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암 - 파견된 자

삼상 16:1-2, 6-13; 시편 23; 5:8-14; 9:1-8; 35-41

 

창세기는 온 우주 만물의 창조자와 인간 역사의 주관자가 야훼 하느님임을 밝히고 있고, 이어지는 출애굽기는 히브리라 불리는 애굽의 노예들을 이 야훼 하느님이 선택하시어 광야 40년의 훈련을 통해 새로운 인간 역사를 펼쳐 가시는 분임을 말학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들을 통해 펼치고자 하시는 새로운 역사란 무엇인가? 걸어서 불과 열흘이면 통과할 수 있는 시나이반도 광야를 40년을 빙빙 돌려가며 그 안에서 살아가도록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요즘 원산상륙과 평양점령을 위한 쌍용한미군사훈련과 같이 가나안에 들어가 그곳에 살고 있는 민족들을 점령하기 위한 군사훈련이 필요했던 것인가? 성서를 보면 광야 40년 동안 애굽을 출발했던 사람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다 죽었다, 심지어는 모세까지도 느보산 비스가 봉우리에서 그 땅을 바라만 보고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다고 했는데, 이 이야기 속에 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메뚜기 - (): ]

 

광야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맨 날 먹는 만나가 지겹다고 이제는 고기와 야채를 먹고 싶다고 불평을 하자 하느님께서 바람을 일으켜 메추라기를 몰아주던 그때, 곧 광야생활에 접어든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던 때였습니다. 모세는 각 지파에서 한명씩을 대표로 뽑아 저들이 들어갈 가나안 땅을 정탐하도록 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 12명 중의 일원이었습니다. 그런데 40일간 정탐한 저들의 보고는 큰 열매가 맺히는 비옥한 땅이라는 점에서는 같았지만, 미래 전망에 있어서는 여호수아 갈렙의 보고와 나머지 열 명의보고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열 명의 보고는 가나안 사람들은 몸집이 거인이고 그 성곽은 매우 단단하다. 우리는 저들에 비하면 메뚜기에 불과하다. 그러니 전쟁을 하면 필패하여 우리는 모두 죽고 우리의 아내와 자녀들은 저들의 노예가 될 것이다.’

 

백성들 사이에 즉각 소동이 일어납니다. 차라리 애굽 땅에서 그냥 살다 죽을 것을 그랬다는 사람들, 아니 저들의 칼에 맞아 죽느니 차라리 이 광야에서 죽는 것이 더 낫겠다는 사람들, 그래 그들은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 애굽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결의하고 대표를 뽑아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합니다. 이를 보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매우 분개하여 옷을 찢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마시오. 우리가 야훼의 마음에 들기만 하면 우리는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오. 그들은 이미 우리의 밥이오. 야훼께서 우리의 편이시니, 두려워하지 맙시다.” 무엇이 이 두 그룹의 차이를 만들어내었던 것일까요? 왜 백성들은 부정적인 열 명의 보고를 받아들이고 2명의 긍정적인 보고에는 고개를 돌렸던 것일까요?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습관이 얼마나 고치기 어려운 것인지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습관은 우리의 행동을 주관하고 반복되는 행동은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고 그래서 우리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비록 홍해를 건너는 기적을 경험했다고 하지만, 평생을 살아왔던 애굽의 노예생활에 기초한 경험이 여전히 저들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과거 경험을 넘어서서 야훼 하느님 믿음에 기초한 미래에 대한 비전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결국 새 역사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갖지 못했던 사람들은 다 광야에서 죽었고, 그들의 아들과 딸들만이 가나안에 들어가 새로운 역사를 펼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역사의 핵심은 무엇인가? 반면 노예세대가 가졌던 잘못은 무엇이었는가? 아까 만나만 먹어 지겹다고 다른 음식을 먹었으면 좋겠다고 불평할 때, 저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애굽에서는 공짜로 먹던 생선, 오이, 참외, 부추, , 마늘이 눈앞에 선하구나.” 여기 먹고 싶은 음식의 다양성이 핵심이 아니라, 공짜라는 단어입니다. 공짜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공짜에 담겨 있는 전제는 무엇인가요? 누가 공짜로 제공한다는 것입니까? 그건 애굽의 왕 파라오가 삶의 보호자라는 것이고 나아가서 역사의 주관자라는 고백입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결단해야 하는 자유인의 삶은 불안합니다. 거기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미래는 여전히 불안합니다. 반면 노예는 그저 하라는 일만 하면 됩니다. 생각할 필요도 없고 결단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이 다 해결이 되니 편안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부분이 자유와 선택이라면 그에게는 자유도 없고 선택도 없습니다.

 

[암픽티오니와 왕 제도]

 

곧 가나안에 들어가 펼쳐지는 새로운 역사란 다름 아닌 인간의 자유와 선택이 보장되는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왕의 제도를 거부해야 하고 오직 야훼 하느님만을 왕으로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파라오의 말이 아닌 십계명과 그에 기초한 계명을 따라 살아가는 일이었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 반석에서 터져 나오는 물, 구름기둥 불기둥의 이야기는 보이지는 않지만 야훼 하느님께서도 먹을 것, 마실 물도 주시고 갈 길도 인도하시는 분임을 경험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광야 40년을 끝내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12지파별로 땅을 나누고 신학용어로 '암픽티오니'라 불리는 야훼 신앙에 기초한 지파평등공동체를 4백년간을 유지하여 오면서 권력이 한 지파 혹은 한 개인에게 집중되지 않도록 하여 온 것입니다. 단지 외부로부터 침입을 받았을 때에 일시 지도자를 세웠고 평시에는 백성들 사이에 분쟁을 해결하는 일을 하였기에 저들을 판관 혹은 사사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외적의 침입과 지배를 당하면서 이들은 왕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러한 역사의 전환기에 이스라엘의 지도자 역할을 했던 사람이 사제이기도 하였던 사무엘이었습니다. 처음 그는 백성들이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하자 완강히 거부합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요구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되자 하느님께 묻습니다. 하느님은 저들이 너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리는 것이다. 왕을 세워주어라. 다만 왕의 제도로 인해 저들이 겪을 폐해가 어떤 것인지는 분명히 알려주어라. 남자들은 군대에 징집될 것이고, 여자들은 시녀로 저들을 위해 일을 해야 하고 수확의 십분지 일은 왕에게 바쳐야 함을 알려주어라.’ 물론 왕의 제도를 통해 만들어지는 국가 권력은 여기서 그치지 아니하고 필연적으로 백성들 사이에 지배자와 피지배자 이로 인한 불의와 부정 그래서 억울한 사람들이 생길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래도 좋다고 하자 첫 번째로 세운 왕이 사울이고 두 번째로 세운 왕이 다윗입니다.

 

사울을 왕으로 세울 때의 기준은 이러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 그만큼 잘생긴 사림이 없을 만큼 깨끗하게 잘 생겼다. 누구든지 그의 옆에 서면 어깨 아래에 닿았다.”(삼상 9:2) 얼굴이 아주 잘생겼고, 체격이 우람했다는 것입니다. 그 기준은 외면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서 다윗이 왕으로 세워지는 그 기준은 외면이 아니라, 내면이었습니다. 그는 이새의 8번째 아들로서 사무엘이 아들들 중에 한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겠으니 내 앞으로 데려오라고 하자, 아버지의 기준에서 벗어난 아들이었습니다. 어렸고, 볼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사무엘조차 첫아들 엘리압의 용모를 보고 야 여기 하느님께서 성별하신 사람이 있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용모나 신장을 보지 말라.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지만, 나 야훼는 속마음을 들여다본다.’고 하시면 일곱 아들이 다 지나도록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여기 나온 아들들 외에 다른 아들은 없느냐?’ ‘, 막내아들이 있긴 하지만, 그는 지금 양을 치고 있습니다.’ 그를 데려오자 성서는 그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볼이 붉고 눈이 반짝이는 잘생긴 아이였다.’ 볼이 붉다는 것은 생기 곧 열정과 비전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고 눈이 반짝인다는 말은 총명과 지혜를 일컫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래를 향해 열려진 내면을 보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지만 나 야훼는 속마음을 들여다본다는 이 말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왜냐하면 처음 사울을 뽑을 때에도 야훼 하느님이 뽑은 것입니다. 외면이든 내면이든 야훼 하느님이 뽑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야훼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아 버림을 받습니다. 다윗 또한 그러합니다. 다윗왕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추앙받긴 하지만, 그는 자신의 부하의 아내 그것도 그가 나라를 위해 전쟁터에 나가 있는 사이에 그의 아내와 불륜의 관계를 맺었고, 그래서 생긴 아이를 감추기 위해 별의별 음모를 꾸미다가 결국은 남편 우리야 장군을 전쟁터에서 죽이도록 계획하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둘도 없는 충성스런 부하를 그의 아내를 차지하기 위해 살해한 것입니다. 이는 씻을 수 없는 죄악입니다. 여기서 제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일단 권력의 자리에 올라가면 망가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적당히 하다 물러나는 민주제도를 선택하는 것인데, 그 민주제도에도 허점이 많아 부정이 개입되고 있으니 언제나 깨어있는 일 밖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육적 눈뜸과 영적 눈뜸]

 

오늘 복음서의 말씀 또한 사람의 외면과 내면 그리고 권력의 상관관계를 말하는 구절입니다. 요한복음은 영적 복음서입니다. 본다, 보지 못한다는 말은 육적인 눈뿐만이 아니라 영적 눈을 동시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 문맥에 따라 육적 눈인지 영적 눈인지를 잘 판단해야 합니다. 이 사람이 눈을 뜬 결과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세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육적인 눈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합니다. 영적 눈뜸입니다. 요한복음서에서 눈뜸이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 속에서 이해할 수 없는 한 구절이 있습니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못 보는 사람을 보게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만, 보는 사람을 눈멀게 한다는 말씀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를 바로 보게 인도해야지 왜 아예 못 보게 한다는 말입니까? 용서와 사랑을 가르치는 예수님의 말씀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스로는 눈이 떴다고 말하지만, 눈이 먼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나면서부터 눈이 멀었던 사람이 고침을 받아 눈을 뜬 사람이 바로 자신들의 눈앞에 있고, 주위 백성들이 이를 증언하고 부모가 증언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당시의 사회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왜 그들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일까요? 저들에게 있어 예수는 사회 불순세력이 집중되어 있는 갈릴리 출신으로 그곳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불순한 하느님 나라 사상을 가르치고 배후 조종자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들이 지금까지 자신들이 진리로 알고 지켜왔던 성전율법체제와 로마의 식민정치사회질서 제도를 모두 부인하지 않는 한 예수를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예수를 부인하고 그를 따르는 자들을 유대사회 밖으로 쫓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체제부정자, 국가반역자, 종북주의자 혹은 빨갱이로 몰아붙인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눈이 먼 아들을 두었던 부모들에게 유대권력자들이 네 아들이 정말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느냐?’ 그런데 이 부모님이 주저하는데, 만약 진실을 얘기하면 그들 또한 체제반역자로 낙인 찍혀 유대사회에서 쫓겨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남한 땅에서 빨갱이로 낙인찍힌 사람은 감옥을 가든가 은둔생활을 하든가 외국으로 추방을 당합니다. 여기에 본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지 못하게 하겠다는 말씀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권력자들에게 회개를 바란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 산에 올라 나무 앞에서 생선을 구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반문합니다. ‘우리가 눈이 멀었단 말이요?’ 예수께서는 차라리 눈먼 사람이라면 오히려 죄가 없을 것이다. 지금 눈이 잘 보인다고 하니 너희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사실 우리는 기회가 왔을 때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자신도 살리도 남도 살리는 길입니다. 그런데 잘못된 자신을 알면서도 이를 감추고 변호하려 할 때, 오히려 구원의 기회는 영영 날아가 버리게 됩니다.

 

[눈뜸과 추방]

 

그러면 이제 하나 물어보겠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보는 사람들입니까? 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까? 육적으로는 다 보는 사람들입니다. 영적으로 본다는 것을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고백으로 기준을 삼으면 지금 우리는 교회 안에 있으니 모두 보는 사람이 되겠지요. 그런데 당시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일은 보는 사람이 됨과 동시에 유대주류사회로부터 추방을 당했습니다. 결국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반쯤 보는 것이고 완전히 보려면 추방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한다면 이는 현재 내가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고, 주류사회라는 안전지대에서 비주류라는 불안전지대로 옮겨가는 일이 전제될 때 본다는 말이 온전히 성립되는 것입니다.

 

눈뜸과 눈멈의 기준이 되는 것은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함으로서 경험의 현재를 떠나 불안의 미래로 나아가는 일입니다. 요한공동체는 예수를 따름으로 인해 유대주류사회로부터 추방당한 공동체였습니다. 차별과 불의한 현실 세계를 넘어서서 새로 오고 있는 세계를 고대한 사람들의 모임이었습니다. 추방의 삶은 매우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러나 저들의 고통을 통한 신앙의 이야기는 지난 2천년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지금도 오늘 이시간 수억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진리의 길을 제시하여 주고 있습니다.

 

인도의 성자라 불리는 비노바 바베는 말합니다. “나는 브라만으로 태어났으나 나의 시카(머리의 왕관처럼 생각하여 길게 기른 머리 타래)를 잘라버리고 자발적으로 그 카스트와 결별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힌두라고 부르지만, 나는 코란과 성서를 꾸준히 연구하였고 결국 힌두교를 버리게 되었다. 나의 활동이 자비와 사랑과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념들을 가지고 있으나 고정되어 굳어버린 견해들은 가지고 있지 않다. 실제로 나는 너무나 변덕스러워서 오늘은 이런 견해를 말하고 또 서슴지 않고 내일은 저런 견해를 밝힌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가 아니다. 나를 매순간 다르게 생각하며 항상 변화를 계속하고 있다. <명상과 혁명 비노바 바베> (칼린디 지음 김문호 옮김 실천문학사 2000. 31)

 

광야의 삶은 오늘이 다르고 내일이 다릅니다. 현대어로는 노마드라고 말하는 유목민을 팔레스타인에서는 베두인족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그 정확한 단어를 잊어버렸지만, 내일이라는 단어와 베두라는 단어는 거의 같은 발음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 에페소 본문은 우리를 향해 잠에서 깨어나라. 죽음에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빛을 비추신다.’라고 선포합니다. ‘전에는 어둠의 세계에서 살았지만, 지금은 주님을 믿고 빛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지금은 어떻게 구별되는 것일까요? 세례인가요? 교인등록인가요? 향린식으로 말하면 저 예배실 전면에 자기 십자가를 다는 때인가요?

 

잠에서 깨어나라고 했는데, 어떤 상태가 되어야 잠에서 깨어나는 일이 되는 것입니까? 죽음에서 일어나라고 했는데, 어떻게 사는 것이 죽음에서 일어나는 부활의 삶이 되는 것입니까? 다가오는 미래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타당한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추구되었던 하느님 나라의 가치가 담겨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따르면 개인의 자유와 인간 평등의 가치, 그리고 공동체 중심의 생명의 가치가 담겨 있어야 합니다.

 

[파견된 자 - 대사(大使) 자아의식]

 

오늘 요한복음의 주인공은 실로암 연못에 가서 눈을 씻고 눈을 떴습니다. 실로암 샘물의 효력이 그렇게 좋았다면 당시 눈먼 사람은 하나도 없었겠지요. 바울이 앓았던 안질도 다 고쳤겠지요. 실로암 또한 눈뜸과 눈멈의 차이를 말해주는 하나의 상징적 장소입니다. 실로암의 뜻이 무어라고 성서는 설명하고 있습니까? 파견된 자. 누구로부터? 하늘로부터. 자신의 삶이 하늘로부터 파견 받은 자의 삶임을 깨닫는 일. 두 발은 땅을 딛고 살지만, 하늘나라의 대사라는 자아 인식. 그것이 바로 눈을 뜬 자라는 것입니다. 그때가 세례의 순간일수도 있고, 저곳에 십자가를 다는 순간일수도 있고, 어느 날 새벽에 무릎 꿇고 조용히 기도할 때 온 몸에 전율이 끼치는 순간일 수도 있고 찬송을 부르는 가운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라는 인간은 잠시 이 땅에 거하면서 다가오고 있는 하느님 나라의 임박함을 알리는 대사라는 깨달음입니다. 대사는 그가 살아가고 있는 나라의 법과 그를 파송한 나라의 법이 충돌할 때에는 그를 파송한 나라의 법을 우선으로 여깁니다.

 

비노바 바베가 청소년 시절에 하루는 어머니께 이렇게 불평합니다. “어머님은 동등을 말씀하시면서 왜 저를 차별하세요? 식은 음식은 늘 저에게만 주시고 저 학생에게는 한 번도 주시지 않잖아요. 그래 네 말이 옳다. 나는 너를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대하고 있다. 나는 너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고 또 편애하고 있어 웬지 아니? 나는 아직도 너를 아들로 생각하고 있고 그 학생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느님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야. 내가 너마저 그렇게 볼 수 있는 때가 되면 이런 차별은 없어질 것이다.”

 

서로서로가 외면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아니하고 그 안에 담겨 있는 내면성, 곧 서로 다른 각자의 모습 속에서 하느님의 형상을 발견하게 되는 때, 그래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어 보잘 것 없는 여김을 받아 지금 이 자리에 초청받지 못한 우리밖에 있는 다윗이라는 막내둥이를 야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위한 미래의 지도자로 선택하신다는 이 진리를 깊이 깨달을 때, 우리는 진정 눈을 뜨는 것이고 어둠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옮겨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빛은 모든 선과 정의와 진실을 열매 맺습니다. 주님을 기쁘게 하여드리는 일이 무엇인지를 가려내십시오. 바울로 선생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