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이후

시편 16편; 사도 2,14, 22-32; 벧전 1,3-9; 요한 20,19-31


한  문 덕 목사



[인사말] 


(삶은 너무나 다양한 요소들이 있기 때문에 살다보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너무나도 많고, 그래서 삶은 늘 우연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가끔 그런 모든 우연들이 우연으로 여겨지지 않고 필연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특히 목사의 경우는 하늘뜻펴기를 준비했는데, 그 날 예배에서 드려지는 목회기도와 성가대의 찬양이 설교내용과 매우 유사할 때 하느님 체험을 하기도 합니다. 제가 설교할 때마다 기도하시는 장로님과 성가대 지휘자와 의논한 적이 없고, 오늘도 이태환 장로님과 조계연 집사님과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지만, 오늘 기도와 찬양을 들으면서 제가 설교를 통해 더 보탤 말이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래 원고에는 없지만 제게 6개월의 안식년을 주셨기에 그동안 제가 어떻게 지냈는지 말씀 드리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안식년을 시작한 작년 11월에는 조금 아팠습니다. 갑자기 쉬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감기가 잘 떨어지지 않고 한달 넘게 고생을 좀 했습니다. 그 뒤에는 그동안 해 오지 못했던 몇 가지를 했습니다. 첫째는 연로하신 저희 부모님의 농사를 돕고 부모님의 노후 생활을 위해 미리 몇 가지를 준비한 일, 둘째는 그동안 육아를 하느라 공부를 미처 하지 못했던 아내를 위해 육아와 살림을 해 보고 있는데, 아직은 너무나 미숙해서 아내로부터 “어디가서 육아와 살림을 한다는 말 하지 말라”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목사가 마냥 쉴 수는 없을 것 같아서 고향 교회 후배 청년 두 명과 주일 저녁에 만나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이라는 주제로 성서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또 향린교회를 떠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사회선교센터 길목 협동조합에서 하는 신학 강좌를 하나 맡아서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사임 이유로 신학박사학위를 해야겠다고 말씀 드렸었는데, 학위를 위한 과정 중에 하나인 외국어 시험을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제게 6개월이라는 쉼의 시간을 허락해 주신 것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참으로 부족한 제가 매우 소중한 향린교회의 훌륭한 교우들과 함께 목회하는 것이 제게는 조금 벅찬 일이어서 저 자신을 되돌아 볼 시간이 필요했는데, 아직도 부족하지만 6개월의 안식년을 통해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럼, 오늘 말씀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국가란 무엇인가?] 


옛날 공자가 수레를 타고 산동성의 명산인 태산 기슭을 지날 때 일이었습니다. 어떤 부인이 무덤 앞에서 너무나도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공자는 수제자였던 자로를 시켜 어떤 이유인지 물어보게 하였습니다. 자로가 부인에게 말했습니다. “부인의 울음 소리가 너무나 슬퍼서 괴로운 일을 연이어 당하신 것 같습니다.” 부인이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옛날에 시아버지가 호랑이에게 물려 돌아가셨고, 또한 남편도 그렇게 보내고, 이번에는 자식마저 또 죽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공자가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이 곳을 떠나지 않으시는지요?” 부인이 대답했습니다. “이 곳에는 가혹한 정치는 없으니까요.”(孔子過泰山側, 有婦人哭於墓者而哀. 夫子式而聽之, 使子路問之. 曰:“子之哭也, 壹似重有憂者.” 而曰: “然! 昔者吾舅死於虎, 吾夫又死焉. 今吾兒又死焉.” 夫子曰: “何爲不去也?” 曰: “無苛政.” 이하 생략『禮記』「檀弓」)


살다 보면 원하지 않는 불행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비바람에 애써 지은 한 여름 농사를 망치기도 하고, 작은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고, 건강하던 몸이 한 순간에 무너지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적은데 우리들이 가진 욕망이 증폭되면 먼저 차지하려고 하는 투쟁과 아귀다툼이 벌어집니다. 거짓과 속임수, 폭력과 무질서가 난무하게 되면 생존의 위협은 가중되고, 불안과 두려움, 온갖 스트레스 때문에 우리의 삶은 더욱 힘들어 집니다. 그래서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모든 종류의 위험에서 우리들을 보호하도록,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는 모든 다툼이 원만하게 그리고 정의롭게 해결되도록 하기 위해 인류는 국가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 속에서 모든 국가가 언제나 그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본래의 목적에 맞는 일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기득권의 입맛에 맞춰 불의를 행하기도 하는 것이 국가입니다. 그래서 국가가 본래의 목적에서 이탈하여 국민의 삶을 더 어렵게 만들고, 국민들의 터전인 생활공동체를 파괴한다면 국민은 언제든지 그러한 국가에 맞서 싸워야 하고, 그렇게 국가를 운영하는 정부에 저항해야만 이전 보다 나은 국가가 되는 것은 자명합니다.


과거 공자가 살았던 시절, 시아버지와 남편, 아들마저 잃는다 해도 가혹한 정치체제 밑에서 사는 것 보다 여기가 더 낫다는 이 여인의 말처럼, 그동안 우리는 박정희와 그 뒤로 계속 이어지는 군사독재 시절의 가혹함에 맞서 왔습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고, 그런 면에서 그 여인의 시절 보다 지금이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이만큼 살게 된 것, 이 정도의 민주주의를 이룩한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좀 더 나은 나라,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열정을 바치고, 헌신하고, 개인의 삶을 희생하고 고통의 눈물을 흘렸기 때문입니다. 기회가 많지 않아 해외를 많이 다녀보지 못했지만 해외 여행을 다닌 분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리고 세계 각처에 유학을 가 있는 선후배 얘기를 들어보면, 한국이 이제 다른 나라들에 비해 삶의 수준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저는 40대 초반에 불과하지만 저의 어린 시절과 지금의 삶을 비교해 보아도 분명 한국은 예전보다 여러 면에서 진보한 것은 사실입니다. 아직도 부족한 것이 너무 많지만 큰 틀에서 볼 때 이 나라는 발전해 왔고 또 앞으로 통일도 이루고 분명히 더 나은 나라로 갈 수 있다고 저는 희망을 놓지 않았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침몰]


그런데 지난 4월 17일 청해진 해운 소속 여객선의 침몰 사고가 벌어지고 열흘이 넘은 지금 저는 매우 참담한 심경이고, 이전에 제가 막연하게 가지고 있던 모든 낙관적 희망들을 더 이상 가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자꾸 미숙함을 드러내는 대통령, 자기만 살고 보겠다는 이기적 욕망의 절정, 여객선 운항과 점검, 승무원 교육 등 모든 면에서 드러나는 총체적 부실, 언론의 타락, 사고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이 정부의 무능함, 책임의 회피와 형식적인 관료주의, 계속 이어지는 거짓말 잔치. 이 모두가 저를 절망의 늪으로 계속 몰고 갔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제가 정말 공포스러울 만큼 괴로웠던 것은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예수의 말씀과 정반대로 흐르는 이 천박한 자본주의의 민낯이었습니다. 이번 사건은 돈을 선택할 것인가?, 생명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기로에서 늘 돈을 선택해 왔던 우리들의 일상이 저지른 사건입니다. 돈만 보고 살아왔던 그래서 남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았던, 한편으로 돈이 있어야 되고 돈이면 다 될 것이라고 착각했던, 더 나아가 진짜 중요한 것들! 책임감, 도덕성, 생명의 존중, 모두가 행복하기 위해 절실히 요청되는 소통의 능력, 일상의 훈련 등을 뒤로 한 채 그저 경제적 동물로 살았던 이 나라의 모습이 낱낱이 드러난 사건입니다. 

 

긴박한 순간 죽음의 공포에 떨며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우리 아이들 생각에 자꾸 눈물이 납니다. 아이의 주검을 확인하고 온 몸이 무너져 내리는 가족들을 보면 제 몸도 녹아 내리는 것 같습니다. 참으로 한심한 정부의 작태와 언론의 눈치 보기 보도 행태, 정치인들의 헛소리, 심지어 이런 상황을 이용한 카톡 스미싱을 보면 정말 화가 나서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슬픔과 분노 사이를 오가며 한 명이라도 제발 구조되기를, 열흘이 넘도록 기도하고 있지만 자꾸 무기력해지는 저 자신을 지금 보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설교를 준비했지만, 이 설교를 어떻게 해야 할지, 잘 하는 건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46명 젊은이의 목숨을 앗아간 천안함 사건이 아직 제 가슴과 머릿속에 생생한데, 이게 나라인가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부활 이야기의 진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는 모두 부활과 관련된 본문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를 다시 살리셨다”, “예수가 부활하셨다”라는 외침은 예수의 부활과 관련되어 우리에게 전해진 매우 초기의 것들입니다. 이후 빈 무덤 이야기나 오늘 요한복음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현현 이야기는 예수 부활의 확실성을 증거하기 위한, 또는 해석이 가미된 후기의 것입니다. 부활의 실체가 무엇인가는 영원히 신비로 남을 것이지만, 예수의 부활을 선포한 제자들의 삶의 변화를 통해서 볼 때 이 부활은 실재로 인정되기에 충분합니다. 그리고 이 부활 사건은 반드시 일어나야 했고, 필연적으로 요청되었습니다. 왜냐하면 30세 초반의 십자가 처형을 당한 예수의 죽음이 그것으로 끝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상황은 여러분들도 잘 아실 것입니다. 공자 시절보다도 더 가혹한 정치의 시절이었습니다. 갈릴리 농부들은 갈릴리 호수 곁 비옥한 토지를 갖고 있어서 무엇인가를 심기만 해도 농사가 잘 되었습니다. 농사를 지어보면 압니다. 제가 저희 집에서 지은 토마토와 상추를 한 두번 공동식사에 낸 적이 있는데, 300명이 충분히 먹을 만큼의 토마토와 상추가 그리 크지 않은 밭에서 생산된 것입니다. 하느님 주신 땅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거기에서는 정말 충분히 많은 결실은 냅니다. 그런데 그런 농부들이 땀흘려 일해 얻은 결실들을 매년 성전과 헤롯정권 그리고 로마에게 바쳐야 했는데, 그것이 소득의 40-50%였고, 심할 때는 7-80%도 빼앗겨야 했습니다. 노동의 결과를 대부분 착취당하고, 그래서 먹을 것조차 없어 이웃에 빚을 내는 일이 숱하게 벌어졌으며, 그 빚을 갚지 못해 결국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날품팔이, 일용직 노동자가 되는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착취만 아니었다면, 하느님이 주신 자연의 생명력으로 먹고 사는 것에 별 어려움을 겪지 않았을 텐데, 이중, 삼중의 지배체제는 당시 민중들의 모든 삶의 근원을 메마르게 하였습니다. 거기에다가 병이 걸린다든지, 자연재해나 불의의 사고로 인해 몸이 불편하게 된다든지 하면 그것이 마치 하느님께 죄를 지어 벌을 받은 것인 양 그렇게 매도되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살겠습니까? 시도 때도 없이 가해지는 로마의 무자비한 폭력, 유일한 희망인 하느님을 섬기는 마음, 종교심마저 참혹하게 짓밟히는 굴욕적 상황들이 계속 되었고, 이 때문에 계속 해서 독립을 향한 무장 투쟁을 일으켰고 또 그 때마다 처참하게 진압되었습니다. 그나마 기대고 싶었던 성전에는 로마에 빌붙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사제들이 득시글거렸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거룩한 체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실 칼을 들지 않았을 뿐이지, 강도짓을 하는 데는 로마와 별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이런 모든 상황에서 멀쩡한 젊은이들은 정신병에 걸리고, 잘 지내던 이웃과 순식간에 원수가 되고, 마을공동체는 해체되고, 어디 하나 기댈 곳 없는 민중들은 목자 잃은 양처럼 굶주림에 허덕이며 하루하루를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럴 때,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은 이런 이들에게 생수요, 길이요, 진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거라사 지방의 군대 귀신을 몰살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악의 근원인 지배세력을 추방합니다. 병자들은 치유되어 다시 자신의 삶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함께 나누는 밥상을 통해 풍성한 나눔을 체험하고, 평등한 인간의 존엄성이 회복됩니다. 이것을 경험한 이들이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 사도행전 말씀처럼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분이 유대 기득권자들의 모함과 저 거대한 악의 세력인 로마의 폭력에 무참히 쓰러진 것입니다. 모진 고통을 겪으며 십자가 처형을 당하고 맙니다. 이렇게 끝나면 되겠습니까? 모든 이들의 소망이었던 예수가 부활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가 부활해야 한단 말입니까? 예수께서는 주검으로 머물러 있을 수 없었습니다. 더 이상 죽음의 세력 앞에 죽임을 당해서도 안 됩니다. 모든 민중의 소망이 무덤 속에 묻혀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것이고, 하느님께서는 그를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그러니 또한 이 기쁨을, 이 즐거운 소식을 그 누가 전하지 않겠으며, 그 누가 선포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오늘 2000년이 지난 이 시점에  부활절 두 번째 주일을 맞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력으로는 기쁨을 누려야 할 부활절기인데, 저 진도 팽목항으로부터 생환의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처음에 스스로 배 밖으로 나와 구조된 사람들 말고 그 이후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아직까지 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소식은 들리지 않고, 죽음의 먹구름만 잔뜩 끼어 있습니다. 



[부활 보다 더 중요한 것]


그러나 분명한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부활을 체험하였든, 부활을 체험하지 못했든 간에 다시는 이런 식의 죽음이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또 다시 십자가에 달리면 안 되듯이, 부활이후에 예수를 두 번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선 안 되듯이, 이번 사고와 같은 일은 절대 벌어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번 청해진 해운 선박 사고가 1993년 페리호 사고와 판박이라는 점을 우리는 깊게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기상을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운행, 선장의 자질 부족, 승객안전에 대한 무책임, 당국의 관리감독 부실, 해난 구조체계에 구멍, 후진국에서나 있을 수 있는 실로 어처구니 없는 일” 지금 이 말은 1993년 페리호 사고에 대해 국가 기록원이 정리해 놓은 것이라고 뉴스에서 손석희 아나운서가 밝힌 내용입니다. 페리호 사건 발생 후 21년이 지났습니다. 지난 21년간 우리는 무엇을 한 것입니까? 


세월호가 평소 해오던 대로 2-3배 과적하지 않고 규정에 맞게 허가받은 적재량 987톤만 실었더라면, 화물을 실을 때 제대로 결박이라도 했었더라면, 청해진 해운이 6천만원 넘는 접대비를 년간 54만원에 불과한 승무원 교육비에 썼더라면, 급선회하여 배가 넘어질 때 기우는 반대편으로 닻을 내렸더라면, 단원고 학생이 제일 먼저 119로 전화를 해 신고했을 때 민관군이 모두 함께 구조에 나서게 했더라면, 선내에서 기다리라고만 방송하지 말고, 구명조끼를 입고 빨리 바깥으로 나가라고 했다면, 배가 뒤집히는 과정이 끝나고 바다 위에 떠 있을 그 시점에서 다이빙 벨을 투입했더라면, 2012년 1590억원을 주고 완성한 한국 최초의 구난함정 통영함을 사용할 수 있었더라면, 노무현 정부 때의 국가안전보장회의 내 위기관리센터의 역할을 이명박근혜 정권이 무력화시키지 않았더라면, 지금 보다 훨씬 더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어쩌면 이러한 비극 자체가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죽인 세력이 옳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선포는 예수의 죽음이 있어서는 안 될 죽음이었다는 것을 만방에 알리는 것입니다. 똑같이 지금 이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죽음의 행렬들이 계속 되면 안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속절없이 학생들의 목숨을 잃게 만든 이들에 대해 마땅히 심판을 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영국의 가디언지는 이번 사건을 놓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침몰 6일째인 오늘 이 나라의 수장인 박근혜 대통령은 마침내 입장 발표를 하며, 세월호의 승무원들 일부의 행동을 ‘살인과도 같은 행태’라고 비난했다. 박 대통령은 ‘책임 있는 사람들에 대해 민형사상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라고, 실종자 부모들이나 국민에게 직접적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 모인 관료들에게 말했다. 그런데 서방 세계에선 어쩌면 그 어느 나라의 수장이라도 이런 의심의 여지 없는 국가적 참사에 대해 이렇게 늦은 입장 발표를 한다면, 지지율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 직위 자체도 무사하기 힘들지 모른다.”

(Today, day six, the country's head of state, President Park Geun-hye, finally issued her own statement, in which she condemned the conduct of some of the ferry's crew as "akin to murder". Those found to blame would, she told assembled officials – but not, it seems, the parents directly or the South Korean public at large – have to take "criminal and civil" responsibility for their actions. It is perhaps doubtful whether, in the western world, any national leader would have survived such a delay in responding to what is undoubtedly a national tragedy, with their ratings, perhaps even their position, intact.)


박근혜 대통령은 선장과 승무원들, 또 다른 공무원들 탓을 하지만 국민의 생명을 구하지 못한 것에 대해 책임지지 못하는 대통령이 그 자리에 앉아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일말의 슬픔이나 감정의 동요 없이 이 사건을 대하고 있기에 외국 언론으로부터 “얼음공주”라는 비난에 직면하고서도 오바마가 왔다고 하늘색 옷을 입고 나갔어야 했습니까? 


이제 부활 이후 제자들이 예수의 죽음이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도마처럼 죽음의 흔적을 확인하고서야 부활을 믿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죽음의 사건이 벌어지고 그래서 부활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있어서는 안 되는 그 죽음이 아니 죽임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되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복되다”는 예수의 말씀이 저는 좀 다르게 들렸습니다. 사고가 난 것을 다 보고야 아느냐?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알았어야 하는 것 아니냐? 억울한 죽음이 생기기 전에, 악이 선을 굴복시키는 일이 생기기 전에 미리 준비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칠 수야 있겠지만 생명은 잃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닙니까? 


박근혜 대통령 당사자를 비롯하여 이번 사고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에 대해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구조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도 정확하게 밝혀야 합니다. 지난번 천안함 사건은 군사작전이라면서 제대로 밝히지도 못했지만 이번에는 반드시 밝혀서 고쳐야 합니다. 군사작전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일이 다시는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 또한 우리가 할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해외 언론에서는 선장이 사고 당시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윗 사람의 명령에 의존하는 유교적 질서 속에 있는 한국에서 사고 대처가 더 힘들었을 것이다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권위에 복종할 것을 가르쳐서 생명이 위험한 순간에도 생존에 대한 동물적 본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구명조끼를 입고 기다렸던 우리 아이들에 대해 어떤 어른이 자책감을 가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많은 국민들이 “세월호 침몰”을 보면서 “한국의 침몰”이라는 불안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한국의 복원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각 가정과 사회의 모든 세포 조직들의 복원력이 커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베드로전서의 말씀처럼 우리가 지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면서 슬퍼할 수밖에 없겠지만 이런 시간을 보내는 동안 우리가 단련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믿음이 단련되지 못한다면 또 다시 역사의 비극을 맞이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부활의 기쁨을 누리는 것보다는 십자가 죽음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 우선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만약 선장의 자리였다면, 승무원의 자리였다면, 해양경찰청장이었다면, 심지어 대통령이었다면 나는 어떠했을까를 물어야 합니다. 그렇게 거시적인 차원의 얘기를 하지 않더라도, 오늘 향린교회의 자리에서 나는 어떤 모습으로 지냈는지부터 살펴 봅시다. 교회의 기본 메뉴얼인 정관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교회의 대표 기관인 당회의 회의록이나 목운위 회의록, 제직회 회의록을 꼼꼼히 챙겨 읽어서 교회가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또 내가 참여할 부분은 무엇인지, 하느님 나라를 일구기 위해 이 공동체와 함께 무엇을 할 것인지, 게으르지 않게 평소 꾸준한 영적훈련을 해 왔는지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에 많은 일이 있지만 크고 중요한 일과 먼저 하고 나중 해야 할 일들을 바르게 구분하여 우왕좌왕 하지 않고 처리했는지, 오랜 시간에 걸쳐 차분히 하나씩 하나씩 짚어가며 해야 할 일을 너무 급하게 하려고 하지는 않았는지, 좀 시끄럽고 소통이 안 되고 좀 혼란스럽더라도 이런 과정을 통해서 배우고 깨닫고 성숙할 수 있다면 그런 과정을 기도하며 차분히 견뎌냈는지, 자신이 직접 몸소 해 보지도 않으면서 그 때 그 때 생각나는 것들을 가지고 너무 섣부른 주장을 한 것은 아닌지, 교회 전체 문제에 대한 파악이 되기도 전에 부서나 신도회의 목소리만 높인 것은 아닌지, 또는 교회 전체 일이라면서 신도회나 부서의 소중한 의견을 무시한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우리가 참여적 성찰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큰 일이 터지기 전에 미리 미리 준비해야 했던 것은 무엇인지 정말 고민하고 연습해야 하지 않을까요? 큰 교회들의 부패와 세습을 통한 지도력 교체를 비판하지만 작은 교회나 진보 교회들의 지도력 또한 무력하기 짝이 없습니다. 불의를 비판하기 위해서라도 정의를 지키는 용기, 사랑의 능력,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를 갖춰야 하는데 저 자신부터 한참 부족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거센 자본주의의 유혹에 넘어가고, 권력자들의 속임수에 걸려 들고, 그들의 폭력과 무자비함에 겁이 납니다. 희망을 보기보다 절망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근거 있는 희망]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죽음의 세력에서 부활 하신 예수를, 그리고 그가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당당하게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다는 사실을. 도망치듯 배를 빠져나온 선장도 있지만, “너희들 다 구하고 난 나중에 나갈께, 선원이 마지막이야”라고 말하고 4층에서 구명조끼를 구해 3층 학생들에게 건네며 가슴까지 물이 차 올라도 마지막까지 승객을 구조한 스물두살의 박지영 승무원도 있었다는 사실을. “걱정하지마. 너희부터 나가고 선생님 나갈께”라며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10명의 자신의 첫 제자들을 구출한 새내기 교사 최혜정 선생님이 계셨다는 사실을. “지금 아이들 구하러 가야해. 수협 통장에 돈 있으니까 아이 등록금으로 써. 지금 아이들 구하러 가야 해, 길게 통화 못해, 끊어” 하고 자신의 책임을 다했던 양대홍 세월호 사무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국정원과 검찰이 짜고 선량한 시민, 이 땅에서 정말 힘겹게 살아가는 탈북자 공무원을 간첩으로 조작한 사건에 맞서 싸워 무죄선고를 이끌어 낸 민주주의를 위한 변호사들이 있다는 사실을. 47억 손해배상하라는 법원 명령을 받은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을 위해 노란 봉투에 4만 7천원을 보낸 주부가 있었고, 한달 남짓 만에 9억 4천여만원이 모였다는 사실을. 늙은 할매 할배들이 무자비한 정권과 한전의 온갖 계략과 폭력에 맞서 10년 동안이나 송전탑 건설을 저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예언자 예레미야가 알지 못했던 하느님의 사람 7000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우리 주변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지만 수많은 하느님의 사람, 우리들의 동지가 있다는 사실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형상"이라는 것, 우리가 “사람"이라는 것을!  


“안녕하십니까? 잘 지내셨나요?”라는 인사를 서로 건넬 수 없어 오늘날 어떻게 인사해야 할 지 모르게 되어버린 이 불쌍한 한국 국민들에게,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 번이나 전하셨던 평화의 인사가 여러분에게 작은 위로가 되길 빕니다. 그러나 그런 참된 평화를 만들기 위해 예수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잘 되겠지~” 하는 막연한 희망은 스러질지 모르지만 근거 있는 희망, 그리고 희망을 향한 노력은 반드시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를 보내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우리들을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여러분에게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어떤 절망의 순간에도 희망을 놓지 맙시다.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근거 있는 희망을 가집시다. 

참된 희망은 마지막 날까지 우리들의 진실한 동반자가 될 것입니다. 


비에 젖어도 향기를 잃지 않는 꽃처럼 

주위가 어둡다고 불평하지 말고 한 자루의 촛불을 켭시다. 

당신이 먼저 촛불을 든다면 세상에는 변치 않는 마음과

굴하지 않는 정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