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주일 <용서와 감사>

삼상 2:18-20, 26: 시 골 3:12-17; 2:41-52

 

오늘은 교회력으로는 성탄절 후 첫 번째 주일로 지키기에 성서 본문 말씀은 소년 예수의 모습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2012년 마지막 주일을 보내고 있고, 또 성도추모주일로 지킵니다.

 

[시간 사이()로서의 人間]

 

소설뿐만 아니라 영화로도 유명한 <그리스인 죠르바>, <최후의 유혹> 등을 쓴 그리스문학의 대표적인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인생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끝 모를 심연에서 태어나 끝 모를 심연으로 사라져 가는 우리들, 그 사이에 빛나는 시간이 인생이다.” 여러분의 2012년 한해의 인생은 어떤 쪽이었습니까? 빛나는 인생이었나요? 아니면 빛이 바랜 인생이었나요? 더 큰 희망을 향한 전진하는 한해였습니까? 아니면 내 인생에서 지우고 싶은 절망과 불안의 한해였습니까?

 

물리적으로 볼 때에는 1231일과 11일은 아무런 차이가 없지만, 역사나 실존의 의미에서는 한해가 가고 한해가 온다는 점에서 엄청난 차이를 느낍니다. 오늘과 내일 우리는 묵은해를 보내는 아쉬움과 새해를 맞는 희망의 교차선상에서 복잡한 감정을 갖게 됩니다. 젊은이들은 한 살을 더 먹는다는 기쁨에 나이 드신 분들은 한 살을 더 먹음으로 죽음에 한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간다는 두려움과 불안을 갖게 됩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에게 있어 공포는 대상이 있으나 불안은 대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 신화는 인간의 유한성과 실존성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처음 불안이라는 신이 인간을 만들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먼저 땅의 신에게 가서 흙을 빌리고, 영혼의 신에게 가서 생명과 호흡을 빌려 인간을 만듭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관심이 없던 땅의 신과 영혼의 신이 서로가 인간을 차지하겠다며 물러서지 않습니다. 하는 수 없이 제우스에게 중재를 부탁합니다. 세 신 사이에서 그는 이렇게 판결을 내립니다. “흙의 신, 너는 이 사람이 살다 죽으면 그의 몸뚱이를 도로 찾아가거라. 영혼의 신, 너도 그가 죽으면 그의 영혼을 찾아 가거라. 그러나 이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불안의 신, 네가 이 사람을 차지하도록 하여라.”

 

[불확실한 자유? 확실한 독재?]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등등의 베스트셀러를 펴내고 있는 영국의 사상가인 알랭 드 보통이 작년에 <불안>이란 제목의 책을 펴냈는데, 그는 인생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이다.” 곧 불안과 욕망을 인생의 핵심으로 본 것입니다.

 

불안의 원인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경기불황, 실업, 승진, 퇴직 등등의 여러 요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본인이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경우 불안은 타인과의 비교에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에서 시작합니다. 저 친구는 저렇게 성공하는데, 나는 도대체 뭔가? 우리가 분명히 과거보다 물질적으로 더욱 풍부해졌는데도 불구하고 대댜수의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은 상대적인 비교 때문입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 5,60대가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말합니다. 동료 목사들을 만나면 자연스럽게 여기에 대해 얘기를 나누게 됩니다. 동시대의 사람들로 혹독했던 독재시대를 경험한 사람들인데, 무엇이 독재에 대한 향수를 갖게 만든 것일까? 첫째는 역사인식이 부족 때문입니다. 박정희의 과거에 대해, 일제시대의 천황에게 혈서로 충성을 맹세한 일본군 장교로서, 그리고 해방 후 여순반란사건의 공산주의자로서의 배후 조정자였음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적대의식입니다. 수십 년의 반공교육에 세뇌를 당해 북한을 통일을 향한 동반자로 보지 않고, 사라져야 할 원수로 보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자신들의 생각과 다르면 적으로 인지하는 흑백사고에 젖어 있습니다. 북한에서 수입하면 매우 싸게 살 수 있는 광산물을 비싼 값에 외국에서 사들여오고 있으며, 글로발호크같은 수조원에 달하는 값에서 뿐만이 아니라 곧 구형이 되기에 미국 국방부에서조차 구입하지 않는 불필요한 무기를 들여오는 어리석은 봉이 된 남한의 현실이 보이지 않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작은 것에 매여 큰 것을 놓치는 어리석은 세대가 된 것입니다. 세 번째 저들은 막연한 불안을 갖고 있습니다. 제어되지 못한 욕망으로 인한 미국발 금융위기로 일어난 경기침체를 개인화시켜 상대적 박탈감과 열등감에 빠져 있다 보니 과거 자신들의 어린 시절, 영웅으로 인식되어졌던, 교실 정면 액자 속의 인물 박정희의 독재 향수에 기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세대는 태어나면서부터 국가와 민족을 앞세운 독재정권의 이념의 노예로 살아왔습니다. 그게 하루 아침에 바뀔 수가 없습니다. 평생을 노예로 살아온 사람들은 자유를 주어도 무엇을 어떻게 주체적으로 판단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기에 다시금 노예 생활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불확실한 자유보다는 확실한 독재를 원하는 것입니다. 히브리노예들이 다시금 애굽의 노예로 돌아가자고 하는 이유입니다. 히틀러가 집권하게 된 동기가 그러하고 최근의 일본의 극단적인 우경화 또한 마찬가지 이유입니다. 불안하면 독재에 기대고 환상과 신비의 종교를 찾아 나섭니다. 기독교만 보더라도 6,70년대 사회적 불안 속에서 전도관이 성행했고, 지금은 신천지가 성행하고 있습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자본주의가 발달하면 할수록 불안은 점점 커지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때 인간은 자본의 수단으로 전락하게 되고 서로가 사랑의 대상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관계로서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랑의 결핍이 생겨나고 그 공간에 공허함과 불안이 차게 됩니다. 많은 경우 이 공허와 불안을 쇼핑과 유행으로 해소하고자 하지만, 유행의 첨단을 좇아갈 수 있는 사람은 소수만이 가능한 법, 다수는 또 다시 불안의 늪이라는 쳇바퀴 안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불안으로부터의 해방]

 

알랭 드 보통은 불안의 원인으로 사랑결핍,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불확실성을 들고 있고 이에 대한 치유책으로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안의 해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언뜻 생각해 보면 철학과 예술이 먹고 사는 일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 답이 쉽게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포탄이 비 오듯이 떨어지는 전쟁 중에도 누군가는 시를 쓰고, 노래는 탄생합니다. 전쟁 중에도 예술이 이어 내려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위대한 예술은 한 시대를 품고 있으며 진실된 영혼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광활한 자연 혹은 폐허가 담긴 풍경화는 우리 존재의 미약함을 일깨워 한갓 부 따위에서 오는 불안을 상쇄시켜주고, 풍자와 유머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허구를 드러내어 불안을 줄여줍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예술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이고 가난한 예술인들이 더 큰 생명력을 드러내는 이유입니다.

 

한 해가 지나가는데, 올해 여러분은 이 시대의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몇 권의 책을 읽어보았으며, 음악컨서트나 미술관은 몇 번을 드나들었습니까? 저는 우리 교회 안에 <철공소>라는 철학을 공부하는 소모임과 <>이라고 영화비평 소모임이 생긴 일에 기뻐합니다. 이는 인생을 풍성하게 만들어갈뿐더러 교우관계를 깊게 만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2,30대의 청년들과 6,70대의 나이 드신 분들이 함께 동참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죽는 그 순간까지 배움의 끈을 놓지 않는 것 그것이 인생을 성공적으로 사는 길입니다. 뷔페 음식 한 끼를 즐기기보다 미술관이나 음악회를 가는 것이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길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유한 사람은 대기업 사장이나 부동산 재벌이 아니라, 캄캄한 밤, 별 밑에서 강렬한 경이감을 맛보거나 이웃의 아픔에 연민으로 다가가 자신의 것을 나누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불안에서 벗어나려면 물질에 목말라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자 러스킨이 말할 것처럼 친절, 호기심, 감수성, 겸손, 경건, 지성에 목말라 하여야 하고, 보다 근원적으로 벗어나려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평화에 목말라 하고 하느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일에 목말라 하는 것입니다.

 

헨리 소로우의 <윌든>이란 책을 보면 자연 안에서 살아갈 때, 돈과 풍족한 삶은 거의 관계가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요즘은 귀농하는 인구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는데, 저희 교회 안에도 몇 년 전부터 농촌마을공동체의 부활을 꿈꾸며 준비하여 왔는데, 내년이면 어느 정도 가시화가 되어갈 것입니다. 오늘의 시장자본주의 시대에 교회가 선택하는 대안적 삶의 하나로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현재 남한 땅에서의 성공의 개념은 너무 획일화되어 있습니다. 주위의 시선에 개의치 마시기 바랍니다. 삶에서 성공을 거두는 길에는 여러 가지가 있고, 그 성취감은 자기만이 느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세상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아니라내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입니다.

 

[자유인으로서의 불안]

 

지난 주 대한문에서 최근 죽음을 맞이한 노동자 4분의 추모 행사를 마치고 식당에서 마주 앉은 한 젊은이가 저에게목사님은 영생을 믿습니까?’하고 묻더군요. 아마 그가 고민하는 문제였던 것 같고, 또 그가 무슨 의도에서 이런 질문을 하였는지 대강의 짐작은 했습니다만, 짤막하게, 믿습니다.’하고 답을 했습니다. 물론 저는 맑스주의자들이 비판하는 바, 현실도피적인 아편 신앙의 관점에서 영생을 믿는다고 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체로 사회개혁적인 관점에서 종교를 비판하고 신과 영생에 대한 신앙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심리에는 만약 천국이나 영생이 있다고 가정할 때, 과연 들어갈 수 있을까 없을까 하는 불안감의 소재를 없애버리는 의도도 숨어 있다고 봅니다. 신이 있다고 할 때, 신으로부터 받는 어떤 제재가 싫은 것이지요. 그러나 사실, 참 신앙은 그런 제재로부터 벗어나는 일에 있고, 불안으로부터 해방받는 일에 있습니다.

 

당시의 유대율법주의가 만들어 놓은 종교의 벽을 허물고, 성전 깊은 곳에 갇혀 있었던 야훼 하느님을 향해 나의 아바라 부르고 자신은 그 아들로 여긴 분이 예수였습니다. 영생신앙이 인간을 종교 안으로 더욱 억맬 수도 있지만, 반대로 인간을 종교로부터 해방을 시킬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뽑아주신 사람들이고 하느님의 성도들이며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들입니다.’라고 선언하는 것은 종교라는 틀 안으로 우리를 몰아넣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종교의 틀 밖으로 나가 자유인으로 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삶의 안정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 인간은 좌절하는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삶이란 본래 불확실한 것입니다. 인간이란 본래 불안정한 존재이고 삶은 계속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바다가 소금 맛이듯이 여러분이 어느 곳에서 삶의 맛을 맛보았다면 그것은 불확실성의 맛입니다. 불안. 그것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더 많이 죽어 있을수록 더 안전합니다. 우리가 무덤 속에 있을 때 누구도 우리를 해칠 수 없습니다. 다만 살아 있을 때에 우리는 상처를 받습니다. 상처가 있고 불안하다면 그건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왜 사람은 불안해하는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개연성을 인정하면 불안은 사라집니다. 왜 우리가 상처를 받습니까? 자신이 아는 세계만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주장하는 세계 또한 옳은 것임을 알면 상처받을 이유가 사라집니다. 자유인이라 불확실성의 세계에 불확실성의 자신을 송두리 채 던져 넣는 사람입니다.

 

[향린 어린이들의 기도]

 

오늘은 12세를 맞은 청소년 예수가 매년 그러했던 것처럼 오늘날로 말하면 해방일인 과월절을 맞아 예루살렘 성전에 갔다 일어난 이야기로, 예수의 어린 시절로부터 30세 이전까지에 대한 복음서의 유일한 이야기입니다. 성전에 홀로 남은 12살의 예수가 성전의 학자들과 수준 높은 대화를 했고 그들이 예수의 지능과 그 태도에 경탄했다는 구절은 예수의 어린 시절이 비범했음을 강조하고 있지만, 실상 오늘 본문에서 중요하게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부모님들이 아들 예수를 발견하고 약간은 꾸중하는 태도로 애야, 너를 찾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른다.” 하고 말하자, 예수는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 하고 답하는 구절입니다. 여기서 내 아버지의 집은 장소로 말하면 예루살렘 성전이지만, 여기에 숨어 있는 뜻은 예수는 당시 성인으로 인정받게 되는 12세가 되면서 자신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추구해야 할 하늘 어버이의 뜻을 알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공자는 나이 50에 지천명에 도달했다고 한 것에 비하면 매우 빠른 셈입니다. 물론 그러나 세상에 나와 그의 뜻을 펴기까지는 근 20년의 세월이 지나가야 했습니다.

 

2주전 성탄절을 앞두고 향린의 어린이들이 각자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문을 썼다고 합니다. 몇 개의 기도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나의 핏줄 같은 하나님. 언제나 제 곁에 계시면 힘들 때 외로울 때 힘이 될 것 같아요. 앞으로도 지금처럼 힘들 때 지켜주세요. 서해 올림> <저의 모든 죄를 용서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없었다면 이 세상은 텅 빈 허허벌판이 되었을 것이에요. 사람들을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권동환 올림> <나를 건지시는 하나님! 요즘 많이 예배에 집중을 잘하지 못할 때가 많네요. ! 제 소개를 안했네요. 저는 9(2학년) 친구인 홍민기란 아이예요. 제가 태어나기 전 아주 오랜 옛날엔 텅 빈 세상이었죠? 그때 하나님이 해와 달 그리고 바다를 만드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많은 생명체를 만들어서 고마워요. 마지막으로 사람을 만들어서 이렇게 좋은 세상에서 살고 있게 해주셔서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민기올림>

 

<나의 생명이신 하나님. 그동안 우리를 보호해주고 우리를 잘 살게 해주어서 감사합니다. 또 우리한테 이렇게 친구도 만들어 주시고 또 우리 생일도 만들어 주어서 감사합니다. 또 전 하나님이 좋아요. 선규올림> <하나님께,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이 땅을 만드시고 절 만들어 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저를 밤낮으로 지켜주신 방패 역할을 해주셔서 감사해요. 앞으로 열심히 살께요. 김서현 올림> <나를 영원히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 항상 저를 사랑해 주시고 돌보아 주셔서 감사해요. 다음 주 목요일에 거제도 외할머니 댁으로 갑니다. 가는 길이 멀고 힘들겠지만 하나님이 저를 지켜주시고 힘들지 않게 도와주실 거라고 저는 믿어요. 가는 길에도, 거제도에 가서도 재미있고 행복하게 있다가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주세요. 저는 기도할 때면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져요. 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들을 수가 없어요. 마음을 열어보아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어요. 저에게 음성을 들을 수 있게 해주세요. 하나님, 사랑해요! 서해올림>

 

예수는 몸과 지혜가 날로 자라면서 하느님과 사람의 총애를 더욱 많이 받게 되었다는 오늘 본문 말씀과 같이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를 더욱 많이 받는 향린의 어린이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신과의 인터뷰]

 

어떤 사람이 신과 인터뷰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신이 말했습니다. “네가 나를 인터뷰 하고 싶다고 했느냐?” 저는 대답했습니다. “시간이 있으시다면...” 신이 미소를 지었습니다. “나의 시간은 영원이다. 무슨 질문을 하고 싶으냐?” “사람들을 보실 때 어떤 것이 가장 신기한지요?” 신이 대답했습니다. "어린 시절을 지루해 하는 것, 서둘러 자라나길 바라고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길 갈망하는 것, 돈을 벌기 위해서 건강을 잃어버리는 것, 그리고는 건강을 되찾기 위해서 돈을 잃어버리는 것, 미래를 염려하다가 현재를 놓쳐 버리는 것, 결국 미래에도 현재에도 살지 못하는 것, 결코 죽지 않을 것처럼 살더니, 결국 살았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죽는 것.” 신은 나의 손을 잡았고, 우리는 잠시 침묵에 빠졌습니다.

 

이어 질문했습니다. “어버이로서 어떤 교훈들을 당신의 자녀들에게 해주고 싶으신가요?” “다른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도록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단지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너 스스로를 사랑받게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부자는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가장 적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너희에게 사랑을 표현 못하거나 말하지 못하는 사람 중에서도 너희를 진실히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뽑아주신 사람들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백성들입니다. 그러니 따뜻한 동정심과 친절한 마음과 겸손과 온유와 인내로 마음을 새롭게 하여 서로 도와주고 피차에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사랑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완전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려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아 한 몸이 된 것입니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십시오.”

 

크게 보아 세 가지를 부탁합니다. 서로 용서하십시오.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그리고 항상 감사하며 사십시오. 바울의 말씀에 의지하여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새해를 새해답게 정말 새롭게 맞이하려면 먼저 잘못된 과거와 인연을 끊어야 합니다. 이 인연을 끊는 것이 용서입니다.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았다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용서 못할 잘못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용서받지 못할 죄로부터 용서함을 이미 받았기 때문입니다. 올 한해가 가기 전에 모든 이를 용서하시고 과거의 억매임으로부터 자유하시기 바랍니다. 용서는 자신의 존엄성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한해를 마감하는 사랑의 실천]

 

그리고 사랑의 실천입니다. 한해가 가기 전에 한 가지를 제안합니다. 내일 저녁 우리가 10시에 이곳에서 송구영신예배를 드리게 되는데, 그에 앞서 작은 사랑 실천을 제안합니다. 대한문에 가면 쌍용차, 제주강정마을 등의 함께 살자는 농성천막이 있고, 그 건너편에는 우리가 지난 2년동안 함께 아픔을 같이 해온 재능해고자들의 천막이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작은 선물을 드리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의 정성이 들어간 작은 선물, 예를 들면 빵이나 떡이나 과자를 만들어서 전달하였으면 합니다. 9시에 대한문으로 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과자나 빵을 한 세트 더 만들어 오시어 예배 전 향우실에서 함께 나누었으면 합니다. 우리는 선물 그러면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기도와 정성이 들어간 작은 것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여러분 참여하실 것이지요?

 

인간의 성공은 그 인간이 부와 지위에 있어 얼마를 만들어냈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과 감사에 달려 있습니다.

 

인생이란 끝 모를 심연에서 태어나 끝 모를 심연으로 사라져 가는 우리들, 그 사이에 빛나는 시간이다.”라는 카찬차킨스의 정의는 맞습니다. 문제는 이를 빛으로 만들어가는 우리들의 노력입니다. 한해의 마지막, 용서와 사랑의 실천과 감사의 기도로 우리들의 빛을 한껏 드러내십시다. 카찬차키스는 자신의 묘비에 이런 글을 남겨 놓았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보내는 말]

 

사람들에게 자유와 행복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 축복이 필요합니다.

축복은 한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두 영혼이 신 안에서의 진정한 만남의 순간입니다.

우리가 서로의 삶을 축복해줄 때, 우리는 더욱 더 친밀해지고 그 속에서 잃어버렸던 나 자신을 찾게 됩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축복할 때 우리는 우리를 소외시키는 두려움과 무기력함과 불신에서 해방됨을 깨닫게 됩니다.

 

축복은 우리가 세상의 자녀가 아닌 하느님의 자녀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축복은 우리를 세상의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을 시키고 우리를 영원의 자유로 인도합니다.

 

우리의 미래는 전문적인 기술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삶에 얼마나 충실한가에 달려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의 미래는 우리의 삶을 얼마나 축복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