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의 참 뜻

19:1-2, 9-18; 119:33-40; 고전 3:10-11, 16-23; 5:38-48

 

오늘의 성서 본문 말씀은 성서의 말씀 중 가장 이해하기 힘들고 가장 지키기 어려운 두 개의 말씀이 동시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건 레위기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는 말씀과 마태복음의 하늘 어버이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는 말씀입니다. 거룩이라고 하는 단어를 정의하기는 쉽지 않지만, 이 단어가 신을 설명하는 단어인 것은 분명합니다. 신의 속성을 설명할 때에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혹은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시고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등등의 말로 말합니다. 그런데 사랑, 자비, 용서와 같은 이런 속성은 제한적이긴 하지만 인간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인간도 사랑의 주체가 될 수 있고 자비나 용서의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사랑하니 너희도 사랑하여라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는 문제가 됩니다. 거룩함이란 신을 설명하는 가장 핵심적인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는 이 말씀은 우리보고 신이 되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타당한 말씀인가?]

 

거룩하게 살아라.’ 그건 우리가 그렇게 목표를 정하고 살라는 말이니까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면 됩니다. 되고 안 되고는 둘째 문제이고 우선 그렇게 살겠다고 다짐하고 또 노력하면 됩니다. 더러운 세속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서 살아가면 거룩하게 살아가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명령은 거룩의 행동을 요구하는 명령이 아니라, 행동을 넘어서는 본성에 대한 명령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신의 거룩성은 신의 행동에 근거해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의 본성 자체가 거룩한 것입니다. 거룩은 동사나 실천적 단어가 아닙니다. 노력한다고 해서 거룩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과연 거룩의 행동을 넘어선 거룩하라고 하는 명령은 타당한 명령인가요?

 

하늘에 계신 어버이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완전함 또한 신의 속성을 설명하는 단어입니다. 인간은 그 속성상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건 육체 자체가 불완전하기에 우리가 육신에 머무는 한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죽어보지는 않아 내 영혼이 육신을 벗어났을 때에 영적 존재로 완전해질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육체를 지니고 살아가는 한 내가 완전해질 수 있는 길은 없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완전함을 요구하는 예수님의 요구는 타당한 것인가요?

 

그래서 그랬다고 보이는데, 대다수의 교회들이 사용하고 있는 개역성경은 완전하라는 단어 대신에 온전하라는 단어를 선택했습니다. 평온할 온()자입니다. 자전을 보니 벼를 거둬들일 때에 오는 평온함을 말하는 한자어입니다.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하느님께서 온전히 평온하신 것 같이 너희도 온전히 평온하라는 말은 헬라어 성서 원문과는 전연 딴판입니다. 완전과 온전. 이는 획 하나의 차이가 아니라 완전히 그 의미가 다른 말입니다. 헬라어 teleio는 평온과는 거리가 먼 부족함이 전연 없는 완전함을 말합니다. ‘온전이라고 하는 번역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다 하더라도 본래 말씀의 의미를 바꾸는 것은 잘못입니다.

 

하여간 만약 제가 오늘의 성서 말씀에 근거해서 하느님이 거룩하심같이 우리도 거룩합시다.’ 혹은 하느님이 완전하심같이 우리도 완전합시다.’라고 저 제단 앞에 표어를 붙여 놓는다하면 모든 교우들이 들고 일어나 이를 떼어낼 것을 요청할 것입니다. 얼토당치도 않는 문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옛 히브리 사람들은 이를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거룩이라는 히브리어는 구별짓다’ ‘따로 떼어 놓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이 거룩하다는 말은 인간과 구별된다는 말입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지키기 위해 주위의 다른 이방민족과 자신들을 구별 짓기 위해 여러 가지 계명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런 계명들로 가득 차 있는 책이 레위기입니다. 레위는 본래 야곱의 세째 아들이지만, 그는 제사장 지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레위 지파였고, 이후 사제들은 모두 레위지파에서 나왔습니다. 그들은 성전의 일만을 하도록 부름 받았고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한 대신 다른 지파 형제들이 희생제사와 감사로 바친 예물로 삶을 영위했습니다.

 

[거룩함을 지키기 위한 금지 규정들]

 

거룩이란 주제로 이루어진 레위기 첫 장을 열면 희생 제사 얘기부터 시작합니다. 제물의 종류와 드리는 방식 등등 세세한 조항들이 나옵니다. 어떤 것들은 쉽게 이해가 되지만 어떤 내용들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떤 예물은 일부를 드리고 나서 남은 것을 먹어도 되지만, 어떤 예물은 모두 불에 태워야 합니다. 친교제를 드리고 나서는 오른쪽 뒷다리를 사제에게 주도록 했는데, 왜 오른쪽 뒷다리만인가? 왼쪽 앞다리는 왜 안 되나? 네발 달린 짐승들 곧 굽이 갈라지고 새김질하는 짐승들을 다 먹을 수 있지만, 돼지와 토끼는 안 먹는데, 왜냐하면 돼지는 굽이 두 쪽으로 갈라졌지만, 새김질을 하지 않기 때문이고 토끼는 새김질은 하지만, 굽이 갈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른쪽과 왼쪽, 굽과 새김질이 거룩의 속성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고대 유대인들은 당시의 사고와 문화에 따라서 거룩 곧 해도 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세세히 구별해 놓았습니다.

 

아이를 낳게 되면 당연히 피를 흘리게 되는데, 피는 더러운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남아를 낳았을 때는 33일동안을 집안에 머문 다음에 성소에 나아올 수 있었지만, 여아를 낳았을 때는 66일을 집안에 머물러야만 했습니다. 오늘날의 눈으로 본다면 엄연한 성차별입니다. 이외에도 수많은 금지 규정들이 나옵니다. 지금도 보수적 유대인들은 물론이요 개신교인들 중에서도 레위기의 규정들 중 일부를 엄격하게 지키는 교단도 있습니다. 미국 슈퍼마켓에 가면 내용물은 거의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거룩한 물품으로 구별해 놓은 코셔(Kosher)라는 상표가 붙어 있는 음식제품이 있습니다. 내용물에는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가격은 비쌉니다. 소고기 같은 경우는 처음 도살장에 소가 들어왔을 때에 유대인 랍비가 한 소를 코셔용으로 점찍어 축복기도를 하면 그게 코셔용 고기가 됩니다.

 

음식에만 구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먹는 방식에도 구별을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고기와 우유를 같이 먹지 않는 것입니다. 그건 새끼를 어미 염소 젖에 삶지 말라.”는 레위기 구절을 확대 해석한 결과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우유뿐만이 아니라 우유로 만든 모든 유제품이 여기에 포함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코셔 맥도날드에는 치즈버거가 없습니다. 더 나아가 치즈가 담겨 있지 않은 햄버거를 먹을 때에도 우유가 들어가지 않은 아메리카노 커피를 같이 마실 수는 있지만 우유가 들어간 카페라테는 함께 먹어서는 안 됩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우유와 고기의 소화시간이 다른 것을 감안하여 우유를 마시고 나서는 한두 시간이 지나 고기를 먹을 수 있지만, 고기를 먹고 나서는 6시간이 지나야 우유를 마실 수가 있습니다. 저도 20여 년 전 이스라엘을 여행할 때에 호텔에서 뷔페 아침을 먹고 나서 커피를 주는데, 그때는 제가 커피에 설탕과 우유를 섞어 먹었는데, 우유를 안주는 겁니다. 달라고 해도 안주는 겁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겠지만, 관광객에게 까지 자신들의 종교적 계율을 요구하는 지나치다고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새끼를 어미 염소 젖에 삶아서는 안되다는 고대의 음식 규정을 오늘날의 치즈버거에 까지 연계한다는 것은 너무 지나친 해석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유대인들이라고 하여 모두가 이를 지키는 것은 아니고 중세시대의 존경받는 랍비 즈비 하임 이스로엘은 돼지고기도 즐겨 먹었다고 합니다만, 코셔음식규율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음식 문화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제는 폭탄테러로 인해 성지순례 가는 것이 위험한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만, 이스라엘을 가면 우리가 즐겨먹는 돼지삽겹살, 장어구이는 눈을 씻고 찾아볼래야 찾아볼수가 없고, 여러분이 만약 말린 오징어를 씹는 것을 보면 비늘 없는 물고기를 먹기에 불결하다고 해서 근처에도 오지 않을 것입니다.

 

먹는 것이 우리를 더럽힐 수 없다는 사도 바울의 말씀이나, 들어가는 음식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에서 나오는 생각들이 더러운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더 중요하기 합니다만, 먹는 음식 하나하나에도 세심하게 하느님의 뜻을 찾아 행하려고 하는 저들의 열심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는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먹습니다. 아니 건강에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모르겠고 괴상한 것을 먹는 묘한 습성이 있습니다. 몇 년전 얘기입니다만, 곰의 쓸개즙이 좋다하여 살아 있는 곰의 쓸개에 빨대를 꽂아 빨아먹는다거나 그것도 놀란 상태의 쓸개즙이 더 효력이 있다는 속설을 좇아 좁은 철장 속에 가두어놓고 막대기로 때려서 성질을 북돋우는 모습을 보면 인간의 잔인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음식에 대한 지나친 금지 규정도 문제이지만, 지나친 자유도 문제입니다.

 

레위기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의 본연의 뜻은 어떤 금지 규정들을 많이 만들어서 지키는데 있지 않았습니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처음에는 큰 범주만 정해 한 두가지만 정하는데, 시간이 지나다 보면 점점 세세한 법규들을 만들어가게 됩니다. 결국은 달은 사라지고 손가락만 남는 본말전도의 잘못이 일어납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본받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규정과 문자 안으로 옭아매고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는 법지상주의 유아독존형 인간으로 바뀌고 마는 것입니다.

 

[금지의 거룩을 철저한 사랑으로]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시 바리새인들이 가르치고 있는바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이 레위기의 말씀을 하느님 어버이께서 완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라고 바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거룩과 완전은 신의 속성이라는 점에서 같은 말이지만, 당시 바리새파 사람들이 거룩을 위해 613개라는 수많은 조항들을 지키기 위해 노심초사함으로 삶의 여유와 기쁨을 누리기보다는 오히려 초조함과 위선 속에서 살아가는 모순을 보시고 사랑에 근거한 완전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의 완전함이란 모든 일에 철저하고 윤리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인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 완전함입니다. 따라서 오해가 있을 수 있는 완전이란 단어 대신에 철저라는 표현이 더 낫습니다.

 

첫째는 복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시의 율법은 동형보복법이었습니다. 내가 한 대 맞았으면 상대를 한 대 때리는 법입니다. 물론 지금도 법정에서 판단하는 기준은 상대에게 손해를 준만큼 같은 손해를 당하도록 하는 법입니다. 정상도 참착하지만, 이게 법의 기본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다른 원칙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을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주고 누가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리를 가주어라. 이는 폭력을 행사하는 억압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굴복이 아니라, 모두 억압하는 자의 양심을 찌름으로 그를 부끄럽게 하는 사랑의 저항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는 것은 이전 하늘뜻펴기에서 자세히 말씀드렸기에 오늘은 생략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해석이 되는데, 원수사랑의 근거로 하늘 어버이께서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기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햇빛과 비가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내리는 것은 자연현상이지 누군가의 의지에 따른 선택의 결과가 아닙니다. 햇빛과 비의 자연현상에 근거해서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대하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대하라는 이 말씀은 과연 정당한 말씀입니까? 성서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니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요? 아니 예수님도 그렇게 사시지 않았지 않습니까? 통치자 헤롯을 여우라 비난하고 종교지도자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욕하고 성전에 들어가 상을 뒤집고 채찍을 들어 장사꾼들을 쫓아내지 않으셨나요?

 

그렇다면 우리가 이 구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모두가 다 같은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그러니 어버이의 심정으로 너희 원수들을 대하여라. 이런 정도로 이해하면 될까요? 국가권력의 횡포로 옳은 사람들이 핍박을 받고 옳지 못한 사람들이 떵떵거리며 사는 오늘의 불의한 사회를 보면서, 우리 사회에 사회적 공의가 무엇보다 중요한 이 때에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이 말씀이 기록될 때는 로마의 폭정에 항거하여 유대 폭동이 일어났고 그래서 예루살렘을 비롯한 대부분의 유대지역이 초토화된 직후이니 살생과 희생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기를 바라는 폭력은 끊어져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에서 씌어졌을 것이라고 이해됩니다. 그 과정에서 원수사랑의 본 뜻이 와전되어 기독교인들은 사회적 불의에도 항거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는 착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원수라고 말하는 북조선의 지도자들에 대해서는 원수사랑이 아닌 원수미움과 불같은 적대감만을 외치고 있습니다.

 

복수심에 가득차면 상대방이 아닌 자신이 먼저 무너지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사랑으로 원수를 대하라는 말씀은 옳은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의 말씀에 근거한다면, 우리들 자신이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이기에 이를 질투와 분노로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거룩은 종교적 언어가 아닌 사회적 용어]

 

끝으로 거룩이라는 단어는 종교적인 언어인가요? 개인의 영성에 관련된 언어인가요? 아니면 사회적 언어인가요? 거룩은 하느님께만 적용되는 단어이니 단연 우리는 종교적인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레위기 말씀을 보면 거룩할 것을 명령한 다음 실천 명령들을 보면 교회 안에서 행해야 하는 종교적 실천은 하나도 없습니다. 기도하고 찬양하며 성경 읽고 묵상하라는 종교적 실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습니다.

 

나 야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 너희 땅의 수확을 거둬들일 때, 밭에서 모조리 거두어들이지 말고 남은 이삭을 줍지 말라. 포도나 과일 또한 그렇게 하여라. 가난한 자와 외국 나그네들이 먹을 수 있도록 놔두어라.’ 거룩한 사람이 된다는 건, 다름 아닌 우리 주위의 가난한 자들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나누는 사랑의 행위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의 물건을 훔치지 말라, 이웃을 억눌러 빼앗아 먹지 마라. 품값을 다음날 아침까지 미루지 마라. 공정하지 못한 재판을 하지 마라.’ ‘하느님과 같이 거룩하게 된다는 말은 세속을 떠나 고귀한 성인이 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세상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가난한 자들과 힘없는 자들 옆으로 다가가 손을 벌리는 사회 공의 실천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공정하지 못한 재판을 하지 말라는 말씀을 오늘의 우리 상황에 되새겨보고 싶습니다. 최근 23년 전 유서대필을 하였다는 죄로 형을 살았던 강기훈씨에게 법원은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당시 군사정권은 이를 빌미로 민주학생운동을 범죄조직으로 몰아 세웠습니다. 간첩이라고 국가내란이라고 중형을 받았던 재판들이 거의 대부분 재심에서 무죄선고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국가권력이 저지른 범죄행위였습니다. 얼마 전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서울시 간첩단 사건의 증거기록이 국정원의 위조문서임이 밝혀져 국제적인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국정원이나 검찰이 범죄 조작을 반복하는 이유는 성공하면 출세하고, 실패해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출세와 영달을 위해 무고한 시민들과 그 가족들을 무참한 지경에 빠트린 자들은 공소 시효없이 이들의 범죄를 물을 수 있는 법이 제정되고 또 실행이 되어야 합니다. 제일 먼저는 강기훈유서대필 조작사건을 총지휘했던 당시 법무부장관 현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부터 책임을 물어 감옥에 처넣어야 공의가 실현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느님을 따라 거룩해지는 일입니다.

 

내란음모와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12년부터 7년까지의 정치형을 받은 이석기의원과 여러 통진당원들 20년이 지나면 또 다시 무죄 선고가 되겠지만, 이 기간동안에 그 가족들과 자녀들이 받을 피해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다음의 글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들의 모임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참담하다]

 

내란음모가 이루어졌다고 하는 이른바 5. 12 모임 참석자의 절반이 여성이었고, 나머지의 절반은 군에도 안 갔다 온 사람들이었다. 이른바 총책과 주요 간부들이 사전에 모임 한 번, 의사소통 한 번 없었고, 내란에 대한 결의문 한 장이나 구체적인 계획 하나 없었으며, 나아가 현 정부의 전복에 대해서 누구 하나 단 한 마디 언급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원은 내란음모의 유죄를 인정하였다. 참담하다. 사법부는 인권과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이다. 그런데 오늘 재판부는 그러한 역할을 전혀 수행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시계를 30년 전으로 돌렸다. 부림 사건은 33, 유서대필 사건은 23년 만에 진실이 밝혀졌다. 이 사건 역시 그러한 절차를 밟아야 하는가? 역사를 제대로 돌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이 다시 뿌려져야 하는가?”

 

서울대 우희종교수는 이렇게 글을 올렸습니다. “이 정도 수준의 (거짓) 집단을 대상으로 대필이다 아니다로 20여년이 넘게 싸워야 했던 우리 사회가 너무도 초라해진다. 사회 발전을 막는 최전선의 집단이 이들이었다. 사회 불안 조성과 더불어 사회 분열을 조장해 국민에 상처를 준 죄와 더불어 국가기관에 대한 불신을 더욱 깊게 해 국가 기강을 짓밟았다는 점에서 (용서할 수 없다).”

 

미국 온라인 뉴스 매체인 글로벌 포스트는 2013년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후퇴했던 해라고 심층 보도했습니다. 국가보안법의 탄생 배경과 한국 전쟁에 대해 언급하며 남한은 오늘날 부유하고 보다 안정적일지 모르나 냉전의 유산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고 북한과 남한은 엄밀히 말해 아직 전쟁 중이다고 보도했다. 전시 작전권이 워싱턴에 있다고 짚은 이 기사는 남한국민들이 자유로운 표현과 평화로운 집회결사를 정부로부터 보장 받기를 원하는 기대치가 점점 커져서 오래된 반공산당법과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2013년은 국가보안법으로 102명이 기소 당해 62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며 이 수치는 10년 동안 가장 높은 수치이며 7년 전과 비교한다면 세배가 증가한 숫자이다. 국가보안법이 북한을 찬양하고, 고무하거나 선전하는 것을 금하는 일에 구체성이 없는 막연한 것이며 이 때문에 국가안보와 관련된 수사를 담당하는 막강한 권력의 정보기관인 국정원이 마음대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준다고 전한 이 기사는 이 법으로 민주화된 정부 후 처음으로 국회의원이 면책 특권을 빼앗기고 국가보안법으로 체포됐으며 통합진보당 해산도 시도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때문에 프리덤 하우스는 남한의 언론 정도를 "자유"에서 "부분적으로 자유"’로 낮췄고, 국민들은 박근혜를 그의 아버지인 군사독재자의 상속자로 보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영문학 전공의 오길영교수(충남대)법과 시적 정의라는 글에서 민주주의 지배 원리는 법치주의다. 그러나 법은 초월적, 객관적 진리의 표현이 아니다. 왜냐하면 헌법의 최종 근거는 법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의 역학이기 때문이다. 법은 힘과 폭력의 문제다.(데리다) 이 점을 잊으면 법형식주의가 된다. 법은 합리성과 논리의 영역이지만 그 울타리를 넘어 인문학적 감성과 사유에 기반한 실천적 추론과도 관련된다. “문학적 재판관은 형식적 법 이해를 넘어서 역사적 변화, 실천적 맥락이 갖는 복잡성, 사선들의 다양성을 두루 고려하며, 변화하는 사회문화적 조건과 가치를 받아들인다. 법률기술자와 갈라지는 지점이다.’(한겨레 2014.2.22. 23) 오교수는 이번 통진당 사건을 다룬 주임판사 김정운을 법률기술자에 비유하고 있지만, 저는 자기 출세에 사로잡힌 권력아부형 법기술자이자, 자신의 야욕으로 인해 고난당하는 가족들에 대한 상상력 감수성을 상실한 냉혈인간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자기 가족은 더 끔찍이 챙기는 것을 볼 때,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과연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산상수훈이라 불리는 마태복음의 예수님의 말씀들은 법기술자로 전락해버린 당시의 성전 중심의 종교형식주의에 대한 비판이자 요즘말로 하면 시적 상상력에 기초한 인문학적 해석인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이나 하늘 어버이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이 말씀들은 모두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대 명제라는 큰 뿌리 속에서 나온 말씀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분명하게 분리를 뜻하는 거룩함은 개인의 영역 안으로 사라지는 종교적 언어가 아니라, 사회적 공의와 분리될 수 없는 공적 언어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다 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우리는 건축가가 아니라 목수들입니다.]

 

가끔 뒤로 물러서서 멀리 내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노력으로 세워지지 않는 나라일 뿐 아니라

우리 눈길로 가서 닿을 수도 없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다만, 하느님이 하시는 거대한 사업의

지극히 작은 부분을 평생토록 감당할 따름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 어느 것 하나 완전하지 못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 손길이 미칠 수 없는 저 너머에 있습니다.

어느 선언문도 말해야 할 내용을 모두 밝히지 못하고,

어느 기도문도 우리의 모든 소원을 담지 못합니다.

어느 고백문도 옹근 전체를 싣지 못하고

어느 방문도 돌봐야 할 사람을 모두 돌보지 못합니다.

어느 계획도 교회의 선교를 완수 못하고

어느 목표도 모든 것에 닿지 못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는 일입니다.

어느 날 싹틀 씨를 우리는 심습니다.

그것들이 가져다줄 미래의 약속을 생각하며,

우리는 뿌려진 씨들 위에 물을 줍니다.

그 위에 벽돌이 쌓여지고 기둥이 세워질

내일의 건물에 기초를 놓고,

우리 힘으로는 해낼 수 없는 효과를 내다보며

반죽에 누룩을 섞습니다.

우리는 만능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할 수 있는 만큼 할 때

거기에서 해방감을 느낄 따름입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게 합니다.

턱없이 모자라지만, 이것이 시작이요

하느님 은총을 세상에 임하도록 하는 걸음입니다.

 

아마도 우리는 끝내 결과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건축가와 목수(木手)들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건축가가 아니라 목수들입니다.

메시아가 아니라 사제들일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 것이 아닌 미래를 내다보는 예언자들입니다. 아멘.

 

(오스카 로메로, 1917-1980)

* 엘살바도르의 천주교 대주교로 가난한 민중의 인권 옹호에 앞장을 섰고 군부독재 반대자로 1980324일 성만찬 미사를 집전하던 중에 사복 군인의 저격을 받아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