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 빛을 발하라(2): 신앙공동체성의 회복

42:1-9; 29; 10:34-43; 3:13-17

 

오늘은 주현절 후 첫째 주일로 일명 예수의 세례주일이라고 불립니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세례 받는 장면을 말하면서 세례는 단순히 우리가 이해하는 회개의 예식이라든가 혹은 교인됨의 기준이라는 관점이 아닌 하느님의 명령이 비둘기 모양의 성령을 통해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예수를 통해 새로운 역사가 시작하고 있음을 알리는 하늘 열림의 사건이다. 그렇다면 이 예수를 통해 열려지는 새로운 역사적 사건의 핵심은 무엇인가? 과거와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성서는 이 다른 점을 예언자 이사야의 종의 노래와 관련시킨다.

 

예언자란 백성들이 처한 역사적 상황을 꿰뚫어 보면서 미래의 새 역사를 펼쳐 보이는 하느님의 사람이다. 이들이 말하는 새 역사는 사탕발림의 허황한 역사가 아니다. 예언자들이 외치는 새로운 역사란 애굽 제국의 압제 아래 고통 받던 히브리 노예들이 해방을 받는 출애굽 역사와 언제나 그 맥을 같이 한다.

 

이사야서는 모두 66장이지만, 이는 그 내용에 따라 세부분으로 구분된다. 1장부터 39장까지를 제1이사야, 40장부터 55장까지를 제2이사야, 56장부터 66장까지는 제3이사야라 구분하여 부른다. 1이사야는 소용돌이치는 국제정세 속에서 외세에 의존하려고 하는 군사적 동맹을 단죄하면서 정의를 최고의 가치로 삼아 야훼 하느님만이 구원의 유일의 길임을 강하게 설파한다. 2이사야는 바빌론 귀양살이에서 희망을 잃어버린 유대민족에게 이제 곧 제2의 출애굽이 있을 것임을 예고한다. 3이사야는 귀양살이에서 돌아와 흩어진 공동체들을 하나로 묶기 위한 연대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고난의 종과 신앙의 역설]

 

오늘 본문은 제2의 출애굽을 선포하는 제2이사야에 속한다. 그런데 이제 제1의 출애굽을 이끌었던 모세를 대행할 지도자는 과거와는 다르다. 어떻게 다른 것인가? 그것이 바로 제2이사야에 등장하는 저 유명한 4개의 종의 노래이고 오늘 본문은 그중 첫 번째 노래이다. ‘나 야훼가 너를 부른다. 정의를 세우라고 너를 부른다. 내가 너의 손을 잡아 지켜주고 너를 세워 인류와 계약을 맺으니 너는 만국의 빛이 되리라. 소경들의 눈을 열어주고 감옥에 묶여 있는 이들을 풀어주고 캄캄한 영창 속에 갇혀 있는 이들을 놓아주어라.’ 여기서 는 누구인가? 메시야라 불리는 한 개인으로 볼 수도 있고, 새로운 깃발아래 혈연을 넘어서서 구성되는 민족적 집단으로 볼 수도 있다. 저는 민중신학의 관점에서 이 둘을 관점을 동시에 갖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저는 서구 신학자들이 그간 개인이냐 집단이냐 하는 이런 논쟁을 하는 것은 핵심을 흐리는 일로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 읽어드린 말씀만 갖고는 과거와 무엇이 다른 것인지가 확실치 않다. 오늘의 이사야의 예언 이전까지의 하느님 나라의 진행방식은 실상 그동안의 제국들이 행해왔던 힘에 기초한 정의로운 사회 건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정의의 규정은 달랐다. 제국들은 자신들의 정의(定議)에 따른 정의(正義)로운 질서를 말해왔고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에 근거한 정의로운 사회를 말해왔다. 그런데 여기 제2이사야에 이르러 단순히 그 목적만이 다른 것이 아니라 이를 실행하는 방법과 그 주체마저 전연 다른 것임을 천명하다. 소위 말하는 역사 주체 패러다임의 변화이다.

 

그는 소리치거나 고함을 지르지 않아 밖에서 그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잘라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버리지 아니하며, 성실하게 바른 인생길만 펴리라.’ 지금 야훼께서 새로운 지도자로 불러 세우는 그 사람은 전연 볼품없는 사람이다. 마치 털을 깎이는 양처럼 폭력 앞에 힘없이 서 있는 사람이며 부러진 갈대와 같이 이미 삶이 꺾인 사람이며 심지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다. 이는 지금까지의 다윗왕을 상징으로 하는 왕홀을 높이 쳐드는 그런 승리자로서의 메시야 상과는 완전히 다른 상()이다. No Cross, No Crown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 왕관도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예배실 정면에 보이는 여러분이 지난 주 자신의 십자가를 단 예수님의 십자가에 얹혀 진 가시면류관을 보고 계신다. 찌르는 가시로 만들어진 저 면류관이 곧 이사야가 말하는 새로운 정의 질서를 세우는 메시야의 상징이며 고난 받는 종의 노래의 핵심입니다. 낮아진 자가 어떻게 높은 자, 약한 자가 어떻게 힘센 자들을 다스릴 것인가 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신앙의 역설이다. 기독교는 수치의 상징이자 패배의 상징인 십자가를 승리와 영광의 상징으로 외치는 역설적인 종교이다. 마굿간에 태어난 아기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신앙이다. 논리로는 말이 안되지만, 여성은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과 같이 생명의 세계에서는 가능한 비약이다.

 

[경계를 넘어라]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를 만나는 얘기는 910장에 걸친 긴 서사 이야기입니다.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이야기이자 사도행전의 분기점을 이루는 사건입니다. 베드로에서 바울에게로 선교의 바통이 넘어가는 순간이며 닫혔던 이방인 구원의 문이 활짝 열리는 개벽의 사건입니다. 초대교회 안에는 예수를 따랐던 유대인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육신의 할례라는 유대교의 전통적 가치를 새로운 신앙공동체의 일원이 됨에 있어 중요한 기준이었습니다. 이방인으로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예수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자 했던 사람들에게는 무의미한 일이었습니다. 이는 안식일법을 거부하시며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셨음을 선포하셨던 복음을 율법으로 되돌리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 하느님께서는 이방인 그중에서도 유대인들이 가장 미워하는 로마인 그중에서도 평범한 시민이 아닌 군대 백부장인 고넬료와 그의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게 하여 베드로로 하여금 이렇게 선언하게 합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두려워하며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다 받아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조건과 차별의 벽을 허문 사건이 바로 사도행전 본문 말씀의 핵심이자 사도행전 전체의 핵심입니다.

 

우리 안에는 끊임없이 누가 참다운 향린인인가?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법적 질문이 있고 정체성에 대한 질문도 있습니다. 교인이 되려면 세례와 새교우가입식을 거쳐야 하는 등 일정기간 교회를 다녀야 한다는 기준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세례도 받지 않고 등록도 하지 않고 10년을 다닌 사람은 향린교인이 될 수 없는가 하는 극단적인 질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분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계속되는 질문은 교인으로서의 법적 자격을 갖추지 못한 그는 하늘나라 또한 못가는 것인가? 답변이 쉽지 않습니다.

 

신앙정체성 질문도 있습니다. 헌금내고 주일예배 참석하는 것이 향린교인 됨의 전부인가? 처음 향린교회를 세울 때에 여러 교회들에 하나를 더하기 위해서가 아닌 분명한 창립목적을 갖고 세워졌습니다. 이를 우리는 공동체정신, 평신도목회 혹은 사회선교 혹은 민족선교라는 이름으로 불러왔습니다. 60년을 지나오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거쳐 갔고, 분쟁도 여러 차례 있었고, 교회가 둘로 갈라진 아픔의 역사도 있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다른 교회가 묻지 않는 향린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 항상 있어 왔습니다.

 

그 중 한두 가지를 2014년 이후의 향린교회의 방향을 생각하면서 오늘 여러분에게 물음으로 던집니다. 우리는 잘 지켜지지 않는 부분을 분명히 지켜내기 위해 교회 정관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그중 여성장로 3분지 1 이상으로 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저는 본래 정관 제정 당시 남성과 여성이 동수가 되도록 한다는 강제 규정을 만들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위원들이 지나치다 하여 현재의 규정을 만들었는데, 이 또한 권장 규정으로 해석을 하여 왔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3분지 1 이상을 계속 권장사항으로 생각하신다면 이는 차라리 없는 편이 낫습니다. 이런 규정이 없을 때에도 여성장로는 항상 있어 왔습니다. 그리고 권장사항으로 할 바에는 3분지 1 보다는 절반으로 표기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합니다. 지금 일부 장로교단들의 총회법에도 여성 총대 30%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교단의 작년 총회 여성총대 비율은 0.9%였습니다. 진보라고 말하는 기장 총회에도 30% 여성 총대라는 문구가 있지만, 작년 여성총대 비율은 7%에 불과했습니다. 그것도 열명 중 한 명은 여성장로로 한다고 하는 강제사항을 넣은 결과입니다. 향린교회 당회의 여성 절반을 의무사항으로 해도 양성평등을 말하는 이 사회 안에 자랑할 것이 하나 없거늘 정관에 있는 3분지 1의 문구를 권장사항으로 해석하는 것은 개혁성을 강조하는 전연 향린교회답지 않는 문구입니다. 40세가 넘으면 자기 얼굴에 스스로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10년을 넘어 목회하였기에 이는 저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고 이 문제를 공적으로 여러분에게 제기합니다.

 

그리고 지난 달 진행된 장로선출 공동의회는 단순히 여성장로 선택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를 넘어서서 또 다른 과제를 우리에게 던졌습니다. 그건 2배수로 진행되는 2차투표에서 당선자가 없는 일은 몇 년 전부터 항시 있어왔던 일이지만, 일배수 투표로 진행하는 3차 투표에서 한분은 되지 않았고 두 분이 가까스로 3분지 2를 넘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 두 분은 새로운 분들도 아니고 이미 장로로 임직을 하셨던 분들이었기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우리 교회 안에 진영논리가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저는 판단합니다.

 

물론 60년 역사에 수백 명이 출석하는 교회에 파당이 없다고 한다면 그건 모두가 성인(聖人)의 경지에 올랐거나 아니면 모두가 그냥 들락날락하는 뜨내기 교인들일 것입니다. 몇 명 안 되는 고린도교회가 바울파, 게바파, 아볼로파, 그리스도파 나뉘었듯이 교회도 사람들이 모이는 곳인지라 서로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자주 만나고 그렇게 자주 만나는 사람들끼리 어떤 그룹이 만들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가정에서도 아빠편 엄마편 나눠지는데, 교회 안에서 여성과 남성, 노년, 장년, 중년, 청년에 따른 세대별, 그리고 신도회나 활동 부서에 따라, 교회의 정체성 이해에 따라 그룹이 생기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입니다. 문제는 교회가 지도자를 세움에 있어 서로서로가 이해가 다른 사람을 밀어주고 키워주는 긍정적 분위기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부정적 분위기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단순히 작년에 만들어진 일이 아니라, 오랜 시간동안 형성되어온 일입니다. 이런식으로 진행하면 누구를 세워도, 45차 투표를 해도 한분도 장로로 선출되지 않게 될 때가 올 것입니다.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이는 내부적으로 신구의 교차시기에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분가가 없었다면 좀 더 후에, 말하자면 저의 임기 이후에 일어날 일이었습니다만, 저는 제가 담임목사로 있을 때에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후임 목사에게 큰 짐을 지워줄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향린교회는 지금 우리 모두가 인식하다시피 2005년 촛불 이래 들어온 소위 말하는 새 교인과 그 이전부터 있었던 교인 사이에 교회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이해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이 시기를 전후로 교인 100%가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 이전부터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갖고 계신 분도 있고, 또 새로 들어오셨지만, 다른 이유로 국악이라든가 평신도 민주화라는 관점에서 향린을 선택하신 분도 있습니다. 저는 이 시간에 이런 부분을 다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런 보이지 않는 그룹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냉철하게 인식하고 우리가 힘에 의한 이념 논리가 아닌, 신앙에 근거한 공동체 정신에 기초하여 이를 이겨내기 위한 각오를 단단히 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지난 주 30명이 신임집사 임명을 받았는데, 그중에는 그간 집사직을 피하셨던 몇 분이 있었는데, 이 분들을 제외하고 얼굴을 보고 그 이름을 말하고 그분의 기도 제목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는 분이 몇 명이나 되십니까? 열 명 이상이다라고 답할 수 있으십니까? 5명을 말할 수 있습니까? 지금 수백 명이 단지 일주일에 한번 예배라는 공간 앞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구조 안에서 누가 누구를 알고 공동체성을 말한다는 것은 매우 제한적입니다.

 

[보이지 않는 우리’]

 

지금 향린교회는 서로 알아가기 위한 의도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이 절대 필요한 시기입니다. 할례라는 사회적 규범을 넘어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 되었듯이, 예수께서 금단의 땅 사마리아를 들어가고 대화해서는 안 되는 여인과 대화를 하였듯이,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더럽다고 피하고자 했던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들어갔듯이 우리 또한 자신들이 설정해 놓은 어떤 경계를 넘어서는 노력을 의도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하여야 합니다. 더욱 우리는 보안법 철폐라는 어느 교회도 넘지 못하는 이 사회의 경계선 끝자락을 넘어서 만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 눈앞에 보이는 여기 모인 우리우리의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안에는 보이지 않는, ‘우리우리안에 들어오지 않는 수많은 우리들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언급하신 우리밖의 우리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사명을 이해하시고 개인의 호불호를 넘어 우리 안에 보다 끈끈한 공동체성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그것만이 향린교회가 살아날 길입니다.

 

이점에서 물론 과거의 구역을 복원하면 좋겠지만, 사는 지역에 따라 일률적으로 교인을 나누는 전통적 방식은 이제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전통적인 교회들도 구역모임 운영에 엄청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향린교회는 더욱 탈지역에 수원 파주 인천 등지에서 오고 계시는 분들입니다. 주중에 따로 만나는 일이 매우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제직들도 계시고 이를 요청하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부분은 지원 형식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올 일년동안 두 달에 한번 정도 자기 가정에 대여섯명의 교인들을 초청하고자 하는 분이 몇 분이라도 되면 이런 일은 어느 정도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나눠드린 교회 활동표에 기입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적극적으로 소통합시다.]

 

그런데 저는 공동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우리 모두가 쉽게 할 수 있는 일을 제안합니다. 예배 시작 전 옆에 모르는 분이 옆에 계시면 서로 자기소개를 하시고, 예배가 끝날 때에는 그냥 형식적으로 악수만 하고 헤어지지 마시고, 식당까지 같이 올라가서 함께 식사를 하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래 오늘부터 사회를 보시는 장로님들에게 부탁드립니다. 그냥 앞뒤좌우분들과 평화인사하세요하지 마시고 매우 구체적으로 행동 지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면 세 사람 이상 악수하시고 모르는 분에게는 제 이름은 누구입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혹은 네 분씩 짝을 지셔서 지난 주 가장 중요한 사건이 무엇이었는지를 한마디씩 하도록 하신다든지,’ 혹은 이번 구정에는 가족들이 어디서 모여서 설차례를 지내시는지?’ 등등 구체적이면서도 누구나 쉽게 답할 수 있는 질문들을 하나씩 던져 좀 더 얘기를 나눌 수 있도록 하시고 교우 여러분께서는 이어지는 찬양을 더 듣고 자리에서 일어서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거기서 헤어지지 마시고 예배 직후 4층 식당은 붐비니까 잠시 1층 향우실로 가셔서 차를 마시며 좀 더 대화를 나누시고 이어 4층 식당까지 함께 올라가시어 밥상교제를 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가운데 오늘부터 열 명이라도 이를 꾸준히 실천하신다면 6개월이 지나지 않아 저희 교회는 확 달라져 있을 것입니다. 부탁드립니다. 어르신 교우들은 새로운 교우들을 만나시거들랑 환영한다고 손을 내미시고, 향린의 미래를 위해 힘써 일해 달라고 격려하시고 또한 새 교우들은 과거의 어려운 시기에 향린교회를 지켜오신 어르신들을 마음 깊은 곳에서 존경하고 따르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지금 4층 식당 자리에 이름표가 붙어 있지 않는데도 이게 누구 좌석이라고 굳어졌습니다. 여성 남성 젊은 사람 나이 드신 분 보이지 않는 구분이 되어 있습니다. 우선 자리를 깹시다. 젊은 집사님들은 권사님 좌석에 끼어 들어가십시오. 남자 어르신들도 안쪽에서만 먹지 마시고 바깥쪽에 앉아서도 잡수시기 바랍니다. 빈자리가 여럿일 경우 편한 교우 옆에 가서 앉지 말고 모르는 분 옆에 가서 앉아 자신을 소개하시기 바랍니다.

 

청신들은 자기 방이 있다고 밥 먹을 때 청신방에 들어가서 따로 먹는데, 이것도 바꿔야 하겠습니다. 말로만 소통이 안 된다 하지 마시고, 우리 얘기는 안 들어준다 하지 마시고, 최소한 밥 먹을 때는 같이 먹으면서 소통을 찾아 나서기 바랍니다. 지금의 우리 4층 식당은 소란하기만 하지, 집에서 자기 방에 따로따로 들어가서 밥 먹는 거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공동식사 자리는 단순히 한 끼의 식사를 때우는 자리가 아닙니다. 서로의 삶을 나누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현대를 가리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 SNS 시대 등등으로 일컫는데, 이 말을 보다 쉬운 다른 말로 바꾸면 탈권위주의 시대를 말합니다. 현 정부가 아무리 국민과의 소통과 대화를 얘기하고 각본이 잘 짜인 기자회견을 해도 그것이 소통이 되지 못하는 것은 국가권위에 기초한 모더니즘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권위주의에 철저하게 물든 군사령관 출신들이 모든 행정기구의 장을 지키고 있는 한, 이 정부는 국민관의 소통에 있어서는 태생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의 남한 개신교가 쇠락을 피할 수 없는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전통적인 신앙에 기초한 모더니즘 사고의 틀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수많은 종교 가운데서 그 생명력을 잃지 않고 2천년동안 계속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신이 인간의 자리 그것도 가장 낮은 자리인 말밥통으로 내려오시고, 히브리 노예들을 들어 선택된 민족으로 들어 쓰고자 하셨다는 제1성서의 주장과 십자가에 죽기까지 스스로를 희생시켰다는 비움과 낮아짐, 그리고 할례와 신분의 벽을 깨고 남자와 여자 젊은이와 어르신 주인과 종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강조했던 제2성서의 가르침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계가 프란체스코 교황에 열광하는 것은 교황의 권위를 내려놓고 노숙자와 더불어 새해 첫 식사를 하고 팔레스타인들의 아픔에 함께 하려는 노력 때문입니다.

 

[사람이 꽃보다 더 아름답다]

 

바로 이점에서 향린교회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의 자신의 벽이 무엇인지를 보고 그 벽을 깨시는 한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자신이 향린교회에서 제대로 믿음생활을 하고 있느냐는 첫 번째 잣대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그래서 그들의 숨겨진 삶의 고통을 이해하고 이를 위해 기도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깊은 관계를 형성함으로 공동체로 일을 더욱 키워가는 것 이것이 평신도 목회입니다.

 

오늘 집에 돌아갔을 때, 가족 중 누군가 물어봅니다. ‘오늘 교회 특별한 일 있었어요?’ ‘뭐 별로 평범했어요.’ 헬렌 켈러가 말하기를 내가 대학교 총장이라면 눈 사용법이라는 필수과목을 만들겠다고. 왜냐하면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자신보다 더 못 본다는 것입니다. [삼일만 볼수 있다면]이라는 수필 첫 부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숲을 다녀온 사람에게 당신은 뭘 봤느냐고 물었더니, 그가 답하길 별 것 없었어요.(Nothing special)'라고 답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자기가 숲에서 느낀 바람과, 나뭇잎과 자작나무와 떡갈나무 몸통을 만질 때의 전연 다른 느낌과 졸졸졸 지나가는 물소리를 왜 못 보고 못 들었느냐?]고 반문합니다. 진리는 일상 속에 숨어 있고, 비범은 평범 속에 숨어 있습니다. 바라기는 집에 돌아가서 누가 묻거든 아 난 오늘 교회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났는데, 긴 얘기는 못했지만,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 같았어, 참 좋았어. 주중에 시간 내서 한번 저녁 먹자고 할거야.”라고 말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린이들은 학교에 갈 때, 기대와 흥분하며 갑니다. 매일 만나는 친구들이지만 너무 너무 좋은 것입니다. ‘엄마 엄마, 게가 이렇게 말했어. 아빠, 게는 참 웃겨.’ 그런데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런 감동이 사라집니다. 그건 만나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실은 자기 자신이 그렇게 굳어져가기 때문입니다. 굳어진 마음 밭을 갈아야 합니다. 돌도 드러내고 가시나무도 쳐내고.

 

작가 김훈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낙원은 일상 속에 있든지 아니면 없다. 7일마다 한번 만나는 이 모임 속에서 낙원을 발견하지 못하면 그 어디에도 여러분이 꿈꾸는 낙원은 없습니다. 행복의 파랑새는 저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올해의 교회 표어는 그대로이지만, 목회의 표어는 한 주에 한 사람을 알자로 정하고 싶습니다. 3층 예배실에서든, 4층 식당에서든, 1층 향우실에서든, 혹은 소모임에서 만나든 그 모든 과정에서 내가 모르고 있던 한 사람을 알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께서 세례 받으심을 기념하는 세례주일입니다. 로마시대에는 비둘기를 이용하여 군사령부에서 예하부대에 명령을 전달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 비둘기의 형상이 내렸다는 얘기는 세례냐 혹은 침례냐 하는 교리논쟁은 물론, 물세례냐 성령세례냐 하는 신학논쟁은 물론, 혹은 세례가 교인됨의 기준이냐 아니냐는 교인됨의 기준에 관한 것은 더더욱 아닌 한마디로 하늘의 부름을 받는 자리였다는 말입니다. 그 비둘기 발에는 아주 작은 통이 하나 달려있었고, 그 안에는 둘둘 말린 매주 작은 글씨로 된 편지가 담겨 있었는데, 뭐라고 쓰여 있었을까요?

 

나 야훼가 너를 부른다. 정의를 세우라고 너를 부른다. 소경들의 눈을 열어주고 감옥에 묶여 있는 이들을 풀어주고 캄캄한 영창 속에 갇혀 있는 이들을 놓아주어라.” 여기서 소경은 볼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언론핍박을 말하고, 감옥에 묶여 있음은 종북이라는 이념의 감옥을 말합이고, 자신의 남은 삶이 얼마인지도 모른 채 세상의 물결에 휘말리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비둘기의 영으로 임하시는 성령의 임재함을 느끼면서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