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52:7-10; 98; 1:1-12; 1:1-14

 

요한복음 본문에 나와 있는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는 오늘의 하늘뜻펴기 제목은 70년대 박정희유신독재 시대 하에서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던 많은 목사님들이 즐겨 사용하던 제목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은 매우 특이한 복음서입니다. 다른 세 개의 복음서에 비하면 비의적 요소가 매우 강합니다. 바둑의 고수들이 바둑알은 동쪽에 놓지만, 실은 마음은 서쪽에 가 있는 경우와 같습니다. 그래서 영적 복음서라고 말하기도 하고 당대의 지식인들을 향한 철학적 복음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껍질을 벗겨내고 더 깊이 들여다보면 가장 혁명적인 복음서입니다. 물론 마태, 마가, 누가복음 또한 말씀을 깊이 들여다보면 그 안에 담긴 혁명의 생각들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아기 예수 탄생의 혁명성]

 

마태가 1장에서 말하는 예수 족보는 남성들 이름만이 들어가는 당시의 가부장적 시대를 거슬러서 4명의 여인 그것도 유대 여인이 아닌 이방 여인, 단순한 이방 여인이 아닌 모두가 스캔들로 가득찬 여인들을 예수의 족보에 넣음으로 당시 시대사상의 핵심이었던 유대교의 거룩의 개념을 부셔버렸습니다. 통치의 중심이었던 예루살렘 성전과 율법이 가장 더럽다고 규정한 것들을 통해 하느님은 자신의 뜻을 펼쳐가신다는 혁명적 선언이 족보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예수 탄생 얘기 속의 등장하는 별과 동방박사의 이야기 이는 당시 로마제국의 가장 강력한 대항마였던 파르티아제국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헤롯왕과 예루살렘 성안에 권력자들은 두려움에 떨게 되고 혁명의 뿌리를 잘라내기 위해 베들레헴의 유아들을 무차별하게 살해합니다.

 

마가는 1장에서 세례 요한을 통해 아합왕의 절대군주권력에 대항했던 예언자 엘리야의 재림을 말하고, 엘리야와 같이 불의한 지배 권력을 비판하던 요한이 옥에 갇히자 그를 이어 예수의 사역이 시작하고 있다고 분명히 밝힘으로 지배 권력에 대한 비판과 저항이 갈릴리 하느님나라 운동의 핵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기적사건으로 회당 안에 악령을 쫓아내심으로 로마제국의 악령이 이제는 유대성전구조 안에 뿌리박혀 있음을 폭로하였습니다. 누가는 마태와 마가가 전하는 사건들에 여러 살을 붙여 더 사실적으로 전하면서 제사장 사가랴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시대의 의인 시므온의 찬가를 통해 예수에 의한 하느님 나라 운동이 갖고 있는 사회경제정치적 혁명성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고, 아기 예수가 말구유에 태어났다는 얘기를 통해 로마의 폭력적인 군사체제 자체를 근본에서부터 뒤집고자 의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니 이런 얘기가 아니라 하더라도 동정녀 탄생으로부터 시작하여 부활로 마쳐지는 복음서들은 이 두 이야기만으로도 엄청난 혁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 복음서를 다 알고 있었던 요한복음은 이보다 더 본질적인 혁명이 필요하다고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아우구스투스 황제 그리고 그 이전 예루살렘을 폭력으로 다스렸던 신의 현현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었던 안티우크스 에피파네스와 같은 셀류쿠스제국의 통치자들은 모두 신격화작업을 통해 그들 또한 동정녀 탄생 그리고 그들의 통치는 영원하다고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 요한은 세복음서의 이야기보다 더 급진적인 이야기를 기술해야 했습니다.

 

[요한의 혁명서]

 

그래서 요한은 기존의 복음서와는 달리 땅의 얘기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얘기로 시작합니다. 1성서의 창세기에 버금가는 새로운 코스모스/우주의 시작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이 구절을 예수의 신성을 말해주는 교리적인 해석을 이끌어낼 수도 있지만, 요한의 의도는 그런 것에 있지 않았습니다.

 

여기 말씀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헬라어 로고서(Logos)는 한 두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는 그리 단순한 단어가 아닙니다. 한 개인의 본질인 마음 혹은 이성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사회의 본질인 언어 혹은 대화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요한은 이 로고스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 단순히 예수를 통해 하느님이 뜻을 드러난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 이야기에서와 같이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온 우주가 창조되었듯이 예수의 말을 통해 새로운 하늘과 땅이 창조되고 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은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통치이념으로 자리 잡게 된 초기 로마제국의 서구교회는 이 구절의 본래성을 상실하고, 그만 헬라의 철학적 논리에 빠져 피를 부르는 교리논쟁에 말려 들어가고 맙니다. 소위 말하는 아리우스파와 아타나시우스파의 논쟁입니다. 아리우스파는 어떻게 절대 신이 둘이 될 수가 있느냐고 해서 이를 은유와 상징으로 해석하려고 했고, 아타나시우스파는 예수의 신성 없이 어떻게 죄의 사함이 일어날 수 있느냐는 반론을 통해 이를 실제의 의미로 해석하였던 것입니다. 오랜 싸움 끝에 아리우스파는 이단으로 쫓겨나가게 됩니다만, 사실 이를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보면 교리나 신학적인 관점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분열의 위기에 처했던 로마 황제가 정치적인 이유로 한쪽의 손을 들어준 것입니다. 지금도 동방교회는 아리우스파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후에 니케아신조와 사도신조를 통해 하느님, 예수, 그리고 성령은 서로 다른 세 인격체이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한분이라는 논리적으로 쉽게 이해하기 힘든 삼위일체론에 근거한 유일신관을 형성했고 이것이 정통교리로 자리 잡으면서 여기에 조금이라도 반론을 제시하면 이단으로 몰리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고 전통이나 교리가 아닌 이성과 양심을 신앙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는 일신론의 유니테리안 교회들이 서양에서는 자리를 잡아가고 있지만, 남한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사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부러워하는 하바드대학이 유니테리안 교회의 본거지입니다. 남북한을 총체적으로 본다면 땅덩어리가 작아서 그런지 아니면 조선시대로부터의 유학 사색당파 싸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단순히 교회뿐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사회전반의 사상적 분위기가 교조적인 경향이 상당히 강하고 파벌적입니다. 물론 남북 대립으로 인해 더욱 고조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전에도 그런 경향이 매우 강하였습니다.

 

사실 요한이 그러했던 것처럼 예수의 신성을 주장했던 아타나시우스의 주장 또한 우리가 생각하듯이 단순히 예수를 신으로 경배하고자 했던 교리적 관점은 아니었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인간이 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신이 되기 위함이다. 예수가 육신의 몸을 입으셨다는 말은 우리 또한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몸을 입기 위함이다. 예수께서 인간의 교만을 견디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썩지 않는 불멸을 상속하게 하려 함이다.”(Athanasius, On the Incarnation 54:3, Feasting on the Word Year C Vol. 1, Westminster Press 144쪽에서 재인용) 요한이나 아타나시우스는 하느님께서 인간 해방을 위해 낮아지셨다는 화육의 관점에서 이를 말하였는데, 교회가 이를 너무 교조화시켜버린 것입니다. 남한교회는 유독 사도신조만을 모든 예배 때마다 암송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남한교회의 종교적 교조성을 여실히 증명하는 하나의 예입니다. 요한이 강조했던 바는 인간 예수 안에서 계시되는 하느님의 빛 됨과 생명력이었습니다.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는 사회정치적 해방의 선언이었던 것입니다.

 

[제국의 평화?]

 

요즘 잘 쓰지 않습니다만, 우리는 특출한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은 하늘이 보낸 사람이라는 말을 합니다. 하늘이 보낸 사람, 2천년전 예수님 당시에는 이를 줄여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칭호는 단지 예수님에게만 붙여진 칭호가 아니라, 이 칭호는 로마 황제를 비롯한 여러 제국들의 통치자들에게 붙여졌던 칭호입니다. 예수 당시에는 악티움해전에서 클레오파트라와 한편이 된 정적 안토니우스를 격파함으로 로마의 오랜 내전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가져온 옥타비아누스를 두고 붙여진 칭호입니다. 누가복음에 아기 예수 시대의 통치자로 말해지는 로마황제  '아우구스토'라는 칭호가 바로 신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평화는 지배자 로마인들에게는 평화를 주었는지 모르지만, 식민지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더 큰 세금 착취와 강제 노동의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는 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거대한 신전들을 새로 짓기 시작하고 신전을 보호하기 위한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를 평화의 왕으로 선포하고 그를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초대교회는 이런 제국의 평화가 거짓 평화임을 폭로하고 바로 민중들의 삶이 우선시되고 사회적 약자들이 주체가 되는 것이 참 평화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말하는 평화와 안보라는 말 뒤에 숨어 있는 거짓을 볼 줄 알아야 하고, 국민대통합과 잘살아보세라는 구호 뒤에 숨어 있는 통치기제의 숨은 의미를 알아채야 합니다. 올해 교수들이 뽑은 사자성어에는 온 세상이 모두 탁하다.’는 뜻의 거세개탁(擧世皆濁)이 선정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한 이유로 대통령은 내곡동 사저 부지 문제 등 스스로 탐욕의 화신이었음을 보여줬고, 검찰이나 법원은 법을 남용하고 오용함으로써 정의를 우롱해, 모든 윤리와 도덕이 붕괴되고 편법과 탈법이 판을 쳤다.”고 말했습니다.

 

5년 후 선택될 사자성어는 어떤 단어가 될까요? 저는 잘못하면 이명박정권보다 더한 탈법이 진행될 것이고 봅니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 시장금융자본주의는 더욱 강하게 우리 사회를 압박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5년 전 현 MB 정권이 시작할 때, 그가 747의 공약을 얘기하고 4만 불이라는 장밋빛 미래를 약속할 때, 우리는 그의 걸어온 과거 행적을 통해 이것이 모두 허위와 거짓이 될 것이라고 말해왔습니다. 그건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같은 이치입니다. 저는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지만, 우리는 떡잎을 보면, 앞으로의 열릴 열매가 미루어 집작할 수 있듯이, 박근혜 당선인이 걸어 온 과거의 행적과 발언들 그리고 막말의 독설가를 자신의 대변인으로 선택한 사실에도 알 수 있듯이 딸이 아버지 뺨친다혹은 구관이 명관이다라는 얘기가 내년 이맘때쯤이면 사회의 회자하는 유행어가 될 가능성이 많다고 보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 울려 퍼진 해방의 복음]

 

복음서는 어둠이 짙어가던 시대에 로마의 황제와 헤롯왕가의 착취와 폭력이 극에 달했을 때에 외쳐진 하늘의 외침, 복된 소식입니다. “반가워라, 기쁜 소식을 안고 산등성이를 달려오는 저 발길이여,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희소식을 전하는구나.” 하는 이사야의 외침은 근 70년간의 바빌론 포로생활로 인해 고국으로 돌아갈 희망이 완전히 끊겨 절망과 실의 속에서 살아가고 있던 그 유배자들에게 들려졌던 희망과 구원의 외침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온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아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요,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신 분이시며,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라는 히브리 저자의 말은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한 일종의 신학적 선언이 아닙니다. 이는 로마황제의 핍박으로 추방을 당하거나 아니면 원형극장 안에서 피를 부르는 로마인들 앞에서 굶주린 사자의 밥이 되거나 하는 절대절멸의 위기의 순간 속에서 드렸던 고백이었습니다. “하늘과 땅은 없어질지라도 주님은 영원합니다.”는 화형의 불길이 자신의 몸을 덮치려던 그 순간에 하늘을 향해 외쳤던 외마디의 찬양이었습니다.

 

성탄절은 단순히 오늘 하루를 기쁘게 보내고자 하는 얄팍한 의도로 만들어진 날이 아닙니다. 1225일은 일 년 중 가장 짙었던 어둠이 서서히 물러가는 날입니다. 1225일만이 성탄절이 아닙니다. 이 날로부터 폭력에 근거한 거짓의 평화는 끝이 났고 이제로부터 새로운 역사가 시작한다는 선포의 날인 것입니다. 어둠과 거짓의 시대는 끝나고 빛과 생명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선포의 날이요 동시에 그날이 속히 오도록 예수님과 더불어 싸워나가겠다는 결단의 날인 것입니다.

 

저를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인 한번이라도 있었나요? 그건 착각이었을 따름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