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풀어주어 가게 하여라

37:1-14; 130; 8:6-11; 11:1-45

 

기독교는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지만, 교리적으로 보면 부활의 종교이다. 인간은 유한한 생명체로서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지만, 누구나 영원한 삶에 대한 욕망을 갖고 있다. 고대인들로부터 현대인에 이르기까지 같은 욕망을 갖고 있다. 진시황제는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노심초사하였고, 애굽의 왕들은 미이라를 통해 부활과 영생을 추구했다. 현대인들 또한 여전히 의학을 통해 가능하면 오래 살아가고자 애쓰고 있고 신앙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고 있다.

 

[부활의 비신화화]

 

그러나 이성과 과학의 영향 아래 현대인들은 부활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으며 신앙인들이라 하더라도 부활의 이해가 조금씩 다르다. 베스트셀러 <죽음이란 무엇인가?>의 저자이자 예일대에서 19년째 이 주제로 강의를 이끌어가고 있는 셀리 케이건교수는 오늘날 이런 현대인들의 사고를 대변하여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는 철학적 논지를 펴가고 있으며, 다만 그는 죽음을 맹목적인 두려움과 부정으로만 바라보던 것을 삶의 한 자연스런 과정으로 받아들이도록 설득하고 있다.

 

그런데 부활에 대해서는 20세기의 현대인들만이 부정적 태도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 시대에도 유대사회 안에 크게 두 부류의 지도자 그룹이 있었는데,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이다. 바리사이파는 종교적 가르침을 통해 백성들을 깨우치고 하느님 나라를 세우고자 하였던 반면 사두가이파는 현실적인 정치적 힘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바리사이파는 부활을 믿었던 반면 사두가이파는 부활을 부정하였다. 이 둘은 부활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이 달랐지만, 모두 로마의 식민지 지배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이 손상당하지 않는 한계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추구했던 사람들로서, 가난한 민중들이 역사의 주체로 나서는, 곧 밑에서부터 민()으로부터 시작하는 하느님 나라를 외치셨던 예수를 제거하는 일에서는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부활을 믿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를 개인적 사건으로 이해하듯이, 당시 바리사이파 사람들 또한 부활을 현재의 연속성 안에서의 개인적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저들은 예수에게 묻기를 한 여인이 형제 일곱이 있는 집에 시집을 갔는데, 큰 아들이 아이가 없이 죽자 당시 습관에 따라 둘째 아들과 결혼을 했는데, 또 아이를 낳지 못하고 죽었고 이런 식으로 일곱 형제와 다 결혼을 하였는데, 그렇다면 하늘나라에서 부활을 하면 누가 이 여인의 남편이 되는냐?는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어리석은 질문으로 들리지만, 당시 저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신앙의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하늘나라에서는 장가가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다고 하며 이 땅의 삶과는 차원이 전연 다른 삶이 있을 것이라는 답변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진행되는 부활과 영생의 삶에 있어서 개인적 특성은 없어지고 영적인 집단성만 남는 것이냐?는 질문을 하게 되는데, 이 또한 쉽게 답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닙니다. 다만 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씨앗과 나무에 비유하고 있고, 더 쉬운 예로는 달걀이 닭이 되는 변화 그리고 고치 속의 누에가 하늘을 나는 나비로의 변화를 통해 현재적 삶과 부활의 삶은 전연 다른 차원일 것만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4개의 본문 말씀이 모두 부활에 관련한 성서의 대표적인 말씀들인데, 이 말씀들 또한 바로 그러한 전연 새로운 이해를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부활이란 그냥 하늘나라에서 이루어지는 개인의 미래적 삶이 아닌 바로 여기에서 시작하는 현재의 변혁사건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이 말씀들이 각기 부활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 말씀들이 오늘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묻어 보고자 합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한 손에는 성서를 다른 한 손에는 신문을이라는 구호를 제창했던 20세기의 걸출한 신학자 칼 바르트가 말하기를, "오늘날의 사람들은 아주 많이 이른바 성숙하게 된 '세상'과 마주한 하느님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내가 더 깊은 관심을 갖는 것은, 하느님과 세상과 마주한 성숙해야 할 '인간'이다. 이 말은 하느님 앞에서 책임감을 가지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인간, 하느님을 향한 살아 있는 희망 속에서 살아 있는 인간, 이 세상에서 섬김의 삶을 살아가고, 자유롭게 고백하며, 끊임없이 기도하는 인간이다."(에베하르트 부쉬 저 830~831) 오늘 우리는 단지 성서가 말하고 있는 부활을 설명하고 이를 믿으십시오 라고 단순하게 선포하는 일에서는 그쳐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성서의 말씀을 성숙하게 된 세상 속에서 새롭게 증언할 해석의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

 

시편 130편의 기자는 자신을 깊은 구렁 속에 빠져 고통하는 한 영혼으로 말하면서 하느님께 구해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 마음을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보다 더 애타는 마음이라고 말하는데, 이를 두 번 반복함으로 그 애절함의 강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는 군생활을 철책선에서 밤에 보초를 서보았기에 저는 이 말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압니다. 혹한의 추운 겨울 그냥 서 있으면 너무 추워 계속 발을 동동 구르면서 빨리 새벽이 밝아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남북화해니 평화통일이니 하는 얘기는 너무 먼 얘기였고 그저 동쪽에 새벽빛이 빨리 떠오르기만 간절히 기다렸던 시절이 있습니다.

 

시편 저자가 말하듯이 지금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미래에 펼쳐질 영원한 부활보다 현재의 고통 가운데서 벗어나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질병의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 파산으로 인해 길거리로 내몰리고 있는 사람들, 부부 갈등 혹은 자녀 탈선으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은 내일이 아닌 오늘, 조금 있다가 아닌 지금, 지금 바로 주님께서 손을 펼치시어 자신을 고통에서 구해주시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이요 해방이요 부활입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이를 파수꾼의 기다림으로 말합니다. 파수꾼은 그가 애써 기다린다고 해서 새벽이 더 일찍 오거나 기다리지 않는다고 더 늦게 오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기다리든 기다리지 않든 시간이 흐르면 새벽은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며 파수꾼의 기다림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엄마가 뱃속의 태아가 세상에 나오기를 기다리는 기다림은 약속 장소에 나가 사람을 기다리는 기다림과는 전연 다른 것입니다. 엄마의 기다림은 아이의 탄생에 자신의 생명을 나눠주며 함께 만들어가는 창조의 기다림입니다. 파수꾼의 기다림 또한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새 역사의 변혁에 함께 동참하는 창조의 기다림입니다.

 

시편 기자는 오늘 우리들에게 각자가 겪는 고통의 현실 속에서 자기 혼자만 벗어나기만을 바라는 소극적인 신앙이 아니라, 껍질을 깨는 고통을 통해 알이 하늘을 나는 새로 부화하듯이 고통을 통한 새 역사의 탄생을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는 것과 같이 창조적으로 참여하자고 초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에제키엘 본문 말씀은 너무나도 유명한 말씀입니다. 나라가 멸망당하고 왕과 함께 적국의 수도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온 지 수십년 이제 자신과 함께 끌려왔던 1세대의 대부분은 죽어가고 있고, 2세대는 바빌론의 문화와 종교에 자발적인 포로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어디에도 이스라엘의 민족 재건의 희망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는 마치 일제 말기 대동아전쟁의 승리를 위해 발악을 하던 당시 조선의 독립을 거의 포기한 상황과 같았습니다.

 

독립의 의지를 갖고 국외로 빠져나간 백성들 외에 조선 땅에서 살아가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친일로 돌아섰습니다. 작가 이광수는 반민특위에 체포된 19492월에 쓴 고백서를 통해 이렇게 변명했습니다. “1941128일 대동아전쟁이 일어나자 나는 조선민족이 대위기에 있음을 느끼고, 일부 인사라도 일본에 협력하는 태도를 보여줌이 민족의 목전에 임박한 위기를 모면할 길이라 생각하고, 기왕 버린 몸이니 이 경우에 희생되기를 스스로 결심하였다.”

 

어떠한 희망도 없이 바빌론에서 포로로 살아가던 에제키엘에게 야훼 하느님은 이런 환상을 보여줍니다. 마른 뼈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습니다. 죽음의 현장이고 학살의 현장입니다. 마치 제주 43항쟁의 현장과 같습니다. ‘이 뼈들이 살아날 것 같으냐?’ 하느님이 묻습니다. 당연히 아니오! 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불손한 행위였기에, ‘주 야훼여 당신께서 아시옵니다.’라고 넌지시 답을 피해갑니다. 그러자 야훼 하느님은 이 뼈들이 서로 붙어 힘줄이 생기고 살이 붙고 그리고 거기에 하늘의 생기를 불어넣어 큰 무리가 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저들이 이 바빌론에서 해방을 받아 고국으로 돌아가 그동안 남과 북으로 나뉘어졌던 두 왕국이 하나가 되어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게 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 환상은 단연코 오늘 우리 한반도의 70년에 가까운 분단 상황에서 희망을 잃지 말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쪽으로는 대화를 다른 한쪽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군사가 동원되는 한미침략 전쟁연습, 그리고 이에 대항하는 미사일 발사와 노골적인 적대적인 언어들, 사실 그 어디에도 평화통일의 희망의 단초가 보이지 않습니다. 또 다시 전쟁위기입니다. 차라리 도박장에서 잭팟이 터지는 일이 통일대박보다는 가능성이 더 많아 보이는 형국입니다. 진정성이 없는 말, 그 저의가 분명히 보이는데도 자꾸만 말을 만들어내면 미움이 점점 더 커지듯이, 524조치 해제 등 남북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가장 근본적인 걸림돌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는 대화와 통일논의는 정말 말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봅니다.

 

아마추어들이 조립해내는 무인기보다 더 열악하다고 하는 무인기에 호들갑을 떠는 남한의 정치 언론들, 미국산 레이다 무기 수입을 위한 또 하나의 조작 사건은 아닌지? 대선관권 개입 부정선거와 간첩조작 사건으로 인한 대통령 사퇴와 국정원 해체라는 시민들의 외침을 잠재우기 위한 정치적 술책은 아닌지? 전시작전통제권을 미군사령관에게 계속 맡김으로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식민지 잔재에 억매인 소수 군장성들의 술책은 아닌지, 아니면 지방선거를 앞둔 또 하나의 북풍조작은 아닌지 의심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핵무기를 만들고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고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컴퓨터 기술로 핸드폰과 노트북을 만들어내고 미국본토에까지 도달하는 장거리미사일을 개발한 북조선의 무인기 기술이 과연 그 정도인지, 구글이 모든 세계인들에게 제공하는 화면보다 더 열악한 사진을 얻어내기 위해 그런 무인기를 띠울 만큼 북조선은 그렇게 어리석은 나라인지, 연료가 떨어져 북쪽 가까운 바다에 추락했다면 이해할만 하지만 백령도에 떨어졌다니, 그것도 높은 공중에서 추락한 비행물체가 부서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예수의 기적보다 더 놀라운 기적으로 보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으로 천안함 사건과 마찬가지로 합리적 의심은 자꾸만 커갑니다. 조선일보는 이때야 말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때라고 여겨 그 무인기에서 나온 청와대 사진이라고 일면에 대서특필하더니 그게 3년 전 사진임이 밝혀지고 말았습니다. 여전히 60년대의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낡은 방식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우리 백성들이 우매함에 빠져 있기 때문이고 빨갱이 공포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역사 인식과 냉철한 현실 분석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오늘 우리는 에제키엘에게 보여주었던 마른 뼈 환상을 통해 남북화해와 평화통일에 대한 희망만은 버리지 말아야 하겠다는 강한 신앙을 다짐합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전쟁은 안 된다. 이제부터의 전쟁은 64년 전에 일어났던 몇 백만이 죽는 전쟁이 아니라 천만 이천만 그 이상의 죽음까지도 가능한 한반도의 완전한 초토화를 의미하기에 절대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는 전쟁 결사 반대 그리고 평화실현에 대한 강한 실천 의지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승공 멸공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는 현실을 인정하고 공존과 공생만이 민족의 살 길임을 남북 백성모두가 천명을 하고 남북 갈등을 부추기며 이득을 챙기는 외세는 철저하게 배격하는 자주의 길을 찾아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25백년전 바빌론 그발강가에서 에제키엘 선지자에게 보여준 마른뼈 부활 환상을 통한 야훼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습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음이 오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옵니다.’라는 사도바울의 로마서의 본문 말씀 또한 이 연장선상에서 읽어보면 확연히 그 뜻이 드러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육체적인과 영적인 것을 물질과 정신, 육신과 영혼이라는 이분법적 이해와 동일시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음이 오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옵니다.’라는 말을 잘못 읽으면 세상 안에서 육신을 위해 돈을 버는 일은 죽음이요, 교회 안에서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일만이 생명과 평화라는 해석이 되는데 이는 매우 위험하고 잘못된 해석입니다. 여기서 육체적이란 물질 그 자체가 아니라 물질이든 정신이든 자신만의 욕망 충족을 위해 그것도 매우 일시적인 쾌락을 위해 사용할 때, 그것이 죽음을 가져오는 육체적인 것이 되는 것입니다. 물질, 육신 그것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는 하느님의 뜻을 위해 사용되도록 주어져 있는 하느님의 선한 도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계속하여 말합니다. ‘비록 여러분의 몸은 죄 때문에 죽었을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여러분은 이미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기 때문에 여러분의 영은 살아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영, 곧 부활의 영입니다. 하느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 그는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의로운 사람으로 일컬음을 받은 사람이요 동시에 새롭게 태어난 부활의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바로 자신만의 세속적 명예와 성공만을 향해 살아왔던 자신을 회개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기간입니다. 그간 열심히 걸어왔던 그 길, 많은 사람들이 걸어가는 그 넓은 길이란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잃어버리고 내가 이 세상에 어떤 부름을 받아 살아가고 있는지를 잊어버리고 세상 사람들의 박수와 환호소리에 파묻히는 그 길이 바로 죽음의 길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바로 거듭남의 길인 것입니다. 그냥 깨닫자고 하면 제대로 깨닫지를 못하니까 40일만이라도 한번 광야에로 나가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일상을 잠시 벗어나 외부에서 자신을 바라보니까 뭔가 문제가 보이는 것입니다. 자신의 죽음이 눈앞에 다가와 있다는 것도 보이고, 내 죽은 다음 사람들이 나를 향해 뭐라고 하는지도 들리고 허망하다고 하는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란 뭐 그리 특별한 신비적 삶이 아닙니다. 사랑에 빠지면 사랑하는 사람이 기뻐하는 일만을 생각하듯이 하느님을 사랑함으로 하느님이 기뻐하는 일만을 생각하고 실천하면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에 사로잡힌 부활의 삶이 된다는 것이 바울의 주장입니다.

 

어려운 일 같지만, 내가 오늘 밤이라도 죽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철저하게 인식하면 전연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걸어간다는 말은 바로 이러한 깨달음을 얻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것은 단지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을 넘어서서 우리가 짊어지고 가는 십자가의 길이 비록 지금은 고난이라 할지라도 그 고난이 끝이 아님을 믿는 것입니다.

 

[풀어주어 가게 하라]

 

이 진리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말씀이 바로 요한복음의 라자로의 부활 이야기입니다. 사실 나자로는 지금 다시 죽어 없으니 부활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소생 혹은 재생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11장 전체에 걸쳐 아주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는 라자로 얘기는 어쩌면 라자로의 얘기라기보다는 이야기의 부피나 그 신앙고백으로 보면 그의 여동생 마리아의 얘기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 라자로의 소생 이야기는 크게 보아 공관복음서가 예수께서 행한 기적이 마치 달인 것처럼 말하는 사건을 이는 달이 아닌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고 말하는 요한복음의 7개의 이적 중 마지막에 해당하는 것으로 예수 부활의 전조(前兆)가 되는 이야기인 것은 분명합니다. 좀 더 세부적으로 분석한다면 여기에는 크게 세 가지의 신학적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첫째는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예수를 따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유대 회당 곧 유대주류 사회로부터 추방당한 요한공동체를 향해 추방의 위협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하느님의 아들로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부활의 주임을 전파하라는 말씀이고 둘째는 마리아의 신앙고백을 통해 마리야야 말로 요한공동체의 실질적인 지도자임을 암시하고 있고 마지막으로 라자로의 소생 사건은 단지 한 개인의 신비적 사건이 아니라 이로 인해 예수와 유대지도자들과의 갈등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 이어지는 11장 마지막 부문에서 백성들 사이에 예수의 소문이 점점 높아감으로 인해 가야바 대사제는 예수가 죽어야 하는 정당성을 말하고 만약 예수가 죽지 않으면 곧 우리가 예수를 죽이지 않으면, 로마가 군대를 끌고 와서 성전을 더럽히고 자신들을 짓밟을 것을 예고함으로써 라자로의 소생 사건은 하나의 개인적이고 신비적인 종교적 사건이 아니라 민족의 운명을 결정짓는 정치적 사건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마지막 말씀이자 오늘의 하늘뜻펴기의 제목인 예수의 선언 그를 풀어주어 가게 하라는 말씀에서 가 단지 라자로 한 개인을 두고 하는 말인지 아니면 로마의 식민지 지배 아래 신음하는 유대 민족 전체를 두고 하는 말인지는 여러분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이 둘 중 제가 어느 쪽에 서 있는지는 저의 하늘뜻펴기를 오늘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능히 판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예수께서 자주 하셨던 말씀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라는 말씀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만 제가 오늘의 하늘뜻펴기를 마치면서 결론으로 할 수 있는 얘기는 그를 풀어주어 가게 하라!’에서 가 개인이라면 나는 지금 무엇에 억매여 있고 그리고 여기서 풀려난다는 것은 어떤 삶인지를 물어보아야 할 것이고, 만약 가 민족공동체 전체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렇다면 오늘의 남북의 적대적 대립과 외세의 간섭이라는 이 정치 현실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풀림이라는 자유와 해방의 길인지를 판단하고 결단해야 할 것입니다.

그를 풀어주어 가게 하라! 침묵 가운데 이 말씀을 묵상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