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사의 자식들
스바니아
3:14-20; 12:2-6; 4:4-7; 루가 3:7-18

 

우리나라의 앞날 나아가서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평화가 현 이명박정권의 연장선상에서 남과 북이 서로 비방만을 하며 5년의 시간을 또 다시 허비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을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대통령 선거가 3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두 후보간에 박빙의 승부가 펼쳐지고 있고, 언론은 2,30대의 젊은이들의 투표가 당락을 결정할 것이라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 저희 교회 사회부원들이 지난 주간 명동에 가서 투표를 독려하는 피켓을 들었는데, 저도 내일과 모래는 젊은이들의 투표 참여를 권유하기 위해 국민대와 상명대 정문에 가서 피켓을 들 예정입니다. 제가 들 피켓의 구호는 이것입니다. “나는 투표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역사는 미래를 향한 거울]

 

왜 교회 목사가 교회 안에서 기도나 열심히 할 것이지, 밖으로 나와 투표 참여를 권유하는가? 이는 제가 목사로서 일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이 땅에 정의 평화 생명이라는 가치로 귀결되는 하느님 나라를 예수님을 따라, 이 땅 위에 세우기 위함에 있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 향린교회가 지난 20년동안 국가보안법 철폐라는 현수막을 남한 사회 내에서는 유일하게 공개적으로 걸어놓고 있는데, 이는 민주진보정권이 들어서지 않고서는 그런 일이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이 아기 예수로 오시는 대림절 3번째 주일이지만, 민주주의와 자유언론, 그리고 생명가치의 승리가 더욱 기다려지는 시간입니다. 성서의 말씀을 자기에게 편리한대로 해석하는 아전인수식 문자적 해석은 잘못된 일이지만, 오늘만큼은 그렇게 읽어보고 싶습니다. 오늘 아침 하느님께서 스바니아를 통해 우리들에게 주신 예언의 말씀을 보면 수도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큰 소리로 외쳐라. 마음껏 기뻐하며 축제를 베풀어라.”라고 하십니다. ‘수도 명동아 환성을 올려라. 향린아 큰 소리로 외쳐라. 마음껏 기뻐하며 축제를 베풀어라.’ 라고 읽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야훼께서 명절이라도 된 듯 기쁘게 더덩실 춤을 추시리라.”는 말씀도 있는데, 선거 결과를 알게 될 20일에는 명동 한복판에 가서 야훼와 더불어 더덩실 기쁨의 춤을 추고자 합니다. 함께 하실 분들은 연락주세요. 정오 국립극장 4거리에서 사이 음악에 맞춰 말춤을 추고 우리 승리하리라는 노래를 함께 부르는 향린 플레쉬몹을 한번 해보면 어떨까요? 오늘 이사야의 말씀처럼 큰일을 이루신 야훼를 찬양하고 함께 기뻐 외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는 <18대 대통령 선거를 맞아 한국교회에 드리는 글>을 발표했습니다. <역사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향한 거울입니다. 역사 정의를 바르게 세우지 않고는 바른 가치관의 미래를 열 수 없습니다. 한국 현대사의 빛과 어둠을 주조한 5.16 군사 쿠데타와 유신독재를 엄정히 정리하지 않고는 우리의 미래에 하느님의 공의가 실현될 수는 없습니다. 역사정의는 어떤 물질적 풍요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그 시대의 영혼입니다. 역사는 자동적으로 발전하지 않으며 얼마든지 퇴행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뼈아프게 경험하고 있습니다. 향후 5년은 대한민국이 민주적 절차, 집단적 지성, 종교적 영성을 모아서 새롭게 변화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시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날개 없이 추락하는 비운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금번 대통령 선거에 우리 미래의 방향이 놓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국 사회와 역사를 위해 눈물로 기도해온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마음과 뜻을 모아 이번 대통령 선거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를 간곡히 당부 드리면서, 대림절기에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그런데 이 글에서 역사정의 실현을 강조하면서 예언자 세례 요한의 이름을 언급하였습니다. 그 얘기의 배경이 바로 오늘 루가복음에 있는 본문의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앞서서 그분의 길을 닦았던 세례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이 독사의 족속들아,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너희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 보여라. 그리고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다.’하는 말은 아예 하지도 마라.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도대체 세례 요한은 누구를 향해 이렇게 심한 독설을 퍼부었을까요? 오늘 말씀을 그냥 읽으면 자기 앞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얘기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조금 주의를 갖고 읽어보면 독사의 자식들이 누굴 두고 하는 말인지 쉽게 알아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앞에 있는 31절로 6절 곧 지난주 본문 말씀을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자의 의도?]

 

지난 주일 제국과 광야란 제목으로 하늘뜻을 전하면서 제가 강조했던 말씀은 이것이었습니다. 루가는 1절에서부터 로마의 황제 티베리오로부터 빌라도총독 그리고 헤레데와 필립보와 리사니아라는 지방 영주 그리고 안나스와 가야파라는 예루살렘 성전의 대제사장들의 이름을 차례대로 나열하였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단순히 세례 요한이 활동했던 그 시대적 연대를 말하고자 한 것인가? 그렇다고 한다면, 그중의 한사람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아니 이미 앞장에서 세례 요한의 출생 시기가 헤로데가 통치하던 때였다고 언급했으니 단지 연대를 밝히고자 했다면 다시금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면 당시 팔레스타인을 지배했던 7명의 통치자들의 이름을 언급한 이유는 다른 것에 있다. 그 의도를 저는 지난 주 본문 말씀에 기초하여 폭력과 차별에 기초한 제국과 평등과 사랑에 기초한 광야의 비교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은 광야에서만이 들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드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왜 그러한가? 라는 그 증거로 오늘 본문 말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세례 요한이 말하는 독사의 자식들이란 다름 아닌 바로 로마제국의 황제와 그의 휘하에 있는 지방의 통치자들, 그리고 거기에 기생해서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고 사는 성전세력을 두고 한 말인 것입니다. 모든 글이 그러하지만, 저자의 의도를 분명히 알고 접근을 해야 그 해석이 분명합니다. 특별히 시와 같은 것은 때로 난해하기 짝이 없는데, 시인이 처한 역사적 상황과 그 고민을 알고 읽으면 이해가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각자 다르게 해석을 합니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닿았으니 지금 바로 회개의 열매를 맺지 않으면 모두 지옥의 불 속에 들어갈 것이다이 구절 또한 잘못하여 이를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을 시키면 이 회개 촉구의 구절은 개인 내면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내게 주신 말씀이라고 이해하는 자기화는 절대 필요합니다. 그러나 만약 모든 말씀을 그렇게 개인의 자기화에만 국한시키고 나면 자기 못남과 인간한계라는 틀에 갇혀 사회의 구조 악에는 접근조차도 하지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민중신학이 서구신학이 말하는 라는 개념에 대항하여 이라는 용어를 선택한 것은 바로 이러한 서구신학의 한계와 잘못 때문입니다. 현재 교회 안에서 라는 개념은 모두 개인화 내면화되어 버렸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심리적 고백에서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도바울이 로마서 3장에서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 개개인을 말하기 보다는 인간세계의 죄성, 곧 당시의 로마제국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13절 이하에서 이런 얘기를 하는데, 과연 이게 개인을 두고 한 말인지 아니면 당시의 제국을 두고 한 말인지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며 그들의 혀는 거짓을 말하고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흐르고 그들의 발은 피 흘리는 일에 날쌔며 간 데마다 파괴와 비참을 남긴다.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고 그들의 눈에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다.” 이는 분명히 로마제국을 비난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를 개인의 죄성을 비난하는 해석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바로 서구의 식민지 제국에 하수인으로 전락한 서구 교회와 신학의 잘못이었습니다. 여기에 한국적인 은 개인의 개념도 있지만, 보통은 집단적 한을 말합니다. 오랜 세월의 착취 구조에서 발생한 민중의 집단적 고통을 말할 때에 한을 말합니다.

 

[독사의 자식들]

 

이 독사의 족속들아, 너희가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 보여라하고 다그치자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는 무리가 세 부류로 나옵니다. 첫 번째 부류는 부자인 귀족들입니다. 요한이 말합니다. ‘속옷 두벌을 가진 사람은 한 벌을 없는 사람에게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도 이와 같이 남과 나누어 먹어야 한다.’ 요즘 복지가 정치적 화두가 되었습니다. 이는 분배정의를 두고 한 말입니다. 이명박정권이 출범하면서 주장하던 것이 파이가 커지면 나누는 몫도 커진다는 논리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는데 그건 파이의 크기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재벌들의 욕망에는 한이 없습니다. 결국 가난한 자와 부자의 간격은 더욱 넓어지고 말았습니다. 누진세를 적용하여 부자들이 더 많이 감당해야 할 세금을 비슷하게 부과하다보니 결과적으로 가난한 서민들이 감당해야 하는 세금 부담은 이명박정권 들어 이전 정권에 비해 수십 배나 올랐습니다. 현재 팔아도 은행 빚을 갚지 못하는 깡통 아파트가 수십만 채입니다. 이는 파이만을 키운 결과입니다. 이정희후보가 재벌해체를 주장하는 이유입니다. 부자와 서민의 간격이 좁아질수록 더 건강하고 더 행복한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부류는 세리들입니다. 세례 요한은 저들을 향해 정한대로만 받고 그 이상은 받아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당시의 세리들은 입찰을 통해 할당받은 금액을 로마제국에 바치고 나머지는 모두 자기가 차지했습니다. 그러니까 악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죽어라고 농사를 져도 빚만 늘게 된 농민들은 광야로 도망을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천 명 광야급식기적 이야기 배경에는 바로 이러한 정치사회적 배경이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티베리오란 이름은 로마 사람들에게는 통치자의 이름이지만, 갈릴리 민중들에게 있어서는 치가 떨리는 이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헤롯 안티파스는 그의 황제 즉위를 축하하는 아부형 도시 티베리우스를 갈릴리 해변에 세우는데, 엄청난 세금을 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줄푸세란 말이 유행합니다. 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푼다는 말인데, 이는 모두 대기업과 부자들을 위한 말입니다. 로마제국 당시의 세리를 요즘 말로 한다면 순대고 오뎅이고 골목구멍가게까지도 무차별하게 공격하는 돈에 환장한 재벌과 정규직 대신 값싸고 마음대로 해고시킬 수 있는 비정규직을 마구 양산해내는 대기업들입니다.

 

세 번째 부류는 군인들입니다. 당시의 로마제국의 군인들이란 주변국을 침략하여 재산을 약탈하고 여인들은 겁탈하고 남자들과 아이들을 노예로 만드는 폭력의 온상지였습니다. 18세기 로마제국 흥망사를 쓴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은 "황제의 권위는 군사력에 의해, 그리고 그 군사력은 세금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비난하는 세 부류들, 곧 귀족과 세리와 군인들을 독사의 자식들로 비난한 것은 바로 다름 아닌 로마제국이었습니다.

 

[‘받은 봉급의 세계사적인 해석]

 

우리는 협박하거나 속임수를 써서 남의 물건을 착취하지 말고 자기가 받은 봉급으로 만족하여라.”는 이 성서의 구절을 한 개인 군인에게만 적용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로마제국의 틀 안에서 이를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미국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남한을 비롯한 일본,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 등등 세계 여러 나라에 비싼 군사무기를 팔아 엄청난 이득을 챙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사가라고 하면 잘 안사니까 협박하거나 속임수를 쓰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의 경우 남한의 군사력은 북한의 군사력에 비해 월등이 높아졌지만, 미군이 철수하면 우리는 금방 북한의 침입을 받아 나라가 멸망할 것처럼 공포를 계속 심어주고 있습니다.

 

이 공포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규정하고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머리에 뿔난 전쟁광으로 만들어왔습니다. 지난 60년동안 수출은커녕 은행하나도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경제봉쇄를 통해 북한을 구석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자기는 신무기를 계속 개발해서 모든 나라에 팔아먹으면서도 북한이 조그마한 무기라도 팔고자 하면 이는 유엔의 규정을 위반하는 도발이라고 세계 뉴스를 도배질하여 왔습니다. 남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는 엄청난 무기들을 세계에 팔아먹으면서도 북한이 팔면 위법이라고 말합니다. 적반하장이라는 말은 이럴 때에 하는 말입니다. 결국 생존에 위협을 느낀 북한은 죽기 아니면 살기로 모든 힘을 핵개발에 투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미국은 북한이 미본토까지 날아갈 수 있는 대륙간탄도 기술이 입증되자 안절부절하고 있습니다. 이는 미국이 저지른 자업자득입니다. 무기로 돈 벌려다가 이제는 자신들의 목숨마저 위협받는 자가당착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입니다. 엊그제도 커넥티커트 한 초등학교에서 20세의 한 백인청년이 총기를 난사해서 20명의 학생을 포함해서 28명이 죽었습니다. 오바마대통령은 눈물을 흘리며 가족들의 아픔에 함께 했는데, 그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라크나 아프카니스탄에서 미군들에 의해 무차별하게 죽임을 당하는 어린 생명들에 대해서도 눈물을 흘려야 할 것입니다.

 

북한은 오래전부터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자고 제안해왔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6자회담이니 핵포기가 먼저이니 하면서 이를 외면해왔습니다. 결국은 북한이 핵보유국이 되었고, 이제 일본 또한 평화헌법 9조를 폐기하고 재무장을 넘어 핵무기까지 보유하려는 보수세력이 정권을 잡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되면 남한도 미국의 핵우산정책에서 벗어나 자체 핵무기를 갖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극동아시아는 모두가 핵보유국이 되는 한방에 모두가 사그라지는 위험천만한 지역이 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핵전쟁이 나면 우리만 죽지 미국사람들이 죽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전쟁 정말 남북한이 서로 갈라져 싸운 것입니까? 당시의 두 세력,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세력과 소련과 중공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세력을 대신해서 싸운 것입니다.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리석음이 60년이 지나도록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 정말 분하고 원통한 일입니다. 지금 남한은 세계에서 가장 강도 높은 노동을 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일인당 국민소득이 2만불이라고 자랑을 합니다. 그러면 4인 가족이라면 연수입이 평균 1억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나요? 반 정도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돈은 다 어디로 사라졌습니까? 그게 완제품도 아닌 F35전투기를 비롯한 신무기 구입으로 사용되고 있고, 미군 주둔비용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삼성이 수출을 해서 수익을 남겼으면 그 이익금이 우리 손에 들어와야 하는데, 주주들인 미국자본가의 손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리석은 곰이 사탕 하나 더 받아먹으려고 열심히 재주를 넘는 사이에 주인은 몰래몰래 큰돈을 챙기고 있는 것입니다.

 

수출이 계속 늘어나면 점점 더 행복한 사회가 되어야 하는데, 왜 동시에 자살률 또한 함께 늘어가나요? 왜 열심히 일하던 노동자들이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고 이 추운 겨울에 거리로 나와 농성을 하거나 철탑 위로 올라가 목숨을 건 투쟁을 하게 되었습니까?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해서 파업을 하였기 때문입니까? 지금 남한의 노조 가입률은 OECD 최하위, 이전 정부에서 두 자리 숫자가 이제는 한 자리 숫자로 줄어들었습니다. 재벌의 편을 든 정부의 부정 개입으로 민주노총 한국노총 이제는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노동자들이 자기 목숨을 끊는 경우가 이전에 있었나요? 전쟁이 일어나 총이나 포탄에 맞아 죽은 사람이 있었을지언정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는 사람은 극히 적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고 있습니까? 정신을 바로 차리지 아니하면 우리는 모두 강대국들의 장기판 놀이에서 토사구팽을 당하는 졸의 신세로 그치고 말 것입니다.

 

미국은 로마 제국이 그러했던 것처럼 태생부터 구조적으로 군사무기제조 폭력형 산업구조입니다. 오늘의 부를 가져오게 된 것은 1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입니다. 유럽에 무기를 팔아먹으면서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이 식민지지배를 통해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남미에서 빼앗아 쌓아두었던 세계의 금을 빨아들인 것입니다. 지금도 미국 경제가 돌아가기 위해서는 수많은 군수공장들이 계속 돌아가야 합니다. 다른 상품들은 TV 광고를 통해 구매를 촉진시키지만, 무기를 소비하기 위해서는 전쟁터가 필요합니다.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이락, 아프칸 전쟁 다 미국이 조종한 전쟁들입니다. 자기 나라에서 싸워야 했다면 다 피할 수 있었던 전쟁들입니다. 한미군사훈련이라고 하는 것도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유통기한이 다된 무기들을 소비하고 이를 새것으로 바꾸는 방식입니다. 6년 전 평택미군기지를 확장해서 전방에 있는 미군들을 그곳으로 철수하겠다고 해놓고는 지금에 와서는 부대 이전을 고려하겠다고 말하고 주둔비용을 더 내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남한은 현재 미국군사체제의 봉입니다. 한미FTA도 이 틀 안에 갇혀 있습니다. 해군기지 제주 강정에 만들어지면 그곳에 우리 해군 군함이 진해기지 놔두고 비싼 기름 값 들어가며 제주도 남단에 갈 필요가 어디에 있습니까? 휴가 외에는 그곳까지 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복지를 위해 씌어져야 할 세금이 다른 나라를 위해 그것도 평화가 아닌 전쟁기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구조의 폭력]

 

우리는 세례 요한이 로마제국과 그들의 하수인들을 향해 그랬던 것처럼, 미국과 그들의 하수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비난을 하고, 약소국을 협박하거나 속임수를 써서 전쟁을 통해 부를 챙기려 하지 말고 자기들의 땅에서 나오는 정당한 몫에 만족하라고 요구해야 합니다. 미국의 군수산업구조를 그대로 두고서는 아무리 말로 평화를 외쳐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사자나 호랑이가 배가 고프면 소나 양을 잡아먹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저들의 육식구조로 된 위와 창자를 초식구조로 바꾸어야 합니다. 미국 민중들이 눈을 떠야 하는데, 눈을 뜨지 못하고 있습니다. 총기사고로 매년 수만 명이 죽어가고 있고, 어린이 사망의 90% 가까이가 총기사고입니다. 그런데도 총기규제 하나 해결하지 못하는 나라가 미국입니다. 총기생산자들의 돈 로비 때문입니다. 폭력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의 문제입니다.

 

얼마 전 밤늦은 시간에 집에 가는 버스를 탔는데, 누군가가 버스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똑똑히 들을 수 있는 큰 소리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줄 알았습니다. 아니었습니다. 그냥 혼자서 횡설수설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만히 보았습니다. 수염이 더부룩한 40대 초반의 사람이었고, 옷가지로 보이는 두둑한 하얀 플라스틱 백 5개를 발 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가까이서 눈을 보았습니다. 악의라곤 하나도 없는 맑은 눈의 소유자였습니다. 얼굴 또한 험한 삶을 살아온 모습은 전연 보이지 않았습니다. 몸관리가 안되어 있고 옷이 남루한 외에 다른 차이는 크게 없었습니다. 보통 노숙자들은 검은 쇼핑백에 자기 물건을 담아가지고 다니는데, 이분은 전부 하얀 백을 들고 있는 것이 특이했습니다. 하는 말을 유심히 들어보았습니다. 앞의 말과 뒤의 말이 전연 연결이 되지 않는 문장들이었지만, 한 문장 한 문장을 놓고 보면 매우 유식한 발언들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 칸트 니체, 칼 막스, 예수까지 등장을 했고 인용하는 어구 또한 맞는 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중간 중간 난 안 했어요. 내가 한 말은 정말입니다.’라는 말을 계속 끼어 넣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저는 추측을 넘어 확신에 이르렀는데, 이 사람은 사회학 내지 사회철학 박사과정을 공부하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나서 간첩죄로 십 몇 년을 감옥 안에서 살다 나온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멀쩡한 청년을 이렇게 만든 세력은 누구인가? 뭐 고문전문가 이근안씨가 이제 와서 자기도 희생자라고 위에서 시켜서, 그것도 애국하느라고 하였다고 하면서 고문을 정당화하고 이제 곧 자서전을 내놓겠다고 하는데,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자신이 희생자라고 여긴다면 누가 자기를 조종했는지, 조정자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의 군부독재자들의 배후에는 누가 있었는지, 그들은 북한을 왜 그렇게 빨갱이로 철전지 원수로 몰아가야 했는지 그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프랑스와 독일은 국경을 맞대고 수없이 서로 죽이는 전쟁을 했지만, 지금은 평화롭게 살아가는데, 왜 우리는 말도 같고 부모도 같은데, 서로 죽이는 전쟁을 하였고, 그리고 이 전쟁이 끝난 지가 6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원수시하고 있고, 정전협정 하나 평화협정으로 바꾸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누구의 책임인지 반문을 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엊그제 WCC 핵관련 회의가 있었는데, 거기서 한 미국인이 우리의 정전 60년은 세계사에도 없는 기네스북에 해당한다는 얘기를 하더군요. 이는 우리가 세계인들의 조롱과 놀림의 대상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다가오는 2013년은 정전협정 60년입니다. 기필코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꿀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십시다.

 

[교회를 섬기는 기쁨]

 

오늘 필립비교회에 보낸 바울 편지의 본문의 핵심 단어는 기쁨입니다.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오늘 본문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필립비 서신 전체가 그러합니다. 4장으로 된 짧은 편지 안에 기쁨에 관련한 단어가 16번이나 나옵니다. 그런데 그 기쁨은 단지 우리가 서로 농담을 하며 웃고 즐기는 그런 피상적인 기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는 감옥 안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떻게 옥중에서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건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 안에 거하였기 때문입니다. 곧 그가 말하는 기쁨은 주님과 함께 하는 데서 나오는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정말 주님과 함께 하는 기쁨인가 아니면 주님 없이 나 혼자 즐겨하는 기쁨인가를 구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바울은 기뻐하는 자의 특징으로 첫째 모든 사람을 너그럽게 대하는 일이고 둘째는 아무 걱정도 하지 않는 일이고, 셋째는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수요기도회 시간에 이 말씀을 갖고 묵상하는 가운데 최명수장로님께서 사회정의를 추구하다보면 세례 요한과 같이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소리도 쳐야 하는데, 이런 비난과 모든 사람을 너그럽게 대하라는 바울의 말씀과는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를 물으셨습니다. 사실 사회정의를 추구할 때의 대상은 한 개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미국의 폭력성을 비판한다고 해서 미국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정의는 불의한 체제를 그 대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체제를 계속 옹호하는 그 사람을 너그럽게 대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바울이 말하는 사람을 너그럽게 대하라는 말은 필립비교회 안에서 교우들끼리 그렇게 하라는 말입니다. 불의한 체제를 바꾸어가고자 애를 쓰는 교회공동체 안에서 사사로운 의견의 차이로 공동체의 화합을 깨는 일은 잘못이라는 말입니다. 감정에 치우친 사적인 작은 이익으로 인해 공적인 공동의 이익을 깨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보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유의해야 할 점입니다. 우리 안에서 개인의 차이는 분명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 우리를 보다 큰 사회와 민족과 세계라는 틀 안에 놓고 작은 차이를 포용할 줄 아는데서 변혁의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 하늘뜻펴기를 마치면서 한 사람의 신앙에 대해 얘기를 하고자 하는데, 이 한 사람이 이번 서울교육감 후보자의 한 사람이라 매우 조심스럽습니다만, 제가 개인적으로 워낙 잘 알고 이 분의 정치적 입장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분의 교회를 사랑하는 신앙을 말하고자 합니다. 이수호선생에 관한 얘기입니다. 이분이 신일고등학교 국어선생으로 전교조 위원장을 지낸 공적 생활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만, 교회생활에 대해서는 전연 모르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3,4년 동안 이분이 예수살기 회원으로 민중 아픔의 현장인 거리 촛불기도회에서 자주 만났고, 그리고 전태일재단에서 함께 일해 왔기에 이분의 신앙이나 인품에 대해서는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이수호선생은 우리와 같은 기장교단 서울북노회의 영은교회에서 지난 20년간 집사로 성가대원으로 봉사하여 왔습니다. 6년 전 매주 한편의 신앙시를 써서 교회 주보에 게재해 왔고, 이를 우리 교회라는 연작 모음 시집으로 출간한바 있습니다. 그중 성가대란 시를 보겠습니다.

 

창 밖에는 축복처럼 눈이 내리고 있었다

서울의 대표적 판자촌 양돈 마을이 있던 자리

그 아파트 위에도 눈은 쌓이고 있었다

함께 내쫒기며 철거당한 우리 교회는

아파트 옆 상가 건물 그 한쪽에

제비집처럼 둥지를 틀고

입주도 떠나지도 못한 사람끼리 모여

가난을 은혜로 나누고 있다.

 

반주자까지 모두 열 명도 안 되는 성가대

예복을 입을 때 마다 마음이 뜨겁다

고아처럼 자라다시피한 한 처녀가 결혼을 하며

옥합을 깨뜨려 그 값비싼 향유로

눈물을 섞어 예수의 발을 씻은

어느 여인의 마음으로

아름다운 성가복을 바쳤다.

누구도 이 값비싼 성의를

개발의 편자라 욕하지 않았다

성가대원들은 예배를 준비하며

그 성의를 입으며 늘 감격스럽다

더욱이나 이 옷은 뒤에 단추가 있어

누군가가 잠가 주어야 한다

뒷사람은 내 옷을 입혀 주고

나는 앞 사람의 옷을 입혀 주면서

왜 그렇게도 마음이 뜨거워지는지

예수도 우리 교회에 오면

성가 대원이 돼야 한다

우리 교회의 어른은 모두가 성가대원이다

 

평생을 장애인으로 암투병의 고통 속에 살아가면서 아름다운 글을 남기고 3년 전 작고한 장영희교수는 졸업생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여기 머무는 동안 너희들은 내게 젊은 지성과 끝없는 탐색으로 삶에 대한 열정과 사랑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가르쳐주었다. 이제 세상에 나가 너의 젊음으로 낡은 생각들을 뒤엎고, 너의 패기로 세상의 잠든 영혼들을 깨우고, 너의 순수함으로 검은 양심들을 깨끗이 청소하고, 너희 사랑으로 외롭고 소외된 마음들을 한껏 보듬어 주어라.”

 

이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여러분에게 세례 요한의 말씀으로 대신합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머지않아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 오십니다. 그분은 손에 키를 들고 타작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울 것입니다.” 부디 다가오는 새 시대에서 알곡으로 남아 하느님의 곳간을 채우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