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려도 괜찮아!”

창세기 12:1-4; 시편 121; 로마 4:1-5, 13-17; 요한 3:1-10

김밝은빛 교우/ 조은화 목사


 

오늘은 총회가 제정한 청년주일입니다. 청년주일은 역사적인 1953년 제38차 교단 호헌 총회에서 청년주일로 성수할 것을 결의한 후 매년 각 교회마다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올해는 향린의 역사와도 같이하는 예순 한 번째(61) 청년주일입니다. 이번 청년주일은 청년선교의 의미를 되새기고 이에 대해 교회는 말씀과 기도로 후원하며 마음을 모으는 날입니다. 오늘 예배는 청년들을 대표해서 김밝은빛 교우와 제가 하늘뜻펴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진한 마음모아 귀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김밝은빛 교우]

제가 수능이 끝나고 할 일이 없을 때, 돈도 벌 겸 친구들과 새벽에 택배 일을 했습니다. 그 택배회사 건물에 들어가면 가운데에 아주 길~게 늘어진 컨베이어 벨트가 있습니다. 일의 시작을 알리는 벨이 울리면 그 저~기서부터 크기도 다르고 색깔도 다른 제각각의 아주 많은 물건들이 길~게 늘어진 하나의 컨베이어 벨트위에서 나란히 떠려갑니다. 그 때 당시엔 아무런 느낌이 없었는데 지금 와서 그 모습 상상해보니 꼭 그 그림이 저희들의 모습이랑 비슷하다는 느낌을 문뜩 받았습니다.

열 살도 채 안될 때부터 우리나라말도 잘 알지 못하면서 글로벌 시대에 맞는 인재가 돼야 한다며 영어를 배우고, 열 살이 좀 넘어 중학생이 되면 특목고에 가야 한다고 학원에서 밤늦게 돌아오고, 또 고등학교 올라왔더니 흔히 얘기하는 SKY에 들어가야 한답니다. 0교시와 야간자율학습으로 3년을 보내고 거기에 재수까지 한다면 빛도 잘 안 들어오는 입시학원에서 비싼 돈 내며 공부를 합니다. 그러고 이제 대학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어느덧 스무 살 또는 저처럼 스물 한 살이 됩니다. 그리고 나서 꽃다운 십대를 돌아보려 하는데 웬걸요 아름다운 추억이 없습니다. 아 하나 있습니다. 그건 바로 입시입니다. 내 미래를 위한다면 까짓 거 십대 그거 포기하자라고 생각하고 전진합니다. ‘어차피 이제 내 앞길을 탄탄대로 일 텐데’라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왜냐하면 학창시절 대학만 가면 앞으로의 인생이 보장될 거라고 존경스런 선생님들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학에 와보니 이게 뭘까요? 또 취업해야 한답니다. 그래서 스펙 쌓기에 대학생활도 또 날아가고 그렇게 또 취업 그 뒤에 결혼... 또 자식 뒷바라지까지 끝도 없어 보입니다. 이렇게 살다가 드디어 늙어 자신이 어렸을 때 그러셨던 부모님처럼 자식에게 SKY 입성을 원하며 끝없이 한숨 돌릴 틈 없이 살 것 같습니다.


 

[길들여진 삶]

어떠십니까? 숨 막히시지요. 이렇게 우린 컨테이너벨트 위에 놓인 것처럼 직선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혹시 직선의 정의 아시는 분 있으십니까? 직선이란 점과 점 사이의 최단거리를 이은 선을 말합니다. 우린 뭐가 그리 급한지 인생을 직선으로 살아갑니다. 최단거리를 정해놓고 그 한 가지 길만을 따라가죠. 이렇게 세상엔 온통 직선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바쁘게 정신없이 살아가는 것 보다 무서운 게 뭔 줄 아십니까? 길들여진 삶입니다. 저는 이런 삶이 정말 무섭습니다. 예전의 어른들이 바쁘게 사셨다면 지금 우리는 바쁘게 사는 걸 넘어 세상에 길들여져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길들여져 살다보니 내 생각 내 주관 내 영혼도 없이 지내게 되어버렸습니다. 자꾸 세상의 생각에 끌려가면서 정작 내 생각은 없어져만 갑니다. 그리고는 이 부당한 시스템에 몸을 맡겨버리고 순응해 버립니다. 심지어 이유 없는 부당한 관습에 조차도 내 것처럼 받아들이게 됩니다. 특히나 우리나라엔 이유 없는 관습이 너무도 만연해있습니다. 기성세대로부터 대물림된 것들, 그리고 대표적으로 군대문화가 그렇습니다.


 

[침묵]

이에 관련된 일은 저희들의 대학에도 깊이 박혀있습니다. 학교에 가니까 이런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다나까 말투, 인사 방식, 기합, 윗사람 줄서기... 이런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다 압니다. 근런데도 왜 수 십년간 바뀌지 않고 그대로일까요? 그것은 바로 어른들이 자신의 안전을 위해 그것을 지키고자 침묵해왔기 때문이고 또 우리들 또한 침묵해서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젊은이’는 ‘저를 묻는 이’ 고, ‘늙은이’는 ‘늘 그런 이’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 ‘젊은이’들 저를 묻고 있을까요? 그리고 ‘늙은 이’ 즉 어르신들은 젊은이가 되려고 노력해 보셨습니까? 제가 보기엔 모두들 너나 할 것 없이 ‘늙은이’, ‘늘 그런 이’ 들로 가득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왜 자신을 묻고 세상에 대해 묻지 않은 채, 늘 그렇게 침묵하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그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 즉 안락함, 풍요, 등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난 그 험난하고 더러운 꼴 견뎌서 이제야 내가 그 자리에 있는데 뭐하러 바꿔? 이 아까운 자리를 어떻게 포기해?” 이런 생각일거라고 조심스레 추측해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 교육의 관한 저희들의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우리 교회 어르신들은 많이들 진보를 외치시기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과연 자녀들을 돌보실 때조차 그러시는지요? 교회 안에서는 우리들의 교육에 대해서 진보적이어야 한다고 그렇게 외치시면서 정작 자신들의 자녀들은 영락없는 한국 사회 교육 시스템안에 가둬놓고 일류를 만들려고 합니다. 당신의 자녀들이 모이고 모여 어린이부가 되고 청소년부가 되며, 청년회가 되고 신도회를 이루는데, 어떻게 저희들이 우리 사회의 틀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교육을 받으며 진보할 수 있겠습니까.

사회를 보는 관점에서 흔히 두 가지로 나뉜다고 봅니다. 사회를 개인의 총합 이상으로 보는 ‘사회 실재론’과 사회를 개인의 합으로 보는 ‘사회 명목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둘 중 어디에 더 관심을 가지시는지요. 청년들이 보기엔 감히 전자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전체만 바뀌길 원하면서도 정작 나 자신의 변화는 일구려 하지 않는 모습을 봅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 교우들께서 나 자신과 같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우리 교회를 이뤄 나간다는 것을 꼭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청년들의 실태]

어른들의 문제뿐만 아니라 실상은 청년들도 심각합니다. 청년들은 나약할 대로 나약해져 있으며 말과 행동이 다른 모습이 너무 많습니다. 뒤에선 궁시렁궁시렁 불평불만 다하고 언제든지 박차고 일어나 강력히 호소할 것처럼 하지만 정작 말해야할 때에 침묵합니다. 왜 그럴까요 대체? 우린 대체 뭐가 무서워서 이렇게 입 꼭 다물고 있을까요? 세상이 옳은 말을 하는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합니다. 그게 두려운겁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표현하지 않고 그냥 안주하는 삶에 포커스를 맞춥니다. 그리고는 어느덧 기득권이 되어 자신의 재산과 집과 명예를 부여잡고 살게 됩니다.

요즈음 우리들을 되돌아보면 굉장히 모순투성입니다. 이십대가 되고 대학에 들어가면서 청년들은 눈에 띄게 지식인인 척! 독립적인 척!합니다. 가족으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말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독서와 신문들을 기피하는 우리에게 딱 알맞은 SNS라는게 생겼습니다. SNS에 올라온 글들을 보며 우리는 “아 난 이제 세상에 대해 어느 정도 잘 아는 개념 있고 깨어있는 사람이야!”라며 스스로에게 주문을 겁니다. 그렇게 얇디 얇은 지식만 가지고 있는 우리다 보니, 줏대 있게 말도 못하고, 무언가 강하게 요구하거나 항의조차 하질 못합니다. 그렇다고 독립은 되어 있습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일부의 경제적인 의존은 우리 사회에서 어쩔 수 없지만, 가장 중요한 내 환경에 안주하지 않는 더 나은 길을 가고자 하는 추진력과 결단력이 결여 되있습니다.

체 게바라. 다들 아시죠? 예. 익히 알려진 대단한 거침없는 혁명갑니다. 근데 요즈음 ‘3초 체 게바라’ 라는 말이 떠돌고 있습니다. 생소하시죠? 용기를 주는 명언들을 보고 난 후, 난 꼭 이 말대로 살아갈 거야! 아니면 어떤 부당한 일들을 알게 된 후에 ‘훗날 저런 일들이 다신 이루어지지 않도록 내가 이 세상을 바꾸겠어!’ 라며 가슴 뜨겁게 큰 결의에 찹니다. 그러나 3초만에 깨닫게 되는 현실은 ‘냉정하게 보니 이러쿵저러쿵 해서 이건 못할 것 같아’ 라는 계속되는 자기 합리화입니다. 이렇게 내 눈앞의 작은 현실들을 핑계 삼아 제자리로 돌아가는 이들을 3초 체 게바라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우리 현주소라는 것입니다. 어느덧 안락함에 취해 그저 가족이란 따뜻하고 배부른 울타리 안에서 불평만 늘어놓는 나약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과 결단]

창세기 12장 1절 말씀을 보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약속을 해주시면서 안전한 집을 떠나 새로운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결국 아브라함은 수많은 고민 끝에 하느님을 믿고 알지 못하는 길을 떠납니다. 오늘 우리에게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과 결단이 있어야하지 않을까요?

지금 우리 젊은이들이 필요한 두 가지를 꼽으라면 첫 번째로 앞에서 말씀드렸던 내면의 독립, 즉 주변환경에 안주하지 않는 추진력과 결단력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과감함입니다. 어른들은 우리가 성공하기 힘들다고 불평하면 많이들 그러십니다. 현실의 조건(걸림돌)들을 점프해 버리라고요. 맞습니다. 청년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힘듭니다. 겁이 납니다. 내가 바라는 걸 이루기 위해, 한 단계 나아가기 위해 점프하는 순간에 내가 그동안 이루고 지켜왔던 것들을 포기해야하는 순간이 오면 정말 두렵습니다. 두발 세발 후퇴를 넘어 땅으로 곤두박칠 쳐버리는 것이 현실이잖습니까? 저는 그래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능력 있는 사람이 성공하는 게 아니라 과감한 사람이 성공하는 거라고요. 자신을 자신답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과감히 버리고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에 필요한 일을 과감히 겁 없이 실천하는 용기, 그렇게 떠날 수 있는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요한복음 3장 5절을 보면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근데 저는 이 말씀을 건방지지만 이렇게 받아들여봤습니다. “누구든지 이 안정된 현 상황과 관념을 과감히 깨고 굳건히 스스로 일어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 또는 너의 미래를 볼 수 없다”라고 말입니다.

이제 제가 준비한 하늘뜻펴기는 여기서 마치고자 합니다. 지금쯤 아마 이러시겠죠? ‘이게 대체 오늘 말씀 제목과 무슨 관계야?.’ 하지만 정말 귀기울여주셨다면 눈치 채신 분들도 계실 겁니다. 저희가 정한 오늘의 하늘뜻펴기 주제는 앞으로 어른들께서 저희에게 해주셨으면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스스로 일어서서 변화할 때이고 변화해야만합니다. 기존의 악습에서 벗어나야 하고 안정되지만 물질과 향락의 그늘에서 벗어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이 분명 미숙하고 더딜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어른들께서 다그치시기보다는 저희에게 격려의 한마디 해주셨으면 합니다, 바로 그런 떠남의 여정, 변화의 과정이 “느려도 괜찮아” 라고요. 그 잔잔한 힘 있는 말이 오갈 수 있는 따뜻한 향린 공동체가 되길 바라며 오늘의 하늘뜻펴기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조은화 목사]

향린에 와서 오늘 이 시간은 저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교회에서 7년간의 전임사역을 하면서 아마도 오늘이 가장 긴장되고 떨리는 순간이 아닌가 싶습니다.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청년주일 하늘뜻펴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딸 셋과 아들 둘이 있는 오남매 중에 맞이입니다. 그래서 집안 자매형제의 각각의 나이는 25살, 27살, 29살, 31살, 30대 중반에 이르는, 어떻게 보면 새청, 청신, 희청의 청년들이 모인 연합청년회와도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미래를 준비하는 청년의 힘겨운 삶을 연령대별로 함께 지켜보게 되고 느끼는 바가 큽니다.

김밝은빛 교우의 하늘뜻펴기를 통해 들으셨듯이 이 시대 청년들의 삶은 답답하고 숨이 막힐듯합니다. 청년주일을 준비하면서 토론을 거쳐 나오게 된 이야기중 가장 큰 문제는 청년들은 머무른 자리를 쉽게 해쳐나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청년시절에 해봄직한 일들을 벌여 나가기보다는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 가진 것을 더 강화하며 살 수밖에 없는 구조안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진 삶을 벗어나 더 높은 차원으로 나가는 삶은 과연 어떻게 해야 오는 것일까요?


 

[아브라함의 떠남]

오늘의 본문인 창세기12장은 ‘아브라함의 소명사건’이라고 불리는 이야기로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기를 지나 페르시아의 통치 시대에 살다가 가나안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고백된 성서의 이야기입니다. 데라의 아들인 아브라함은 원역사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셈의 계보 가운데 마지막 자손이면서 동시에 족장 이야기의 첫 번째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출발하여 하란을 거쳐 가나안 땅에 이르렀다가 이집트로 피신한 후 가나안 땅을 향해 새로운 출발을 하고 있는 과정은 이스라엘 역사의 축소판과 같습니다.

이야기의 전반은 이렇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을 향하여 길을 떠나다가 하란에 머물러 살게 된 데라와 그의 아들 아브라함,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하느님은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네 이름은 남에게 복을 끼쳐 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 라고 약속하셨고, 아브라함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길을 떠났다는 내용입니다.

창세기11장에서 바벨탑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인간의 죄악상에 대한 고발을 듣게 됩니다. 자신의 힘으로 각국에서 데려온 포로들을 통해 물질과 권력으로 바벨탑을 짓습니다. 어떻게든 신이 되어 보고자 합니다. 인간 자신의 이름을 높이 올려 무엇이든 해보이겠다는 전능감에 도취되어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똘똘 뭉치려다가 오히려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창세기12장은 11장까지의 원역사에서 족장사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아브라함의 소명사건을 연결시킵니다. 바벨탑사건에서 인간의 악에 모습에 대한 하늘의 처벌과 악의 고발에 반하여 이스라엘은 오히려 버리고 ‘떠나는 삶’이 그 시작이 되었음을 알립니다.


 

[흩어짐의 시작, 하느님을 믿고 떠나는 모험]

창세기 12장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흩어짐, 그 흩어짐의 시작은 갈대아 우르였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르는 이스라엘 민족이 바빌론 포로로 끌려가면서 살게 된 메소포타미아 지역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포로기를 거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오경을 정리하면서 그들이 출발했던 우르(원)라는 곳에서 왜 떠나왔는지. 그 떠나옴의 결정은 어떤 것이었는가에 대한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결정은, 하느님을 믿고 떠나는 모험을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살던 자리를 떠난다는 것은 어떤 결단을 필요로 하는가? 떠남의 여행을 감행하기에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더군다나 선택하기 어려운 점은 아브라함에게 하느님은 그의 갈 곳이 어디라고 가르쳐 주고 있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메소포타미아로 끌려가 포로민으로 살게 된 이스라엘 민족이 오랜 시간이 흘러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의 새로운 정책에 의해 이제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실제적인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그동안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살게 되면서 오랜 세월 그나마 어렵게 마련한 집과 재산을 어떻게 놔두고 갈 것인가?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놓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과정 안에 하느님은 어떻게 개입하시는가? 이스라엘이 작게나마 누리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하는 상황 속에서 그 어려운 선택을 하고 떠나는 삶이 바로 지금 아브라함을 통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타국에서 흩어져서 어렵게 포로민으로 살면서도 끝까지 간직하고 있었던 전승들을 가지고 성서를 완성하면서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고백을 담았습니다.

바벨론 시대 이후 페르시아 시대까지 이스라엘 민족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살면서 비록 자신들은 노예로 하층민으로 어렵게 살았겠으나 도시 전체가 가지고 있는 위대한 문명 안에서 어렵게 터를 잡고 자리 잡은 그것을 버리고 쉽게 팔레스타인으로 떠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본국으로 가고 싶으나 그동안 익숙해져 있는 것들을 버려야 하는 상황입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일제강점 38년 이후 해방이 한국민족 모두에게 기쁜 소식은 아니었습니다. 일본으로 하여금 부와 명예를 누린 이들, 그리고 꽤나 터를 잡고 안정적으로 살게 된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터와 소유권을 버리고 고국으로 돌아가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떠남의 이유]

바로 이스라엘은 이런 상황에서 그들의 발걸음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를 고백합니다. 그들은 본국으로 떠나는 어려운 결정 앞에서 그들이 그동안 만들어온 집과 관계, 문명의 익숙함을 모두 포기하고 떠나는 이 발걸음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복된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밑도 끝도 없어 보이는 떠남의 여행길, 하느님은 분명 자신을 믿고 떠나는 이스라엘의 행보가 복되다고 하십니다. 그들의 원래의 고향을 찾고 그곳에서 민족의 힘을 키우고자 부함과 명성을 버리고 나오는 자리가 복되다는 것입니다.

떠남을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은 우리의 삶이 어디에 중점을 두며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제시해 줍니다. 이스라엘 민족사의 이동을 보면 우르에서 하란으로 그리고 하란에서 가나안으로의 여정임을 보게 됩니다. 그 도시들은 풍요로웠고 세련된 도시이고 강대국의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자본이 우선적으로 안정적이고 편한 것 같아 보이지만 이런 삶은 더 이상 하느님과 가까워질 수 없는 삶의 방식이 됩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아브라함을 더 이상 그런 세속적인 삶에서 살도록 내버려 둘 수 없으셨을 겁니다. 결국 주님은 그 자리를 떠나도록 불러내십니다.


 

[떠남, 그 이후의 약속]

그리고 궁금한 것은 그런 떠남의 선택 이후는 정말 어떤 길이 열려지는가?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서 또다시 주목해 볼 것이 있습니다. 창세기 12장 3절의 말씀에 여러 번 쓰인 ‘저주’라고 하는 말이 각각 다른 의미로 쓰였다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인 번역을 정리해보면 그 뜻은 이렇습니다.

“너에게 친절히 대하며 복을 주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을 복주겠다. 그러나 혹여 너를 기존 제도에서 제외시키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내가 그들을 저주하겠다.”

앞길이 보장이 되지 않아 불안해보일지라도 오히려 주님은 이스라엘이 가는 길에 그들을 없이 보려는 억압하는 세력이 있다면 보호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니 지금 남의 땅에 살면서 향락의 냄새나 맡으며 사는 죽어가는 삶보다 어렵고 힘들어 보일지라도 하느님이 보여주시는 약속의 땅에서 힘을 키워 사는 주체성을 가진 백성으로 사는 것이 복되다고 것이지요.


 

[물과 성령으로 다시!]

요한복음은 3장에서는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를 통해 유대교 기독교 공동체와 요한공동체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의회의원으로 유대 사회의 질서를 대변하는 존재인 니고데모와 예수와의 대화, 그 이면에는 두 공동체의 갈등이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당시 유대사회와 로마 제국 치하 속에서 요한공동체는 유대인 위주의 기독공동체가 보기에는 불온한 집단이었습니다. 유대공동체는 ‘다름’에 대해 폐쇄적인 모습으로 요한공동체 앞에 다가섭니다. 그리고 유대주의의 편집적인 체재의 질서관을 대변하는 사회 종교적 위치의 인물인 니고데모에게 예수는 이렇게 말을 건넵니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요한복음 3장 5절)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물은 혼돈이고 어둠입니다. 창조이전 물 위에 하느님의 영이 운행하셨던, 그래서 죽음의 세계와도 같은 물! 당시 세례는 물에 사람의 전신을 잠갔다가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그 상징하는 바는 몸을 깨끗이 하는 정결 례의 의미보다는 물속에 깊이 들어갔다 나오면서 겪게 되는 혼돈과 죽음을 맛보며 것입니다. 생명이전, 자신의 창조이전의 죽음과 같은, 내 이전의 나된 이전으로 돌아가겠다는 다짐을 하며 나의 정체성이 형성되기 그 이전으로 들어가 죽음을 불사하고 나의 낡은 가치관, 기득권의 그 어떤 것도 내려놓고 오직 주의 영이 이끄시는 대로 가겠다는 결단입니다. 결국 요한공동체는 유대공동체에 대하여 낡은 관습과 기준을 버리고 체제변혁, 죽음을 각오한 기득권 포기가 있을 때에 비로소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려놓음 그리고 새로운 눈]

요한복음 3장은 유대계열의 기독교인들 그러니까 제의와 종교상황에 있어서 어느 정도 안정권이 된, 제도화된 것들이 많은 이들에게 요한공동체가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기득권을 버릴 것, 그리고 기존의 관습과 제의, 제도를 내려놓고 새로운 눈으로 주의 뜻을 따라 갈 것을 요구합니다.

청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기성세대가 청년들에게 원하는 “너 왜 여기까지밖에 못해. ~해야지!”라는 소리가 참 버겁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대학 들어가면 졸업해야지, 직장 다녀야지, 결혼해야지, 욕심 가득한 눈으로 사람을 계량하고 평가하는 세상 속에서 진정한 자유는 빼앗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신앙의 길 조차도 성과가 있어야 하는 성과주의의 눈으로 교회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식민지를 살았지만 그 가운데 축적한 부와 경제적 상황을 놓고 떠나지만 그 결정을 내리고 가는 길이 힘겨웠던 것처럼 지금의 청년들도 어려운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떠나는 것 그것은 존재자체를 다시 생각해야 하고 기존의 가정의 의지, 부모를 의지하는 습관, 무엇인가 쌓아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도식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가능함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떠남의 연습을 충실히 하려하고 있습니다.


 

[느려도 괜찮아!]

아브람이 정해진 틀과 물질적 풍요의 환경에서 하느님이 인도해 주시는 진정한 세계가 있음을 믿고 나갔던 것처럼, 청년들은 더디고 초라해 보이고 어리석어보이기까지 한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갈 것입니다. 오늘 청년들이 함께 부를 노래제목은 ‘바람이 불어오는 곳’입니다. 규정된 세상 안에서 바람이부는 곳으로, 햇살 가득한 그곳으로 가겠다는 다짐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부를 때에 그들이 가는 걸음이 그들의 떠남 연습이 시작되고 있음을 봐주십시오. 혹여 세상의 방식대로 속도가 안 맞고 더디어 보일지라도 청년들의 속도는 그렇지 않음을 그래서 오늘의 청년주일을 준비하며 청년들 모두가 입을 모아 정한 “느려도 괜찮아!”라고 격려해주시고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말을 우리 자신에게도 진실하게 외쳤으면 합니다.

“느려도 괜찮아!”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