밟히는 소금, 됫박에 덮힌 빛

58:1-9; 112:1-9; 고전 2:1-12; 5:13-20

 

 

언제나 그렇듯이 금주에도 우리 주변에는 몇 가지의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뒤엉켜 들려왔습니다. 우선 좋은 소식으로는 그간 밀고 당기던 남북이산가족 만남이 아직도 한미전쟁연습으로 인해 돌발적인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지만, 일단 보름 후에는 그간 60년동안 떨어져 있던 남북의 85 세대의 가족이 만날 것이라는 것, 그리고 24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우리 향린교회가 지난 2년 동안 열심히 함께 하여왔던 쌍용차 해고가 잘못이라는 2심 법원의 판단, 그리고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23세의 황유미씨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이 외부 압력으로 인해 개봉관이 대폭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매진을 이어가고 있고 몇몇의 뜻있는 분들은 아예 통째로 좌석을 모조리 예매하여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나쁜 소식으로는 조류독감으로부터 인간 생명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멀쩡한 닭과 오리들이 산채로 계속 땅속에 묻히고 있고, 이에 희망을 잃어버린 50대 양계농민이 자살을 했다는 소식, 재작년 대선 삼일을 앞두고 국정원 여직원이 40개의 아이디로 대선댓글공작에 개입을 하다 붙잡혔지만, 뭐가 그리 급했던지 밤 11시에 선거 개입이 없었다는 허위 발표를 한 전 서울경찰청장 김용판씨에 대한 무죄 선고입니다.

 

[누가 진짜 국가내란 음모자들인가?]

 

이는 당시 이 사건의 조사를 책임지고 있었던 권은희 수사과장의 의견과는 반대되는 거짓 발표였고 이후 여론조사에 의하면 국정원이 선거에 개입한 것을 알았다면 대통령당선자는 뒤바뀌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니 이는 국가내란에 해당하는 엄청난 범죄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이 재판은 국정원과 사이버사령부와 보훈처의 관권대선개입이 드러남으로 인해 구석에 몰려 있는 박근혜정부에게 있어서는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재판이었으니 담당 판사가 양으로 혹은 음으로 겪어야 했던 중압감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였을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개인이 국가권력으로부터 받는 중압감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검찰이나 경찰이 정권의 시녀 노릇을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판사마저 국민 상식에 반하는 판정을 하게 되면 민심 이반이 일어나는 것은 역사의 필연이고, 삼권분립이 법의 조문으로만 존재하는 국가는 여전히 후진국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6,70년대 박정희군사 유신독재에 항거하던 대학생들과 교수들에게 무거운 형벌을 내렸던 해바라기 정치 판사들 지금은 다들 은퇴를 해서 잘 살고 있겠지만, 그들이 중형 언도를 내렸던 사건들이 지금은 모두 무죄로 판결이 났는데, 도대체 그 당시 뭐가 무서워서 고문에 의한 거짓 자백인줄 뻔히 알면서도 양심에 어긋나는 판결을 했는지 일일이 찾아가서 한번 묻고 싶습니다. 제가 어느 기자회견장에서 이런 얘기를 했는데, 권력에 아부하여 양심에 반하는 판단을 하고 사회 정의를 더럽힌 검사나 판사들은 고문기술자 이근안 마냥 모두 그 이름을 역사에 남겨 후손들이 귀감으로 삼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일들이 계속됩니다.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게 되면 국가가 손해 배상을 하는데, 이때 잘못된 언도를 내린 판사들에게도 설사 그들이 은퇴를 했다하더라도 친일 후손 재산 환수하듯이 일정 부분 책임을 지워야 한다고 봅니다. 공안형사나 검사들 무고한 시민을 고문과 협박으로 죄인을 만들어도 이들을 이들의 죄를 물을 수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일입니다.

 

검찰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진보당의 이석기의원을 비롯한 당원 9명에게 국가내란음모죄로 검찰이 20, 15년의 구형을 했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도대체 백여 명이 모여 총기 하나 칼 한 자루 없는데 국가내란이 성립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애당초 언론에 발표했던 고발장에 칠백 군데가 넘는 오류가 발견이 되고 그리고 이 오류들이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절두산 성지(聖地)’성전(聖戰)’으로 바꾸는 등 매우 의도적으로 국민을 현혹시키는 위조 조서라면 이는 애당초 고발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것입니다. 수백페이지에 달하는 박사 논문에도 남의 글 한 문장을 따옴표 없이 옮겨왔다고 해서 학위 자체를 문제 삼고 있는 판에 수많은 사람들의 명예와 생명이 달려 있는 일이기에 오히려 이를 고발한 국정원이나 일부 검찰수사관들을 국가내란음모죄로 다스려야 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알다시피 이 사건은 이석기의원과 몇몇 진보당원들을 희생양 삼아 진보당 나아가 이 땅의 통일진보 평화세력을 모두 없애겠다는 청와대의 사주를 받은 국정원이 조작한 일입니다. 이제 남은 희망이라곤 국가보안법 피고자 이시우 사진작가에게 무죄를 선고했던 양심적인 판사가 다시 한번 나와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60년대 인혁당 사건이 이 땅의 통일민주화 세력을 짓밟는 신호탄이 되었듯이, 이번 내란음모 조작 사건이 검찰의 구형대로 움직인다면, 이는 제2의 유신독재 시대가 시작한다는 신호탄이 될 것입니다. 자유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바라는 사람들의 비장한 각오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단식은 종교적 행위인가? 사회적 행위인가?]

 

그런데 제가 이런 얘기를 예배시간에 하면 향린교우들은 그렇지 않지만, 대부분의 향린 밖의 기독교인들은 우리는 지금 한명의 종교인으로 어떻게 하면 신과 바른 관계를 가질 것인가를 알기 위해 예배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지, 정의로운 사회 구현을 위한 사회운동가가 되기 위해 예배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라고 항의할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의 말씀은 단식을 다루고 있는데, 단식은 종교 행위입니까? 사회 행위입니까? 올해 초에도 10여명의 교우들이 한주간의 단식 훈련에 참가하였습니다만, 대부분은 음식 절제 훈련을 통해 새해를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마음에서 참여했습니다. 육체를 비움으로 자신의 욕망을 비우고, 그래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에 보다 더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는 순전한 마음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야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을 삶의 최우선에 두었던 유대인들은 오랜 세월동안 단식을 하여 왔습니다. 과월절 칠칠절 초막절과 같은 절기에는 조상들의 고난을 기억하고 야훼 하느님의 구원에 감사한다는 의미에서 단식을 하여 왔습니다. 예수님 당시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바리새파 사람들은 일주일에 두 번 단식을 의무적으로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행위가 하나의 계명으로 굳어지자 본래의 뜻은 사라지고 의무 행위만이 남았습니다.

 

저보다 한 살 위인 사촌 누이가 한명 있었는데, 이 누이는 학생 때에 밥 굶기를 예사로 했는데,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것을 부모님이 들어주지 않으면 무조건 방에 들어가 이불을 덮고는 밥을 굶고 학교 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래 한 이틀이 지나면 언제나 부모님이 항복을 하십니다. 그래 저는 한번도 못해보았지만, 자녀가 하는 단식이 부모님을 협박하는 무기로 변한 것을 보았습니다.

 

이사야 시대에 유대인들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항의합니다. ‘(하느님) 당신께서 보아주시지 않는데 단식은 무엇 때문에 해야 합니까? 당신께서 알아주시지 않는데 고행은 무엇 때문에 해야 합니까?’라는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본래 고행을 통해 자신의 죄를 더 깊이 깨닫고 하느님의 뜻을 더 잘 실천하기 위해 시작한 일인데, 시간이 경과하면서 타성화 되자 백성들은 이를 자랑하고 더 나아가 욕망 충족을 위한 하느님 협박용으로 변질이 된 것입니다. 하느님이 칭찬도 안해 주고 우리 소원도 들어주지 않으면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협박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야말로 적반하장(賊反荷杖) 도둑이 지팡이를 들고 큰 소리를 치는 셈입니다. 신앙의 자율성이 종교적 계명으로 타율화 되면 이런 위험에 자주 빠집니다.

 

지난 주 수요일 노숙인들을 위하여 치약과 칫솔 그리고 김밥 한 줄을 나눠주는 일에 최영선권사님과 새교우 이기은님이 오후 내내 봉사를 하셨습니다. 그 일이 끝나자 하늘뜻펴기를 보내는 메일 발송 작업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사무집사께서 힘드시지요?’라고 얘기하자 즉각 아니요, 재미있는데요.’라고 답을 하시었습니다. 이게 자율과 타율의 차이입니다. 자발적인 봉사는 힘도 안 들고 흥이 납니다. 그러나 직업상 해야 하는 일들은 짜증이 나기 십상입니다. 우리 교회가 구역모임이 잘 안됩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 자발적인 구역모임을 위해 세분의 남자 집사님이 모였습니다.(채운석 나명훈 강인권) 자신들이 사는 지역 안에서 자발적인 구역모임을 만들어보겠다는 뜻을 밝히셨습니다.

 

저도 오랫동안 목회를 해보면서 느끼는 일이지만, 무슨 일이든 자발성이 중요합니다. 모든 권위가 도전받고 있는 오늘날의 포스트모던 시대에서는 무슨 일이든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소모임같은 것도 목회실에서 주도적으로 시작했던 소모임들은 시간이 지나면 그 동력이 떨어집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자발적으로 시작했던 일들은 세월이 가도 사그라지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10년넘어 진행되고 있는 안병무읽기, 장애자 목욕봉사, 사도행전공부, 철학공부하는 모임, 국악기배우기, 판소리배우기, 향기로운 이웃 합창 등등 이번 주부터는 성서통독반도 시작합니다. 자발성이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자기가 좋아해서 시작해야 오래가고 흥이 나는 것입니다. 자녀들도 스스로 원해서 시작한 일들은 꾸준히 가지만, 부모의 의지에 의해 시작하는 일들은 대체로 오래 가지 않습니다. 저는 무슨 일이든 여러분이 원해서 시작하기를 바랍니다.

 

소설가 이윤기는 한 문학상 수상식에서 이런 얘기를 통해 우리의 현재를 묻고 있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삶에 네 뜨거운 피가 통하고 있는가? 너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품삯이 아닌, 일 자체, 그 일의 골수와 희로애락에 함께 하고 있는가?” (재인용 구본형 <낯선 곳에서의 아침> 319)

 

살아가노라면 사회의 지도자들이 물의를 빚는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그건 권력이 만들어준 권위 때문입니다. 권력을 자주 행사하다보면 자신만이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독재 권력이 그래서 생깁니다. 또 도덕적으로 가장 올바르게 그리고 종교적으로 가장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 오히려 문제를 일으키게 되는 경우 종종 발생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목사들인데, 신적 계시라는 언어적 표상으로 인해 스스로의 오류 논리에 갇혀 있을 때가 더 자주 일어납니다. 더구나 우리나라와 같이 남북분단으로 인해 이념이 절대화되는 곳에서는 정치나 종교뿐만이 아니라 사회 모든 영역에서 이런 자기 절대화가 더욱 극성을 부리게 됩니다.

 

저는 주기도를 드릴 때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한 것과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옵시고의 앞뒤 순서를 바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게 하옵시고로 하는 것이 교리적으로도 옳고 문맥상으로도 더 자연스러울 것 같은데, 왜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을까? 하느님은 사랑이 본질이시고 용서가 전문이시니까 용서하는 것이 쉽지만, 우리 인간은 용서하는 것이 힘드니까, 하느님이 용서하시는 그 힘에 의지하여 우리의 형제자매를 용서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저는 이게 항상 의문이고 불만입니다. 하느님의 절대성이 인간의 상대성에 묶여 있다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 아닌가요?

 

[존재와 행위의 일치성]

 

같은 맥락에서 저는 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어라.’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을까가 항상 의문입니다. 행위와 실천을 통해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옳은 순서이지, 의로운 행위가 있지도 않는데, 왜 먼저 존재론적인 의인을 선포하시는 것인가? 과연 나는 세상의 소금인가? 빛인가? 그렇다면 왜 소금과 빛의 행위가 자발적으로 나타나지 않는가? 아니면 내가 소금과 빛의 행위를 함으로써 나의 이러한 존재성이 증명되는 것이 맞는가?

 

독일의 양심이라 불리는 천재신학자 본훼퍼의 책에 행위와 존재라는 제목이 있습니다. 그는 1929년 베를린대학에 교수자격 논문에서 당시 세계 신학계에 두 거성인 칼 바르트와 루돌프 불트만의 각기 다른 계시 이해를 칸트의 초월철학과 헤겔-하이덱거의 존재론을 통해 풀어가고자 했습니다. 칸트의 초월철학의 영향을 받은 바르트는 신 중심적 입장에서 행위를 강조하고, 존재론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은 인간 중심적 입장에서 존재를 강조하였는데, 본훼퍼는 바르트와 불트만의 행위와 존재의 두 대립적 입장이 교회 개념을 통해 극복될 수 있으며 행위와 존재의 일치가 가능하다고 보았는데, 이는 이미 예수의 가르침 속에 숨어 있었던 사상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소금과 빛이라고 그 존재성을 명명하시고 나서 이어 착한 행실을 통해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성서를 우리의 삶을 위한 절대 가치를 갖고 있다는 의미에서 하느님의 말씀으로 고백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말씀을 읽을 때에 갈등을 겪습니다. 그것은 성서의 말씀이 말하는 이상과 오늘을 살아가는 현실의 괴리 때문입니다. 저 또한 하늘뜻펴기를 함에 있어 성서가 갖고 있는 눈을 통해 세계를 재해석합니다. 이 재해석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지금 여기에서 실천 가능한 실체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상과 현실의 일치이면 사상과 실천의 결합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상과 현실이 그렇듯이 사상과 실천 사이에는 괴리가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사상이 추구하는 것은 비타협적인 철저함인 반면 실천은 적당한 선에서 현실과 타협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상을 추구하는 것은 초월적이지만, 실천은 현실적입니다. 이 둘의 관계는 필수적이지만 동시에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전리관이란 학자는 사상의 실현은 곧 사상 자신과 사상가의 훼멸(毁滅)이다라는 얘기를 하기도 했습니다.(모택동시대와 포스트모택동시대 1949-2009 한울 23) 그리고 그 한 예로 프랑스대혁명의 시기의 루소와 로베스피에르를 얘기합니다. 루소의 인간평등론에 기초하여 법률가였던 로베스피에르는 제한 선거의 철폐, 봉건제 폐지, 영주와 귀족이 사사로이 탈취한 토지반환운동을 주관하며 왕정을 타도하는 혁명가로 나섭니다. 그래서 혁명은 성공했고 권력을 잡았으나 그는 수많은 정적을 단두대에서 처형함으로 오히려 독재권력의 상징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루소의 피로 물든 손이라는 별명을 가졌고, 그 또한 정적에 의해 단두대에서 희생당하고 맙니다.

 

이와 같이 루소의 뜻을 실천하고자 나선 로베스피에르가 결국 루소의 빛을 가렸듯이 오늘날 많은 교회들 또한 예수의 뜻을 실천하고자 나섰지만, 예수의 빛을 가리고 있는 현실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젊은이들은 기독교를 개독교라 부르고 있고 세상은 교회를 향해 설교하지 말라고 비판합니다.

 

[남한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단체는 몇 년 전부터 남한 교회의 사회적 신뢰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하여 왔는데, 이 결과에 따르면 수년 전부터 계속해서 20%를 넘지 못하는 만성적인 불신을 받고 있고, 가톨릭에는 뒤졌지만, 불교에는 앞서 있던 신뢰도가 3녀전부터는 불교에 도 뒤지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 20%라는 수치도 응답자 중에 기독교인이 포함된 결과입니다. 여러분은 순전히 비기독교인들에게 물으면 개신교회를 신뢰하는 숫자가 얼마쯤 되리라고 상상하십니까? 20%? 10%? 올해는 이에 대한 발표가 없습니다만, 몇 년 전에는 3.2%에 불과했는데, 올해 이에 대한 발표가 없는 것을 보면 더 떨어져서 너무 창피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비기독교인 백 명 중 3명 정도만 교회가 하는 얘기를 신뢰하고 있고 나머지 97명은 믿지를 않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길거리에서 목소리를 높여 전도하고 전도지를 아무리 나눠줘도 거의 소용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교회가 만약 제품을 파는 회사라면 망하는 것은 시간문제이지요.

 

가장 큰 이유는 말과 행동이 다른 언행 불일치이고, 이어서 재정비리와 목사의 부정, 이웃종교에 대한 배타적 태도와 강압적인 전도 방식, 저급한 설교내용 순입니다. 이 여론조사는 교회의 신뢰도를 회복하기 위한 최우선 과제로 윤리성 회복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지난 몇 년동안 매번 1순위였던 봉사와 구제활동을 제치고 올라선 항목입니다. 우리는 교회가 복지시설을 많이 갖고 가난한 자에게 물품을 나눠주는 봉사와 구제활동을 하면 교회의 신뢰도가 회복될 것이고 생각하지만, 이미 우리 사회는 그런 낮은 단계의 사회는 지나갔습니다. 새 포도주머니에는 새 포도즙이 필요한 것입니다.

 

현재 세상 사람들이 한국교회에 기대하는 역할은 구제와 봉사 차원을 넘어서서 사회정의의 실현에 앞장 서 달라는 것입니다. 사회부패를 막기 위한 소금이 되기를 버리고 불의가 행해지는 어두운 곳을 비추어 고발하는 빛의 되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방식은 개인들의 심령을 변화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경험하는 일이지만, 조금 변화되는 듯싶다 가도 도로 과거의 죄로 돌아갑니다. 개인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환경이 바뀌지 않으면 도루묵이 되고 맙니다. 교회도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한 두 번 혁신적인 일들을 꾀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과거로 회귀하기 일쑤이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간다고 장담하는 사람들도 구조가 허술하면 재정비리가 일어나서 사회법정에 고발되고 있습니다.

 

예수 시대에도 바르게 살려고 애쓰는 지도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조가 바뀌지 않기에 사회는 계속 썩어져가고 있었고,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헤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심령을 변화시켜 선한 사람이 되라고 말하지 않고 너희는 소금이다 너희는 빛이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사람들의 발아래 짓밟힐 따름이고 빛이 됫박 속에 갇혀있어서야 그게 무슨 소용이 되겠느냐?고 믿음의 무용론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소금과 빛된 교회의 예언적 책임]

 

여기서 교회는 한 개인의 심령을 변화시키는 일에서 그쳐서는 안되고 이런 개인의 심령 변화와 더불어 깨끗한 사람들이 바르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사회구조를 만들어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나쁜 일을 행하고도 그 잘못에 처벌을 받지 않고 계속 잘 먹고 오히려 세상을 비웃는 듯이 떵떵거리면 살아가도록 놔두어서는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회개시키는 일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잘못된 사회구조를 바꿔내야 합니다. 작은 도둑 백 사람을 잡아내는 것보다 큰 도둑 하나를 잡아 제대로 처벌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악의 근원을 제거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일들을 감당하는 소금과 빛이 갖고 있는 기능을 위한 존재론적인 당위가 하나 있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건 희생입니다. 소금이 맛을 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을 녹여야 하고 빛이 그 빛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을 태워야 합니다. 세상은 지금 교회를 향해 그런 희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자기 몸짓을 키우는 것은 소금과 빛의 존재성을 부정하는 일입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물건을 나눠주고 해외에 나가 선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 집안이 썩어가고 있는데, 그걸 못 본체 한다면 되겠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자기들과 같이 그냥 비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께 더 떳떳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담당해야 하는 예언적 기능입니다. 예언자란 한마디로 말하면 어떤 사람입니까? 예언자들은 권력으로부터 항상 핍박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권력가들의 비행을 고발했으니까요? 다른 사람들은 무서워서 말을 못하는데, 하느님의 손에 붙잡힌 이들은 자신들의 안전을 넘어 권력가들의 불의와 부정을 고발하였습니다.

 

작가 김규항은 말하기를 예술가의 본색은 착한 행동이 아니라 나쁜 행동에 있다. 예술가는 여기저기서 훌륭한 사람이라고 상찬(賞讚)받으며, 의식 있는 사람으로 행세하려는 중산층 인텔리의 속물근성에 봉사하는 착한 사람이 아니라, 불온한 상상력으로 오히려 누구도 함부로 상찬하기 어렵도록 불편을 행사하며, 현재의 세상과 포탄처럼 충돌하는 나쁜 사람이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예술가가 아니라 기독교인으로 바꿔 넣으면 바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소금과 빛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식이 단순히 교회 건물 안에서 이루어지는 종교행사가 아니라, ‘억울하게 묶인 이를 끌러주고 멍에를 풀어주고, 압제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버리는 것이며,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주는사회적 행위임을 이사야가 강조하였듯이 예수님 또한 율법의 완성자로서 율법의 근본정신인 의로운 행위를 하는 하느님의 아들딸로서의 자유 인간이 될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어버이를 찬양하게 하여라.”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