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신도주일>

그리스도인의 능력

시편 40:1-11; 이사야 49:1-7; 고린토전서 1:1-9; 요한 1:29-42

김 판 임 목사(세종대학교 교수)

I. 도입: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렐루야! 사랑과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일들을 하나님이 이루신 “기적”으로 알고 고백합니다. 기적이란 인간의 이성으로 납득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합리적인 설명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교육열이 높은 한국사회에서는 학교 교육에 종교 교육은 없고 과학 교육의 비중은 높였습니다. 종교는 믿어도 그만 안 믿어도 그만, 개인의 자유일 뿐이고, 교육도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과학은 너무나 중요한 과목이고 시험까지 봅니다. 다윈의 진화론은 꼭 배워서 시험을 치루어야 하는 주제입니다. 그래서 한국인은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모두 진화론자입니다. 진화론의 영향 하에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우연일 뿐이라고.’ ‘너의 존재와 나의 존재, 모두 우연히 발생하였으며, 너와 나의 만남도 우연, 오늘 하루를 살면서 경험하는 모든 일들은 우연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약자는 강가에게 먹힐 뿐이고, 다만 부단한 노력으로 조금 진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을 주기도 하고,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지 목하면 도태될 뿐이라‘고 위협을 주기도 합니다. 이러한 세계관에서 사람들은 모두 약육강식, 적자생존이 불변의 법칙이라고 여기며 살아갑니다.

학교에서 이러한 교육을 받으며 이러한 가르침이 가르쳐준 세계관 안에 살면서도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생각을 해 봅니다. 아뇨! 너의 존재, 나의 존재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너와 나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고. 인간은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의 법칙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이죠.

‘내가 무언가 계획을 하고 실천을 해야만 하늘의 상급이 있다고 여기는 분들은 기적이니 은혜니 하는 어휘가 낯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2014년 1월 셋째주 여신도주일을 맞이하여 “하늘 뜻 펴기”요청을 받고 보니,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놀라운 기적을 경험한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향린교회는 제가 독일로 유학을 떠나기 전 1980-1983년까지 한 4 년 간 출석하던 교회입니다. 당시는 김호식 목사님이 시무하셨고, 장하구 장로님, 이명의 장로님, 홍창의 장로님 등 너무나 존경하는 장로님들이 여러분 계셨습니다.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학과장이셨던 손승희 교수님께서 향린교회를 한번 나가보라고 제안하시기에, 향린교회에 대한 전이해도 전혀 없이 출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안병무 선생님과 서울대 출신 친구들이 평신도 공동체를 이루고자 시작하셨다는 것, 개척 초창기에는 안병무 선생님이 주로 설교를, 제 지도교수였던 허혁 선생님은 성경공부를 맡아서 하셨다는 것, 김호식 목사님이 처음으로 전문직 설교자로 청빙을 받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향린교회가 제게 주었던 인상적인 것은, 누가 교회를 창립하고 어떤 정신으로 이끌어가는 지에 대한 것보다는 교회를 향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이었습니다. 주일 아침마다 교회를 향해 걸어 들어가는 사람들을 보면 – 뒷모습에서, 옆모습에서 드러납니다 - 귀를 쫑긋 세우고,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전달되었습니다. 이러한 교인들의 진지한 모습을 볼 때, 저는 이 나라 미래에 희망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향린교회 예배실은 언제나 가득 찼고, 사람들은 빽빽이 붙어 앉았으며, 벽 쪽으로 사람들이 쭉 둘러서서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선 채로 예배를 드리던 사람도 빽빽이 섰으니, 서 계신 분들만 해도 족히 80명은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출석하던 4년 내내 향린 교회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교회에 올 때 마다 흥분했었죠. 교회가 나라의 미래를 선도할 것같은 기대감, 매주 새롭게 듣게 될 하나님 말씀에 대한 기대감, 그런 것이죠.

이 귀한 향린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기회를 얻게 되니 정말 놀랍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추천해주신 황성규 교수님, 용납해주신 조헌정 목사님과 임송자 여신도 회장님, 향린교회 모든 교우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II. 하늘 뜻 펴기

자기 자신을 깨닫기

사랑하는 향린의 교우 여러분!

능력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행하신 일들을 기억합시다.

지금의 내가 나 된 것은 무슨 기적인가? 내가 그리스도인 됨은 어찌 된 일인가?

이 뜬금없는 질문에 갑자기 멍해지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우리 집안은 조상 5대째 기독교집안이니, 나의 나 된 것은 조상의 은덕이라고 하실 분도 계실 겁니다.

기독교를 포함한 세계의 모든 종교는 고통받는 개개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출발합니다. 그리고 구원의 길을 제시해 줍니다. 우리는 나라도 구하고 지구도 구하고자 합니다만, 모든 구원의 첫걸음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는 것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헤매면서 다른 이를 구원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지 못하면, 세상이 만든 가치관과 세계관 속에서 인정받으려고 안간 힘을 쓰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악을 행하며 마음 속 불안과 번뇌로부터 벗어나질 못합니다.

도대체 예수를 믿는다고 주일날 아침 교회에 나와 앉아 있는 우리는 누구입니까?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는 1937년 총회에서 1월 셋째 주일을 여신도주일로 지킬 것을 결의하고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습니다. 여신도주일을 제정하기 이전이나 이후나 변함없이 여신도회의 헌신은 한국 교회를 지탱해주는 큰 힘이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이루어지기 20년 전인 1884년에 개신교선교사들이 한국 땅에 들어와 복음을 전해 주었습니다. 기울대로 기운 조선 말기,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조선 사회의 민중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은 생명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조선 사회에서는 양반이 아니라고 멸시 당하고, 남자가 아니라고 존중받지 못했었는데, 그리스도의 복음은 “내가 하나님의 귀한 피조물”이라고, “하나님의 귀하신 독생자 예수께서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그로 인해 구원을 얻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해 새로운 자기 이해가 싹텄던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으로 기대했지만, 오히려 나라는 일본에게 넘어갔습니다. 일본강점시기 우리는 내가 누구인가, 하나님과 나는 어떤 관계인가 하는 문제보다 더 시급한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교회 남성들이 모이면, 성경을 읽고 성경의 진리보다는 나라의 주권을 되찾을 궁리를 해야 했고, 그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여신도들도 교회가 요청하는 대로 헌신하도록 교육받았습니다.

430년 동안 이집트의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주신 하나님께서 일본의 악랄한 식민정책에 시달리던 한국을 해방시켜주었습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일본의 힘이 기우는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했지만, 곧 남북이 갈라져 전쟁을 치루게 되자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북한을 원수로 여기며 반공을 이데올로기로 만들어 독재 정치인들과 손을 잡았습니다.

한국의 역사적 상황이 그래서인지, 언제부터인가 한국 교회는 예수를 믿는 우리가 누구인지, 세상 사람들과 어떻게 다른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가르치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세속적인 단체와 똑같이 부자가 되는 것의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거짓된 가르침이나 일삼으며 교인들을 타락시켜온 것은 아니나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특히 교인의 수와 재정 규모가 큰 대형교회일수록 세상과 구별되지 않은 세속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교인들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분위기 속에서 향린교회의 현존은 큰 위로입니다. 저는 2008년 촛불집회에서 향린교회를 다시 만났습니다. 미국소고기 수입반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용산 참사, 재능교육, 작년 전교조 탄압반대 등, 민중의 고통에 함께 하며 정부의 일방적인 탄압에 항거하는 시위에서 향린교회의 깃발을 보았을 때, 저는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썩어버린 한국 교회의 부패 속에 함게 매립되지 않으려고 애쓰는 향린의 전신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청년 예수처럼, 어두운 세상에 함몰되지 않고 진리의 빟을 발하는 청년 예수처럼, 보석처럼 투명하게 빛나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청년 예수처럼 향린교회가 영원하길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내가, 우리가, 누구인지 올바로 깨닫고 있어야만 예수님의 정신을 지켜 나갈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과연 나는 누구입니까? 우리가 오늘 함께 읽은 성경 구절 중 고린도전서 1장 2절에서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2절은 모든 편지가 그러하듯이 편지의 발신인과 수신인을 표시합니다. 현재 우리가 편지 봉투에 쓰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편지를 보내는 발신인은 “바울과 소스데네”라는 것이고, 편지를 받는 수신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입니다. 고린도교인들을 나타내는 다양한 표현들은 에 모든 그리스도인에 대한 이해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여기서 교회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에클레시아”입니다. 에클레시아란 “끌어낸”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란, 하나님이 세상으로부터 불러낸 존재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성도”란 거룩한 무리라는 뜻이죠. 거룩이란 도덕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구별됨, 거리를 둠 이란 뜻입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과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존재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에클레시아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셋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입니다. 당시 사회는 모든 사람이 주종 관계를 이루며 살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주(퀴리오스)”란 로마 황제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노예에겐 상전이 주이고, 여자에겐 남편이, 자녀들에겐 아버지가, 소작인들에겐 영주를 가리킵니다. 눈에 보이는 그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겉으로는 여전히 로마법에 의해 세금을 내고 법적 조치를 받고 살지만, “주 예수”라는 고백을 통해 세상의 주가 통치하는 지배로부터 내적 거리를 둘 수 있는 힘을 얻었던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 견고함과 겸손함으로

1) 하나님이 나를 세상으로부터 분리해 내셨다. 2) 그러므로 나는 세상과 구별된 존재이다. 3) 나는 이 세상이 살지만, 나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1장 2절에 나타난 표현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자기 이해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요약한 말씀이 고린도전서 1장 9절 말씀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부르셔서 당신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게 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자기이해에 확고히 서면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가 나옵니다.

“세상이 무어라 해도 나는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며 그와 교제하며 견고히 살아간다.”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가져야할 삶의 자세입니다. 살아가면서 다시 세상 권력에 휩싸이면 구원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날에 책망 받을 것이 없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장 29-42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여러 개 나옵니다. 처음엔 세례요한이 예수를 보고 “하나님의 어린양”(요 1:30), “하나님의 아들”(요 1:34)이라고 사람들에게 증언을 합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에서는 예수님의 첫 번 째 제자 두 제자의 이야기입니다. 안드레와 시몬의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을 제외한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호숫가에 있는 이들을 “나를 따르라”고 직접 부르시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반면, 요한복음에서는 안드레와 시몬이 요한의 제자들이었다가 요한의 증언을 듣고 예수를 따라간 사람들로 묘사가 됩니다.

이 이야기에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마지막 42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시몬을 눈여겨 보시고 그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앞으로 너를 게파라 부르겠다(게파는 베드로 곧 바위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 붙어서 견고히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게파(베드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 휩싸이지 않고 오직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세상을 이기는 존재가 바로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모두 베드로입니다. 견고한 바위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름 기준을 마련해 놓고 자기 잘난 맛에 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닌 보잘 것 없는 존재인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나를 사용하신다고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혹여 그리스도인들이 자랑을 하게 된다면 자기 자랑보다는 “주님”을 자랑하라고 바울은 권면합니다(고전 1:31 참조).

고린도전서 1장 26-29절을 읽어봅시다. “지혜로운 사람, 유력한 사람. 가문이 좋은 사람”보다는 “보잘 것 없는 사람, 멸시받는 사람,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을 하나님은 택하셨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뭐 좀 가졌다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내세우기 때문에 복음이 들어갈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를 보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읽은 이사야 49장 1-7절, 특히 6-7절을 주목하십시오. “만국이 꺼려하여 가까이 하지 아니하므로 지배자의 기막힌 멸시를 받으며 종살이하는” 사람을 불러 하나님이 계획하신 과제, 이스라엘을 다시 세울 과제를 제시합니다.

“네가 나의 종으로서 할 일은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살아남은 이스라엘 사람을 돌아오게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나는 너를 만국의 빛으로 세운다. 너는 땅 끝까지 나의 구원이 이르게 하여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형성에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불러 내셨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가 그러했듯이 예레미아와 그와 모든 예언자들이 그러했듯이, 전능하시고 주도면밀하신 하나님을 만나면, 그분 앞에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고백을 드리게 됩니다. 그래서 나의 나된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시편 40편 4절에서도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기본자세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라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 말씀을 접하니, 시편 1편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복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편 1:1-2)

스스로 잘났다고 여기면 하나님과 가까워 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기를 내려놓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자신을 비울 때 하나님은 그 비운 공간에 들어오셔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험한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거짓을 일삼고 잔인해지지 않도록 기도합시다. “야훼여 당신의 그 인자하심 나에게서 거두지 마시고, 그 진실한 사랑으로 이 몸을 언제나 지켜 주소서”(시편 40:11)

3. 그리스도인의 능력: 성령의 역사

1) 언변

우리가 자기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할 때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이 우리를 통해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인의 능력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5-7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봅시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면서 모든 것을 갖추게 되었고

특히 언변과 지식에 뛰어나게 되었습니다.”(고전 1:5)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무엇보다도 “말(언변)”으로 나타납니다. 한국 전통에서는 행동보다 말을 앞세우는 것을 경계했습니다만, 기독교가 탄생하던 시절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눈으로만 보지 않고 입으로 읊어서 귀로 들었습니다. 아무 말이나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인들은 바르게 말을 하도록 가장 기본적인 교육이 문법과 수사학이었습니다.

성서의 말씀을 중시하는 유대 문화와 문법과 수사학을 중시하는 그리스문화라는 융합 문화에서 자라난 바울은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을 행해 “언변이 능하다”고 칭찬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기독교인이 되면 말이 는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도대체 그리스도인들이란 무슨 말을 하는 사람들인가요?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난 성령의 은사들을 열거합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예언, 영들 분별, 방언, 방언 통역.” 모두 아홉 가지가 열거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말로 하는 일들입니다. 앞에 열거된 지혜의 말씀이나 지식의 말씀, 후반부에 나오는 예언, 영들 분별, 방언과 방언 통역 모두 의심의 여지없이 언어행위입니다. 여기서 능력 행함으로 번역된 것은 “귀신 축출”을 의미합니다. 믿음도 병 고치는 일도, 귀신을 축출하는 일도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말로 합니다.

추측컨대, 이 아홉 가지 은사들은 고린도교인들이 가졌으면 하고 부러워하던 능력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아마도 더 많은 능력을 열거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표현대로 성령은 하나이지만, 성령의 은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로마서 8장 28절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 고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그렇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그 모두 합하여 선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지혜의 말이든, 지식의 말이든, 예언이든, 방언이든 성을 이루는 말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므로 능력을 행할 때 자기 자랑이 아니라 “감사”가 나오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지니신 그리스도인의 능력이 선을 도모하는 일로, 감사의 말로 나타나길 축원합니다.

2) 지식

바울이 고린도전서 1장 5절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난 풍족한 은사로 언급한 것은 언변 외에 두 번째로 “지식”입니다. 한국의 높은 교육열은 미국을 비롯하여 많은 나라에 자극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국의 교육이 주로 수학과 과학, 영어에 집중되어 있고, 오로지 시험 준비를 위해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더욱 놀랄 것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가진 지식의 내용으로 제시한 것이 무엇인지는 고린도전서 8장6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은 교회 안에 생긴 갈등이 지식으로 인한 것이라 여기고 지식보다 사랑을 제시하는 내용입니다.

5절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리고 6절에서 이와 대치되는 반격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아버지가(계시니)그에게서 만물과 우리가 (나와) 그에게로 (가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그를 통하여 만물과 우리가 (구원을 받고) 그를 통하여 (구원의 완성을 보리라)”

이 문장은 당시 그리스도인이 가진 지식을 나타냅니다. 이 문장에서 동사는 사용되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 만물, 우리, 예수 그리스도가 주어로 사용되고, 전치사와 관계대명사, 전치사와 인칭 대명사로만 구성된 문장으로서 하나님과 세상만물,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와 세상만물과 우리의 관계를 나타내 줍니다.

이 문장에서 하나님은 모든 믿는 이들의 아버지로서 창조자와 종말 심판자입니다. 그의 창조의 빛 안에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와 그렇지 않은 존재들이 다 포함됩니다. “그를 위하며”라고 번역된 것보다 “그를 향하여”가 더 적절합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최종적인 판결을 하실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에게로 만물과 우리가 모두 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문장에 의하면 하나님의 구원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통하여”라고 번역된 “디아”라는 전치사가 명확히 말해줍니다. 만물과 우리가 구원받게 되는 것은 우리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는 것이고, 마지막 심판 때,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구원의 완성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지식이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주님과 우리의 관계, 세상 만물과 우리의 관계, 하나님과 세상만물, 예수 그리스도와 세상 만물의 관계를 설정해 놓은 것입니다. 이 지식은 결국 신앙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예수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 세상 만물과 우리의 관계를 분명히 (지식적으로) “알” 때, 그리스도인들은 흔들림 없이 견고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III. 마무리

오늘 여신도주일을 맞이하여 “그리스도인의 능력”이란 제목으로 하늘 뜻을 펼쳐 보았습니다. 여신도주일은 1937년부터 제정되어 지켜 왓지만, 한국교회에서 여신도회의 역할은 한국교회의 시작부터였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조선말 가장 낮고 보잘것없은 존재로 여겨지던 여성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힘을 얻고 새롭게 태어났으며 교회와 나라의 기둥이 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예전엔 가정과 사회가 그러했듯이 교회에서도 남시도가 군림하고 여신도들은 말없이 봉사하는 자리를 채웠지만, 이제 21세기 한국 교ㅛ회는 남신도와 여신도가 진정한 동반자 관계를 맺으며 교회의 발전을 위해 더욱 애쓰시게 될 것입니다. 여신도회 젊은층이 어르신들을 잘 섬기도 여신도회의 아름다운 전통을 잘 이어가게 되리라 전망해 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이끌어내시고 세상을 이길 놀라운 성령의 은사를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언변의 능력으로 말을 할 때 마다

1) 감사의 말을 하도록 하십시오

2) 사랑의 말을 하도록 하십시오

3) 정의의 말을 하도록 하십시오.

감사와 사랑과 정의의 말들은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묶어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게 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어느 누구도, 나이가 많다거나, 어리다거나, 가난하다거나, 여자라거나, 권력이 없다거나. . ., 그 어 떤 이유로든 소외당하는 일로 힘들게 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힘 되어 줄 것입니다.

험한 세상에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함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말입니다. 그 견고함은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스도와의 관계, 만물과의 관계를 명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 때, 다시 말하면 제대로 된 신앙이 있을 때 가능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어둠에 빠져 있지 않고 밝은 빛을 비루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처럼 거짓과 탐욕에 빠져 있지 않고 오직 진리와 정의 안에서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자랑스런 향린교회 여신도회 여러분,

존경하고 사랑하는 향린교회 교우 여러분,

하나님 보시기에 자랑스러운 여러분 되시기 축원합니다.

마지막 날, 그리스도의 날에 칭찬받는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침묵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