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정의에 직면하기

시편 119,1-8; 신명기 30,15-20; 고린토전서 3,1-9; 마태오 5,21-34

 

고 상 균 목사

 

[어둠이 가고 빛이 옵니다!]

혹시 느끼고 계신가요? 해가 참 길어졌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면 공감하실 분들이 적지 않으실 것 같은데요 저는 지난 달 가스사용 고지서를 보고 가슴이 철렁했습니다만, 시기상 아직 성급하긴 하지만 맹위를 떨치던 겨울추위도 슬슬 물러설 자리를 보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이 모습 그대로, 절대로 될 수 없어 보이던 것들이 내 안에 혹은 우리의 모임과 사회 가운데, 그 강하고 힘센 것들이 어느 틈엔가 스멀스멀 뒤로 물러서는 일이 많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밤과 낮의 기온차가 슬슬 벌어지기 시작하는 요즘, 무엇보다 존경하는 어르신들과 향린 공동체 구성원 모두 몸과 마음의 건강 유지하시길 기원 드립니다.

 

[왜곡된 정의: 신명기]

 

보아라! 나는 오늘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너희 앞에 내놓는다!

(신명기 30:15)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 모세의 마지막 가르침중 하나인 오늘의 1성서 본문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무척 결연하게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대리자, 더군다나 평생을 탈출공동체의 지도자로 살았던 권위자의 임종이라는, 그야말로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할 자리에서 이야기 속 주인공 모세는 자신과 함께 한 공동체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종용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명제를 던지며 하느님 앞에서의 단독자로서의 인간 실존의 문제를 역설하는 키에르케고르처럼 말입니다. ‘너희가 하느님이 내리는 명령에 순종하면 복을 누릴 것이나, 불순종하면 망할 것이다!’ 지엄한 자리에서 누가 하는 명령이라고 감히 거역한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본문은 그렇게 독자를 내용 속 이스라엘 공동체와 함께 그저 아멘을 외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갑니다. 하지만 성스런 결연함넘치도록 묘사되는 그 한중간에서 우리 잠시 정신을 차리고 함께 생각을 해 보았으면 하는데요, 본문에서 유사하게 반복되고 있는 단어, 명령 규례 법도는 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이 장엄한 이야기는 도대체 누가 언제, 어떤 상황에서 기록한 것일까? 등의 것이 바로 그 생각할 점들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오랜 교회의 전통, 아니 유대교로부터 이어지는 신앙의 유산 속에서 본문은 오래도록 모세의 직접저작설이 권위를 가지고 전해질만큼(사실 한국의 대다수 보수 개신교는 여전히 그렇게 믿고 있겠습니다만), 절대적 권위를 확보한 상태에서 신에게 충성하면 복 받는다식으로 해석되곤 했습니다. 더 나아가 그렇게 복을 약속하는 신 앞에서의 완전한 순종, 성결한 신앙은 종종 이웃문화와 종교에 대한 배타성을 넘어 공격성과 적대성을 보이는데 까지 이르렀습니다.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 수년 전 당시 서울 시장이었던 이가 종교집회에서 서울을 들어 하나님께 바친다라고 외치고, 일단의 선교단체 회원들이 사찰에 난입해 소위 땅밟기를 한 후, 자랑스레 기념촬영을 하는 등의 일들이 일부 수구 광신도들의 해프닝을 치부할 수 없는 이유는 이와 같은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신념이 대다수 한국교회와 교인들의 신앙이며, 그와 같은 신앙을 강화하는 기재로 오늘의 본문 등의 성서 및 이에 대한 해석이 크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현상을 안타까워하는 향린공동체는 어떻게 본문에게 접근해야 할까요? 그 실마리는 신명기라는 책의 형성과정을 따라감을 통해 얻어질 수 있습니다.

 

승냥이 떼를 막으려다 호랑이 떼를 맞아들인 형국이랄까요? 북 이스라엘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불러들인 대제국 앗시리아에 의해 나라이름을 제외한 모든 것을 빼앗기고 허덕이던 주전 640년 경, 남 유다에 마지막 희망의 불꽃이 피어오릅니다. 그 불꽃의 이름은 8살에 왕위에 오른 요시아....... 비운에 사망한 선왕과 달리 그는 신바빌로니아와의 전쟁으로 쇄락의 길에 들어선 앗시리아와 통치자의 교체라는 혼돈 속에서 영향력이 약화된 이집트 사이에서 가쁜 숨을 잠시 고르며, 종교 및 사회 운영 전반에 대한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국가의 무너진 기강을 단시간 내에 세워나갑니다.

 

대사제 힐키야는 야훼의 전에서 법전을 찾았다고 하며 그 책을 공보대신 사반에게 주었다. ~ 그 율법책의 내용을 듣자 왕은 자기의 옷을 찢었다. (열왕기하22:8~11)

 

열왕기하22장에 기록되어 있는 요시아 왕의 일대기 가운데 상기내용은 개혁군주 요시야 및 그의 지지 세력이 그 활동의 근거를 성전에서 발견했다는 한 법전에서 찾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역사적으로는 그렇게 발견되었다는 형식을 통해 새롭게 편찬한 자신들의 법전에게 정통성을 부여했을 가능성이 큰 이 사건에 등장하는 법, 신명기적 역사서 중 하나인 열왕기서는 이 법에 따라 요시야가 이집트와 앗시리아, 그리고 당시 인근의 패권 국가였던 모압과 암몬의 제의를 금지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우리가 위기에 봉착한 것은 우리가 신과 맺은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위기를 극복할 길은 지난 잘못을 반성하고 신과의 약속을 재이행하는 것이다. 신은 결코 우리와의 약속을 파기하지 않으신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는 저 유명한 1성서의 율법 및 시대정신은 이렇게 북이스라엘 붕괴와 남 유다의 멸망직전의 위기상황 속에서 탄생하는데요, 이 같은 내용이 모세의 가르침형식으로 반복되고 있는 재진술의 책신명기, 특히 그 가운데 최후의 가르침에 해당되는 오늘 본문은 어떻게 해서든 국가의 멸망을 막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동분서주하던 안타까운 심정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후 요시아가 종교적 열광 속에서 대국 이집트와 단독으로 맞서다 므깃도에서 허망하게 최후를 맞은 후, 이와 같은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유다는 신바빌로니아에 의해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시절이 흘러, 절대강자로 등극한 페르시아에 의해 과거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변으로 끌려갔던 유대의 지배계층은 고향으로 귀환하게 됩니다. 최근 좌파 척결을 위해 이 사람의 일대기가 영화로 만들어진다죠? 일제의 패망 정국에서 정치적으로 열세였던 자신을 대통령으로 세워준 미국에게 머리를 조아렸던 이승만과 같이 자신들의 잃어버린 오십 년을 되찾아 준 페르시아의 군주를 메시아로 칭송했던 그들은 제국의 힘을 이용해 돌아간 고향에서 지난날의 권력을 되찾으려 합니다. 그들이 떠난 50년 동안 그 땅을 억척스레 일구며 살아남았던 낮은 이들은 한순간에 진멸해야 할 그 땅의 이방인이 되었고, 아후라마즈다라는 유일신을 숭배하며, 그 상징으로 피워 올리는 불길 이외의 형상을 두지 않는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를 의식하면서, 신상과 우상 척결에 열을 올렸던 그들.......무례한 귀환자들은 자신들의 약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과거의 기록들을 재해석하고 편저하기에 이릅니다. 이들에 의해 포로기의 고통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너희 지배자의 신이 아니라, 우리 야훼께서 지으셨다!’외쳤던 창세의 이야기는 자신들의 선조들이 우르, 즉 티그리스-유프라테스에서 왔음을 강조함으로 통해 그곳으로부터의 귀환이 정당하다는 논리적 근거가 되어갔고, 야훼가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이들의 편이 되어 파라오와 싸워 이집트에서 탈출시켜 주셨다는 그 가슴 벅찬 이야기는 모세와 아론으로 대표되는 남성 제사장집단의 대리통치를 정당화하는 이념이 되었으며, 레위지파 즉 제사장 집단을 특별히 구분하여 사용하신다는 내용으로 가득한 레위기와 민수기를 통해 귀환한 이들에 의한 앙시엥레짐, 즉 구시대로의 회귀는 신의 명령이 됩니다. 내용의 대부분이 설화, 즉 이야기들임에도 불구하고 책의 이름이 토라’, 다시 말 해 으로 명명된 오경에는 이렇게 귀환한 이들이 자신의 약한 정통성을 신의 이름으로 합법화하려 했던 정치적의도가 곳곳에 들어차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신명기 역시 마치 구한말 개화파들의 여러 개혁정책들과 같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리는 나라의 명운을 이어가려 발버둥치던 이들이 고민이 담긴 반성과 고민의 글이었고, 강자의 횡포에 신음하던 민을 보호해야 국가의 다음이 있음을 천명했던 고대의 사회복지방안이었으나, 친 페르시아계 중년 남성제사장들에 의해 엘레하드바림 아쉐르 다바르 모세모세가 무리에게 행한 말씀으로 시작하는 서언과 함께 이스라엘 남성 무리들에게 시키는대로 하면 복을 받고 아니면 저주를 받는다는경고성 축복(?)을 결론짓는 마무리가 첨가되면서 이스라엘에 있어 절대 권위를 가지는 이름, 즉 모세의 설교라는 종교적 언어로 탈바꿈 하게 됩니다. 이제 국가위기의 상황을 통해 얻게 된 신의 말씀, ‘강자가 자신들의 힘을 끝까지 밀어붙이게 되면 결국 자신들을 포함해 모두가 멸망하고 만다. 우리 이제는 신 앞에 돌이켜 상생의 길로 가자!’던 그 절절한 신앙고백은 지배자의 귀환, 그것이 정의롭다!’라는 논리로 왜곡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늘뜻펴기 초반에 언급했던 한국개신교의 안타까운 자화상은 그와 같이 왜곡된 정의를 비판 없이 황금률로 받아드린 결과라 할 수 있겠습니다.

 

[십자가의 정의가 왜곡된 교회: 고린토 공동체]

 

이와 같이 왜곡된 정의, 변질된 신앙에 대한 안타까움은 오늘의 두 번째 본문이 고린토교회에게 보내진 처음 편지에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은 고린토 운화가 건설되어 중간 기착지로서의 기능이 약화되었습니다만, 고대에는 육지로 배를 끌어올리는 방식을 통해 그리스남단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지나는 최단거리의 관문으로 엄청난 물질적 풍요로움을 구가했던 도시 고린토의 공동체에 대해 바울로는 절박한 마음을 분명한 어조에 담아 서신을 보냅니다.

 

자매, 형제 여러분, 제발 갈라지지 말고 단합하십시오. ~ 듣기에 나는 바울로파다.’ 나는 아폴로파다.’ ‘나는 베드로파다.’ ‘나는 그리스도파다.’하고 떠들고 다닌다합니다. 그리스도가 갈라졌습니까? 십자가에 달린 이가 저 입니까? 여러분은 제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단 말입니까?

(고린토전서 1:10~13 요약)

 

대다수가 글을 몰랐던 고대의 상황과 달리 도시 거주민 상업과 유통업에 종사했던 고린토는 상대적으로 많은 이들이 읽고 쓰는 것에 익숙했고, 이는 활발한 사상과 학문의 교류를 가능케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식자는 우환인 것일까요? 이처럼 소위 잘난이가 많았던 고린토 공동체는 의견의 다름을 넘어 대립과 분열의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상황에서 바울로와 함께 장막 깁는 일을 통해 공동체를 든든하게 지켜냈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헌신도, 당대의 기독교 공동체에서 최고의 지식인이라 정평이 났던 아폴로의 지혜도, 자신의 삶을 버리고 오직 선교의 길로 매진했던 바올로의 염원도, 심지어 신앙의 핵심에 자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까지도 정파 이데올로기를 공고화하는 논리로 변질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베드로파로 자신들을 치장하며 기실은 공동체 안에서 유대인의 권위를 세우려했던 이들과 아폴로의 가르침을 배우자는 대의명분 뒤로 그리스인 시민사회 특유의 철학적 사유 이외의 모든 것들을 저급한 것을 치부했던 자들에 의해 공동체가 지켜가던 복음의 정의는 그렇게 왜곡되어 갔던 것입니다. 바울로는 정의의 왜곡으로 위기에 직면한 공동체에게 안타까운 심정으로 호소합니다.

 

여러분은 지금도 육적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서로 시기하고 다투고 있으니 여러분은 아직도 육적인 사람들이고 세속적인 인간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고린토전서 3:3)

 

바둑판에서 회자되는 격언 중 장고 끝에 악수 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민의 시간이 지나치게 길어진 나머지 처음 출발했던 생각에서 벗어나 엉뚱한 수를 두는 실수를 이르는 말일 텐데요, 우리의 공동체는 혹은 그 가운데 있는 우리들의 모습은 사랑하는 공동체를 더욱 아름답고 의미 있게 세우려는 원 뜻가운데 있는지, 혹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왜곡된 정의의 편에 서 있는 것은 아닌지 함께 느껴보았으면 합니다. 고린토교회의 갈등과 복음의 왜곡은 공동체와 복음을 지키겠다는 자들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왜곡된 정의에 직면하다: 예수의 성스러운 분노]

 

왜곡된 정의로 세상을 지배하는 이들에 대해 오늘의 복음서 이야기 중 예수는 그 성스런 분노를 표출합니다. 오늘 본문의 앞에서 율법은 일점일획도 훼손될 수 없다는 내용을 천명한 마태오복음은 후행하는 본문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 이상스러우리만치 그 율법의 해체를 강조합니다. ‘살인하는 자는 재판을 받으라고 되어 있는데, 아니다!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모두 재판을 받아야 하다. 간음하지 말라고 되어 있는데, 아니다! 음란한 생각을 품으면 이미 간음한 것이다. 율법에 아내를 버리려면 이혼장을 써주라고 되어 있는데, 아니다! 절대 버릴 수 없다. 또 거짓맹세를 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아니다! 아예 맹세를 하지마라!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이른바 1,2 성서의 중간기로 구분되는 마카비 시대 즈음에 태동했을 것으로 보는 바리사이들은 분리된 자들이라는 어원에서 기인하듯, 부조리한 사회권력과 정권과 결탁하여 타락해가는 종교권력에서부터 자신들을 구별하고, 오직 야훼하느님의 가르침을 삶의 자리에서 구현해갈 것을 염원했던 이들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최초의 의지는 점차 사라져가기 시작했고 급기야 식민지 상황에서의 최고 지역통치기관 산헤드린의 회원이 되면서부터는 그토록 경멸했던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이후 그들이 분리하는 대상은 부패한 권력이 아니라 가난하고 지쳐 도저히 율법을 지킬 수 없는 민중이 되었고, 이제 그들이 천명하는 율법은 신의 이름으로 낮은 이들을 억압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시대를 지나 종국에는 율법수호라는 명분하에 유대교 공동체에서 배척되어야만 했던 마태오 공동체는 이와 같은 지배자의 허울, 즉 왜곡을 통해 어떻게 정의가 약자에게 폭력이 되어갔는지를 온 몸으로 체화했던 것이고, 이들에 눈에 비친 바리사이들의 율법은 그 근본의 법정신, 곧 누명을 쓰고 죽음을 당하지 않도록 모두에게 재판의 기회가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 앞에서는 성결을 강조하고는 뒤에서는 온갖 방법으로 여성들에게 폭력을 가했던 남성권력자들의 행동은 잘못되었다는 것, 합법적 이혼을 통해 현실적 다음 생활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취지는 망각된 채, 여성을 마음대로 사고 버리는 가부장의 악행에 대한 면죄부로 전락한 이혼증서 발부제도는 틀렸다는 것, 그리고 신의 이름을 독점한 이들이 전가의 보도인양 휘두르는 맹세자체를 철폐해야 한다는 것, 예수는 오늘의 본문을 통해 왜곡된 정의를 인식하고, 이를 근본에서부터 재해석하고 해체시켜야 한다는 것을 강한 어조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향린 공동체의 모든 여러분! ‘통일은 대박이다라는 말로 많은 이들이 그토록 눈물 흘리며 염원하는 것을 한 순간 경제적, 그 중에도 저급한 이익의 논리로 격하시켜버리는 현 정권, 철도를 특정 자본 세력이 독점하게 하면서도 이를 철도 정책 개혁이라는 말로 왜곡하는 이들.......이밖에도 거대자본만 자유로운 자유무역협정, 권력자가 하라는 것만 해야 하는 법질서 준수’, 수십 년을 별 탈 없이 지냈는데, 갑자기 변경된 지하철 우측보행이 보행선진화.......우리사회는 지금 그야말로 정의의 왜곡, 왜곡된 가치의 범람이 주입을 넘어 강요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비단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거대담론 만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내 생각을 관철시켜야 한다는 것이 공동체의 공공선과 혼동되는 경우, 나의 정의로움을 강력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보고 듣는 사람이야 어떻든 말든 인터넷, SNS, 혹은 집회 현장에서 욕설을 끊임없이 쏟아내는 일, 이 뿐만이 아닐 겁니다. ‘자 우리 편하게 이야기 합시다 오른쪽부터 돌아가면서 반드시!’, ‘젊은 사람들은 도통 나와 통 이야기를 하지 않아요, 내가 얼마나 열려있는 사람인데, 내가 얼마나 열려있냐 하면.......’을 장장 삼십분에 걸쳐 이야기하기, 사회의 평등과 정의의 실현을 위해 열심히 싸운 후, 벗들과 함께하는 자리에서 분주한 동생들과 불편한 사람이야 있든 말든 주고받는 성적농담.......세상의 한 중간에서 온갖 형태의 왜곡에 맞서 싸우신 예수의 오심을 기억하는 주현의 절기에 나도 모르는 순간, 지금 내가 왜곡된 정의를 생산하고 있는 존재가 되어 갈등과 문제를 증폭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용히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왜곡된 진실과 직면해나갔으면 합니다. 우리가 이 부분을 차분히 성찰해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기실 사회와 자신의 내면에 도사린 불의와 부조리를 직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풀지 못하는 울화와 마주대하고 있거나 그것 속에 침잠해 버리고 말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사랑하는 향린의 교우 여러분! 우리들 신앙의 실천은 어쩌면 우리와 나, 너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왜곡된 정의, 그 안타까운 현실에 직면하고, 깊은 성찰을 통해 그 다음으로 나아가는 어떤 것인지도 모릅니다. 오늘 함께 모신 말씀은 그와 같은 왜곡의 전철을 더 이상 반복하게 두지 말라는, 그리고 반복하지 말라는 하늘 뜻을 포함하고 있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은 무엇을 직면하고 계십니까? 침묵 가운데 느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