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구할 것?

49:8-16a, 131; 고전 4:1-5; 6:24-34

[김석채전도사]

먼저 오늘은 작년 7,8월과 올 겨울 어제까지 두 번에 걸쳐 권권개입 대선 부정을 고발하고 이 땅의 정의를 40일 일인 시위를 하신 김석채전도사님께서 지난 수요일 광화문에서 마지막 시위를 마치면서 교우 10여명과 함께 거리 기도회를 가졌는데, 짧은 영상과 당시 전도사님께서 전한 하늘뜻펴기를 먼저 하도록 하겠습니다.

<3:16>

하느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5: 16>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신앙의 두 축]

하느님께서 유대 민족을 선택하셔서 이방 민족에게 당신을 알리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 이후에, 그리스도인들을 선택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모든 인류에게 전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나 이 복음은 으로가 아니라 철저하게 섬김을 바탕으로 전해집니다. 또 이 구원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종말혹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뗄레야 뗄 수 없습니다. 종말과 심판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매우 교만한 인본주의로 빠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신앙의 한 축입니다. 위의 요한 복음의 성구가 이것을 말해 줍니다.

위의 마태복음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또 다른 축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 살 때에 착한 행실로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의 성구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우리의 좋은 행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보여줘서 그것을 본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이 두 축 중 어느 하나가 폄하되어서는 안됩니다. 앞의 구원론이 폄하되면 그리스도교는 사회도덕주의나 윤리로 변질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보다 더 큽니다. 그러나 뒤의 세상에서 행함의 측면이 폄하된다면, 우리의 신앙은 곧 타계적 신앙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의 역사와 사회의 현실를 도외시하는 이러한 타계적 신앙을 가지고서는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현실을 도외시 했다면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 두 측면을 종합하여, 벧후 1: 4 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그리스도)께서는 그 영광과 능력으로 귀중하고 위대한 약속을 우리에게 내려 주시어, 여러분이 그 약속 덕분에, 욕망으로 이 세상에서 빚어진 멸망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가톨릭역) 여기서의 위대한 약속이란 예수를 구주로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과 생명을 얻는다는 측면입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부터의 구원입니까? 그것은 욕망으로 이 세상에서 빚어진 멸망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싸움은 이 뜻 모를 욕망과의 싸움입니다. 국가의 공공 조직을 동원하여 부정선거를 해서라도, 국가 공동체의 질서를 엉망으로 만들어서라도 권력을 차지해야 하겠다는, 뜻 모를 욕망 말입니다. 이런 뜻 모를 욕망이 그대로 구현되게 방치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이런 방치로 빚어진 구조 속에서 사람들이 신음하고 하느님 나라가 신음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능력에 힘입어 이러한 뜻 모를 욕망에 저항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저항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조헌정목사]

지난 주에는 우리보고 하느님과 같이 거룩해지라 완전해지라 말씀하더니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그런 것들은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글자 그대로 믿고 살아가는 기독교인이 몇 명이나 될까요? 성경은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는 하느님의 살아있는 말씀이라고 굳건히 믿는 보수 기독교인들이라고 해서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을까요? 하늘에 계신 어버이께서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잘 알고 계실뿐더러 설사 어머니가 자기가 낳은 아이를 잊을지는 몰라도 하느님 어버이는 결코 우리를 잊어버리는 일은 결코 없다는 말씀이 위로가 되지만, 그렇다고 먹고사는 일을 소홀히 하는 교인들은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사는 일에는 더 집요합니다. 기도는 구체적이야 한다며 시시콜콜 자질구레한 일 요구하는 종류도 많고요.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 말씀은 맞습니다. 걱정한다고 목숨을 한 시간 늘이기는커녕 오히려 지나친 걱정으로 우리의 수명이 짧아지고 있는 것을 잘 알면서도 걱정을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요? 냉장고에 일주일치 음식물은 저장되어 있으니 오늘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걱정은 안 해도 될지는 몰라도 등록금 걱정도 해야 되고, 올라가는 월세 걱정은 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입니다.

[세 모녀의 포기]

지난 주 수요일 저녁 송파구 반지하에 살던 30세의 두 딸과 60세의 어머니 세 모녀가 동반 자살을 하였습니다. 이보다 일주일 전쯤 자살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인기척이 없어 주인집의 신고로 이날 발견이 되었습니다. 12년 전에 암으로 남편을 잃었고, 큰 딸은 당뇨와 고혈압으로 고생하고 있고, 작은 딸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등 비정규직 일자리를 떠돌았습니다. 그러다가 식당일을 하던 어머님마저 넘어지면서 오른팔을 다쳐 생계를 책임질 사람이 없어졌고 그래서 동반 자살을 하였습니다. 이런 경우 잘못하면 이들의 경솔함을 비난하기 쉽지만, 우리가 그들의 과거를 다 알 수도 없고 우리가 그들이 아니니 우리의 잣대로 그들을 함부로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마지막 행적을 보면 아등바등 남에게 피해를 입혀서라도 자기 유익을 구하려는 보통사람들과는 달랐습니다. 조금 다르게 아니라 많이 달랐습니다. 그분들은 주인 아주머니께 죄송하다는 글을 남겼고, 거기에는 마지막 월세와 공과금 70만원을 넣은 봉투를 남겨놓았습니다. 잘못하면 자신들의 죽음에 대한 비난이 월세를 올린 집 주인의 무정함으로 변질될까봐 걱정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500만원 집세 보증금은 자신들의 장례비용으로 남겨놓았습니다. 세상을 비관하여 자살을 했지만, 주위 사람들을 생각하고 주인에게 죄송하다는 표현을 마지막 말로 남겨놓을 만큼 선한 사람들이었기에 더욱 안타깝습니다.

저는 잠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분들은 교회를 다니지 않았을까? 언론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아마 십중팔구 다녔을 것입니다. 죽기 전에 힘들다는 얘기는 은연 중 가까운 친구들에게 했을 것이고 그럴 때에 누군가가 교회를 나가 하느님께 기도해보라고 권유했을 것입니다. 아니 누가 신앙을 가지라고 하기 전에 그들 스스로 하느님께서 병도 고쳐주시고 안정된 직장도 주시라는 청원 기도는 교회가 아니더라도 어디에서나 집에서 버스 안에서 수도 없이 간절히 간절히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도 무심하여 끝내 희망을 발견하지 못하여 번개탄 연기 속으로 자신들의 한 많은 생애를 맡겼습니다.

혹여 폐가 될까 남에게 앓는 소리 한번 못하던 심성 고운 사람들이었다고 하는데, 이런 사람들을 위해 국가기관이라는게 존재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세금을 거둬 정부 관리들을 먹여 살리는 것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사람들이 도둑질을 하거나 자살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한 것입니다. 이분들이 국가의 혜택 생각 안해본 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신청을 한다 하더라도 자신들이 어떤 혜택을 받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박근혜씨가 후보시절 약속했던 어르신 수당 20만원 등등 여러 복지 공약들을 폐기하였을 때, 그들은 정부에 대한 기대를 저버렸을 것입니다. 복지 관계자들은 설사 그들이 신청을 했어도 복지 혜택을 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분들은 자살이 아니라 사회적 타살이고 그냥 사회적 타살이라고 하면 세금 열심히 내는 우리의 책임이 되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가난을 개인의 책임으로 몰아가고, 가난을 수치로 여기도록 강요하고, 가난한 자에 대한 복지 예산을 줄여가는 국가 정부가 살해한 것입니다.

저는 만약 이분들이 교회에 나가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마라. 이것들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라는 설교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최소한의 먹고 살 것이 준비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맞겠지만, 그들에게는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정작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에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옷 잘 입고 똑똑한 사람들이 나오는 교회에 나올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채찍을 들어 성전 숙청을 감행하신 것입니다. 하루 끼니를 해결할 수 없는 극빈자들은 오늘 우리 사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당시에는 더 많았습니다. 5천명을 먹이시고 4천명을 먹이시는 급식기적 이야기는 로마와 헤롯의 폭정 세금을 감당하지 못해 집을 떠나 유랑하는 무리들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 선생이 말하는 것처럼 며칠을 굶은 사람에게 먹을 것도 주지 않으면서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께서 너의 필요를 다 알고 계신다라고 말하는 건 책임회피가 아니라 일종의 죄악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구하라는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무차별적으로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 적어도 먹는 것과 입을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가진 자들과 가난하지만, 이 땅에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하느님 나라 건설을 꿈꾸는 깨인 사람들, 여러분과 같은 사회적 지도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지도자가 아닙니다라고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이미 향린교회에 등록한 사람들은 모두가 남김없이 여러분이 아무리 난 아니라고 손사래를 쳐도 이미 사회적 지도자들입니다. 완전하지 않을뿐더러 완전할 수도 없지만, 향린교인들은 태생적으로 이 남한 땅에서는 소수자에 속하는 깬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서너 살의 어린아이들은 잠시라도 자기 눈에 부모가 보이지 않으면 부모를 울어댑니다. 그러나 그 순간 부모가 나타나 말을 합니다. 내가 저기서 이웃집 아줌마하고 잠시 얘기하고 있었잖아. 너는 나를 못 봐도 나는 너를 보고 있었어. 그러나 아이는 이런 얘기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일고여덟 살이 되면 이게 무슨 말인지 압니다. 더 자라 청소년이 되면 부모의 도움 없이 독립을 하기 시작하고 더 나이가 들면 반대로 부모님을 챙기기 시작합니다. 신앙도 이러한 단계들이 있습니다.

[스팸 기도]

십여 년 전 아르헨티나의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목사님이 설교 단상에 자주 언급이 되었었는데, 그분의 책 제목 중 하나가 우리 기도의 대부분은 하늘나라에서 잡동사니 우편물처럼 취급당합니다.”입니다. 요즘은 이메일로 소통하기에 그 양이 대폭 줄어들었지만, 제 앞으로 오는 우편물이 상당량 있습니다. 그런데 그 우편물을 제가 뜯어보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이 교회 선전물이라 봉투 채 바로 쓰레기통에 넣습니다. 이메일도 그러합니다. 아예 스팸으로 처리해서 제목도 보지 않는 이메일이 하루에도 수십 개에 이릅니다. 우리가 부모로서 자녀들의 하는 모든 말에 다 관심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가 별로 생각없이 지껄이는 말에는 건성으로 응응 하고 맙니다. 또 자녀가 해달라고 요구를 해도 부모가 생각할 때,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기면 모른 채 합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우리의 기도가 하늘나라에서 잡동사니 우편물로 취급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스팸으로 처리되는 기도를 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영국의 사상가 버드란트 러셀은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은 과로가 아니라 걱정이나 불안이다.’라고 말합니다. 걱정하고 염려한다고 해서 일이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우리는 걱정과 불안으로 인해 밤잠을 설치면서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현대는 불안의 시대입니다. 물질 중심의 세속적 성공주의는 무한 경쟁이라는 끝이 없는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기에 우리 모두는 너나 할 것 없이 불안의 늪 속으로 빠져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특단의 조치가 없이는 이 세속의 거센 물결을 이겨날 길이 없습니다.

나이가 드신 어르신들에게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가장 후회스러운 일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 가장 많이 나오는 답이 일이 안될까봐 너무 조마조마하게 살아온 일을 후회한다.’고 말합니다. 비록 실패한다 하더라도 자신감을 갖고 새로운 길에 도전하여 볼 것을 안일하게 살아온 것이 후회스럽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잣대에 매여 산 것이 후회스럽다고 말합니다. 아직 살아갈 시간이 많은 사람들은 귀담아 들어야 하겠습니다.

[99세의 시바타 도요]

92세에 글을 쓰기 시작해서 만 99세에 장례비용으로 모아 두었던 백만엔을 투자하여 펴낸 시집이 만부만 팔려도 대단하다고 하는 일본에서, 첫 번 시집이 무려 150만부나 팔려 일본 사회뿐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도 한때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시바타 도요라는 분이 계십니다. 1년 전 101세로 세상을 떴습니다만, 지금도 그의 넉넉한 시는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던져 줍니다.

바람이 유리문을 두드려

안으로 들어오게 해 주었지

그랬더니 햇살까지 들어와

셋이서 수다를 떠네.

할머니 혼자서 외롭지 않아?

바람과 햇살이 묻기에

인간은 어차피 다 혼자야.

나는 대답 했네.

<바람과 햇살과 나>라는 시의 전문입니다.

있잖아, 불행하다고 한숨짓지 마

햇살과 산들바람은 한 쪽 편만 들지 않아

꿈은 평등하게 꿀 수 있는 거야

나도 괴로운 일 많았지만 살아 있어 좋았어

너도 약해지지 마

<약해지지마>라는 시의 전문입니다. 시에도 나와 있지만, 그의 삶이 행복했던 것은 아닙니다. 부유한 가정의 외동딸로 태어났지만 열 살 무렵 가세가 기울어져 갑자기 학교를 그만 두었고 이후 요리점 등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20대에 결혼했지만 이혼의 아픔을 겪었고 33세에 요리사와 다시 결혼해 외아들을 낳았으며 재봉일 등을 하며 힘겹게 살았습니다. 그러다 남편이 죽고 나서 죽을 날만 기다리다가 누군가가 시를 써보라고 해서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하늘>

외로워지면 하늘을 올려다본다

가족 같은 구름

지도 같은 구름

술래잡기에 한창인 구름도 있다

모두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해질녘 붉게 물든 구름

깊은 밤 하늘 가득한 별

너도 하늘을 보는 여유를 가질 수 있기를

<저금>

난 말이지, 사람들이

친절을 베풀면

마음에 저금을 해둬

쓸쓸할 때면

그걸 꺼내

기운을 차리지

너도 지금부터

모아 두렴

연금보다

좋단다

[걱정 넘어서기]

아주 간결하면서도 삶의 근저에서부터 희망을 불러오는 시들입니다. 세 모녀가 이분의 시 한줄 접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을 갖습니다. 티베트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해결될 문제라면 걱정이 없고, 해결 안 될 문제라면 걱정을 마라.”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둘 중 하나입니다. 해결되거나 해결되지 않거나. 해결될 일이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건 어차피 해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라면 이 또한 걱정할 필요가 전연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걱정하든 말든 어차피 해결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걱정일랑 접고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예수님의 말씀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합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하는 말씀 속에 인생의 깊은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2천년이나 지금이나 불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는 매일반입니다. 자동차를 굴리고 뜨거운 물 펑펑 쏟아지는 편리함 속에 살아간다고 해서 불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성공주의에 매몰된 무차별의 경쟁과 돈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물질문명이라는 이 가치 기준을 뒤집지 않고서는 불행은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의 혁명이 필요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생각의 혁명을 가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시편 기자는 이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 거창한 길을 좇지 아니하고, 주제넘게 놀라운 일을 꿈꾸지도 않사옵니다. 차라리 내 마음 차분히 가라앉혀, 젖 떨어진 어린 아기, 어미 품에 안긴 듯이 내 마음 평온합니다.” 바울은 조금 더 유식하게 말합니다만, 그 기조는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를 하느님의 심오한 진리를 맡은 관리인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관리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주인에 대한 충성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서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는 조금도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라고 내가 내 마음대로 내 인생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착각하면서 성공주의에 매몰되고 불안의 스트레스가 떠나지 않습니다.

[먼저 구한다는 것은?]

물론 우리는 자유인으로 자기 인생의 주인입니다. 자기 인생을 남에게 맡겨서도 안 되고 제대로 살지 못한 것을 남에게 책임 전가를 시켜서도 안 됩니다. 자기 인생은 자기가 책임져야 합니다. 그런데 자유를 구가한다고 하여 자기 욕망에 자신을 맡겨버리는 순간 인간은 방종과 교만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관리인으로서의 주인의식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지구를 인간들이 제 편리를 따라 마구 파헤치고 뒤집어 놓는 바람에 인류 멸망이라는 위기에 부딪히고 있습니다.

지구 온난화로 해일과 폭설이 자주 일어나고 이제는 농촌이나 도시나 할 것 없이 중국에서 몰려오는 보이지 않는 미세먼지에 마스크를 하고 다녀야 합니다. 경제 경제 건설 건설이 최고라는 인간 욕망이 지배하면서 관리인의 자기 성찰을 벗어난 죄과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찾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그래야만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오늘 지난 대선에서의 관권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김석채전도사님께서 두 번째 401인 시위를 마치면서 광화문에서 교우 10여명이 함께 모여 찬송하고 기도하는 동영상을 보셨습니다. 김석채전도사님은 지난 주 중학생인 둘째 아들을남아프리카공화국에 사는 친구 집으로 유학을 보냈습니다만, 생활이 넉넉해서 보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타개하는 하나의 적극적 방식에서 보낸 것입니다. 한때 아내 이은숙님이 강남에서 잘나가는 논술강사일 때 돈을 벌기도 했다고 하지만, 건강 때문에 중단할 수밖에 없었고, 큰 아들의 자폐 장애 치료비로 번 돈 다 까먹고, 지금은 양평에서 무너져가는 조그마한 창고를 빌려 중고품가게를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경제로 보면 힘들지만, 신학공부를 하면서 저 멀리 양평에서 매일 서울로 나와 1인 시위를 하고 2년 너머 매주 월요일 저녁 교회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소모임을 이끌어왔고, 또 사도행전이라는 작은 성서공부반도 이끌어 왔습니다. 저는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이 말씀을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실천하시는 전도사님께 감탄하지 않을 수 없고, 그래서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는 하느님의 축복이 임할 것임을 확신합니다.

참 신앙인이란 저는 남들이 시도해보지 않는 위대한 일을 시도하다가 실패하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합니다. 물론 이 실패는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서 말하는 것이지 하느님 기준에서 본다면 성공입니다. 왜냐하면 성공과 실패의 기준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패하는 것은 인간적이지만, 좌절하는 것은 악마적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소치동계올림픽의 꽃으로 우리는 김연아선수를 말하지만, 세계는 올림픽 3관왕을 이룩한 러시아로 귀화한 빅터 안/ 안현수선수를 말합니다. 저는 그가 조국을 버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의 경계를 넘어선 그의 인생 도전이 세계 사람들에게 큰 교훈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다시 태어난다면 한국에서 태어나겠는가?'라는 질문을 5천명에게 했는데, 그 결과는 57%가 우리나라에서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연령별로는 20대가 가장 높았습니다. 그 이유로는 과도한 경쟁이 1위 스펙쌓기와 허례허식, 비싼 집값, 눈치라는 사회적 분위기 순이었습니다. 암울한 현실에 대해서는 정치가 가장 높았고, 성범죄와 학연지연혈연 문제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 우리나라가 공정한 사회인가를 묻는 질문에는 71%가 공정하지 않다고 답했으며 공정한 사회라고 답한 사람은 5.5%에 불과했습니다. 양극화에 대해서도 70%가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한국인만의 정문화가 47%1위를 차지했는데, 이는 마치 정은 우리나라사람들만의 특수한 것인 양 오해되는 답입니다. 정은 어느 나라에나 있는 것이고 오히려 지금의 아파트 문화는 옆집에 사는 사람이 죽은 지 며칠이 되어도 알지 못하는 정 없는 사회로 바꾸고 말았습니다.

정에 이어서 사계절과 높은 아이티 기술과 김연아와 박지성과 같은 스포츠가 다음 순위를 차지했는데, 이것들은 모두 맹목적인 국가주의와 폐쇄적인 민족주의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국가를 배반하면 매국노가 되고 빨갱이가 된다는 무의식적인 강박감이 모든 사람들의 뇌리를 누르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진정한 답이 될 수가 없습니다. 저는 하느님 나라를 꿈꾸는 목사로서 우리나라에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답이 보다 근원적인데서 출발하였으면 하는 아쉬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역사 변혁은 하나로부터]

어제가 일본군사 제국주의의 침략적인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여 나라의 독립과 생명의 자유를 외친 기미년 삼일독립혁명 95주년이었습니다. 최근 31운동이 아닌 31혁명으로 불러야한다는 움직임이 사회 일각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이는 진즉에 일어나야 했던 일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March 1st Movement 라고 말하면 서양 사람들은 춘삼월 봄이 되어 개미나 개구리가 움직이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목숨을 담보로 일제의 총칼 앞에서 분연히 일어난 독립항쟁이 어떻게 운동입니까? 이는 이승만정권을 비롯하여 지금의 박근혜정권의 국가권력이 백성들의 항쟁 의식을 잠재우기 위해 벌이는 못된 수작이자 역사 조작입니다. 수천 명이 학살을 당하고 수만 명이 옥에 갇힌 삼일독립항쟁은 분명히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적인 식민지 체제를 뒤집기 위한 혁명입니다. 삼일운동 이는 일제의 지배에 동조하는 세력들이 붙인 가짜 이름입니다.

저는 다시 태어나겠는가라는 질문에 많은 사람들이 다시 태어나겠다고 답을 하기를 원하고 그 이유를 물으면 한국은 31독립항쟁과 419혁명 그리고 광주민중항쟁과 6월항쟁이라는 자유와 평화를 위한 거국적인 민중항쟁이 끊임없이 지속되어온 깨어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답을 하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백성들이 여기저기 수도 없이 많기에 나는 이 나라를 사랑하고 좋아한다고 답을 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일본과 미국을 비롯한 제국의 외세가 아무리 이 나라와 민족을 반쪽으로 갈라놓고 이간질을 시켜도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기에 통일이라는 과제를 위해 다시금 이 나라에 태어나겠다는 답변을 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번 주 수요일부터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를 향한 의로운 고난을 기억하는 사순절이 시작합니다. 다시 한 번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다지는 시간으로 만들어가기를 바랍니다. 성서배움마당이나 시국 평신도새벽기도회 참석을 통해 그리고 말씀읽기와 기도를 통해 더 깊이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 욕망을 절제하는 성찰과 행동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조동화시인의 시로 저의 얘기를 끝맺고자 합니다.

나 하나 꽃 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느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 피고 나도 꽃 피면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나 하나 물 들어

산이 달라지겠느냐고도

말하지 말아라.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 온 산이

활활 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