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훼께서 좋아하시는 일

미가 6:1-8; 시편 15; 고전 1;18-31; 5:1-12

 

저 개인적으로 믿음생활을 하면서도 그러하지만, 목사로서 교인들과 신앙 상담할 때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가?’ 입니다. 우리가 이 시간에 나온 이유 또한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기 위함이고 성서의 말씀에 귀를 기우리는 이유 또한 나의 삶에 임하는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함입니다. 예배드린다는 말은 창조주 하느님께, 예를 갖추어 경배를 드린다는 말이지만, 여기서 한발자국 더 나아가면 주인에게 나의 삶을 드린다는 말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800년 전, 중동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살아가던 작은 민족이 하나 있었습니다. 저들은 저들의 신에게 정성을 다해 예배를 드려왔습니다. 예루살렘 성안에 사는 성인 남성들은 하루에 세 번 성전에 나와 예배했고,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일 년에 최소한 세 번 죄 용서를 위한 예물을 들고 성전에 나와 예배를 드려왔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삶이 곧 예배라는 모토 아래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규칙들, 아주 세세한 규정들을 만들어놓고 이를 지키기에 힘써 왔습니다. 저들은 그것이 야훼 하느님이 좋아하시는 것이라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야훼 하느님은 저들의 행동들이 전연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자 미가를 불러 이렇게 따집니다. “할 말이 있거든 해 보아라. 내가 너희를 종살이 하던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어 너희들을 해방시켰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냐?” 그러자 백성들은 자신들이 드리는 예물이 부족하여 그런가 하여 묻습니다. “그러면 하느님 야훼께 예배를 드리려면 송아지를 가지고 가야 합니까, 수양 몇 천 마리를 바치면 야훼께서 기뻐하실까요? 아니면 맏아들이라도 바쳐야 할까요?”

 

개 눈에는 고기 뼈다귀만 보인다고 유대백성들의 눈에는 모든 것을 물질로 해석했습니다. 자신이 무언가를 받으면 기분이 좋듯이 신 또한 뭔가를 받으면 기분이 좋을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무엇을 드릴까에만 집중하다보니 드림의 본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야훼 하느님께서 저들을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준 기본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 기본을 잊지 말라고 계명을 주었는데, 그만 계명에 매여 손가락만 보고 정작 보아야 할 달은 보지 않게 것입니다.

 

[정부 권력과 인권의 충돌]

 

그래 예언자 미가는 야훼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매우 분명하게 말합니다. 첫째 정의를 실천하는 일. 둘째 기꺼이 은덕에 보답하는 일. 셋째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 이 짧은 구절을 어떤 사람은 제1성서의 황금률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2성서의 황금률은 무엇이지요? 정의란 무엇인가요? 한때 서점가를 강타한 정의란 무엇인가?’란 하바드대의 마이클 샌들 교수의 책도 있지만, 사백 쪽에 달하는 그의 책을 다 읽는다 해도 여전히 정의가 무엇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세상은 복잡하고 그가 말하는 철학적 논리는 많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하면 오늘 미가가 말하는 정의는 분명합니다. 미가는 정의를 하느님의 관점에서 크게 두 가지로 나누는데,, 우선은 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가난하고 힘없는 자에 대한 보편 인권 정의입니다.

 

망할 것들! 권력이나 쥐었다고 자리에 들면 못된 일만 꾸몄다가 아침 밝기가 무섭게 해치우고 마는 이 악당들아. 탐나는 밭이 있으면 빼앗고 탐나는 집을 만나면 제 것으로 만들어 그 집과 함께 임자도 종으로 삼고 밭과 함께 밭주인도 부려먹는구나.”(2:1-2) 소수의 가진 자들이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을 마구 잡아먹는 탐욕과 불의에 가득 찬 세상을 고발하고 있는데, 이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의 실상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늘 일하다 내일 짤려도 아무 말 못하는 비정규직 양산, 판매 대리점 을은 대기업 갑이 주는 물건을 주는 대로 받아야 하고 다 팔리지 않아도 반품은 하지 못하는 현실은 현대판 노예제도입니다. 우리나라도 5%의 사람들이 절반에 가까운 부를 독점하고 있는데, 5% 안에 한 가정의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삼 대가 포함되니 결국은 2%도 안 되는 재벌 가족들이 현재 우리나라의 부의 절반을 독점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정당한 방식으로 부를 모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과정에서 수많은 불법들이 행해졌고 이것들이 알려져서 법의 판단을 받게 된 것은 빙산의 일각입니다. 삼성의 이건희회장은 자신이 잘못을 뉘우치는 표시로 8천억인가 하는 돈을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말한 지가 2년이 넘었지만, 함흥차사입니다. 현재 이들은 자신들의 불법과 비리를 보호하기 위해 청와대와 의회와 검찰과 법원과 국정원이라는 정치권력과 교묘히 손을 잡고 이익을 나눠 먹습니다. 그리고 이 정치권력은 자신들의 권력을 뒷받침하고 있는 군부권력과 손을 잡고 또 나눠먹기를 합니다. 우리나라처럼 사병과 장교 비율이 높은 나라도 없고 별이 많은 나라도 없습니다. 대통령들이 장성의 숫자를 줄이겠다고 수십 년 전부터 말하지만, 비리로 얽혀있기에 쉽게 줄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 아는 얘기이지만, 장성 진급을 위해 엄청난 돈을 쓰는데, 그렇게 하는 이유는 일단 별을 달면 그보다 몇 배가 넘는 명예와 재물이 그 안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입만 열면 국가 안보 운운하고 북조선의 남침 위협을 들먹거리지만, 그 속에 감추어진 탐욕의 비밀은 실상 다 돈에 있습니다. 무기구입에 따른 천문학적인 떡고물이 있기에 저들은 안보를 핑계 삼아 우리나라 실정에 맞지도 않는 고가의 미사일과 전투기들을 계속 구입하는 것입니다. 미국 또한 새로운 무기를 개발하려면 그 개발비를 충당하기 위해 현재의 무기들을 어디엔가 팔아야 하는 것이고 거기서도 엄청난 떡고물이 떨어지기에 무기 개발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말하면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신무기는 계속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개인 간의 보편적인 인권과 경제정의는 국가 권력의 문제로 넘어가고 이 국가 권력은 전쟁무기라고 하는 패권 국가들의 지배 권력과 연결이 됩니다.

 

[제국 권력과 약소국 정의의 충돌]

 

그래 예언자 미가는 힘없는 백성들의 경제정의를 외치고 나서 이어 곧 바로 나라간의 전쟁무기 정의를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민족 사이의 분쟁을 판가름해 주시고 강대국 사이의 시비를 가려 주시리라. 그리 되면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전쟁을 일으키는 무기를 없애야만 개인 간의 경제정의 또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권력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도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현재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나라를 보십시오. 이 남한 땅만큼 개인의 경제 인권과 패권 국가의 이익이 적나라하게 맞부딪히는 곳은 없습니다. 우리 안에는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더 많은 신식 무기를 구입해야 한다는 안보논리가 우리의 뇌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보논리로 따지자면 핵보다 더 무서운 무기는 없고 지금의 남북대립상황 하에서는 북이 핵을 포기할 의사가 없으니 지금은 미국의 핵우산아래 있지만, 언젠가는 핵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은요? 그 다음은 둘 다 핵을 가졌으니 핵전쟁을 해서 모두가 죽든지, 아니면 그런 미친 짓을 할 수가 없으니 핵을 우리 둘 다 갖지 말자 그렇게 되겠지요. 미소도 60년대 핵무기 경쟁하다가 결국 그게 미친 짓이라 여겨 지금은 핵군축을 하여 오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은 핵이 아니더라도 대량살상무기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결국 현대전에서는 전쟁은 불가능합니다. 시리아가 3년간의 내전을 하다가 중지할 수밖에 없는게 전쟁을 몇 년 더 지속하다가는 나라 전체가 초토화되기 때문입니다. 국민 대부분이 죽거나 중상을 입거나 다른 나라로 피신을 했는데, 거기에 승리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군대가 없는 나라 상상할 수 있습니까? 우리나라에 군대가 없으면 불안해서 살수가 없겠지요? 그런데 이 세상에 군대 없이도 잘사는 나라가 있습니다. 태평양의 작은 섬나라나 도시국가들이 있는데, 위키백과에 보니 34개국이 있습니다. 그중 큰 나라는 아이슬란드와 코스타리카입니다. 아이슬란드는 북대서양의 외딴 섬이니 예외로 친다 하더라도 코스타리카는 인구가 500만이나 되는데도 군대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군대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1949년도까지는 군대가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군대를 없애자고 제일 먼저 제안한 사람은 당시 국방장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은 다들 식민지에서 독립한 후 빈번히 발생하는 군부 쿠데타로 인해 매우 불안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군대를 없애기로 한 것입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별 문제없이 주권을 지키고 평화로운 민주주의 체제를 잘 유지해오고 있습니다. 두어 차례 주변 니카라과로부터 공격을 당한 일이 있는데, 그때에도 경찰력으로 맞서 싸우면서 외교력을 통해 이를 해결했는데 외교력이 통한 이유는 군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미국 가정의 40%가 총기를 집에 소유하고 있는데, 다 거짓 안보논리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안보논리 때문에 총기사고로 인해 수만명이 죽어가고 있고, 어린이들 또한 매년 수천명이 죽고 있습니다. 최근 10년동안 미군이 전쟁에 나가 죽은 숫자보다 더 많고, 2015년이 되면 자동차사망 숫자보다 더 많아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일단 총기를 소지했던 사람은 총기를 포기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불안해서 잠을 잘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기에 기초한 안보논리라는게 허구인 것은 총 없는 사람은 총기사고도 나지 않고 잠도 잘 자거든요.

 

[영세중립 통일 방안]

 

통일은 대박이라는 말이 뚱딴지같은 말이 갑작스레 유행하고 있어, 정부 돈으로 운영되는 기관에서는 이를 현수막으로 걸어놓았습니다. 제가 사는 이북5도청에도 통일은 대박이다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습니다. 요즘 북조선에 그 가치를 계산할 수 없는 엄청난 양의 희토류가 있고, 거기에 최근에는 석유매장량이 세계 3위라는 확인되지 않는 뉴스까지 뜨고 있어 기술력의 남한과 풍부한 자원과 노동력의 북조선이 하나 되는 통일이 대박인 것은 분명한데, 이 대박이 쪽박이 안 되고 정말 대박이 되려면 궁극적으로 군대 없는 나라를 지향해야 합니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지금 통일이 안 되는 이유는 남북이 공히 호전적인 군대권력이 평화의 세력보다 더 크기에 대화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도 문제가 있지만, 더 큰 이유는 주변 강국들이 통일을 원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남북한이 통일이 되면 엄청난 군사력을 갖게 되고, 이게 중국이든 미국 어느 한쪽으로 기울면 세력 균형이 깨어지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미국과 중국이 만나 맨 날 6자 회담운운 거려도 그건 그냥 하는 말일 따름입니다. 우리가 군대가 없는 영세중립국으로 간다고 할 때, 주변 외세들이 여기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비무장이라는 평화의 공간을 마련하여 중국과 러시아라는 대륙세력과 미국과 일본이라는 해양세력의 부딪힘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군대 없는 영세중립국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저는 이 길이 통일로 가는 가장 현실적인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통일 이후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재원을 무기생산이나 구입에다 투자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려면 이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물론 누군가는 독일 통일을 얘기하겠지만, 독일은 구소련의 체제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독일이 소련과 접경을 하지 않았기에 소련이 쉽게 포기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크라이나가 유럽연방과 러시아 사이에서 줄다리기가 계속되고 있고, 피를 부르는 민중 폭동이 일어날 단계에 와 있습니다. 국민 다수가 유럽연방으로 가길 원하여도 이것이 쉽지 않는 이유는 국경을 접하고 있는 강대국 러시아가 이를 결코 허용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북조선이 무너지면 마치 남한이 바로 접수하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이야 말로 대단한 착각입니다. 북조선은 철저한 통제국가이기에 민중폭동이 일어날 수도 없지만, 설사 일어나더라도 군대가 있으니 이집트마냥 김정은체제가 무너질 수는 있어도 국가 체제 자체가 무너지는 그럴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착각들을 하도 많이 하니 그런 경우를 상상해볼 수는 있겠습니다. 그럴 경우 중국이 과연 북조선을 포기할까요? 지금 북조선에 수많은 자국민이 살고 있고 투자한 재산이 많은데, 오히려 중국이 먼저 선점할 것입니다. 미국도 이를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북한 체제를 무너지게 하려고 경제봉쇄를 하면서도 또 무너지지 않도록 적당히 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은 남한에 군대를 주둔하고 중고 무기를 남한과 일본에 팔아먹을 수 있는 현재의 긴장 체제를 유지하는 데에 목적이 있지, 남북통일에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 백성들은 권력자들의 위선적인 안보논리에 더 이상 속아서는 안 되고 전쟁연습이 국력을 튼튼하게 해 줄 것이라는 논리에도 속아서도 안 됩니다. 전쟁연습이란 시효가 임박한 폭탄들을 소비하는 하나의 수단입니다. 그리고 또 미국산 폭탄들을 구입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60년 이상 속아왔고, 그 이전에도 속아왔고, 아니 인류역사가 그런 권력자들의 속임수에 계속 속아 넘어온 것 아닙니까? 잘살면 잘살수록 가진게 많아 더 불안하니 권력자들의 속임수에 더 잘 넘어갑니다.

 

기독교의 진리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외치시는 평화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로마가 말하는 평화란 군사적 힘에 기초하니 결국 남의 나라를 침략함으로서만 평화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피의 대가로 유지하는 것이 로마의 평화요 제국의 평화인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 예수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맞서지 않았습니까? 바울은 이 십자가의 진리를 알아챘고, 그래서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의 경륜이 드러났다고 외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 어리석은 사람들을 택하고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 세상에서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을 택했다는 신앙의 역설을 말하는 것입니다.

 

미가가 말한 정의를 말하다가 영세중립통일방안까지 왔습니다만, 정의란 한마디로 말하면 백성들의 권리를 지키는 일입니다. 그래 미가는 정의가 무엇이고 평화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아주 간단하고도 쉽게 이렇게 답합니다. “사람마다 제가 가꾼 포도나무 그늘, 무화과나무 아래 편히 앉아 쉬는 것”(4:4) 정의란 복잡한게 아닙니다. 편히 쉬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게 정의로운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동행하는 삶]

 

두 번째 야훼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일은 은덕에 보답하는 일입니다. 이 말을 잘못 이해하면 하느님께 감사 예물 드리는 일로 오해되기 쉬운데, 이는 다른 사람에게 자비 베푸는 일을 말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조심스럽게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인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조심스럽게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이 될까요? 기도를 영적 교제라고 말하니 조심스럽게 기도하라는 말씀일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은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고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기도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삶에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님과 동행하는 삶이 될까요?

 

여기에 대한 답으로 오늘 마태복음서의 산상수훈의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흔히 팔복이라고 말하는데 저는 이 팔복의 말씀을 이해하는 핵심 사상은 팔복 맨 마지막에 나오는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누리는 복, 슬퍼하는 자, 온유한 자, 평화를 위해 일하는 자, 그리고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누리는 이 복들은 한마디로 말하면 현세에서는 영원한 민중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는 누릴 수 없는 복이고 영원한 민중혁명은 끝이 없는 피의 역사를 말합니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말하면 이 복들은 현세에서는 불가능한 복들이고 종말론적인 하느님의 나라가 왔을 때에야 가능한 일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이 복들을 현세에서도 누릴 수 있다고 말하는데, 그런 사람들은 현세의 삶에서 떨어져 수도생활을 하는 종교인들입니다. 현세와 내세를 명확히 구분하다 보면 여기서 우리는 니체나 맑스주의자들이 비판하는바 기독교의 탈현세적인 기복사상 곧 불의 앞에 잠잠하는 노예 신앙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저는 그래서 내세는 현세와 변증법적으로 하나이고 하느님 나라 완성은 미래가 아닌 지금 여기에서결단을 통해 완성되는 종말론적인 신앙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지금 이 시간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들이 과연 현실에서 가능하냐 가능하지 않느냐 하는 질문이 아니라 이 모든 복들은 그냥 골방에 앉아 기도한다고 주어지는 결과로서의 복이 아니라, 예수 이름으로 옳은 일을 하다가 세상권력으로부터 박해를 받았을 때 오는 과정으로서 복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 혹은 행복은 상대적입니다. 같은 조건 하의 두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한 사람은 행복할 수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불행할 수 있습니다. 버트란트 러셀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거지가 질투하는 대상은 백만장자가 아니라 좀더 형편이 나은 다른 거지다.” 우리가 꿈꾸는 행복이 얼마나 허무한 것들임을 한마디로 폭로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작가 알랭 드 보통은 인생의 풍요함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부유한 사람은 상인이나 지주가 아니라, 밤에 별 밑에서 강렬한 경이감을 맛보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해석하고 덜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세상 관점의 전복이 곧 복]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인생의 풍요로움을 전연 다른 곳에서 느끼는 단순한 사람을 말합니다. 슬퍼하는 사람이 복이 되는 것은 다른 이의 아픔을 함께 하기 때문이고 자비를 베푸는 사람 또한 그 자비함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악착같지 않아 이 세상에서 땅을 소유하기는 힘들지만, 세상이 빼앗아갈 수 없는 하늘의 땅을 소유할 수 있고 그래서 불의한 권력 앞에 당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목마름을 느끼듯이 옳은 일에 대해 목말라 할 때, 하느님은 우리에게 설명할 수 없는 영혼의 만족함을 가져다줍니다. 이런 것들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사람들은 옳은 일을 위해 싸우지 않았을 것입니다. 문익환목사님이 그러했고 마틴루터킹목사가 그러했고 본훼퍼목사가 그러했고 마하트마 간디가 그러했고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그러했습니다.

 

팔복의 말씀들은 행복이란 삶의 조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조건을 뒤집어엎는 관점의 전복 속에서 나오는 것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곧 복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고,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앙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는게 너무너무 힘들어서 맨 날 죽고 싶다고 외치던 한 사람이 시한부 인생이라는 말기 암 진단을 받게 되면 , 그동안 힘들어서 빨리 죽고 싶었는데 잘 되었다.’라고 반응하지 않고, 오히려 남은 삶에 더 깊은 애착을 갖게 됩니다. 이는 곧 행복이 조건에 달려 있지 않고 태도에 달려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에 어리석게 보이는 일이 하느님께는 지혜가 되고 이 땅에서 무력한 자들이 하느님께는 힘의 근원이 됩니다. 이것이 곧 지난 2천년동안 교회가 이 세상에서 보여준 십자가의 길이며 부활의 능력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일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정의를 실천하고 자비 베풀기를 즐겨하고 하느님과 동행하는 깨어있는 단순명료한 삶입니다.

 

사랑하는 향린교우 여러분!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이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 뿌리내려 많은 열매들을 맺기를 바라면서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