문화에서 심각한 괴리를 느끼는 이십대 삼십대 젊은 여성들은 아예 교회에 발걸음을 내딛지도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21세기 초반 한국개신교의 상황은 20세기 초반부와 극명하게 대비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기독교는 서구 선교사들의 일방적 선교 이전에 구원과 자유를 갈망하던 한국인에 의해 적극적으로 수용되었습니다. 국운이 쇠망해가던 시기에 국민을 계몽하고 멸망해가는 국가의 정기를 바로 세워보려고 치열하게 싸웠던 민족 지도자들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1919년 삼일운동의 범민족적 저항에 한국교회가 적극적으로 동참했으며, 민족의 수난에 선구적으로 동참하는 기독교인들을 보고 교세가 늘어나기 시작하였던 것도 역사의 한 사실로 남아 있습니다. 한국의 초기 기독교인들은 식민지의 고난 속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믿었습니다. 소망할 것이 하나 없어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정의를 소망하며 믿었습니다. 그리고 믿는 대로 살았습니다. 이런 기독교인들을 바라보면서 일제하의 백성들은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자포자기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발견하였습니다. 세상과는 차원이 다른 가치관을 지니고 신앙을 실천하고 살면서 동시에 민족의 정기를 드높이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교회 다니는 사람은 보증수표, 무조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회적 인정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삼일운동의 유관순 같은 인물이야말로 20세기 초반부 한국기독교의 정신을 대변하는 상징적 인물일 것입니다.

고난과 수난의 시대에 민족의 정신적 지도력으로 부상하였던 한국기독교가, 물질적 풍요의 시대에 사회의 지탄을 받는 집단이 된 것은 안타깝기 그지없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비록 소수였다고 해도 각 시대마다 한국사회의 중심과제와 씨름해온 자랑스러운 기독교인들,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일제 저항기에 ‘민족’을 위해 씨름하였던 거룩한 씨앗들이 있었듯이, 분단시대의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민주,’ ‘인권’ 그리고 ‘통일’을 위해서, 급속 산업화 시대에 ‘민중’을 위해서 헌신하였던 거룩한 씨앗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거룩한 씨앗들이야 말로 한국 기독교의 소중한 정신적 광맥이고, 하나님 나라 운동의 토대가 되는 ‘이 땅의 그루터기’입니다.

오늘날 인류의 최대과제는 그리고 한반도의 중심과제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그런 점에서 생명과 평화를 추구하는 각종 NGO 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기독교인들, 사회의 약자들과 장애인들과 이주노동자들을 위하여 묵묵히 목회와 선교에 임하는 도시의 교회들과 기독교인들, 그리고 농촌에서 생명농업을 지향하며 교회가 지렛대에 되어서 농촌지역 살리기를 행하는 교회들과 기독교인들은 비록 그 수는 적다고 하더라도 20세기 후반부에 그리고 21세기 초반부에 한국사회의 양심과 정기를 바로 세우는 고독한 작업을 수행함으로써 전래 초기부터 면면히 흘러온 한국기독교의 참된 광맥을 이어주는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삶의 자리가 어디이건 간에 생명과 평화의 문제를 자신의 과제로 삼고 살아가는 신앙인들은 21세기에 한국 기독교의 소중한 정신의 광맥을 이어가는 거룩한 씨앗들이고, 우리 시대에 변함없이 하나님 나라운동의 토대가 되는 ‘이 땅의 그루터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생명과 평화를 일구는 교회”로 표어를 삼으시고 신앙생활 하시는 향린교회 교우 여러분들도 ‘이 땅의 그루터기’로 살고 싶어 하시는 분들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슴이 시냇물을 목말라 찾듯이 하나님 나라의 생명과 평화와 정의를 갈급해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내면적 과제가 있습니다. 죽음과 폭력과 불의의 시대에 생명과 평화와 정의를 추구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저항의 행위입니다. 저항은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합니다. 바다에 무감각하게 둥둥 떠 있는 죽은 고래는 덩치만 크지 그 속에는 생명의 힘이 없습니다. 거센 물살을 헤치며 거슬러 올라가는 날쌘 송사리의 작은 몸체에는 엄청난 생명력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이런 힘이 있습니까? 어디에서 이런 에너지를 찾을 수 있습니까? 세상의 정세와 권세와 맞대결하고 충돌하는 것은 사람을 기진맥진하게 합니다. 욕하면서 닮아가게끔 우리를 유혹합니다. 우리는 무슨 힘으로 이 세상을 본받지 않으면서 마음을 늘 새롭게 하여(롬 12:2) 생명과 평화와 정의를 위해서 싸울 것입니까? 아무런 힘도 남아있지 않은 것 같은 기진맥진의 상태에서 도대체 사람을 살게 하는 에너지, 사람을 살게 하는 힘은 무엇입니까? 결국 이 질문을 문학적으로 가다듬으면 톨스토이 단편집의 제목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로 정리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께서 사십 주야를 단식하시고 나서 몹시 시장하였을 때에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시는 이야기입니다. 기진맥진해있는 상태에 있으면서도, 물질의 유혹, 기적의 유혹, 권력의 유혹을 단번에 힘있게 물리치시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광야의 유혹 이야기를 읽으면 요한복음 4장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제자들이 잡수시라고 음식을 권하자, 평소에 ‘먹고 마시는 자’라는 별명까지 지니신 예수께서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양식이 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내 양식이다”(요 4:32, 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 자체가 본인에게 힘을 주는 에너지라고 설명하셨습니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고 하는데요, 얼마나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목말라 했으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과정 자체가 양식이 되겠습니까. 예수는 그 기쁨과 그 힘으로 살았습니다. 초대교회는 예수가 공생애 기간 사탄과 싸울 수 있는 힘과 에너지를 이미 가지고 계셨던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 힘을 공생애 직전 광야에서 이미 입증하셨다고 기억하였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예수와 같은 경지, 예수와 같은 내공을 갖추지 못한 자신들의 상황을 겸허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배신자들이 속출하기도 하였습니다. 신약성서의 서신들은 초대교회가 세상과 싸워 이기며 신앙의 경주를 할 수 있는 힘을 키울 수 있도록 지도자들이 영적인 훈련을 권면하고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우리들은 세계화된 21세기를 살아가면서 산 넘어 더 높은 산을 만나듯이 더 크고 깊은 구조적 억압의 상황과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한반도의 신앙인들인 우리들이 우리 땅의 그리고 세계적 차원의 권사와 정세들에 대해서 계속하여 저항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의 원천을 초대 교회의 모델에 비추어서 세 가지 정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1. 감사의 힘

초대교회는 시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적 시각을 지니고 있었으면서도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며 “사람들이 태평세월을 노래하고 있을 때에 갑자기 멸망이 들이닥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살전 5:3). 바울은 로마제국의 평화와 안보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냉철한 시각을 지니고 있었으면서도, 이러한 심판을 선언하는 같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 “여러분 중에는 악을 악으로 갚는 사람이 하나도 없도록 하고, 언제나 서로 남에게 선을 행하도록 힘쓰십시오. 또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십시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살전 5:15-19)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좋은 일이 있을 때만이 아니라 모든 일에,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훈련이고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핵심적인 방법입니다. 성서를 보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인물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즐거울 때 찬양하며 고난 속에서도 감사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구약의 하박국 선지자는 흉작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뻐합니다. “비록 무화과는 아니 열리고 포도는 달리지 않고 올리브 농사는 망하고 밭곡식은 나지 않아도 비록 우리에 있던 양떼는 간 데 없고 목장에는 소떼가 보이지 않아도 나는 야훼 안에서 환성을 올리렵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렵니다”(합 3:17-18). 욥은 재산과 자녀를 잃는 큰 상실의 고통 속에서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 가리라. 야훼께서 주셨던 것, 야훼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야훼의 이름을 찬양할지라”고 고백합니다(욥 1:21). 어떻게 이러한 고백이 가능하겠습니까? 이 신앙인들은 기질이 낙천적이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훈련된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놀라운 감사의 자세가 가능했습니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범사에 감사하라)”라는 권면의 말씀 바로 앞에는 “늘 기도하십시오(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이 있고, 바로 뒤에는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라는 말씀이 있는데, 깨어서 쉬지 않고 기도하며 성령의 불을 끄지 않는 신앙의 훈련이야말로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영혼이 자라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 되는 것입니다.

슈바이쩌 박사의 『생명에의 경외』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 내면의 행복이란 우리 경험에 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정도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항상 감사하셨기 때문에 그분은 항상 하나님과 함께 하셨고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을 알았고,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슈바이쩌는 범사에 감사하도록 훈련된 영혼이야말로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파악할 수 있고, 임마누엘 하나님과 항상 동행하는 특권을 누린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유학시절 뉴욕에서 이민교회를 섬길 때 만났던 한 성도를 기억합니다. 그분은 평범한 사회인이었지만 비범한 신앙을 지녔던 분이었습니다. 오랜 이민생활의 고생 끝에 생활이 안정되시자 치명적인 암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심방갈 때마다 감사하다고 하시는 겁니다. 갑자기 세상에서 불러가실 수도 있는데, 인생 정리할 수 있는 여유를 주셔서 감사하고, 하나님을 알고 죽을 수 있어서 감사하고, 아내가 아니라 내가 암에 걸려서 감사하다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산 사람들 위로하고 가셨습니다. 그 성도의 장례식이 추운 겨울날이었지만, 참석한 저희들은 뜨거운 성령을 체험하며 전혀 추운 줄을 몰랐습니다. 저는 개인사와 가족사의 수많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할 줄 아는 신앙인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이 숨겨 놓으신 작은 예수를 만나는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 같은 허영과 교만의 시대에 가장 작은 일에도 감사하고 자족할 줄 아는 신앙인을 만날 때마다, 아무도 혁명을 말하지 않는 이 시대에 혁명적인 인간상을 만나는 느낌을 지니게 됩니다.

러시아 작가 도스또예프스키는 인간을 “감사할 줄 모르는 두 발 달린 동물”이라고 부르며 “이것이 인간에 대한 최고의 정의이다”라는 냉소적인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만, 우리의 마음의 습관은 늘 하나님과의 관계를 닫히게 하는 쪽으로 달려가는 것 같습니다. 범사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의 거룩한 습관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을 열어놓게 하는 버팀목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의 노예주들에게 큰 돈벌이감으로 착취되었던 귀신 들린 여종을 치유하고 자유롭게 한 대가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을 해방시킨 행위로 투옥되었던 것입니다. 그날 밤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찬송은 감사하는 영혼의 행위입니다. 바울의 감사의 행위는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사건을 일으키는 밑거름이 된 것을 성서는 증언합니다(행 16;16-40).

2. 기억의 힘

초대교회는 구약성서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상고하면서 과거 하나님이 일해오신 역사를 늘 기억하며 재해석했습니다. 미래의 평화의 비전은 과거 신실했던 하나님에 대한 기억, 그리고 구름같이 많은 믿음의 선배들, 믿음의 증인들에 대한 기억을 통해서 강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성만찬을 제정하시면서 빵을 뗄 때나 잔을 마실 때나 “나를 기억하라”고 거듭 당부하였습니다(고전 11:23-25). 믿음의 인물들을 쭉 나열해서 ‘믿음장’으로 유명한 히브리서 11장에 연이어 히브리서 12장은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구름처럼 우리를 둘러 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무거운 짐과 우리를 얽어 매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 갑시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봅시다”(히 12:1-2)라는 권면으로 시작합니다. 바라보자는 말은 기억하자는 말과 동의어일 것입니다. 온갖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믿음의 길을 완주한 믿음의 선배들과 주님을 기억하면 지치거나 낙심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히 12:3).

우리 한국기독교는 기억을 통하여 누릴 수 있는 유산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는 2007년 3월 인도네시아 파라팟에서 개최된 아시아기독교협의회(Christian Conference of Asia/CCA)의 50년을 회고하는 희년 행사에 패널토의자로 참석하였습니다. 이 행사에서 가장 감명깊었던 시간은 백발의 노장들이 직접 50년 아시아기독교협의회의 파란만장했던 역사를 회고하는 시간이었습니다. 1955년 반둥회의 직후에 아시아기독교의 문제는 아시아인들이 일차적으로 협의하겠다는 주체적 자세로 아시아기독교 지도자들이 모였을 때, 서구교회 백인지도자들이 난색을 표명하였던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아시아대륙의 기독교협의희는 서구중심주의를 넘어선 최초의 대륙별 에큐메니칼 협의회가 되었습니다. 가장 감동적이었던 것은 한국 기독교인의 신앙을 통해서 50년 아시아교회의 정신을 요약하는 이야기였습니다. 백발이 성성한 뉴질랜드의 론 오그래디(Ron O'Grady) 목사님은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 깊이 관여하셨던 분이신데, 자기의 친구인 김관석 목사님이 군사정권 당시 투옥되었을 때 한참 염려하고 있다가, 석방된 후 반갑게 만난 기회에, 당신같이 부드러운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감옥생활을 버텼느냐고 질문했다고 합니다. 김관석 목사님은 “기도원에 간 것처럼 기도도 하고 성경도 읽고 찬송도 했고 가끔씩 하나님 앞에서 춤도 추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말에서 론 오그래디 목사님은 아시아 전체 교회의 불굴의 정신과 영혼을 요약하는 핵심을 발견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것은 곧 “감옥 속에서 주님을 향하여 덩실덩실 춤을 추는 것”(dancing to the Lord in the prison!)입니다. 이 표현은 정의를 위한 고난 속에서 임마누엘 하나님을 체험하고 기뻐하며 찬양하는 기독교 신앙의 저력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힘은 단지 한 개인의 신앙만이라기보다, 민주화에 투신하였던 한국의 기독교인들 전체의 신앙의 저력의 핵심을 요약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한국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저력에 대한 회상이 50년 아시아기독교의 역사를 회고하는 시간의 클라이막스가 되었던 것입니다. 고난받는 아시아 여러 나라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현장에 있었던 한국 기독교인인 저는 한국교회의 유산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미래에 대한 책임감을 더욱 깊이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성서와 교회사와 세계사가 증언하는 구름같이 많은 믿음의 증인들과 함께, 군사정권으로 인한 폭압의 시대, 아니 그 이전 나라조차도 없던 시대에, 기독교 정신과 복음으로 국내외에서 광야의 삶을 개척해나갔던 믿음의 선배들을 기억하는 일은 21세기형 과제 앞에 서 있는 한국의 신앙인들인 우리들의 혼을 일깨워줍니다.

3. 사랑의 힘/성도의 교제에서 오는 힘

오늘 본문 말씀 중 하나인 살전 3:9-13은 “주님께서 여러분의 사랑을 키워 주시고 풍성하게 해 주셔서 우리가 여러분을 사랑하듯이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고 또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되기를 빕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초기 기독교 운동은 친밀한 대안 가족같이 ‘형제’ ‘자매’라는 호칭으로 서로를 불렀습니다. 동시에 초대교회 운동에는 서로를 ‘친구’로 부르는 전통도 있었습니다. 요한3서의 끝 인사는 “평화가 그대에게 있기를 빕니다. 여기 있는 친구들이 그대에게 문안합니다. 친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요삼 15)로 되어 있습니다. 초대교회 운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신뢰하고 존경하며 사랑하는 신앙의 친구들과 동지들의 운동이었습니다. 바울 서신의 긴 인사목록이나 사도행전의 여행일지 등을 보면 당시 로마제국에 존재하던 각종 인종 출신의 남녀 기독교인들이 잔뜩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서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름만 가지고 그 인물의 배경과 인생에 대해서 추측하고 연구하는 분야도 있는데요, 짧은 시간 동안에 마치 마른 짚단에 불 붙듯이 기독교가 지중해 로마제국 전역에 퍼져나가게 되었던 것은 탁월한 한 두 영웅적 인물의 공헌 때문이라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신앙의 우정을 에너지로 삼아 함께 일하였던 수많은 남녀 기독교인들의 공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앙의 전통에서 우정은 우선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에토스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우정이 점차 민주화되어갔다는 점입니다. 구약에서는 아브라함이나 모세 정도 되어야 “하나님의 친구”로 불리웁니다(약 2:23; 출 33:11). 그런데 외경의 하나인 “솔로몬의 지혜”는 각 세대에서 진정한 지혜를 찾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자격을 부여합니다. “지혜를 얻는 자는 하나님과의 우정을 얻는다”는 말씀이나(7:14), “각 세대에서 지혜는 거룩한 영혼들에게 스며들어 그들로 하나님의 친구들, 예언자들이 되게 한다”는 말씀이 발견됩니다(7:27). 신약성서에 와서는 예수께서 평범한 제자들을 친구라고 불렀습니다(요 15). 하나님과의 우정, 예수와의 우정은 성도들 간의 우정에 거룩한 질과 깊이를 더해 주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는 개인적인 영성적 차원, 사회적인 예언자적 차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코이노니아의 차원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의 교제가 없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혼자서 막지 못할 원수도 둘이서는 막을 수 있다. 삼겹으로 줄을 꼬면 쉽게 끊어지지 않는 법이다”(전 4:12). 주님께서 70인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에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홀로 보내지 않고 두 사람씩 파송하셨던 이유도 선교 현장의 역경을 교제와 우정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도록 배려하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혼자 타는 장작은 바람 불면 쉽게 꺼집니다. 함께 타오를 때 장한 불길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는 주된 이유는 사회 속에서 패거리 문화나 깡패 그룹의 의리는 있지만 성숙한 인격 사이의 향기로운 우정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정이 없는 부부들 사이에서는 이혼률이 높아진다고 하지요. 우정은 신뢰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고 각자가 꾸준히 성장해 나가는 인격체들 가운데서 가능한 선물입니다. 신앙 공동체 내에 있는 사랑의 힘, 우정의 힘, 성도의 교제에서 오는 힘, 코이노니아의 힘은 우리가 생명과 평화와 정의를 향한 선한 싸움을 싸워갈 수 있게 하는 기쁨의 연료가 됩니다. 성도의 교제는 사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힘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뒤를 쫓아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때에 우리가 홀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 함께 기도하고 함께 예배를 보고 함께 식탁교제와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공동체가 있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생명력 있게 피어나는 일에 중요한 거름이 됩니다.

저는 몇 해 전 개인적으로 폭력적 상황을 겪고 절망의 심연에 빠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시편의 탄식시만을 읽으며 집에 누워 있는데, 학생들과 동료들이 찾아 와서 함께 기도하고 대화를 통해 저의 아픔을 나누어 줄 때, 문득 이분들이 저의 고난에 동참해주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의 현존인 것을 깨달았고, 이것이 바로 교회구나, 이것이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몸이구나 하는 감격에 젖는 순간들을 체험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발 디딜 곳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다가 한편으로는 설명할 길 없이 샘솟는 기쁨과 힘을 느끼고는 했습니다.

오늘은 임마누엘 주님의 오심을 기리는 대림절 첫날입니다. 그 옛날 불의와 폭력의 시대에 예레미야는 옥에 갇힌 상황에서 세상에 올바른 정치를 펼 메시야를 갈망했습니다. 유다에 살 길을 열어주고, 예루살렘에서 모두가 마음 놓고 살게 될 새로운 세상을 시작할 메시야를 열망했습니다(렘 33:14-16). 오늘 우리도 생명과 평화를 이 땅 위에 실현할 하나님의 정의로운 정치를 갈망하면서 “생명과 평화를 일구는 교회”에 모여 대림절 예배를 드립니다. 향린교회 교우 여러분들께서 인생의 많은 시련과 우리 사회의 무거운 과제들의 도전 속에서도, 감사의 힘, 기억의 힘, 사랑의 힘, 우정의 힘, 성도의 교제에서 오는 힘, 연대의 힘으로 세상을 넉넉히 이기실 수 있기를, 흔들림 없이 생명과 평화의 사도로 살아가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