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아 여인의 진짜 비밀

17:1-7; 95; 5:1-11; 4:5-42

 

사순절은 히브리 백성들의 40년 광야 생활과 예수님의 광야 40일 단식기도를 동시에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2주전 예수님의 광야 40일 기도생활 속에서 사탄의 3가지 시험을 물리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오늘의 제1성서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년 생활의 중요한 한 단면을 보여주는 므리바 물 사건 혹은 마싸아 사건 이야기입니다. 마싸아란 뜻은 야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가 안 계신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바람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 그리고 그로 인해 고통이 심할수록 하느님은 과연 계시는가? 하는 의문을 품게 됩니다. 저는 이런 의문을 불경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마더 테레사 수녀도 같은 회의를 가졌었고, 프란시스코 교황 또한 때로는 같은 회의를 갖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연약해지고 그래서 신적 존재에 회의를 갖는 것은 인간임을 말해주는 가장 중요한 단서이니까요.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었다고 우리가 믿고 고백하지만, 예수 또한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참지 못하여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절규를 하였던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후예들은 애굽에서 노예로 4백년을 살아오다 모세라는 출중한 지도자를 만나 지긋지긋한 노예생활로부터 해방을 받고 자유를 얻게 됩니다. 자유와 해방! 당시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홍해를 건너 광야로 들어가서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들은 고기가 없다, 채소와 과일을 먹고 싶다며 앙탈을 부렸고, 심지어는 그때마다 애굽으로 차라리 돌아가자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출애굽기에서 저들이 하는 불신적인 행동을 통해 인간의 근본이 어떤 것인지를 보게 되고 우리들 자신을 성찰하게 됩니다. 순간 기뻐하다가도 순간 불만에 가득 차는 하루에도 마음이 수십 번 수백 번이 왔다갔다하는 변덕스런 우리들 자신을 보게 됩니다.

 

마싸아 사건은 만나 기적 사건에 바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하늘로부터 먹을 것이 떨어졌으니 때가 되면 마실 물도 주실 것이다라고 하는게 믿음입니다만, 마실 물이 없자 아우성을 쳐댑니다. ‘어쩌자고 우리를 애굽에서 데려내왔느냐?’ 너무 고통스러우니 구해달라고 애굽의 압제에서 끄집어 내달라고 해서 끄집어 내주었더니 이제는 물에 떠내려간 가방을 내놓으라고 강탈을 부리고 있습니다. 사실 돌아보면 우리도 위기 속에서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이것만 해결해주시면 잘 믿고 순종하겠습니다. 그러나 해결이 되는 순간 돌아서면서 우리는 그 서원 기도를 잊고 또 다른 것을 요구합니다. 어찌 보면 신앙이란 자신이 필요에 따라 하느님을 찾고 그리고 해결이 되면 또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다람쥐 채바퀴의 생활과도 같습니다. 말은 절대 신이라고 고백하지만, 실제는 자기 필요에 따라 움직이는 노예와 다름이 없습니다.

 

[가나안의 젖과 꿀은 과연 무엇?]

 

그런데 저는 출애굽기를 대할 때마다 야훼 하느님께서 약속하셨던 가나안의 젖과 꿀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하는 신학적 질문을 계속하게 됩니다. 저들은 광야생활의 어려움 속에서도 만나와 메추라기,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는 경험, 그리고 밤에는 불기둥과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함께 하시는 야훼 하느님을 경험했습니다. 40년이 지나는 동안 애굽에서 나온 첫 세대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모두 광야에서 죽었고 가나안에 들어간 세대는 광야에서 태어나고 광야에서 하느님의 말씀으로 훈련받은 2세대 새로운 세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여호수아서나 판관기를 보면 저들은 그곳에 가서도 계속 전쟁을 하고 때로는 여러 이방 민족들로부터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리곤 다른 민족과 같이 왕을 세웁니다. 그러나 왕으로 대변되는 국가권력은 폭력이 절대적인 군대 조직과 지배 계급이 절대적입니다. 강자와 약자 그리고 빈부의 차별은 필연의 과정입니다. 왕조시대 초기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나라가 강대해지는 영광을 누렸지만, 이런 영광도 잠시 왕국은 권력 암투와 이념 대결로 인해 남과 북 둘로 나누이고 이 두 형제 나라는 또 서로 다투다가 각각 앗시리아와 바빌론 제국에 의해 멸망을 당합니다. 심지어는 야훼 하느님이 거하시는 집이자 온 우주의 중심으로 여겨졌던 예루살렘 성전마저 무참히 파괴당하고 맙니다. 그렇다면 모세 5경이 줄기차게 말하는 가나안의 젖과 꿀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러한 성서의 역사 속에서 오늘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교회공동체가 지향하는 바가 있는데, 하느님 나라 건설이라는 총론에는 모두가 동의하는데,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하는 각론에 들어가면 각자가 생각하는 내용이 조금씩 다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교회의 이전과 매각 그리고 존치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무엇이 가나안의 젖과 꿀이었는가? 먹어 보았는가? 아니면 앞으로 먹게 될 것인가?

 

[병렬 읽기: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

 

이 질문을 갖고 이제 요한복음의 사마리아 여인의 얘기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너무 잘 아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보다 후기에 쓰인 요한복음은 마태오, 마르코, 루가의 세 복음서에 비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매우 탄탄한 신학적 구성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의 기적을 기적이라 말하지 아니하고 이를 하나의 표지혹은 표식’(, 세메이온)이라고 부릅니다. 공동번역서는 이를 구별하지 않고 그냥 기적이라고 번역을 하고 있고, 다른 번역서는 이적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모두 정확한 번역이 아닙니다. 저자가 분명한 목적을 갖고 선택한 단어를 구별 없이 번역하는 것은 큰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또 오늘 이야기에도 등장합니다만, 야훼라는 신을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희랍어로 에고 에이미 곧 나는 ...이다라는 불완전 문장인데, 이는 히브리어 발음상 야훼 신을 뜻합니다. 그냥 번역으로 읽어서는 저자의 깊은 신학을 전연 눈치챌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 또한 이러한 요한복음 신학 전체의 맥락에서 읽어나가야 하고 특히 이 얘기는 바로 앞장에서 얘기되고 있는 니고데모 이야기와 병렬적으로 함께 비교하면서 읽어나가야만 그 뜻이 제대로 드러납니다.

 

니고데모는 남성으로 당시 유대사회 핵심부에 해당하는 산헤드린의 한 회원이자 바리사이파 사람으로 존경받는 율법학자였습니다. 말하자면 성공의 원형이었습니다. 여기에 비해 사마리아 여인은 이름조차도 없습니다. 정식 결혼식을 했는지 안했는지는 모르지만, 여섯 번째 남편과 살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여성들의 차별적 지위를 고려하면 남편 여섯이 있었다는 말은 남자들로부터 계속 버림을 당하는 바닥의 여인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그 시작부터 당시 최고 지위를 누리는 한 남성과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를 만나는 두 이야기를 통해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넌지시 돌려가며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종교사회에서의 기층지배를 상징하고 사마리아 여인은 주변으로 밀려나다 밀려나다 더 이상 갈 데가 없는 민중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를 찾아오고 사마리아 여인은 대낮에 예수를 만납니다. 그리고 니고데모는 예수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우매한 사람으로 여인은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가서 이를 전하는 깨달음의 사람으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유대율법사회는 사라져야 하는 어둠의 상징으로 사마리아 여인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빛의 상징으로 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얘기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요한이 지향하고 있는 이야기의 저의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거기에 이 이야기의 시작이 되는 구성 또한 매우 전복적입니다.

 

[손가락이 아닌 달을 보는 일이 매우 중요]

 

예수는 당시 사회보안법으로 보면 두 가지의 범죄를 저지릅니다. 첫째는 유대인들은 들어가서는 안 되는 사마리아 땅을 들어갑니다. 본래는 형제 나라였지만, 둘로 갈라지고 북 사마리아 왕국이 먼저 앗시리아에 멸망당하면서 강제 이주로 인해 여러 민족과 피가 섞이게 되는데, 이때부터 남쪽 유대인들을 개라 부르고 접촉을 하는 것을 금지해 왔습니다. 오늘날 남한사람이 북조선의 사람과 접촉하면 국가보안법으로 구속하듯이 똑같은 법이 당시에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이를 어기고 그 땅을 들어갑니다. 그리고 대화를 나누어서는 안 되는 사마리아 여인과 말하자면 접선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도 사마리아 사람의 얘기는 나오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예수를 당시의 사회법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한 인물로 말하지는 않습니다.

 

말하자면 문익환목사님이나 한상렬목사님을 국가보안법 위반자로 정치범으로 구속하듯이 당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곧 정치적인 이유였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요한복음은 11절로부터 창조 이전부터 로고스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이 로고스가 예수로 육화되었다고 선언함으로 우주적 개벽을 선포했고, 예수의 활동을 통해 이런 개벽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책입니다. 매우 매우 혁명적인 책입니다. 우주적 혁명, 세계의 혁명, 정신의 혁명, 종교의 혁명 저는 혁명이란 혁명은 모두 요한복음에 나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복음서는 모두 예루살렘 성전 숙청을 예수 생애의 마지막 주간에 일어난 일로 설명하고 이로 인해 체포를 당하고 재판을 받아 십자가 처형으로 진행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2장에서 이미 성전 숙청을 단행하고 공관복음서에서는 단지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말하는 반면에 요한복음은 여기서 더 한발작나가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만에 다시 세우겠다는 선언을 합니다. 이는 성전 숙청이 아니라 성전 파괴입니다. ‘교회를 깨끗이 하겠다는 것과 교회를 허물어라하는 것과는 완연히 다른 것입니다.

 

깨끗케 하는 것은 기존의 틀을 유지하면서 그 안의 내용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이지만, 허문다는 것은 내용은 물론 그 틀까지도 완전히 바꾸겠다는 말입니다. 부분 혁명이 아니라 전폭 혁명이고 이는 폭탄선언입니다. 그렇다면 사마리아 여인이 과거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고, 지금 현재 살아가고 있는 여섯 번째 남편도 참 남편이 아니라는 얘기가 단지 더럽거나 혹은 불우한 한 여인의 이야기에 그치고 마는 것일까요? 만약 제가 그런 식으로 이를 해석하고 지나간다면 저자 요한이 무덤 문을 박차고 나와 야 이 멍청한 목사야! 그러고도 니가 신학을 몇 십년씩 공부했다고 하는 목사냐?’라며 저에게 호통을 칠 것입니다.

 

우주의 개벽과 유대종교의 폐지를 논하는 마당에 외로움에 절여 이 남자 저 남자의 품에 안기며 살아가는 한 고독한 여성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이야 말로 저자에 대한 모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섯 명의 남편은 무엇을 상징하는 표지판(세메이온)입니까? 1231절에서 예수께서는 지금은 이 세상이 심판을 받을 때이다. 이제는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나게 되었다.‘고 선언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말하는 거짓 남편이란 유대와 사마리아를 군사의 힘으로 통치해온 제국들을 상징하는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제국들의 통치자는 단순히 군대의 수장일 뿐만 아니라 그 제국에 속한 백성들이 예배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살아 있는 신이었습니다. 예언서에 보면 남편은 예배의 대상인 하느님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과거 다섯 남편이란 애굽과 앗수르와 바빌론과 페르시아와 그리스제국을 말하고 오늘 함께 살아가지만 참 남편이 아닌 거짓 남편은 로마제국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섯 남편들이 모두 참 남편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누가 완전을 상징하는 일곱 번째의 참 남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제가 이를 말한다면 이는 향린교우들에 대한 모독이 되겠지요.

 

오늘 본문 말씀에서 여인이 말합니다. “저는 그리스도라 하는 메시야가 오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번역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선언이 숨어 있습니다.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는 희랍어 성서에는 에고 에이미라고 쓰여 있는데, 이 희랍어 에고 에이미는 히브리어로 바꾸면 그 발음이 야훼가 됩니다. 당시에는 감히 이 단어를 말하는 것은 금지사항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야훼 하느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제3 십계명을 어기는 범죄였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를 한번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생명의 문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언설이 모두 스스로가 야훼임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버지와 하나라고 하는 선언보다 더 진일보한 선언이고 더 나아가서 요한복음은 너희는 내가 하는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라는 예수의 선언을 통해 우리 스스로가 신적 자리에로 나아갈 수 있다는 매우 당돌한 선언을 요한은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시인 김남주의 <당돌하게도 나는>이라는 시를 읽겠습니다.

 

당돌하게도 나는

 

하늘에서 가장 먼 곳에 땅이 있고

땅에서 가장 먼 곳에 하늘이 있다

그리고 하늘과 땅 사이에 교회와 나란히

자본가의 빌딩이 키를 다투며 서 있다

키가 작은 나는 바닥을 기다시피 하여

빌딩의 스카이라운지와 교회의 철탑이 만들어 놓은 그늘을 짊어지고

허위와 욕망의 거리를 빠져나간다

신음처럼 깔린 빌딩 맨 아래층에서는

철판을 두들겨패는 노동자의 망치 소리가

아우성이 되어 찢어진 내 오른쪽 귀를 아프게 하고

교회의 문턱에서는 앉은뱅이 행상을 쫓는 경찰의 호루라기 소리가

미처 아물지 못한 내 왼쪽 고막을 울게 한다 그리고

십자가의 위선과 라운지의 호사 때문에 내 얼굴은

노여움의 경련으로 거미줄처럼 찌푸려진다

 

예배란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이고 성전이란 하느님을 예배하기 위한 장소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바로 그 성전에만 가야한다고 믿는다. 예수님 당시의 종교는 그렇게 가르쳤고 지금도 그렇게 말하지는 않지만, 대부분이 교회에 나가야만 참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느님은 절대적 존재로 결코 장소에 매이실 분이 아니란 걸 알았지만, 그렇게 가르치는 이유는 종교가 갖고 있는 권력성, 이는 단순히 종교권력만이 아닌 정치권력과 밀접하게 연결된 통치권력으로서 민중을 보다 쉽게 다루기 위함이었다.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의 핵심은 그러니까 사마리아 조상들이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그리심 성전도 아니고 유대인들이 구원이 온다고 말하는 예루살렘 성전도 아니 이곳도 저곳도 아닌 바로 네가 서있는 그 자리에서 참 예배가 이루어진다는 의미는 단순히 지리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을 넘어서 그런 성전을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정치와 종교의 통치 권력에 휘둘리지 말고 스스로의 신앙 주체적인 신앙으로 바로 서라는 말씀인 것이다.

얼마 전 한겨레의 조현기자가 남미교회들을 방문하면서 상파울루의 이바브교회 키비츠목사를 소개하였다. 키비츠목사를 남미의 해방신학을 교회에 적용해 가치와 성장을 동시에 견인해낸 목사로 소개하고 있다. 천상이 아닌 이 땅의 구원을 위해 현장과 사람을 중시하는 목회로 젊은이들이 모이는 교회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의 목회 십계명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 목회 십계명이 예수께서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시겠다는 예수 부활의 몸으로서의 성전 그리고 오늘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말씀하시는 영적으로 참되게 예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1. 정의는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정의는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 사랑의 실천과 연대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이 슬로건은 이 교회가 지난 연말 모금운동을 전개할 때 내세운 것이다. 교회는 40만 달러(4억원)를 모금해 정의를 실현하는 37개 엔지오 단체를 돕고 있다.

 

2. 반쪽의 복음을 전체적으로 살려내라

영적인 문제나 죽음 이후만 다루는 게 복음이 아니라는 게 키비츠 목사가 따르는 통전적 신앙관이다. 그는 하느님은 떠다니는 영만 창조한 게 아니다. 이 땅 위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어떻게 종합적으로 이룰 것인지를 말해놓은 게 복음이라고 말한다.

 

3. 현장에 길이 있다

젊은 시절 인디오와 아프리카인들 속으로 들어가 사역을 하면서 복음의 핵심이 현장에 있음을 터득한 그는 삶과 별개가 아니라 삶과 직결된 게 복음이기 때문에, 추상적인 이야기에 머물러선 안 되며 현실과 끊임없이 대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교회가 정치적 입장을 세우지 않을지라도, 신자들의 토론을 통해 정치·사회 문제에 진일보한 생각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인권 침해 등 명백히 하나님 나라에 반대되는 정책에는 분명한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4. 약자를 죽음으로 내몰지 않는 하느님 나라를 세워라

하느님 나라란 일부만 복을 누리고 나머지는 희생되는 계급 사회가 아니라 형제애를 바탕으로 약자와 무능력자들이 보호받는 세상을 말한다.

 

5. 교회 건물이 아니라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신다.

이바브 교회는 25년간 부지를 빌려 천막에서 예배를 드려왔다. 교회 신축은 이 땅의 임대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최근에야 이뤄졌다. 헌금의 대부분을 건물에 쓰는 일을 해선 안 되며 형제들을 위해 써야 한다는 방침에 따른 것이었다.

 

6. 교회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교회를 세우라

그는 예수님이 새벽마다 교회에 나오라거나 시도 때도 없이 교회에서 살라고 하지 않았다며 예수님이 원했던 것 이상을 원하지 말라고 한다. 그는 교회에서 사는 것은 신앙인의 자세가 아니다교회는 일주일에 한 번만 오라고 말한다.

 

7. 교회 안에 머물지 말고 사람들 안에 머물라

가정과 직장, 마을 일에 충실하며 그곳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게 신앙인이라고 한다. 그는 진정한 복음이란 교회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안에 머물면서 사람들을 바꾸는 것이라고 말한다.

 

8. 대중성이 아니라 저항력을 길러라

키비츠 목사는 그리스도교는 애초 대중의 종교가 아니라 강력한 소수의 믿음으로 시작된 종교였다고 말한다. 예수님도 겨자씨와 늑대 사이의 양 한 마리 이야기를 통해 온 세상을 지배하려는 권력에 대항해 어떻게 하느님 현존의 모습을 지켜내느냐를 중요시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성장이나 힘의 확대보다는 세속적인 욕망의 힘이 대항하는 저항세력으로 남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9. 다른 교회를 모방하지 마라

키비츠 목사도 처음 목회를 시작할 때는 저 목사처럼 되고 싶다”, “저런 교회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자신만의 소명을 찾아내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단다. 그는 모방이 아니라 자신과 소명을 찾을 때가 목회가 시작되는 시점이라고 말한다. 저는 향린교회 교우들은 모두 생활목회자로서 자신만의 목회를 찾아 나서기를 기도합니다.

 

10. 영성이 깨어날 침묵의 시간을 가져라

키비츠 목사는 일주일에 5회 한 시간씩 핸드폰도 두고 홀로 온전한 침묵 속에서 뛴다. 그는 사람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경청으로 성숙되며, 읽는 것보다 침묵 속에서 영성이 기지개를 켠다고 말한다.

 

저는 이전과 매각 그리고 존치의 주장들이 오고가는 오늘의 향린의 역사 현장에서 모든 교인들이 이 키비츠 목사의 목회 십계명을 통해 향린의 미래를 함께 꿈꾸는 하늘 은총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도 오늘 새벽 이 대목을 다시 한 번 읽으면서 하늘뜻펴기 내용을 더 세심하게 다듬거나 8시반부터 있을 임시당회 준비를 접고 동터오는 새벽빛 속에서 예수님의 광야에서의 기도하는 그림을 바라보며 한 시간의 침묵 시간을 가졌습니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