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223_대림절네째주일 / 모든 것을 버리고
시편 80:3-7; 미가 5:2-6;히브리서 10:5-10;루가 1:46-55
찬96장, 예수님은 누구신가 / 찬341장, 십자가를 내가 지고 / 국찬 63장, 그를 맞으라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마음을 좀 추스리셨는지요? 처절한 죽음을 목도하고 암흑 속에서 지내야했던 그 3일의 이야기,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도 무덤가를 서성이며 떠나지 못하다가 결국 부활 아침을 맞이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우리들이야 말로 먼저 몸과 맘을 추스려야합니다.......
라고 말은 하면서도 한진중공업 지회 최강서 조직차장의 사망 소식에 맘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나는 회사를 증오한다. 자본 아니 가진 자들의 횡포에 졌다.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심장이 터지는 것 같다. 내가 못 가진 것이 한이 된다. 민주노조사수 하라 손해배상철회하라.
태어나 듣지도 보지도 못한 돈 158억 죽어라고 밀어내는 한진악질자본 박근혜가 대통령되고 5년을 또...못하겠다 지회로 돌아오세요. 동지들 여지껏 어떻게 지켜낸 민주노조 입니까?? 꼭 돌아와서 승리해주십시오. 돈이 전부인 세상에 없어서 더 힘들다”
유서의 내용입니다.


전원 복직되었던 92명의 해고자들이 다시 무기한 휴업을 당해야 하는 모멸감, 고스란히 나아있는 사측으로부터의 158억 손해배상청구. 이게 어디 살라는 말 입니까? 그냥 죽으라고 하는 것이지. 어제는 울산 현대중공업 정리해고자 이운남 전 조직부장, 어제는 울산 현대중공업 정리해고자 이운남 전 조직부장, 한총련 조국통일위원회 간부였던 최경남 님의 자살 소식도 전해졌습니다.
재능 해고노동자들도 결국 만5년을 채우고 말았고, 쌍용자동차 국정조사도 말은 나왔지만 어떻게 될지 오리무중이어서 철탑에 올라있는 분들도 거기 그대로 계시고, 강정에서는 여전히 밤새도록 공사차량 진입에 저항하는 지킴이들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짐짝처럼 들려나가 던져지고, 용산 참사 가족들은 여전히 옥에 갇혀있으며, 그렇지 하지 말아달라는 애기봉 성탄 점등도 기어코 했습니다. 어제의 해가 오늘도 떴듯이 설사 정권 교체가 되었어도 하루아침 사이 금새 변할리 없는 고난의 현장을 지키고 있는 이들은 한탄이나 자조할 새도 없이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변한 것 없는 그곳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도 정권 교체가 되면 좀 더 나은 면이 많지 않겠나, 그래도 그렇지 역사를 거꾸로 돌려도 그렇게까지 되돌리겠어... 라며 투표독려를 비롯하여 몸과 맘을 다해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많은 이들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결과를 마주대하면서 멘붕 상태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 입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이냐? 라는 대선 결과에 대한 평가와 분석은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에 굳이 그 내용을 반복하지는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세대, 지역, 정파, 계급, 그리고 종교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가르고 있는 수많은 벽들을 또다시 확인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어떤 분들은 제발 지역별로 나오는 통계를 하지말자고 호소하기도 합니다. 매 선거 때마다 광주가 무슨 죄가 있느냐고요. 빨갱이와 민주주의 수호라는 얼토당토하지도 않는 대립 구도에서 한치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 상황에서 지역에 이어 세대가 가름질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이 선거판을 뒤엎지 못한 것은 바로 ‘불안감’ 때문입니다. 그간 하늘뜻펴기를 하면서 ‘불안’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게 되는 위험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했습니다만, 불안이라는 것은 제 아무리 이성과 객관적인 사실로 넘어서려고 해도 쉽사리 넘어서지지 않는 거대한 장벽이라는 것을 이번 선거 과정에서 다시 경험합니다.



저만해도 선거 전후로 가족 내 갈등이 고조되었습니다. 보수교회를 다니고 계신 친정엄마가 보내온 카톡 메세지에는 북한 인권문제, 공산주의로 통일된다더라, 안보를 위해서는 강한 군사력이 필요하다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평소 정치나 경제 돌아가는 것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계셨던 것도 아니고 그저 하루하루 생활하는 것에 치여 사는 분이 보내온 내용은 누군가가 보내준 것을  복사하여 전달한 것임에 분명했지만 더 이상 별로 잃을 것이 없는 분에게 드리워진 깊은 불안감의 실체는 무엇일까?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희망이 불안에 쫓겨 다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 희망이 불안에 잡아먹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를 생각해 봅니다. 희망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 자체의 존재감이 너무나도 미미해서 일까? 혹시 희망이 아닌 것을 희망이라고 우겨온 것 일까? 등등, 여러 생각으로 머리 속이 복잡해 집니다. 누군가는 거짓말과 과장과 대안 없는 희망을 뻥튀기하여 퍼트렸지만 사람들은 그 말에 오히려 귀를 기울인 것 같아 보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 중에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라는 주체성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거센 풍랑에 흔들리는 배에서도 주무시고 계셨다는 예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시대가 불안할수록 정의롭고, 평화로운 것을 선택할 줄 아는 ‘깨어있음’이 우리를 이끌 것 같지만, 우리의 현실은 역사, 경제, 정치에 있어서 가장 정의롭지 못하고, 가장 평화롭지 못한 선택을 더 많이 한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나는 주체성이 있는데 당신은 왜 주체성이 없냐? 라는 말은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나와 당신이 함께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노력을 실천하는 것은 말보다 백배, 천배의 수고를 하지 않으면 이루어 내기 힘들다는 진리를 확인하게 됩니다. 



[화인 맞은 양심]


어제는 일년 중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지였습니다. 만 44세가 된 제 생일이기도 했고요. 어린 시절 ‘죽을 4자’라는 말은 엄청난 말이었습니다. 4층에 가게 되거나, 4번째가 되거나, 4자가 들어가는 말을 읽게 되거나, 혹은 4호에 살거나 등등 ‘4’와 관련된 일만 생기면 ‘얼레리꼴레리..죽을 4자래요’라며 놀리고, 그 놀림에 울고불고 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죽을 4’가 하나도 아니고 쌍으로 겹치게 되었으니, 나는 정말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동시에 제대로 죽으면 제대로 살 수 있겠지....,  앞으로는 더 죽도록 힘들어지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올해의 생일을 맞이했습니다.


정말 죽겠다...죽고만 싶다...이런 탄식은 인류 역사에서 반복되는 가장 오래된 탄식 중의 하나 일 것 입니다. 예배부름 내용처럼 ‘당신 백성에게 눈물의 빵을 먹이시고 싫도록 눈물을 마시게 하셨사옵니다. 이웃들에게는 시빗거리가 되게 하셨고 원수들은 우리를 비웃사옵니다.’ 라는 말씀이 맘에 딱 와닿습니다.
기원전 8세기를 살았던 미가는 ‘망할 것들!’로 시작되는 2장에서 권력이나 쥐었다고 자리에 들면 못된 일만 꾸몄다가 아침 밝기가 무섭게 해치우고 마는 악당들에 대한 야훼 하느님의 호통을 전합니다. 재앙을 내리리라, 내릴 때가 가까웠다. 이미 더러워진 이 땅, 불쌍하게도 망할 수 밖에 없다 라고 말 입니다. 해방을 경험했지만, 송아지, 수양 몇 천마리, 맏아들 등 야훼가 관심 없어 하는 목록들만 들이밀 뿐, 정작 ‘정의를 실천하며, 한결같은 사랑을 즐겨 행하는 일’에 관심 없어 하는 이들은 멸망에 이를 수 밖에 없고, 빈정거림과 조롱을 실컷 당하리라는 말씀 입니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도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 입니다. 희생제물, 봉헌물, 번제물과 속죄의 제물이 제 아무리 율법을 따라 드려진다 해도, 그보다는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한 몸 내어 놓은 것의 필요성, 그리고 바로 그렇게 실천한 이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 합니다. 
 


아기 예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 넷째주일인 오늘 ‘첫번째 크리스마스’라는 책을 추천해 드립니다. 예수 탄생 전후의 사회 상황과 예수가 잉태된 사건, 그리고 예수 탄생의 의미와 오늘의 우리와의 연결고리를 짚어보기에 더 없이 좋은 책 입니다.
로마제국이 군사력, 경제력, 정치력, 이데올로기적인 힘으로 통합된 패권을 휘두르고 있는 가운데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에게 붙였던 ‘신의 아들’,  ‘주님’, ‘구원자’, ‘구세주’등의 말을 예수에게 붙이는 복음서의 구절들은 혁명적인 저항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성탄이 되면 ‘기쁘다 구주 오셨네’라는 찬송을 전 세계 교회가 부릅니다만, 구주라는 말이 단지 매우 내면적인 개인의 죄를 사해주는 주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해방과 치유를 통해 온전하게 하는, 바로 로마제국의 황제와는 전혀 다른 구주가 오셨다는 것을 선포하는 말 입니다.
팍스 로마나와 팍스 아메리카나를 대조하여 오늘날 온갖 폭력을 앞세우는 제국이 바로 아메리카라는 이야기를 수십번 들으셨을 것 입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바로 오늘날의 미국이다 라는 말 말입니다. 


물론 맞는 말이지만, 2012년 현재 소수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대체 어떻게 부를 것인가?를 고민해본다면, 몰락해가고 있는 제국과 곧바로 그 제국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야욕에 불타오르고 있는 또 하나의 제국, 그리고 제국들의 패권 싸움에서 새우등 터질 것이 뻔히 보이는데도 그들의 그림자 뒤에 서있으면서 마치 자신이 제국의 실체인 줄 착각하며 사는 우리와 주변국들의 모습까지 보아야 할 것 입니다. 
   

연중 이어지는 기독교절기는 우리가 지금 네번째 주일을 맞이하고 있는 대림절에서부터 성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창조절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세워가도록 짜여져 있습니다. 예수가 세상에 오시기를 기다리며  ‘온다’는 것을 새기는 ‘대림절’을 지나 성탄 전야가 되면 몸 풀 곳이 없어 헤매여야 했던 마리아와 요셉을 떠올리곤 하는데 오늘 오신다 해도 머물 곳은 더 찾기 힘들어진 이 세대에 주는 대림과 성탄의 메세지는 매우 강렬하고도 혁명적일 수 밖에 없을 것 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양극화로 치달아 가고 있는 상황에서 1프로와 99프로의 심한 불균형의 구도에서 1프로는 차치하고 99프로 안에서의 양극화가 더 무섭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국은 군사력, 경제력, 정치력, 이데올로기적인 힘으로 지탱됩니다. 군사력은 아실만큼 아실터이고, 노동과 생산을 장악해 가는 경제력도 비정규직과 정리해고라는 수많은 사례를 통해 경험한 바 있습니다. 정치력은 다양하게 설명될 수 있겠지만, 이번 선거만해도 도저히 유신과 함께 갈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 금단선을 넘어가는 것을 보며 조직과 제도를 쥐고 있는 장악력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이데올로기적인 힘이 세 가지를 끈끈하게 붙여놓는 본드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여전히 종북이라는 말 앞에서는 맥을 못추는 것이 우리네 현실입니다. 우리는 박근혜씨가 1억5천만원짜리 굿을 하고 박정희 탄신제를 지내는 장면을 보고 어이없어 했지만, 이미 일부에게는 신과 같은 존재가 되어 있는 박정희의 망령은 마치 독재와 폭력을 통한 평화가 가능하다고 믿게 만드는 마약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집단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무의식적인 한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때론 이러한 한이 분출되어 촛불물결을 이루기도 하지만, 대안과 희망을 딱히 발견하지 못할 때, 내적으로는 더욱 움추러 들게 만드는 요인이 됩니다. 그렇기에 정치, 경제, 군사적인 면에 있어서 더없이 중요한 시기, 더없이 위태로운 이 시기에 폭력을 선택하고야 마는 것은 그만큼 이 사회에 절망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이러니 하지요.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비폭력적이고 생명력을 담고 있는 것을 선택할 것 같은데, 더 폭력적이고 더 야만적인 것을 선택한다는 이 현실이 말입니다. 그렇기에 이 병적인 상태가 더욱 위태롭고, 위험하게 보입니다. 더 폭력적이고 더 야만적인 것을 선택한 집단은 결국 집단적으로 화인 맞아버린 양심에 대한 보상을 받기 위해 내가 아닌 다른 희생양을 찾기에 혈안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회복되어야 할 희망의 발신지, 기독교]


1627년 독일의 쾰른은 대도시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쾰른에도 중세에 횡행했던 마녀 사냥이 한창이었습니다. 늙은 여인들, 산파, 유랑자들, 거지들, 떠돌아다니는 도제들, 하루벌이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명문의 귀족 딸들, 공무원들, 사제들, 수녀들이 마녀로 고발되어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습니다. (112쪽) 17세기 초 역시 깊은 절망으로 인한 무력감이 사회를 뒤덮고 있었고, 전염병, 굶주림, 흉작, 가축의 떼죽음이 있었고 이에 대한 책임을 마녀들로 표 딱지가 붙은 사람들이 고스란히 져야 했습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빨간색 머리는 물론, 장애인이라서, 얼굴에 사마귀가 있어서, 젊은 여성이 남성과 육체적인 관계를 가졌다고 해서, 반대로 남성과의 관계를 피했다고 해서, 교회를 가지 않아서, 혹은 교회를 너무 자주 가서 등등  온갖 이유를 붙여 마녀를 찾아내기에 혈안이 되었던 때 입니다. 심지어 일곱살짜리 아이가 마귀새끼라고 화형을 당했습니다. 당시 종교, 그리고 종교 지도자는 무엇을 했을까요? 예상할 수 있다시피 마녀사냥을 정당화시켜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현재 한국에도 존경받는 예수회 신부님들이 많이 계시지만, 당시 후리드리히 폰 슈페라는 예수회 신부님은 마녀 사냥에 반기를 드는 사람도 마녀로 처형당하는 그 시절에 독일 권력자에게 꼭 필요한 책을 익명으로 출판합니다.


‘권력자들은 재판관과 관리들이 모든 일을 올바르게 하겠거니 하면서 자신의 양심을 무마시키려고 합니다. 재판관과 관리들은 모든 책임을 권력자에게 돌리면서 그들은 다만 명령을 수행할 뿐 이라고 말합니다. 이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자신이 처벌받게 될 것이라고 엄살을 떱니다.’  
‘책임적인 위치에 있는 이들이 양심에 따라 행동하지 않으면 그들의 영혼 구원은 큰 위기에 빠질 것 입니다. 내가 때때로 그들을 혹독하고 열정적으로 경고했다고 해서 전혀 놀랄 필요가 없을 것 입니다. 그러나 나는 예언자가 벙어리 개라고 부른 것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지 않습니다.’
슈페 신부 책 말미에 적혀 있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계급적으로나 사회적 지위에 있어 책임적인 위치에 있는 분들이 여기에도 많이 앉아있지만 무엇보다도 짙은 암흑이 도래한 시기에 우리는 기독교인이라는 이것 하나만으로도 이 사회와 이 역사 앞에 책임을 져야 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재판장과 관리, 혹은 정치가들의 무책임 못지않게 신앙인으로서의 우리들 역시 무책임함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 입니다. 
정치나 신앙이나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언급되지만, 본질로 본다면 진보와 보수는 양날개와도 같습니다. 앞으로 나아가되, 원칙적으로 지켜야 할 것들은 지켜나갈 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양날개는 커녕, 보수라고 불리우는 집단이 진정한 보수가 아니듯이 진보 역시 진정한 진보인지 의문이 들 때가 많습니다. 


1프로가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이데올로기의 의미와 해석의 힘을 쥐고 흔드는 것에 저항해야 한다고 하면서 99프로 안에서 1프로와 꼭 같은 방식으로 나만큼은 살아남으려고 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빨갱이와 종북으로 표 딱지 붙이는 것에 분노하면서도 우리 안에 또 다른 의미의 빨갱이와 종북을 만들지는 않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변혁과 해방은 용기와 헌신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손에 쥐고 놓치지 않으려 하고 오히려 경쟁만이 살길처럼 살고 있으면서 입으로는 변혁과 해방을 말한다면 주님께서 보시기에 가증스러운 일입니다. 

마리아의 노래 가사처럼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시고, 배고픈 사람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는 주님의 약속은 오늘날 우리도 간절히 바라는 바 입니다. 
없던 일로 하고 싶어도 뱃속의 아이로 모든 것이 설명되는 상황에서, 신변의 위험을 무릎 쓰고 고속버스도 없던 시절 북쪽 나사렛에서 남쪽 유대 지방의 산속에 살고 있는 엘리사벳을 만나러 발걸음을 재촉했을 마리아의 입에서 주님을 찬양하며 설레이는 노래가 흘러나올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을 두려워 하는 이들에게 베푸실 자비에 대한 희망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 입니다.
죽을 정도는 아니었나보지...이렇게 냉소적으로 볼 수 없는 것이 언제 어디서든 남편없이 임신한 여성을 죽이겠다고 달려들면 그 자리에서 죽어야만 하는 율법이 지배하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던 사람의 입에서 나온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에서 얼마나 강한 에너지를 뿜어내는지, 석달이 지나면서 몸이 더 불었을텐데 마리아는 왔던 길을 되돌아 갔습니다.
나이가 많고 아이를 갖지 못했다가 천사의 예고를 통해 잉태하게 된 사제의 부인 엘리사벳과 젊은 여성으로서 아마도 언제든 아이를 갖고자 했다면 갖을 수 있었을, 그러나 사회가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아이를 잉태하게 된 평범한 여성 마리아는 태에서부터 생명이 자라나는 것을 알게 된 그 순간부터 강한 에너지, 바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 세례 요한이고, 예수 입니다.     
마리아의 노래에 이어 나오는 즈가리야의 노래도 ‘해방’을 노래하며, 원수들과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손에서 우리를 구해주신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습니다.


어떠한 희망도 쉽사리 찾을 수 없는 세상에서 희망의 발신지가 되어야 하는 것이 종교의 역할입니다. 물론 거짓 희망이 아니라 참 희망의 표징이 되어야 하고, 종교라고 해서 반드시 기독교여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성탄의 계절만큼은 아기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체제 전복적이면서도 지극히 비폭력적인 저항의 정신이 면면히 흐르고 있는 기독교가 희망의 발신지가 되어야 합니다.


[또 다시 아기예수를 기다리며]


어느덧 제가 향린교회에 부임한지 9년하고도 4개월이 지났습니다. 오늘이 향린교회 부목사로 강단에서 하늘뜻펴기를 하는 마지막 날 입니다. 이달 말로 향린교회를 사임하고 나면 1월 첫주부터 섬돌향린교회에서의 새로운 목회를 시작하게 됩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섬돌향린교회에서의 공식적인 청빙과정이 마무리되기 전까지는 교단법상으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 이긴 합니다.  


기억하고 계신 분들이 얼마나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오늘 하늘뜻펴기 제목은 제가 향린교회에 부임한지 111일만에 처음으로 주일 하늘뜻펴기를 했던 2003년11월23일의 제목과 같습니다. 당시 원고를 보면 임태득 목사의 기저귀 발언에 대한 분노가 담겨 있습니다. 교계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발언이라 꼭 같은 말을 반복하는 사람은 더 이상 없을지 모르지만, 여성에 대한 비하와 성적 수치심을 일으키는 발언들이 교계를 포함한 이 사회에서 10년 사이 사라졌나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부자가 대신 죽어 줄 사람을 돈으로 살 수 있다면 가난한 사람은 풍족하게 살 수 있다’라는 말과 같은 돈과 부에 대한 경구를 예로 든 내용도 있습니다. 과도한 부를 부정한 방법으로 쌓아놓고 누리면서도 그 부를 하느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이라고 여기고, 부의 축적 과정에서 행한 모든 잘못을 정당화시키는 수많은 신앙인들의 슬픈 행태에 대한 이야기엿습니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 사이 변화가 있었을까요? 더하면 더했지 신앙의 양심에 따라 쌓은 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사람들이 전체 기독교인의 절반이 넘는다 등과 같은 소식을 들은 바 없습니다.


종교적인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던 부자 청년이 결국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돌아갔다는 본문을 함께 나누었지만 여전히 우리들도 시시때때로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돌아갈 뿐 전격적인 변화를 스스로의 삶에서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예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베드로가 냉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라며 무언가를 기대하는 맘으로 고백한 말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라는 제목을 땄습니다만, 저 역시 베드로가 가졌던 그 한계보다도 훨씬 더 못 미치는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서 다시한번 ‘모든 것을 버리고’라는 말을 되뇌여 봅니다.



저는 다시금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믿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성직자의 길을 가면 적어도 예수와 꼭 같을 수는 없어도 그 언저리라도 닮아가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목사 임직 직전의 심정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 맘 하나로 비록 18개월 된 어린 아이가 있지만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에 저항하는 현장에 아이를 업고서라도 함께 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용기 내어 향린교회에 지원서를 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제 아무리 ‘모든 것을 버리겠다’하지만, 그 사이 제게 지워진 책임과 역할이 늘어나 제 어깨가 많이 무겁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마치 제 개인의 명예로 여기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겠습니다.
 


매해 오는 성탄절이 또다시 코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깊은 절망감과 절박함이 한데 얽혀 분출되기 직전의 성탄입니다.



억압과 불의와 폭력은 곤봉과 방패와 최루탄으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정신과 삶 자체를 황폐화시키는 교활한 방식으로 우리네 삶을 잠식해가고 있습니다. 예수 탄생 시기에 갈릴래아의 수도 세포리스에서 일어났다는 항쟁 전후의 황폐함은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오늘날과 별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오히려 당시는 폭력을 동반한 저항이라도 일어났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는 오랜 기간 온 몸으로 저항하고 있는 이들을 그저 바라만 보다가 전혀 위협적인 존재조차 전혀 되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상식적인 역사관으로 보았을 때 새로운 정권은 독재와 제국의 야욕을 기반으로 한 세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다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곳에서 초라하게 탄생할 예수를 기다립니다. 우리에게 해방과 정의와 평화와 생명을 가져다 줄 성탄의 빛은 우리가 거듭나려고 몸부림치며, 머리가 아닌 진리가 이끄는대로 가슴을 내어 맡기고 온 몸으로 살아낼 때 참 빛을 발하게 될 것 입니다.
비록 제국과 자본의 폭력 앞에 전혀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 있는 이유가 있다면 예언자 미가의 말대로 야훼께서 내리시는 이슬이 되기 위해, 푸성귀 위에 내리는 가랑비가 되기 위해, 누가 이래라 저래라 하기 전에, 사람이 뭐라고 하기를 기다리는 일 없이 내리는 비가 되기 위해서 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과 같이 나의 존재의 의미를 깨달을 때 진정한 의미의 ‘모든 것을 버리고’가 가능해 질 것 입니다. 바로 그때, 마음이 교만한 자들이 흩어지고, 권세있는 자들이 내쳐지며,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 보내는 참 세상도 시작될 것 입니다.


부디 이런 세상을 만들어 가기 위해 2012년 대림절이 다 가기 전에 버리고 비울 것들을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더 늦기 전에 말 입니다.
바다에 물이 넘실거리듯 땅에 야훼를 아는 지식이 차고 넘칠 수 있도록 다시금 허리끈과 신발끈을 동여매고 일어납시다.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참고도서]
1. 첫 번째 크리스마스, 마커스 보그/존 도니믹 크로산 글, 김준우 역, 한국기독교연구소, 2011
2. 역사의 양심 양심의 역사-스파르타쿠스에서 알버츠까지, 채수일 지음, 다산글방, 1997
3. 상처받은 하나님의 마음-한에 대한 동양적 개념과 죄에 대한 서양 기독교적 개념, 박승호, 대한기독교서회, 1998



[파송사]


편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이제 온몸으로 밀고 나가야 하는 순간에 와 있습니다.
나도 여러분도 시작해야 합니다.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 일지라도 시작해야 합니다.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시작하십시오.*
 
어디서고 당당한 하느님의 사람답게 삶의 예배를 이어가십시오.

(*김수영의 시(詩)여, 침을 뱉어라-힘으로서의 시의 존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