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과 광야

말라기 3:1-4; 루가 1:68-79; 필립비 1:3-11; 루가 3:1-6

 

[천국과 지옥]

 

미국에 오랫동안 사는 한인들이 고국을 방문하고 나서 돌아와 이런 말을 곧잘 하였습니다. 미국은 재미없는 천국이고 한국은 재미있는 지옥이다. 자살율 세계 1위 그것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요지부동의 1위 국가라는 점에서 통계상으로 말한다면 어느 나라보다도 지옥에 가까운 나라인 것은 분명합니다. 교육제도를 보더라도 공부를 하고 싶어도 대학등록금 때문에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도 문제이지만, 대학입학을 위해 학생은 물론 부모들까지 몇 년을 엄청난 긴장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경쟁의 현실도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모습입니다, 최근 뉴스를 보니 유치원 입학이 대학입시보다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10대 일의 추첨에서 떨어진 부모님들은 직장을 그만 두어야 한다고 하니 세계 경제력 12, 13위의 국가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교육은 백년대계를 바라보고 나라를 건강하게 만드는 가장 근본 되는 일입니다. 저출산율 세계 1위라는 불명예를 이겨내기 위해 몇 년 전부터 아이 낳으라고 그렇게도 장려하더니만, 이게 무슨 꼴인가요?

 

나라가 너무 작아 별로 소용도 되지 않는 MD 미사일 무기 체제나 성능도 실험되지 않는 미국산 신예 전투기 구입에는 천문학적인 예산을 쓰고, 수만 년 굽이굽이 흘러가는 강을 굳이 직선으로 하고 계속 흘러들어오는 모래로 메꿔지는 강바닥을 긁어내는 일에는 수조원의 돈을 펑펑 쏟아 부으면서도 정작 유치원 몇 십 개를 준비하지 못하는 이 정부의 행정을 보면 정말 분노가 치밉니다.

 

그런데 다른 편으로 보면, 바로 그러한 정치경제 부조리로 인한 사회적 모순이 문화계에는 예측불허의 일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겨울나그네를 시작으로 동남아에 퍼진 한류 열풍, 사이의 셰계적인 말춤 열풍,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를 비롯한 최근에 개봉되는 영화들, 오늘 우리가 보게 되는 MB의 추억이나 26, 남영동 1985년과 같은 역사고발형 영화같은 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참으로 보기 힘든 일입니다. 대선 또한 그렇습니다. 우리나라는 대통령 선거 때마다 예측불허의 일들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올해 맥없이 진행될 뻔한 TV 토론장이 혜성과 같이 등장한 한 진보 여인의 진실 고발과 직설적 화법으로 인해 갑작스레 판세가 흔들리는 모양이 되는 등 이런 일들은 남한사회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스릴 만점의 재미입니다. 23차 대선 TV 토론이 기다려지는 한주간입니다.

 

다카기 마사오‘6억원을 비롯한 그의 입에서 나오는 용어들은 모두 공중파에서는 금지된 용어들로 호, 불호가 분명하게 갈리는 발언들이었습니다. 찬성이냐 반대냐 어느 한쪽의 선택만이 남아 있지, 중간지대를 허용하지 않는 발언들입니다. 성서의 하느님의 말씀은 언제나 우리에게 어느 한쪽을 선택하도록 강권합니다. 양다리 걸치기는 없다고 말합니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보아라, 나는 오늘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너희 앞에 내놓는다. 내가 오늘 내리는 야훼의 명령을 순종하며 야훼를 사랑하고 그가 지시하신 길을 걸으면 너희는 복되게 살며 번성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 마음이 변화하여 순종하지 아니하면 너희는 반드시 망하리라.” 예언자 엘리야는 백성들을 향해 말합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있을 작정입니까? 만일 야훼가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시오.” 예수는 말씀하십니다.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듯이 너희는 야훼 하느님과 맘몬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말라기 예언자의 핵심 주장]

 

오늘 제1성서 본문 말라기는 마지막 책입니다. 흔히 말라기서 하면 떠오르는 구절이 하나 있는데, 목사들은 좋아하고 교인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구절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은 10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열의 하나를 바칠 때, 조금도 덜지 말고 성전 곳간에 가져다 넣어 내 집 양식으로 쓰게 하여라. 그렇게 바치고 나서 내가 하늘 창고의 문을 열고 갚아 주는지 갚아 주지 않는지 두고 보아라.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그런데 하늘 창고의 문에서 나오는 것들이 우리가 바라는 땅에 속한 세상 것들인지 아니면 땅의 것과 구별되는 다른 무엇을 말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고, 또 십일조의 본래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도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십일조를 말하고 있는 이 성서의 앞뒤 구절을 읽어보면 십일조가 핵심이 아니라, 진짜 핵심은 다른 곳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대림에 말씀을 맞추다 보니 4절에서 말씀을 끊었습니다만, 실상 이어지는 5절 말씀에 진짜 핵심이 있습니다. 기다리던 메시야가 와서 어떤 일을 할 것인지를 말해주는 구절입니다. “나는 너희의 재판관으로 나타나 점쟁이와 간음하는 자와 거짓 맹세하는 자, 하늘 두려운 생각없어 날품팔이, 과부, 고아, 뜨내기의 인권을 짓밟는 자들의 죄를 당장에 밝히리라.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날품팔이, 과부, 고아, 뜨내기는 오늘날로 말한다면 미래를 전연 계획할 수 없이 한끼를 걱정해야 하는 독거노인들과 노숙자들과 고아들과 직장을 잃거나 주인으로부터 학대받는 이주노동자, 버림받은 이주 여성들을 말하는데, 이들의 인권을 짓밟는 자들의 책임을 묻는 책이 말라기서입니다.

 

[남한의 인권 현실]

 

1210일은 세계인권주일이고 오늘은 한국교회가 지키는 인권주일입니다. 지난 목요일 한국교회협의회와 인권센터는 인권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2012년은 사회적 갈등이 유례없이 지속된 한 해입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 해고는 23명의 안타까운 희생자를 낳았고 4년째인 지금도 거리와 철탑 위에서 처절한 절규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저지하고 민주, 평화, 생명을 지키려는 강정마을 주민과 시민, 종교단체의 고투는 5년을 넘어섰습니다. 그 외에도 밀양 송전탑 7, 재능교육 해고 노동자 6, 강원도 골프장 반대 노숙도 만 1년을 이미 넘겼습니다. 전국의 노동 현장, 농어촌, 도시 서민, 평범한 주민 등의 고달픈 피울음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모두 사회적으로 별 힘을 갖지 못한 이들을 우리 사회는 너무나도 가혹하게 대한 한 해였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안타깝게 여기고 분노하는 것은 이러한 갈등을 합리적으로 조정해야 할 정부가 사회적 조정 기능을 포기한 것처럼 보이는 현실입니다.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정부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갈등을 조정하고 합리적 방안을 제시하여 국민의 고달픔을 덜어주어야 하건만 우리 정부는 이들의 울부짖음에 무관심하거나 너무나도 소극적 대응으로 일관했습니다. 특히 노동자와 사용자, 개발업자와 철거민의 갈등이 첨예화할 때 어김없이 등장하여 가공할 폭력을 행사한 용역업체의 잔인함과 이를 방치한 공권력의 태도는 국민의 실망과 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면서 국가의 권력에 하수인이 되어버린 국가인권위원회를 대신하여 1127일 서울시 인권위원회가 출범한 일은 어둠 속에 비춘 한 가닥 희망이었다고 말하면서 인권이 존중받는 사회로 진보하기 위해 몇 가지를 제언하였습니다.

 

쌍용자동차, 제주강정마을, 용산 참사, 재능교육 등 현안 사회적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설 것과 공권력의 존재를 무력하화는 사설 용역업체들의 무자비한 폭력과 인권 유린을 법에 따라 강력하게 엄단할 것, 그리고 국제 엠네스티가 지적했듯이 국가보안법 남용 실태를 인정하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적극 추진할 것, 남성과 여성,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차별방지, 이주민, 성적 소수자, 양심적 병역 거부자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무시와 차별을 해소할 수 있는 정책을 세우고, 평화를 위해 신앙 양심에 따라 행동한 한상렬목사와 정연길목사 등 아직도 감옥에 갇혀있는 양심수들의 석방을 촉구했습니다. 그리고 최근 억울한 죽음을 당한 장애인들의 노동권, 주거권, 이동권을 입법화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국제언론감시단체인 프리덤하우스가 작년에 발표한 바에 의하면 남한은 세계 196개국 가운데 70위이며 이전의 자유국가에서 부분자유국가로 강등당했습니다. 지금도 언론인들의 투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언론의 자유가 없는 나라, 그게 바로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남한 땅입니다. 경제는 상위권인데, 자유에 있어 하위권이라면 이는 먹을 것만 주면 만족하는 우리 안에 갇힌 돼지와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결코 자유민주주의의 나라가 아닙니다. 그리고 독립국가도 아닙니다.

 

[남한과 팔레스타인]

 

얼마 전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과 미국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엔에서 비회원 옵서버 국가’(non-member observer state) 지위를 얻는 데 성공했다. 193개 회원국 가운데 찬성 138, 반대 9, 기권 41 등의 압도적인 표차로 통과시켰다. 결의안을 냈던 마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 수반은 표결에 앞서 옵서버 국가 지위 부여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평화를 확보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며 지지를 호소했다. 그는 우리는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상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 싶다면서 유엔이 팔레스타인에 출생증명서를 발급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문제는 남한 정부의 입장입니다. 세계 대다수의 국가가 찬성표를 던졌건만 미국의 눈치를 보느라 기권표를 던졌습니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말처럼 "팔레스타인은 독립국가가 될 정당한 권리가 있으며, 이스라엘은 이웃과 평화롭게 공존할 권리가 있다"는 단순한 원칙을 근거로 얼마든지 찬성의 한 표를 던질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개인의 품격이 약자에 대한 지지와 연대에 있듯이 국가의 품격 또한 부당한 고통을 당하는 약소국에게 희망을 북돋와주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압력으로 그렇게 하지 못한 것입니다. 전시작전통제권이 미군 사령관의 손에 놓여 있으니 우리는 싫든 좋든 저들이 만들어 놓은 전시작전계획을 위해 미국산 신무기 구입을 해야만 합니다. 전쟁이 나면 미군의 명령을 받는 나라를 독립국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외국에 나가면 남한의 국가 품격은 말이 아닙니다. 이제 만약 다카기 마사오의 딸이 당선이 된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전두환의 광주학살 이후 존 워컴 미8군사령관이 말한 바 한국 민족은 들쥐와 같은 민족이어서 누가 지도자가 되든 복종할 것이며, 한국민에게는 민주주의가 적합지 않다라는 폭언을 다시 듣는다 해도 우리는 대답할 말을 잃게 될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의 저명한 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는 국제작가회의 대표단을 맞이하는 환영사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희망이라는 고칠 수 없는 병을 앓고 있습니다. 해방과 독립을 바라는 마음 말입니다. 영웅도 희생양도 아닌 정상적인 삶을 살겠다는 바람, 자식들이 안전하게 학교로 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임산부가 군 검문소 앞에서 죽은 아기를 낳지 않고 병원에서 살아있는 아기를 낳으리라는 바람, 우리 시인들이 피가 아니라 장미에서 빨간색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될 날이 오리라는 바람, 이 땅이 사랑과 평화의 땅이라는 원래의 이름을 되찾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우리와 더불어 이 희망이라는 짐을 나누어 진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이번 대선에 기필코 평화를 지향하는 대통령이 당선될 수 있도록 모두가 힘써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와 정치]

 

루가는 인류 구원과 해방을 위해 두 개의 책을 쓰게 되는 데, 첫 번째는 루가복음이고 두 번째는 사도행전입니다. 루가복음은 예수가 걸어가신 길이 어떤 길인지를 보여주고 있고, 사도행전은 예수를 따랐던 사도들, 특히 바울의 선교를 통해 형성된 교회공동체의 길이 어떠한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는 두 개의 루가복음서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는 시편 대신에 세례 요한의 아버지가 되는 즈가리아 제사장의 찬미가입니다. 루가는 그의 복음서 처음 2장에서 여러 등장인물들을 내 세우는데, 이 등장인물들은 모두 찬미가를 부릅니다. 이는 아마도 초기 교회공동체에서 부르던 찬송가들이었을 것이라고 성서학자들은 말합니다. 즈가리야의 찬미가뿐만이 아니라, 그의 아내가 되는 엘리사벳의 찬미가도 있고, 마리아의 찬가도 있고, 아기 예수가 태어났을 때 베들레헴 하늘에 울려 퍼진 하늘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라는 천사들의 찬미가도 있고, 아기 예수가 할례를 받을 때에 이를 영접하는 의로운 사람 시므온의 찬미가가 실려 있습니다. 그리고 이 찬미가들은 단순히 야훼 하느님에 대한 찬양을 말하는 일에서 그치지 않고 이 세상에 어떤 변혁이 일어날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마리아의 찬가는 주님은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라는 일종의 민중 혁명이 일어났음을 선포하고 있고, 즈가리야는 죽음의 그늘 밑 어둠 속에 사는 자기 백성들에게 빛을 비추어 주시고 자신들의 발걸음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시리라는 곧 로마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민족 해방과 독립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서의 말씀들을 보면 이게 모두 정치적 사건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종교적 사건이 아닙니다. 그런데, 흔히들 말하기를 왜 교회는 정치에 대해 말하면 안 된다고 하는지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정당 정치에 대해서 교회가 관여하는 것은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는 교회로서 현명한 일이 아니지만, 잘못된 정치 권력을 비판하는 정치적 발언은 분명히 교회가 감당해야 할 예언자적인 신앙 태도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와 같이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부자를 빈손으로 돌려보내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고 배고픈 자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려면 정치적 혁명이 일어나야 하는 것이지요. 교회 개혁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식민지 백성들이 지배자들로부터 벗어나 평화의 길로 가려면 일종의 군사적 혁명이 일어나야 하는 것이지요, 분명히 복음서는 사회경제정치적인 뒤집어짐 곧 혁명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폭력적이냐 아니면 비폭력적이냐는 방법의 차이는 있지만, 정치적 사건임은 분명합니다.

 

루가복음 3장의 본문은 이를 더욱 명확하게 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등장을 알리고 있는데, 당시의 시대 정치적 상황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로마 황제 티베리오가 다스린 지 십오 년째 되던 해에 본티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있었다. 갈릴래아 지방의 영주는 헤로데였고, 이두래아 지방의 영주는 헤로데의 동생 필립보였으며 아빌레네 지방의 영우즌 리사니아였다. 그리고 당사의 대사제는 안나스와 가야파였다. ‘바로 그 무렵에 세례 요한이 등장하고 있다고 말하는루가의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단순히 크로노스적 연대를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분명히 아닙니다. 이렇고 이런 사람들이 로마의 통치자로 그리고 그 하수인들이 유대의 통치자로 그리고 그 하수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지배하고 있던 어둠의 시대에 세례 요한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카이로스적 하느님의 역사 간섭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루가복음은 앞서 세례요한과 예수가 태어나던 시기가 언제인지를 밝혔습니다. 1장 서두에서 헤로데가 유다의 왕이었을 때, 세례 요한이 탄생하고 그리고 2장에서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토가 호적 조사령을 내렸을 때, 예수가 탄생하였음을 말한 바 있습니다. 왜 루가는 세례요한과 예수의 탄생을 당시의 통치자들의 이름과 함께 언급하는 것일까요? 이 또한 단순히 크로노스적인 역사가의 의도인가요? 아닙니다. 이들의 탄생이 갖는 정치적 역학 관계, 하늘과 땅의 적대적 관계를 서두에서부터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과 헤로데왕은 어떤 관계였습니까? 세례 요한은 헤로데 왕을 비행을 공개적으로 비판함으로 참수를 당했습니다. 예수와 로마 황제와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직접 관계는 없습니다만, 예수는 로마가 자신들의 제국 지배를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정치범들에게만 시행하는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제국과 광야 1]

 

그렇다면 이미 세례요한의 활동 시대가 언제인지를 말했던 저자 루가가 3장에서 다시금 당시의 세상 통치자 7명을 차례대로 나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로마제국이 말하는 평화의 길과 세례 요한으로부터 시작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의 길이 서로 적대적인 역학 관계에 있었음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입니다. 황제와 총독과 영주들과 대사제들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화려한 궁궐에 거주합니다. 그 궁궐은 성안에 있으며 그 성은 군사적 방어진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전쟁 폭력의 온상입니다.

 

여기에 대비하여 세례 요한이 등장합니다. 루가는 그의 등장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즈가리야의 아들 요한은 광야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 광야는 빈들입니다. 성과는 달리 열려 있는 공간입니다. 누구나 쉽게 접근하고 거기에 거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폭정에 시달린 가난한 사람들과 그 폭정에 항거하다 도망 나온 시대의 저항아들, 새로운 시대를 꿈꾸는 혁명가들이 거하는 곳입니다. 거기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본래 히브리어로 광야는 므드바르인데, ‘는 장소를 뜻하는 접두어이고 드바르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는 동사입니다. 여기서 광야는 단순히 고요하고 적막한 장소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고 하느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애굽을 탈출한 노예들이 훈련받은 장소이고, 모세와 엘리야가 부름을 받고 쉼을 얻었고, 세례 요한과 예수가 하늘 부름을 들었던 곳입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하느님의 말씀은 저 로마제국의 통치자들이 있는 그곳에서는 들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도시 문화에 길들여진 우리들은 탁 트인 자연의 공간에서 보다 앞뒤가 막힌 아파트공간에서 건물공간에서 그리고 지하철과 버스와 자가용의 공간에서 안전을 느낍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하느님의 말씀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없어서 없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안전을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인공 안에 두고 거기에 정신을 빼앗기다 보니 하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합니다. 정말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 듣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이제 도시라는 성과 인간 제국이 형성해 놓은 바벨탑과 물질문화에서 벗어나 광야에로 나아가야 합니다.

 

루가가 말하는 찬가들은 그냥 외쳐지는 찬가들이 아닙니다. 당시의 제국들이 외치는 찬가를 염두에 둔 찬가입니다. 로마 시인들은 이렇게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노래하였습니다. “오 시저여, 그대의 시대는 들판에 풍족한 수확을 되찾아 주었노라. 우리의 죄를 깨끗이 싯어주며 그 옛날의 미적을 되살리리, 시저가 이 나라의 수호자로 있는 한 어떠한 분쟁이나 폭력도 평화를 앗아가지 못하리라. 보라 내 아들, 그의 보호 아래 영광스러운 로마는 그 제국의 경계를 땅 끝까지, 그 긍지를 하늘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아우구스투스 시저! 그가 황금시대를 재건할 것이다.(리차드 호슬리. 크리스마스의 해방. 61)

 

아우구스투스는 신적 칭호입니다. “가장 신성하신 시저. 우리는 그분이 모든 사물의 시초와 동일함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존재 전체를 규율하시는 섭리께서 우리의 인생을 완성의 절정에 올려놓으시고자 우리에게 아우구스투를 주셨으며 그분은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구원자로 오서서 이전 시대의 모든 소망을 성취하셨으니 드디어 신 아우구스투스의 탄신일은 전 세계를 위한 기쁜 소식(euangelion, 복음)이 되었도다. (위의 책 62)

 

[제국과 광야 2]

 

제국이 만든 도시는 성으로 둘러싸여 있어 외부로부터 보호는 될지언정 내부끼리의 경쟁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공간이 한정되어 있으니 내가 1평을 더 늘리면 다른 누군가는 한 평을 줄여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밟고 올라서야 하는 경쟁과 파멸이 필연의 법칙입니다.

 

반면 광야는 넓습니다. 지평선 끝이 보이지 않는 광야에서 선을 그어 말뚝을 박고 여기는 내 땅이라고 하면 그는 그 순간 바보가 된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것 0.01%를 지키기 위해 다른 99.99%의 땅을 밟지 못하는 바보가 되기 때문이다. 애굽에 살던 히브리 노예들은 상전을 따라 집안에서만 머물렀습니다. 상전이 다른 노예들은 집안끼리 다투었습니다. 또 한 집안에서도 자기들끼리는 아랫목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했습니다. 그러다가 홍해를 건너 광야로 나왔습니다.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사는게 조금 불편했지만, 경쟁해야 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여전히 애굽의 경쟁과 욕심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기도 했다. 그들은 새벽에 만나를 주울 때에 남보다 많이 주었습니다. 하루에 다 못 먹을게 분명했지만, 그리고 지도자 모세는 내일도 분명히 하느님께서 만나를 보내 주실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남보다 더 많이 갖지 못하면 못내 불안했습니다. 그들은 당일로 다 못 먹는 줄 알았지만, 내일을 위해 더 많이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성서는 말합니다. 집에 와서 대어보니 다 똑같았다고. 저도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지만... 애굽의 도성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광야에서는 적게 거둔 자나 많이 거둔 자나 되로 대어보면 똑같아지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게다가 어떤 이들은 모두 같은 양이 된 만나를 소유했지만, 내일은 만나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조금 아껴 놓았습니다. 배가 좀 고팠지만, 내일을 위해 남겨두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하루만 지나면 그 놈의 만나는 갑작스레 썩기 시작하면서 벌레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내일에 대한 확신을 가진 사람! 그 사람은 기도할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우리의 필요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필요가 다 채워지면, 우리의 기도가 응답을 받으면 그때부터 우리에게는 하느님이 멀어집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머물 공간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역설입니다.

 

어제 오후부터 새교우 10여명과 함께 디아코니아 평화의 집에서 기도와 영성 훈련의 12일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늘 아침 톨스토이의 일일 명상의 글을 함께 읽었습니다. <오늘날처럼 전 세계의 민족들이 서로 교류하고 있는 시대에, 단순히 자기 나라에 대한 편협한 사람을 호소하며, 언제든지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고 호소하는 것은 바로, 지금 평화롭게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기 마을만을 사랑하라고 설득하며, 각 마을에 군대를 소집하고 요새를 쌓는 행위와 같다. 애국심도 자기 가족에 대한 사랑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이지만, 결코 미덕이 아니며 그것이 도를 넘어서 이웃에 대한 사랑을 파괴하게 된다면 오히려 죄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제국과 광야의 차이입니다. 제국은 우리를 보호한다면 성을 쌓습니다. 그리고는 전쟁을 일으킵니다. 반면 광야는 경계를 허뭅니다. 이웃이 함께 살아가야 하는 한 가족임을 깨닫도록 만듭니다.

 

오늘 4개의 본문을 전체로 살펴보면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그건 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많이 나오는 단어는 입니다. ‘나의 행차 길을 닦으리라. 주님보다 앞서 와서 그의 길을 닦으며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는 길을 주의 백성들에게 알게 하라. 우리의 발걸음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시리라.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높은 산은 눕혀 굽은 길이 높아지며 험한 길이 고르게 되는 날이 오리라.’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계절입니다. 주의 날을 바라보면서 주의 길을 준비하는 향린의 아들 딸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