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6

역사적 예수와 십자가 처형

50:4-9; 31:9-16; 필립 2:5-11; 27:11-54

 

오늘은 사순절 여섯 번째 주일로 예수 생애 마지막 주일을 기념하는 주간으로 흔히 고난주간이라고 불립니다. 오늘은 또한 종려주일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입성하실 때에 백성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환호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은 그러한 종려주일 본문이 아닌 십자가 처형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실 그간 저는 새끼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실 때에 백성들의 환호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대로 구원자로서의 메시아 예수를 향한 환호가 아니라, 동시에 예루살렘 성 반대편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로마군대의 입성 행렬을 비웃는 일종의 정치적 패러디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 몇 년동안 종려주일 패러디를 재현하는 행위를 하여왔었는데, 불행히도 이는 내년으로 미루어야 하겠습니다.

 

[종려의 환호와 십자가 고통의 교차]

 

그런데 우리가 그간 종려주일을 지켜오면서 사실 잘못을 범한 것이 있는데, 그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외치는 백성들의 환호 소리에 정신이 팔려 정작 들어야 할 십자가 죽음을 향한 예수의 비장한 결단 그리고 이어지는 십자가 위에서의 고통의 소리를 듣는 일에 소홀히 하여 왔는데, 오늘은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하는 절규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4개의 복음서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 따라 예수의 마지막 외침을 달리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십자가상의 칠언이라고 부릅니다만, 이 또한 일곱이라는 숫자에 맞춘 일종의 교리적이고 신학적인 작업의 결과이지, 꼭 일곱 마디의 말씀만 하신 것은 아닙니다.

 

오늘 마태복음 본문 말씀에도 보면,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외에 예수께서 다시 한 번 큰 소리를 지르시고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큰소리가 외마디의 비명이었는지 어떤 의미가 담긴 말씀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그 큰 소리에 이어 성전 깊숙이 간직되어 있는 야훼 하느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가 보관되어 있는 지성소의 휘장이 쭈- - 갈라지고 땅이 흔들리고 바위가 갈라지고 무덤이 열리면서 잠들었던 많은 성인들이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예수 부활 이전에 이미 성인들의 부활이 있었다고 하는 신학적인 논쟁을 유발하는 그러면서 동시에 현대인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우주적이고 신비적이고 사건이 일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서의 십자가 사건의 기록을 사실적인 묘사라기보다는 신학적인 해석이 가미된 말씀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의 일생을 그린 수많은 영화들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몇 년 전에 방영된 Passion of Christ는 영화는 영화의 대부분을 예수가 채찍에 맞을 때의 살점이 떨어지는 모습이나 손과 발에 못이 박힐 때의 그 소리와 흘리는 피를 매우 실제적으로 묘사함으로 인해 논란이 되기도 했고 남한뿐만이 아니라 미국의 보수적인 교단들은 이를 이단적인 영화로 거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의 십자가 고통을 잘 그려낸 영화가 이단으로 정죄받아야 했을까요? 그건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그런 고통을 쉽게 이겨내는 영웅으로 간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니케아신조나 사도신조를 비롯한 여러 교리서에서 예수는 참 하느님이자 동시에 참 인간이었다는 상반되는 모순성을 절대적 진리로 계속 강조하여 왔습니다. 사실 이 교리에 따른다면 그 영화는 전연 잘못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인들은 예수가 받아야 했던 고통의 소리를 애써 무시함으로 예수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제자로서의 신앙이 아닌,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신자로 머물고 만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십자가의 고통은 부활의 영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하나의 부수 요소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근본 잘못이 놓여 있습니다. 그러기에 너희들은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요, 나를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따라야 한다는 예수의 핵심 말씀들은 모두 뒤로 밀려나고 만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따라 삶에 책임을 지는 제자와 사도로서의 살아있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이 묘사해내는 고통의 소리에 대해 이것이 힘들다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과 귀를 활짝 열어 들어야 할 것입니다.

 

[삶이란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우는 일]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시편 기자가 그려내는 고통의 탄식, 이보다 더 인간의 고통을 잘 그려낼 수 있을까요? “야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괴롭습니다. 울다 지쳐 눈은 몽롱하고 목이 타며 애간장이 끊어집니다. 괴로워서 숨이 넘어갈 것 같으며 한숨으로 세월을 보냅니다. 더 견딜 수 없이 기운은 다하였고 뼈 마디마디가 녹아납니다.” 우리는 지난주 함께 신앙생활을 하시다 한동안 소식이 뜸하였던 한 교우님의 죽음의 소식에 모두가 놀랐습니다. 아내의 입을 통해 그가 겪었던 고통의 무게가 얼마나 컸는지를 들었습니다. 인간은 한없이 강한 것 같아도 한번 무너지면 겉잡을 수 없이 나약해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간혹 병원 심방을 할 때, 지난 주에도 현대의학으로 완치가 안 되는 질병을 겪고 계시는 교우들로부터 고통의 소리를 듣습니다. ‘목사님 너무 힘들어요. 차라리 하느님께서 빨리 데려갔으면 좋겠어요.’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첫 시집을 낸 이후 15권 이상의 시집을 낸 신현림 시인은 <나의 싸움>이란 시에서 삶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삶이란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우는 일이다.

 

망가지지 않기 위해 일을 한다.

지상에서 남은 나날들을 사랑하기 위해

외로움이 지나쳐

괴로움이 되는 모든 것

마음을 폐가로 만드는 모든 것과 싸운다.

 

슬픔이 지나쳐 독약이 되는 모든 것

가슴을 까맣게 태우는 모든 것

실패와 실패 끝의 치욕과

습자지만큼 나약한 마음과

저승냄새 가득한 우울과 쓸쓸함

줄 위를 걷는 듯한 불안과

 

지겨운 고통은 어서 꺼지라구! (<나의 싸움> 신현림)

 

외로움, 괴로움, 슬픔, 독약, 실패, 치욕 저승, 우울, 쓸쓸함, 불안. 짧은 시구 안에 온갖 어둠의 언어를 잔뜩 집어넣어 독자의 마음을 캄캄한 구석으로 몰아가더니 마지막 시구에서 지겨운 고통은 어서 꺼지라구!’ 하는 호통으로 끝나는게 매우 인상적입니다. 마치 터널을 지날 때에 터널이 생각보다 너무 길어 이제나 저제나 하는 끝냄의 기대를 포기하는 순간 터널이 끝나 밝은 햇빛으로 갑자기 나와 눈이 부실 때의 기분입니다. 이 시인은 오늘 시편 기자가 마지막 결어 부분에서 야훼여, 나는 당신만을 믿사옵니다. 나는 당신의 종이오니 웃는 얼굴을 보여줄 것이라고 확신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겪고 있는 현실의 고통과 고민을 깊게 드러내면서도 이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철학자 키엘케고르는 시인이란 격렬한 고통을 가슴 속에 품고 있다 탄식과 비명이 입술을 빠져나올 때 아름다운 음악으로 들리는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이 두 편의 시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키엘케고르는 시인을 왜 삶의 탄식을 아름다운 음악으로 바꾸는 행복한사람이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불행한사람이라고 말한 것일까요? 하나하나의 시적 작업은 그에게 창작의 열매라는 놀라운 행복감을 가져다주지만, 결국 그 행복감도 잠시 그는 자신만이 갖고 있는 고통에 대한 깊은 감수성으로 인해 또 다시 그 깊고 깊은 고통의 자리에로 내려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의 숙명이라고 해야 할까요?

 

[예언자의 내면적 갈등]

 

오늘 우리에게 들려지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 또한 불의한 권력자를 향한 강한 질타가 담긴 예언의 말씀이라기보다는 한 편의 시와 같이 예언자 자신의 내면의 갈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종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바른 말을 한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박해와 고난을 당하고 있는데, 그 어디에서도 구원의 희망은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며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턱을 내민다. 나는 욕설과 침뱉음을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는다.” 폭력 앞에 완전히 무력한 자로 서 있는 모습입니다. 때리면 때리는 대로 침을 뱉으면 침을 뱉는 대로 모든 고통을 신음소리 죽여 가며 받는 모습입니다. 오늘 예수께서 빌라도 로마 총독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침묵으로 일관하는 모습과 일치합니다.

 

이사야서에는 이런 고난당하는 종의 시가 4편이 있는데, 오늘은 그중 세 번째의 시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신학자들은 이 고난당하는 종이 한 개인 곧 이사야를 두고 한 말인지 아니면 바빌론 포로생활을 겪고 있는 유대민족 전체를 두고 한 말인지에 대해 논의가 분분합니다. 물론 굳이 이게 꼭 어느 하나로 판명되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건 신학자의 몫이고 시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시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 줄타기의 곡예가 계속되는 긴장감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벌거벗은 상태로 폭력 앞에 무력하게 서 있는 이 시인이 개인을 가리키어, 그래서 어떤 한 사람이 이유를 알 수 없는 극심한 고통을 겪는다 하더라도, 혹은 민족 전체를 가리키어, 어떤 한 민족이 이유를 알 수 없는 극심한 고난의 세월을 겪는다 하더라도 결국 역사의 종말은 의와 공평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시는 야훼 하느님에게 있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다는 신앙 확신입니다.

 

이 신앙 확신이 예배라는 형식 안에서는 하나의 신앙고백으로 찬양이 되기도 하고 신조로 고백의 기도문이 되기도 하는데, 필립비 본문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너무나도 유명한 말씀입니다. 1세기의 교회가 로마 황제종교의 박해 가운데서 고백했던 십자가 신앙고백문입니다. 우리도 매년 첫주일에 십자가 신앙고백문을 읽고 저기에 자기 십자가를 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읽는 고백문이나 2천년전 필립비 교회 교인들이 읽었던 고백문은 본질상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 밖의 현실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필립비교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할 때, 그들은 큰 소리로 이를 외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자신들의 삶의 주변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고, 본인 자신들도 예수를 따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언제 어느 순간에 로마 정보원들에게 끌려가 십자가 처형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같은 말이라도 누구의 입에서 그가 어떤 상황에 있었는가에 따라서 정반대로 해석이 되듯이, 같은 신앙고백문이라도 십자가 처형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 하에서의 고백과 오늘날 21세기의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남한 땅에서의 고백은 전연 그 해석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필리비 신앙고백문은 자신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높이는 일은 예수가 십자가 죽음 앞에서도 이를 하느님의 뜻으로 알고 순종하신 그 비움의 신앙에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십자가 앞에서 하느님을 배반하지 말고 죽음으로 순종하자고 하는 비장한 각오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런 비장함이 지금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물론 지금 사순절새벽시국기도회에 참여하고 을지로 2가 사거리에 나가 서울 시민들 앞에서 관권개입 부정선거와 국정원의 간첩조작을 지지적하고 이명박구속과 박근혜퇴진을 외칠 때에 근처에 있는 정보원들이 언제 체포조로 변할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은 조금 있지만, 그러나 필리비교인들, 혹은 60년대와 70년대 박정희군사독재 시절 하에서 종교적 자유를 추구했던 선배들이 가져야 했던 그런 절박한 공포감은 없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있어 십자가는 치욕과 죽음의 상징이 아니라 거룩함과 승리의 상징이 되고 말았는데, 이것이 신앙의 본질인지 아니면 변질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지금 어느 누구도 십자가가 무섭다고 고개를 돌리지 않는데 그게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확신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십자가 처형과 로마제국]

 

분명한 것은 우리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의 대상으로 삼는 순간 그가 이 땅에서 겪었던 십자가 고통은 하나의 상징으로 사라지고 그 의미만 남습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지금은 그 의미도 퇴색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십자가는 죽음과 고통의 상징이 아닌 승리와 부활의 상징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도 작은 십자가를 즐겨 모으는데, 만약 이것이 정말 죽음과 고통의 상징이라면 제가 모을 수가 없겠지요. 저 또한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 신앙을 돌아봅니다. 제가 오늘 하늘뜻펴기에 <역사적 예수와 십자가 처형>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예수의 역사성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고, 예수가 한 인간으로서 겪어야 했던 삶의 고민과 번민, 고통과 아픔이 실제였음을 그리고 십자가는 종교적 상징물이 아니라 로마 제국이 그의 통치를 거부하는 정치범들을 처형하는 방법이었고, 그것도 그냥 죽이기 위한 사형법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로마에 저항하면 이렇게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 주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사형을 시킬 때에 극히 소수의 증인들만이 참관하는데서 진행하지만, 당시에는 모든 주민들이 쉽게 바라다 볼 수 있는 높은 언덕 위에, 그리고 사람을 죽이더라도 어떻게 하면 최대한 긴 시간동안, 최대한 큰 고통 속에서 죽일 수 있을 가를 고민하여 고안해낸 사형법이 십자가형이었던 것입니다. 그래 일반적인 경우 십자가 위에 죽어가는 사형수들은 보통 사흘간에 걸쳐 천천히 죽어갔습니다. 낮에는 작렬하는 광야의 태양 아래 밤에는 차가운 광야의 바람 앞에서 천천히 흐르는 피가 온 몸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딱지로 변해가며 죽어갔던 것이고, 그의 눈은 까마귀가 와서 쪼아 먹고 그의 발과 다리의 살들은 들개들이 와서 뜯어 먹었던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사형수의 외마디 고통소리는 하루 온종일 특히나 고요한 밤중의 들려오는 신음소리는 온 마을사람들의 심장에 공포의 작은 비수를 수만 개의 바늘마냥 수없이 꽂아놓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해 예수는 다른 사람과 달리 불과 반 나절만에 죽어야만 했습니다. 예수가 영웅시되었다면 한 달쯤은 버텨줘야 했는데, 부활의 몸을 생각할 때, 그의 몸이 어디라도 손상을 입는 상황을 만들어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오늘 십자가 처형의 고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우리의 십자가 인식이 예수 이후 적어도 성서가 기록된 그 때와는 너무 다르게 변질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은 우연히 혹은 인류구원이라는 거대한 목표를 향해 자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이는 역사적으로 분명히 로마제국과 이에 식민지 첨병 역할을 하는 헤롯왕가 그리고 이에 빌붙어 살아가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그리고 사제와 율법학자들이라는 권력집단을 비판하고 이에 적극 저항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래 성서가 말하는 하느님의 말씀은 엑소더스라는 노예로부터의 정치적 해방과 율법이라는 약자 보호에 그 본래의 뜻이 있었는데, 예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이를 아주 잘게 쪼갠 613개의 아주 작은 규정들로 만들어 버렸는데, 결국 이는 달은 쳐다보지 않고 손가락만 쳐다보도록 만드는 신앙의 변질을 가져왔던 것이고 예수는 이를 비난했던 것입니다. 고난주간 첫날 곧 2천년 전 오늘 행한 예루살렘 성전 숙청은 바로 이런 변질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자 도전이었던 것입니다.

 

[빌라도에 대한 복음서의 평가와 역사적 평가의 차이]

 

4개의 복음서는 모두 예수 죽음의 원인을 유대종교지도자들에게 향하도록 하고 있고 빌라도 총독은 죄가 없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마치 복음서의 기록만 읽으면 빌라도 총독은 매우 선한 사람으로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인물로 보이는데, 역사적으로 보면 그는 복음서의 묘사와는 달리 매우 악랄한 통치자였습니다. 그러면 왜 이러한 반동이 일어났는가? 복음서가 기록되던 당시는 예루살렘 성이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초토화가 되고 모든 유대인들은 반로마 민족으로 찍혀 팔레스타인 밖으로 추방을 당하던 시기였습니다. 한때는 테러의 협력자로 찍혀 로마시로부터도 추방을 당해야만 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사람은 십자가형을 당했습니다. 누가 보아도 예수는 반로마적이었습니다. 여기에 복음서 저자들의 고민이 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일이 로마에 적대적인 일이 아님을 보여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혈통으로 유대인들이었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로마의 박해는 필연적이었습니다. 여기서 복음서 저자들은 한결 같이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로마 제국과는 상관이 없는 유대종교지도자들에 의한 핍박의 결과였음을 말하면서 이를 증명하기 위해 로마 빌라도 총독은 오히려 예수에게 호의를 갖고 있었고 그를 살려주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고 하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역사적으로 증명이 되지 않는, 상식적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 명절이 되면 군중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명을 놓아주는 관례가 있었다는 문구까지 삽입을 하여 빌라도 총독은 예수를 풀어주고자 했고, 여기에는 그의 아내가 꿈을 꾸면서까지 적극 반대했다고 하는 전설적인 얘기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적 실제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사도들은 복음서에는 이렇게 기록을 해놓을 수밖에 없었지만, 실제는 그 반대였기에 초기 사도들의 신앙고백이라고 알려진 사도신조에는 예수가 유대인들이 아닌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하는 곧 예수의 죽음은 로마제국에 의한 정치적 살해 행위였음을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필립비서의 낮아짐과 비임을 뜻하는 희랍어 케노시스적인 이 신앙고백문을 우리가 이러한 역사적 해석 없이 그냥 받아들이면 국가권력의 희생자였던 예수의 좁은 길을 향한 투쟁은 겸손과 비움이라는 넓은 길의 개인의 대속 신앙으로 건너 띄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느님의 어린 양으로 죄가 없으셨지만,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심으로 모든 인류가 구원을 받았다는 대속의 교리는 교회가 하나의 종교조직체로서 살아가기 위해 분명 필요한 가르침이지만, 자기 십자가를 지는 책임 있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무조건적인 대속(代贖) 이전에 단독의 실존자로 하느님 앞에 서는 자속(自贖)의 과정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대속신앙과 자속신앙]

 

함석헌은 <흰 손>이란 시에서 바로 이러한 우리의 자속없는 대속신앙을 매우 강한 어조로 이렇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놈들아 갈보리에 흘렸던 피

그 피 네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 위해, 네 몸 위에, 네 혼 위에, 흘려

네 피된 산피 말이지.

네 만일 그 피 마셨다면야

왜 내 살 먹어라 내 피 마셔라 않더냐?’

그러면야 지금 그 피 네 속에 있을 것 아니냐?

네 살에, 뼈에, 혼에, 얼에 뱉을 것 아니냐?

피는 한 방울 아니 묻고, 표지만 든 흰 손

아니 흘려서 아니 묻었구나

네 피 흘릴 맘 한방울없어 그저 남더러

대신 흘려 달래 살고 싶더냐?

 

대속이라, 둘도 없는 네 인격에 대신을 뉘하느냐?

내게 진 빚 나 모르게 너 혼자 줄치면 그 장부들 내 안다더냐?

힘은 아니들이고 빌어 삶

생각은 아니하고 더라만 아는 빎

이름을 빌망정 삶을 어찌 빌 수 있느냐?

너 살고 싶으냐?

대들어라 부닥쳐라.

인격의 부딪침 있기 전에 대속이 무슨 대속이냐?

그의 죽음 네 죽음 되고, 그의 삶 네 삶이 되기 위해 부딪쳐라.

알몸으로 알몸에 대들어라!

벌거벗은 영으로 그 바위에 돌격을 해라!

네가 나를 믿거든 내 뜻을 온전히 이루라!

내 내 뜻을 의 안에 말해 세상에 보냈노라.

, 내 아들 믿거든 그가 되라

그가 죽었으면 너도 죽어라.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보냄의 말]

 

20대에는 너무 이른 것 아니냐는 생각에 주저했고, 30대에는 좀 더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에 주저했으며, 40대에는 돌아봐야 할 것들이 생겨서 주저했고, 50대에는 책임져야만 하는 것들로 인해 주저하다가, 60대에는 주저할 이유가 없어 주저했으며, 70대에는 추억을 회상하다가 주저하고, 80대에는 나를 찾는 이 없어 주저함을 나눌 수 없어 주저했다. 주저하다가 바람결처럼 스쳐가는 것이 인생이고, 주저하고 있는 걸 알면서도 왜 주저하고 있는지 이유를 찾기 위해 주저하는 것이 인생이며, 나의 주저함을 잊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주저함에 온갖 참견으로 세월을 보내는 것이 인생이다.

 

"아직 늦지 않았어요." 그렇기에, 이 한 마디는 구원이자 해방인 것이 분명하다. 주저한 시간들을 깨달았다면, 지금 시작해 볼 용기가 생겼다면, 더 이상 망설이지 말고 너의 삶을 살아라. 너만의 리듬과 너만의 보폭으로 걸어라. 스스로 걸어갈 수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길벗이 될 수 있다. 자신의 영혼을 불태워 빛을 밝힐 수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영혼에서 빛나는 그 빛을 알아볼 수 있으니. (자캐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