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 빛을 발하라(3) 사람됨의 회복

이사 9:1-4; 27:1, 4-9; 고전 1:10-18; 4:12-23

 

목요일부터는 민족대이동이 시작하는 구정 설날 연휴가 시작합니다. 기쁨이 가득 찬 명절 연휴가 되기를 바라면서 이런 기쁨을 나눌 수 없는 소외된 이웃들을 헤아려보는 넉넉함도 지닐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특히 용산참사, 쌍용자동차, 밀양의 송전탑건설반대 등등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유가족들을 기억하는 한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설날의 기원과 의의]

 

이라는 말은 설다’, ‘낯설다’, ‘익숙하지 못하다’, ‘삼가다등의 의미에서 유래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설다 낯설다 익숙하지 못하다는 새해이니 쉽게 이해가 되는 설명이지만, ‘삼가다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이는 우리 옛말인 조심하다라는 뜻을 지닌 섧다에 그 어원이 있습니다. 설날을 한자어로 신일(愼日)이라고 표현하는데, 신일이란 신중한 날 곧 삼가고 조심하는 날이란 뜻입니다. 이는 새해는 새로운 시간으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질서에 통합되지 않았기 때문에 언행을 삼가고 조심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생긴 말이라고 합니다.

 

한국의 설날은 서기 488년 신라 비처왕 시절 설날을 쇠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있으며, 이후 고려와 조선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1886년 을미개혁으로 양력이 도입되면서 공식적인 새해 첫날은 11일이었습니다. 이후 일제가 조선문화 말살 정책 일환으로 조선인들이 음력설에 세배를 다니거나 설빔을 차려입은 경우에는 먹물을 뿌려 옷을 얼룩지게 하고 떡 방앗간을 돌리지 못하게 하는 등 온갖 탄압과 박해를 가하기도 했습니다.

 

일제가 물러난 이후 미군정하의 남한 정부 수립 이후 40년동안 정부는 양력설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특히 이승만, 박정희 정부는 이중과세를 통해 사기업체의 휴무에 불이익을 주면서까지 음력설을 없애려 하였고, 양력설에 차례를 지낼 것을 권장하여 서울 등 대도시의 일부 가정에서는 양력설을 쇠는 풍토가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기억합니다만, 어렸을 때, 서울은 구정보다는 신정 때에 때때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러나 농촌은 여전히 음력설에 차례를 지내는 전통을 유지하여 왔고, 음력설도 공휴일로 지정하여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면서 전두환정권 시절에는 민속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구정 하루를 공휴일로 지정하였다가, 6월 항쟁 이후 노태우정부 때에 여론을 받아들여 '구정‘ 3일 간을 공휴일로 지정하여 온 것입니다

 

설날이 갖는 상징성은 무엇인가요? 새해가 시작한다는 축제로서의 기능과 조상 제사의 기능이 함께 존재하고 있습니다. 제가 문헌을 통해 확인하지 못했습니다만, 설날에 가정에서 제사를 지내는 전통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봅니다. 고대로부터 국가가 새해를 맞아 나라의 안녕을 구하는 천제를 드리기는 했겠지만, 집집마다 자기 조상 특히 3대까지의 조상에게 격식에 맞추어 제사 드리는 일은 5천년 역사 속에서 그리 길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조상제사에 담긴 국가권력의 음모]

 

대체로 우리는 조선시대의 유학 혹은 유교에 그 기원을 두지만, 실상 유학의 기초를 놓은 공자는 부모에 대한 효는 강조했어도, 한 제자가 죽음 이후의 일을 물었을 때, 삶도 다 모르는데, 어찌 죽음 이후를 알 수 있겠는가라며 반문하였던 것을 감안하면 죽은 조상에 대한 숭배는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유교에서 조상제사가 왜 이렇게 중요하게 자리 잡게 되었는가? 그건 국가가 백성을 보다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방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흔히 중국의 공자로부터 시작하여 조선시대를 지배한 유학의 핵심사상은 인()에 기초한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권력자들에 의해 충효사상(忠孝思想)으로 좁혀집니다.

 

임금에 대한 충과 부모에 대한 효를 동일선상에 놓고 조상에 대한 숭배 사상을 이념적으로 교조화 하면 자연히 임금에 대한 충 또한 신의 자리로 올라서게 됩니다. 그래서 조선이전 국가에서도 그러했지만, 특히 조선시대에 국가가 효자나 효부, 효녀상을 제정하고 이를 주관한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그런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충효에 대한 예가 세세한 법으로 규정되면서 유학은 유교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당파싸움은 바로 이런 법 규정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러나 인간의 사고가 깨어나기 시작한 근대 이후 오늘날에 있어서는 교조적인 충효사상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으면서 충과 효과 분리가 되고 효에 근거한 조상제사는 현세의 복을 받기 위한 신앙행위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묘를 크게 만들고 사치스럽게 하는 행위의 내면에는 바로 조상들이 현세의 복에 관계한다고 하는 무의식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한편으로는 인간의 과학적 이성이 더 큰 힘을 발휘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물질중심의 인간 욕망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면서 조상제사가 더욱 강화되고 있다는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국가가 통제했다면 지금은 욕망에 따라 자발적으로 행하는 차이만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제사가 점점 형식화되어 가고 있고 그로 인해 새로운 제사 문화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조상 귀신들의 한탄]

 

몇 년 전부터 제사에 관련한 재미있는 유모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명절 때 쫄쫄 굶은 조상귀신들이 모여 서로 신세를 한탄했다고 합니다. 신세타령하는 귀신들의 얘기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한 귀신이 씩씩거리며 말합니다. "설 명절에 음식 먹으러 후손 집에 가보니, , 글쎄 이 녀석들이 오후 처갓집에 갈 때 차 막힌다고 새벽에 벌써 지들끼리 편한 시간에 차례를 지내버렸지 뭔가? 가보니 설거지도 끝나고 집안이 텅텅 비어 있었어." 또 다른 귀신이 말합니다. "자넨 그래도 나은 편이여, 나는 그럴까봐 새벽부터 후손 집에 가지 않았겠나. 그런데 집이 텅 비었더라구. 알고 보니 긴 연휴를 이용해서 온 가족이 동남아로 여행을 가서 거기서 제사를 지냈다는 거야. 거길 내가 어떻게 알고 찾아가누?" 그러자 계속해서 이런 불평이 쏟아져 나옵니다. "난 제사상은 받긴 받았는데 이게 택배로 오다보니 음식이 죄다 상해서 그냥 물만 한 그릇 먹고 나왔어그래도 자네는 나은 거야. "나쁜 놈들! 호텔에서 지낸다기에 거기까지 갔더니, 이놈들이 음식을 전부 플라스틱 음식으로 차려서 난 이빨만 다치고 왔네." ”그래도 자네는 나은 편이야. 난 말야. 아예 후손 집에 가지도 않았어. 인터넷인가 뭔가로 제사를 지낸다고 해서 나도 힘들게 후손 집에 갈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 편하게 근처 PC방으로 갔었지" "그래, 인터넷으로 차례상을 받은 기분이 어떻든가?" "기분은 무슨 기분... 먼저 카페에 회원 가입을 해야 된다잖아. 귀신이 어떻게 회원가입을 하노? 에이, 못된 놈들!!!"

 

제사상에 절하는 것은 우상에게 절하는 것이다. 아니다! 이는 돌아가신 분에 대한 하나의 공경심의 표현일 따름이다라는 반론은 지금도 기독교인들 사이에 하나의 논쟁이 되고 있습니다. 저는 절이 우리나라의 고유한 인사법임을 인정하고 절 명상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저희 가정에서는 한 번도 제사상을 마련해 본적이 없기 때문에 절을 해본 적은 없습니다. 이 때문에 교회를 다니는 가족과 그렇지 않은 가족 간에 불화가 계속되고 있고, 특히 며느리가 이를 거부하는 경우에는 부부 갈등으로 번져 설 이후에 이혼율이 높아진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저는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의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제사상의 본래적 의미]

 

고린도전서 8장에 우상 앞에 드렸던 음식을 먹어도 되는가? 하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때 바울의 대답은 하느님은 우리가 믿는 한 분 밖에 없기 때문에 우상 앞에 드린 음식은 단지 음식일 따름이다. 그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렇게 믿고 있는 믿음이 약한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판단에 따른 행동이 아니라, 타인의 생각을 존중하는 행동을 취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자신의 믿음에 반해 절을 해도 괜찮다는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안식일의 주인이 사람이라는 관점에서 제사를 통해 민속전통을 회복하고 가족 화목을 이끌어내는 열린 태도로 다가서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본래 제사상은 조상들에게 드리는 먹거리 음식이 아니라 산 자와 죽은 자가 접속하는 하나의 상징적 기호였습니다. 요즘 제상에 오르는 생선은 종류를 따지는 대신에 값으로 따져 너무 비싸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흔하지도 않는 조기 정도를 제상에 올리거나 아버님이 좋아하셨다고 하는 생선을 올리는 경우도 있지만, 본래는 송어를 올렸습니다. 그것은 송어가 바닷물과 냇물의 담수를 다 같이 넘나들었기 때문입니다. 바다는 저승을 냇물은 이승을 상징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물도 뿌리나물, 줄기나물, 이파리나물로 종류별로 올렸는데 이 또한 할아버지, 아들, 손자의 조자손 삼대를 의미합니다. 제상에 담긴 동양철학적인 입장에서 접근하면 보다 쉽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정도까지는 수용이 가능한데, 조율이시라 하여 왼쪽부터 대추, , , 배의 순으로 놓는다든지 혹은 홍동백서라 하여 붉은 과일은 동쪽에 흰 과일은 서쪽에 놓는다든지 생동숙서라 하여 김치는 동쪽에, 나물은 서쪽에 어동육서라 하여 생선은 동쪽에, 육류는 서쪽에, 그럴 뿐더러 생선의 머리는 동쪽, 꼬리는 서쪽으로 놓아야 한다는 세세한 항목으로 들어가다 보면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한다고 하는 제사의 기본 정신은 사라지는 오류가 생겨납니다. 심지어는 먹기 편하게 생선의 뼈를 발라서 놓는다든가 복숭아는 잘못 먹으면 목구멍에 걸려 죽게 되니 제상에 놓으면 안 된다는 얘기는 본말을 뒤집는 생각이라고 봅니다. 본래가 그러했듯이 죽은 사람이 주가 되는 방식이 아니라 죽은 이를 통해 가족이 보다 하나 되고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그런 성찰을 갖는 제사상 차림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제사상은 차리지 않더라도 추모 예배를 통해 조상들의 뜻을 기억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봅니다.

 

[신앙의 편견]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예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아 형제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의 형제를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의 이야기입니다. 이 네 사람이 모두 어부였습니다. 그래 우리는 12제자들이 모두 어부출신이라는 착각을 갖기도 합니다만, 이 네 사람의 얘기가 먼저 나온 것은 이들이 초기 예수공동체 운동에 있어 지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마치 예수께서 해변가를 걷다 우연히 이 네 사람을 만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하시자 한 형제는 그물을 던지다 말고, 또 다른 한 형제는 그물을 손질하다 말고 즉시로 가족과 배를 버리고 예수를 따라나선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만, 우리가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이는 오랜 시간에 걸친 예수따름의 과정을 압축하여 극적으로 묘사한 것이지 실제로 이렇게 말 한마디에 단 순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었으니 누구든지 처음 보는 순간 누가 참 제자가 될 수 있는지를 알아내는 초능력을 갖고 있었고, 또한 말을 건네면 그 순간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마력을 가졌다고 상상할 수 있지만, 이런 상상력은 우리에게 예수에 대한 일종의 신비적 감탄은 자아낼 수 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의 삶과 예수의 길은 점점 더 멀어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저는 예수와 이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의 이상을 실천하는 일을 위해 오랜 시간동안 서로 만나 토론도 하고 논쟁도 하면서 그 뜻과 의지를 모아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가롯 유다와 같은 배반자는 나와서는 안 되었을 것이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내가 죽어야 하겠다고 얘기할 때, 베드로가 결단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스승을 막아서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서 이야기를 읽을 때에 우리는 곧잘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신앙고백에 매여 인간 예수에 대한 신앙적 편견 곧 초대교회가 갖고 있었던 가현설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많습니다.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인간의 원죄 교리에 근거한 전적 타락과 오직 은혜만이라는 구원 교리를 통해 인간의 자유 의지로서의 가능성을 처음부터 차단시켜 버렸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인간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아들인 신적 인간으로 설명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예수 이해는 신에 대한 숭배의 대상이 주를 이루었지, 예수를 삶을 따라가는 배움과 따름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는 않게 된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 예수는 목이 마를 때도 있었고 배가 고플 때도 있었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술도 마셨던 한 명의 인간이었음을 알고 있지만, 복음서에 기록되지 않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또 다른 면, 예를 들면 어렸을 때 친구들과 딱지를 치거나 팽이를 돌리다가 서로 다투어 주먹질을 하다 코피를 흘렸다거나 혹은 청년 시절 이웃집 아가씨를 남몰래 짝사랑하여 사랑의 고백이 담긴 편지를 보낸다거나 음식을 먹으면 당연히 배설을 해야 하는데, 예수가 똥을 싸기 위해 뒷간에 가는 일 등은 별로 우리 머리 속에 상상되지 아니하여 왔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는 인간으로서 살기는 하였지만, 전연 비인간적인 모습으로 살았다는 생각입니다. 일종의 신앙의 모순입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가 직면했던 가현설의 시작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수영을 배우기 전에는 물에 빠져 죽을 뻔한 경험들이 있는데, 이런 경험은 예수에게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경험이고 오히려 물 위를 걸었다는 신비적인 얘기만이 우리의 머리 속에 낙인처럼 박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고 할 때의 그 따름이란 완전한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신적인 길에 들어서는, 곧 하늘나라를 향해 가는 구원의 길을 의미하였지 여기에 인간의 고뇌와 약점이 전제된 삶의 구체성이 자리 잡을 공간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예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아 형제를 향해 나를 따라 오너라.’고 말하는 그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하늘나라 같이 가자는 부름으로 이해하십니까? 많은 향린교우들은 이를 십자가를 향한 고난의 길로 이해하지만, 향린 밖의 대부분의 교인들에게 있어 이 따름의 길은 불완전하고 죄 많은 인간이 흠 없고 완전한 인간 다른 말로 하면 신적 인간 최소한 천사가 되어가는 탈현세적인 천당 가는 길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그냥 탈현세가 아니라 가질 것 다 갖고 누릴 것 다 누리는 축복의 현세 그것도 평범한 복이어서는 안되고 남보다 더 많이 갖고 더 많이 누리는, 나가도 복이요 들어가도 복이요 앞으로 넘어져도 복이요 뒤로 넘어져도 복을 받는 누르고 눌러 차고 넘치는 복복복의 도둑심보의 탈현세 신앙입니다.

 

[좁은 길인가? 자아도취인가?]

 

그럼으로써 기독교인들은 자기도 모르게 신앙의 더 큰 모순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 비인간화되어 가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르치는 교회일수록 윤리나 도덕의 상식은 쉽게 무너지고 한번 다툼이 일어나면 소송과 맞소송이 계속되는 마귀들의 집단으로 변해가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기실현이란 자신의 죄성을 깊이 투시하는 성찰에서 일어나야 하지만, 인간의 완전성을 신적 그리스도에게 투사함으로 말미암아 입술로 고백하는 반복되는 교리적인 고백 속에서 그만 자아도취가 일어나고 마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 왜 분열이 일어났을까요? 베드로와 아볼로와 바울과 같은 지도자들이 싸움을 부추겼을까요?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모인 교회에 그리스도파는 왜 생겨나는 것입니까? 이 말은 자신들은 더 이상 잘못을 범하는 인간이 아니라는 자아도취에 빠졌던 것입니다. 나는 신의 자리에 올라섰기에 항상 옳은 것이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은 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서 저자들 또한 같은 문제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의 일차적 목적은 예수의 삶을 기록하는 일이기도 했지만, 부활의 예수로만 인식됨으로 십자가의 현실이 사라져버린 예수공동체에 어떻게 하면 믿음의 일상성과 현실성을 회복하느냐에 있었습니다. 전부 하늘만 처다 보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 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는 루가의 지적이 있었던 것이고, 마르코는 부활의 복음서가 아닌 수난의 십자가 복음서를 쓰기로 작정했던 것이고, 요한은 더 더욱 창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게시던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는 폭탄선언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여기서의 육신은 희랍어로 말하면 단순히 인간 anthropos도 아니고 어떤 정신성이 담보된 soma도 아닌 그냥 살덩어리를 의미하는 sarx라는 매우 도발적인 단어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마태오는 제자 부름의 사건을 이야기체로 바꾸면서 예수를 따르는 일은 그냥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일상의 삶의 자리 그것도 먹고 사는 생계의 자리와 보호와 편안함이 담보된 가족을 떠나는 결단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자신의 글을 통해 이를 자문자답합니다. 사람들이 예수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메시야냐? 예수의 대답은 항상 모호합니다. 자신이 분명 세례를 베풀 때에, 성령이 임재하는 것을 목격했던 세례 요한조차 제자를 보내 이를 다시 확인합니다. 이때에도 예수는 그래 내가 바로 메시야다.’라고 답하지 않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보면 알지 않느냐?’ 라는 모호한 답을 합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의 자아 인식에 대해 인자 곧 사람의 아들이라고 표현을 즐겨 말합니다. 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예수 입에서 나오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입에서만 나오고 있는 것인가요? 여기서 우리는 예수가 요구했던 따름으로서의 삶과 예수를 단지 하느님의 아들로서 고백하는 믿음 사이에 깊은 괴리가 생겨나는 것을 눈치챌 수 있습니다. 이 괴리를 복음서 저자들은 깊이 인식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들 또한 명쾌히 풀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공동체는 여전히 부활이라고 하는 인간 가능성의 세계를 뛰어넘는 신적 믿음에 기초해서 모였기 때문입니다.

 

다만 제가 오늘 강조하고 하는 말씀은 복음서 저자들이 고민했듯이 우리가 바라는 믿음의 길이 아닌, 예수께서 요구하는 믿음의 길을 따라서 가자는 것입니다. 가기도 전에 부활로 그냥 넘어가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부활은 오직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만이 얻어질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됨의 근본]

 

신과 인간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인간은 투쟁을 통해 선한 것을 얻지만, 다신이 아닌 유일신은 그 자체가 선이기에 거기에 투쟁이 없습니다. 니체나 키엘케고르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다움이란 실수하고 잘못을 범함으로 자기 고민과 범민 끝에 이를 넘어서려고 하는 투쟁과 노력 자체에 인간다움이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야훼를 만났듯이, 베드로가 예수를 만났듯이, 우리가 신을 만나는 것은 자신의 약점과 실패를 통해 만나는 것이지, 우리의 성공과 강함을 통해 만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의 핵심진리인 성육신의 가르침이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이 땅에 내려오시기로 작정하신 것은 우리를 모두 흠 없는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약점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넘어지지 않고 계속 일어서는 투쟁하는 인간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기독교의 상징들, 마구간과 발씻음과 살과 피를 나누는 식사와 십자가 위의 고통들은 모두 바울이 고백한대로 한낱 어리석은 일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이 되는 근본인 것입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로 하여금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는 초청이 단순히 제자가 되라는 부름인가요? 물론 와서 배우라는 초청입니다만, 배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무엇을 위한 배움인가요? 배움으로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일까요? 오늘 우리는 모두 이 초청에 응해 이 자리에 나와 있습니다. 오늘 처음 나오신 분도 있지만, 수십년동안 이 초청에 응해 오신 분들 또한 많습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는 이 예수님의 부름을 지금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그리고 이를 어떻게 실천하고 계신가요? 저는 오늘 하늘뜻 제목을 사람됨의 회복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결론으로 말하자면 이는 자유와 해방입니다. 물론 예수께서도 이 자유와 해방을 위해 싸우셨는데, 다만 그가 걸어가셨던 길은 섬김이라는 길이었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 섬김을 훈련하는 장소입니다. 누구를 어떻게 섬길 것인가? 그건 여러분이 결정할 몫입니다. 다만 섬김에 관해 한가지의 근본만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누구나 한번쯤은 읽어보았을 마더 테레사의 <한 번에 한사람씩>입니다.

 

난 결코 대중을 구하려 하지 않는다

난 다만 한 개인을 바라 볼 뿐이다

난 한 번에 단 한사람만 사랑 할 수 있다

한 번에 단지 한사람만 껴안을 수 있다

단지 한사람, 한사람, 한사람씩만

따라서 당신도 시작하고

나도 시작하는 것이다

난 한사람을 붙잡는다

만일 내가 그 사람을 붙잡지 않았다면

42천명을 붙잡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노력은 단지 바다에 붓는 한방울의 물과 같다

하지만 만일 내가 한방울의 물을 붓지 않았다면,

바다는 그 한방울만큼 줄어들 것이다

당신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당신 가족에게도.

당신이 다니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단지 시작하는 것이다

한 번에 한사람씩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