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 그 기준은?

2:15-17, 3:1-7; 시편 32; 5:12-19; 4:1-11

 

이번 주 수요일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기억하고 참여하는 40일간의 사순절이 시작하였습니다. 부활절 전날까지에서 일곱 번의 일요일을 빼면 40일이 됩니다. 일요일이 포함되지 않는 이유는 이 날은 주 안에서 하나 된 형제자매들이 하느님 앞에 나아와 예배하며 기쁨으로 친교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주중에는 하느님 앞에서 단독자로 있으면서 침묵으로 기도하고 말씀을 통해 자신을 더 깊이 성찰하면서 세상 욕망을 줄이기 위해 단식도 하여야 하지만, 일요일에는 공동체로 함께 하기에 입을 열어 말도 해야 하고 또 식탁교제를 갖기 위함입니다. 제가 주일이라는 용어 대신에 일요일이라는 용어를 쓰는 이유는 오늘만 주님의 날인 주일이 아니라, 일주일 전체가 사실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주님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사순절은 시간의 십일조]

 

신학적으로 보면 목회자 평신도 구분이 타당한 구분이 아니듯이, 평일 주일 하는 구분도 타당하지 않습니다. 잘못 이해하면 평일은 주님께서 주인이 되는 주일이 아니니 다소 나의 뜻대로 살아가도 되고 일요일은 주님의 날이니 말씀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구분을 갖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한 부분을 떼어 하느님께 드리는 거룩의 행위는 옳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머지를 다소나마 자기 마음대로 쓰겠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한 부분을 떼어 거룩하게 하는 이유는 나머지 부분도 그에 가깝도록 거룩하게 만들겠다는 서원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당시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비판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헌금의 정신은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의를 행하는데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의 조항만 잘 지키면 의인이 될 수 있다는 사고방식, 열에 하나를 드리면 나머지 아홉은 다소 나의 뜻대로 써도 된다는 전도된 주인의식은 물질 뿐만 아니라 시간에서도 일어납니다. 40일의 사순절은 일종의 시간의 십일조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사순절의 시작인 수요일을 재의 수요일이라고 부릅니다. 이 날은 사제들이 교인들의 이마 위에 재를 찍으며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찌니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인간의 유한성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고, 나이 들어 죽을 때에 내가 잘못 살았구나 하고 후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결국 다 놓고 갈 줄 알았으면 평소에 조금 나눠주며 살 걸 하고 후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세상적 가치가 아닌 하느님의 말씀에 기초한 하늘 가치가 우리가 최종적으로 선택해야 하는 가치임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마태복음서는 예수의 광야 40일 단식기도를 통해 우리 인간들이 받는 세상 유혹을 어떻게 물리칠 수 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세상으로부터 받는 유혹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먹을 것으로 대변되는 재물, 사람들의 칭찬과 시선을 받고자 하는 인기로 대변되는 명예, 그리고 자신의 말대로 사람을 움직이는 권력 이 세 가지입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인간은 빵을 필요로 하는 육체적 존재이긴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영성이 담긴 진리의 말씀을 먹어야 하는 영혼의 존재임을 깨닫게 합니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다치지 않았다면 그건 하느님께서 보낸 사람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고 그에게는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 것입니다. 그러나 인기와 명예를 추구하다보면 그 사람의 인생은 다른 사람의 기대와 가치에 따라 살아가는 비주체적 인간이 될 수밖에 없어 결국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권력의 맛은 또 돈이나 명예가 주는 맛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내가 의도하는 대로 사람들이 움직인다. 이거 보통 짜릿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루소는 권력의 맛은 오렌지 맛보다 더 짜릿하다고 말합니다. 아이들이 자동차나 로봇을 좋아하는 것은 자기가 조정하는 대로 물체가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땡깡을 피우는 것도 부모를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재물, 명예 그리고 권력은 인간 누구나가 추구하는 삶의 일부이지만, 문제는 한계를 설정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유혹의 공통점은 마약과 같이 한번 맛을 들이면 거기서 헤어 나오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결국 끝없는 욕망의 바다 속에서 헤매다가 인생이 끝나고 만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성서 이야기가 에덴동산의 선악과나무 얘기입니다. 이는 인간의 자유가 가져다주는 그 결과가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비유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는 것이 왜 문제가 됩니까? 선과 악을 구별할 줄 아는 것이 지혜 아닙니까? 우리가 공부하고 지식을 쌓는 것도 따지고 보면 선과 악을 구별하기 위함이 아닙니까? 해도 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구별하는 열매를 따먹는 일이 왜 하느님을 거역하는 죄가 되는 것입니까? 뭐가 문제이지요?

 

[선악 판단, 무엇이 문제인가?]

 

문제는 선과 악의 기준이 일정하지 않고 사람마다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같은 선생 밑에서 같은 교과서를 갖고 공부를 한 학생들마다 그 기준이 다 다르고, 한 부모 밑에서 같은 가르침을 받고 같은 밥을 먹은 형제자매도 선악의 판단 기준이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양심, 양심 하지만, 사람마다 양심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 뭡니까? 법입니다. 그런데 법이라고 하는 것이 같은 죄를 저질러도 어떤 법 조항을 적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고 이는 판사의 해석이 달려 있습니다. 결국 법도 선악의 절대기준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를 피하기 위해 삼심제가 있지만, 이것도 우리나라와 같이 대법원장을 비롯한 고등 판사 선정에 있어 정치권력자의 입김이 작용하고 사람이 달라지는데, 사람이 달라지면 판결이 달라진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삼권분립이 잘돼있다는 미국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대통령의 진보 성향에 따라 대법판사 구성이 변경이 되고 그러다보니 선악의 기준이 달라집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선악의 기준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복잡한 사회상황과 사법체계가 판가름을 애매하게 할 때가 많습니다. 요즘 BBCCNN TV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재판 실황을 자주 중계하고 있습니다. 오스카 피스토리우스라는 한때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우상으로 여겨졌던 육상 선수의 재판 장면을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로 실황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국가내란 음모재판이나 서울시간첩단 사건과 같이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는 중요한 재판은 실황중계를 하면 좋겠습니다. 피스토리우스는 선천적 장애로 생후 11개월 때 양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고 이후 칼날 모양 의족을 장착하고 달려서 "의족 스프린터", "블레이드 러너"로 불렸습니다. 장애올림픽의 100m, 200m, 400m의 세계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올림픽에도 출전해 계주에서 메달을 땄습니다. 이때 특수재질로 만들어진 인공 다리를 과연 이를 인간의 다리로 인정할 수 있느냐 없느냐 이게 차별이냐 아니냐로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만, 1년 전까지만 해도 남아공의 영웅이자, 세계에 인간승리의 상징인물이었습니다.

 

작년 발렌타이데이에 유명 모델이인 여자 친구를 화장실에서 총으로 죽인 혐의로 체포당했는데, 그는 침입자로 알고 총을 쐈다고 말하고 있고 이웃사람들은 총소리가 있기 전에 둘이서 싸우는 고성을 들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22년전 미국 풋볼계의 영웅이었던 오제이 심슨이 전부인과 그의 애인을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는데, 그의 집에서 피 묻은 장갑이 발견되는 분명한 증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죄로 끝난 일이 있었는데, 그때 돈이 곧 정의다라는 말도 유행했는데, 피스토리우스의 재판이 오제이 심슨 재판의 복사판이 되는 것은 아닌가 하여 세계인들이 주목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법이 선악을 판단하는 최종 기준이 되었는데, 이게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된다는 점에 법의 허점이 있는 것입니다.

 

[선악의 기준은 결국 무엇?]

 

그렇다면 창세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27, 8백여 년 전에 기록된 것으로 말해지는데, 그 당시에 선악의 기준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선악과를 따먹는 실체는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가요? 보편 인간을 두고 한 말일까요? 아니면 특정 인간을 두고 한 말일까요? 이웃간의 분쟁 판결은 보통 마을의 지도자들이 했지만, 그래도 해결이 안 되면 최종 판결은 왕이 했습니다. 한 아기를 자기 아이라 주장하는 두 어머니의 분쟁을 해결한 솔로몬의 재판은 유명하지요. 국내 재판은 왕이 한다 하지만, 국제간의 분쟁은 누가 하지요. 국제간의 분쟁에서 누가 선이 되고 누가 악이 되는 것입니까? 강한 제국들이 약소국을 침범할 때, 이유를 댑니다. 정의를 실현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함이라고. 한반도를 침략하고 식민지 지배를 할 때, 일본제국은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라고 얘기했고, 미국과 러시아가 한반도를 분할 점령할 때도 평화 유지가 이유였습니다.

 

지금도 미군이 남한에 주둔하고 팔고 싶은 무기를 사도록 만들고 또 전쟁이 일어나면 한국군을 지휘하는 전시작전권을 갖고 매년 키리졸브니 독수리훈련이니 하며 평양을 점령하는 전쟁훈련을 하는 것도 모두 한반도평화라는 이름으로 하고 있습니다. 미핵폭격기와 미핵잠수함을 한반도 안으로 갖고 들어옴으로 북조선이 미사일을 쏘면서 대응을 하여 전쟁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지만, 전쟁연습이 우리를 위해서 한다고 하니까 우리 국민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잘못 입을 벌렸다 하면 종북으로, 빨갱이로 몰릴까봐 전쟁연습 반대하는 평화의 외침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핵전쟁이 일어나면 남북의 한반도는 완전히 초토화가 될 것을 알면서도 죽으면 모든게 끝나는데도 지금은 도대체 뭐가 선이고 뭐가 악인지 분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간 우리는 지금까지 남한은 절대 선이요 북조선은 절대 악으로 배워왔고, 미국은 절대 선이요 소련은 절대 악으로 배워왔습니다. 그래서 미국이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며 이라크를 침략할 때에는 침묵했지만, 지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점령한 일에 대해서는 한 나라의 주권을 침입한 잘못이라고 말합니다. 그야말로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악의 실체입니다. 선 따로 악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이 혼재되어 있는데, 그중 힘센 놈이 선이 되고 힘 약한 놈이 악이 되는 것입니다.

 

선악과의 열매를 따먹고 하느님 노릇을 대신한다는 성서의 말씀은 아담과 하와라는 개인 인간을 말한다기보다는 국가 권력의 횡포를 두고 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을 바빌론 제국의 중심이 되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권력의 횡포를 말할 때에 가장 말해지는 것이 짐이 곧 국가이다라는 루이 14세의 발언입니다. 그런데 이 얘기가 중세의 왕조시대의 얘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 사회에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

 

다음 대선의 야권 주자로 얘기되고 있는 현 박원순 서울시장을 종북주의자로 몰아 이번 선거에서 탈락시키기 위해 국정원이 조작한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사건의 전모가 이 이 조작에 참여했던 협조원의 자살 시도와 유서를 통해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유서에서 국정원을 국조원이라고 불렀습니다. 국가정보원이 아니라 국가조작원이라는 말입니다. 이 국조원은 지난 대선에서 선거부정을 통해 박근혜씨를 대통령으로 만들어내는 막강한 힘을 보여주었습니다. 100여명의 통진당원들을 모두 국가반란을 꾀하는 북조선의 지하 조직원으로 둔갑시켰습니다. 지금 국조원은 언제든지 필요한 숫자만큼의 간첩을 만들어내는 절대 권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을 이간질시키고 선한 사람을 악인으로 만드는 악의 근원이지만, 지하철에서 수상한 사람을 발견하면 국정원에 신고하라는 방송공작으로 세뇌를 당한 시민들은 여전히 국정원이 우리를 보호해주는 선한 조직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지금 국정원은 이름만 달랐지, 6,70년대의 정보부나 8,90년대의 안기부가 했던 방식 그대로 국가권력의 시녀, 청와대의 충견에 불과합니다. 국정원을 이번 기회에 확실히 해체하여 다시는 국내 정치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구조를 바꿔내야 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말은 개개인의 선악을 판단하는 도덕과 윤리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아담과 하와는 보통의 사람이 아니라, 무한 권력을 행사하는 제국의 통치자를 두고 하는 말이고 여기서 뱀은 국가권력을 향한 욕망입니다.

 

[하느님의 형상, 뱀의 형상]

 

창세기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매우 문학적으로 뛰어난 글입니다. 사람 아담은 흙으로부터 만들어지는데, 흙의 히브리 언어가 아다마입니다. 뱀의 특성을 뜻하는 간교함이라는 히브리 말이 하룸인데, 선악과를 따먹고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이 옷을 벗은 것을 알았다고 말할 때에 벗음을 뜻하는 히브리 말이 하루밈입니다. 그러니까 옷을 벗은 것을 알았다는 그 의미는 뱀과 같은 교활한 인간, 곧 처음의 언어를 살짝 비트는 언어기술자로 변한 인간의 죄성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처음 하느님은 이 동산의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말라. 그것을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서의 방점은 하나를 제외하고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다는 자유와 풍성한 기쁨입니다. 이게 에덴의 문자적 의미입니다. 그런데 뱀은 이를 묘하게 비틉니다. “하느님이 너희더러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하나도 따먹지 말라고 하셨다는데 그것이 정말이냐?” 뱀은 곧 요즘으로 말하면 말을 이리저리 비틀어 보도하는 언론과 같습니다. 국민사이를 이간질 시키는 권력의 시녀가 된 언론입니다. 인간의 특징은 언어에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 사이의 분쟁은 언제나 말에서 시작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의 형상을 띄고 태어났지만, 동시에 뱀의 형상 또한 우리의 언어 습관 속에 드러납니다.

 

[국가폭력성의 문제]

 

금지된 선악과의 열매는 언론을 장악한 제어될 수 없는 국가권력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제주도 강정에서 미군용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평화지킴이들은 국가의 일을 방해한다 하여 감옥에 갇히고 수억 원의 벌금형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8년 전 평택 대추리의 농민들이 미군기지 확장을 위해 자신들이 평생 가꿔온 땅을 내줄 수 없다하여 목숨을 내어놓고 투쟁할 때, 우리는 그들과 하나 되어 3년 너머 투쟁했습니다. 국가의 이름으로 한다고 해서 다 옳은 것도 아니고 정당한 것도 아닙니다. 전시라면 모르지만, 평화시에 그것도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미군에게 땅을 내어준다고 하는 것은 악을 편드는 일입니다. 그러나 한반도의 평화 유지라는 거짓 구호에 국민 다수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어떻게 말하면 우리 교회가 명동환경재개발지역 안에 포함됨으로 이전을 강요당하고 있는 현실도 일종의 국가폭력입니다. 언제 우리에게 물어보고 그래서 양해를 구하고 정했습니까? 아닙니다. 20년 전에 일방적으로 선포했습니다. 예전에 뉴타운 재개발은 서울시가 정했지만, 그래도 조합이라는 형식을 통해 사는 주민들의 동의를 형식적으로 나마 구합니다. 그러나 서민주민들이 자본논리에 희생당하다 보니 지금은 거의 중지된 상태입니다. 박원순시장 이후 이제는 뉴타운 개발 계획이 주민들의 반대운동으로 거의 백지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가 처한 상황은 우리 교회가 더 좋은 건물을 갖게 되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동안 국가가 시민의 동의없이 권력의 이름으로 진행하는 폭력에 저항하여 온 향린교회의 선교적 가치가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도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서울 한복판에 있는 명동은 남한의 얼굴이기에 환경개선을 하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국가가 주민에게 동의를 구하고 그리고 적절한 보상대책을 마련하여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지금 정부는 구역만을 지정해놓고 자본의 뒤로 숨어버렸습니다.

 

요즘 갖가지 생각을 갖게 됩니다. 담임목사로서 50년 된 오래된 건물 대신에 보다 크고 넓은 새 교회 건물로 옮겨서 후임자에게 새로운 향린의 미래를 열어가도록 그 길을 준비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고 기뻐할 일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우리 교인들이 원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의 강압에 의해서 할 수 없이 그것도 교인들은 건축헌금 제대로 하지 않고 교회 새 건물을 갖는다는 것이 과연 이후 향린교회에 도움이 되는 일인지 저로서는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건물은 언제든지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가치는 한번 손상되면 회복하기가 어렵습니다.

 

지난 주 사회부는 재개발대책위원들과의 대화 그리고 토론을 거쳐 오늘 임시공동의회를 연기해달라는 요청을 했습니다. 이유는 교인들의 의견이 충분히 발표되는 민주적 절차가 상실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오늘 투표를 진행한다면 반대하겠다는 의사를 교회 홈피에 공식적으로 표명했습니다. 저는 담임목사로서 그런 지적을 나오게 만든 일에 책임을 느끼고 용서를 구합니다. 어제 저녁에도 사회부와 대책위원들이 모여 논의를 했고, 또 오늘 아침 8시에 임시당회가 모였습니다. 이미 공고한 일이니 이번 공동의회가 설명회를 겸한 첫 번 공동의회로 가질 것을 논의했습니다.

 

저는 매각과 이전을 다루는 공동의회와 사순절 첫째 주일인 오늘 선악과의 말씀과 예수의 광야 시험 말씀이 주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많은 교회들이 우리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논의를 진행하여 나갈는지 그 과정과 결과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저는 현실적인 우리의 필요와 더불어 향린교회의 출발이 그러했고 지금까지 그렇게 활동해왔던 것처럼 보다 더 당당하게 정부에 대해서도 따질 것은 따지고 요구할 것은 요구함으로 재개발의 아픔을 당하는 힘없는 교회들에게 신앙의 본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대추리 투쟁에 처음 참여할 때, 거기 가보니 장로교회가 하나 있었는데, 국가의 보상을 받고는 먼저 나가버렸습니다. 그래서 교회 건물이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 교회를 이용해서 남아 있는 주민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그 교회 한 분이 밤에 와서 창문을 다 깨고 마룻바닥을 못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도록 모두 헤집어 놓았습니다. 물론 정부가 시켜서 한 일이겠지만, 속으로 못된 교인이구나 하고 욕을 했습니다. 이미 팔고 나갔으니 정부 보고 하라고 하면 되었지 자신이 직접 나서서 교회 건물을 부수고 예배를 방해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지요. 아마 주민들을 놔두고 나간 게 양심에 찔려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천막교회를 세워서 예배를 드렸던 때가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는 말아야겠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수천억을 들여 감사예배를 드린 현재 남한에서 가장 웅장하고 현대식으로 멋들어지게 만들어진 서초동의 S 교회를 지나가는데, 경찰버스 3개가 서 있었습니다. 당회가 둘로 갈라지고 교인들간의 충돌 때문이었습니다. 경찰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예배 종종 일어나는 교회 일이지만, 그건 간판만 교회이지 이미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현재 둘로 나누어져 새건물과 구건물에서 두 예배가 진행되고 있으며 서로를 법정에 고발한 상태입니다. 건물로는 성전이지만, 교인들의 마음속 성전은 미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동대문 성곽복원에 관련하여 동대문감리교회는 교인 총회까지 다 통과하여 이주하기로 합의가 끝난 일이었지만, 그러나 결국 현재는 교회 이전파와 반대파 둘로 갈라져서 따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서초동 S교회는 제자화운동과 새벽기도로 유명한 교회이고 동대문감리교회는 70년대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120년 역사의 이름 있는 교회입니다. 이 두 교회를 보면서 우리가 정말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돌아보도록 만듭니다.

 

보이는 성전과 보이지 않는 성전 둘 다 중요합니다. 이 두 교회는 법적으로 하자가 없는 절차를 거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말하면 아담과 하와가 서로에게 잘못을 떠넘김으로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고 노래했던 하나됨이 둘로 나뉘는 분리가 일어났고 결국 둘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이는 먹음직하고 보기에 탐스러울뿐더러 사람을 영리하게 해줄 것 같은 선악과를 따먹는 잘못을 범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어리석음이 향린교회에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을 확신하면서도 죄인인 인간들의 집단이기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 한편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말씀에서 아담의 범죄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 덕분에 많은 사람이 은총을 입었다고 말합니다. 저는 감히 향린교회가 다른 교회들의 분리의 아픔을 회복하는 진정 예수살기의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순절의 첫 시작입니다. 지금은 우리에 앞서서 걸어가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자신들의 모든 주장을 내려놓는 시기입니다.

 

지난 주 그냥꽃이라는 필명을 가진 한 교인이 교회 홈피에 올린 글입니다.

 

[공동의회를 앞두고]

어제 제직회가 있었습니다. 교회 부지에 대한 재개발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들어 왔지만 주변 건물이 허물어 진 것은 불과 1년 전입니다. 어제 다루어진 내용의 우리 교회 재개발 논의에 대한 것은 불과 10여일 전입니다. 이제 하려는 말은 제 자신에게 하는 넋두리이자, 다짐입니다.

 

교회들이 건물 신축이나 이전 등의 재산과 관련한 일이 있을 때 분란이 생긴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사례들이 증명합니다. 어제 회의에 앞서 열린 목회운영위가 끝나고 나온 반응들에 대한 느낌도 가볍지 않았습니다. 어제의 제직회의 직후 받은 느낌은 조금 더 무거웠습니다. 공동의회가 끝나고 나면 어떤 무게감이 느껴질지 걱정이 앞섭니다.

 

이번 공동의회에서 갈리는 의견은 지금 파는 게 교회에 이익이다.’ ‘조금 기다리며 명분을 세우는 게 이익이다.’ ‘현재의 건물은 상당히 불편하며 낡았다’ ‘이 자리에 계속 남아 있는 건 불가능하다’ ‘교회가 돈 더 많이 받자고 하는 건 맞지 않다로 생각됩니다. 우리 내부에서 터부시 되는 의견이겠지만 심지어 더 많은 돈을 받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도 교인의 당연한 의무인 지점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교인에게는 교회의 재산을 관리할 책임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처럼 다른 의견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결국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지금 협상에 나서야 한다는 것은 조금 기다렸을 때 발생할 부담을 교인들이 지게 될 것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기다리자는 의견을 가진 이들은 안팎에서 우리 교회에 기대하는 것을 져버리지 말자는 호소일 것입니다. 이런 의견도 저런 의견도 교회가 지금처럼, 지금보다 더 좋은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생각입니다.

 

그런데 모두가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공동의회는 무리 없이 잘 진행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무언가가 부족합니다. 가만 생각해 보니 내게 늘 부족한 바로 그것입니다. ‘남을 낫게 여기고, 너도 교회를 사랑하여 말한 것이다라고 인정하는 것.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의 표현이었습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그 사랑이 각 사람에게로 향하여 교만하여지는 마음을 누르고 온유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

 

오는 공동의회를 통해 어떤 결론이 나오든 그 과정과 이후의 일들을 통해 누구를 비난하거나 어떤 의견에 무슨 잘못이 있다거나 혹은 누구는 이걸 책임져야 할 것이다라고 상처 주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저를 비롯하여 모두가 온유한 마음으로 듣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말을 하기를 다짐합니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