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죽음) 그러나 아직(부활)

2:14a, 36-41; 116:1-4; 12-19; 벧전 1:17-23; 24:13-35

 

요즘 목사님들을 만나면 설교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합니다. 부활주일을 4일 앞두고 일어난 세월호 참사로 인해 부활절 메시지를 전하기가 어려워진 것입니다. 20일이 지난 지금도 바다 속에 잠겨 있는 사람들이 수십 명이나 되는 상황에서, 그것도 어린 생명들이 대부분인 이런 참극 속에서 죽었던 예수가 부활했다는 신앙의 선언이 무력해진 것입니다.

 

저희는 이번 참사 사건에 직접 연관이 있는 가정이 없는 듯 합니다만, 안산지역의 교회 목사님들은 무슨 설교를 할 수 있을까요? 어떤 대형교회는 고등학생 40명이 희생당했다고 합니다. 모든 장례가 끝나야 위로도 가능하고 부활 희망의 메시지도 가능하겠지만, 지금도 주검이 발견되고 있으니 애도하는 말씀 외에 달리 전하기가 힘듭니다. 유가족분들의 슬픔에야 비길 수는 없겠지만, 5천만 백성 모두가 참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내일 5일은 어린이날이고, 8일은 어버이날에 15일에는 스승의 날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식을 잃은 부모님들, 제자를 잃은 선생님들, 부모를 잃은 자녀들, 선생님을 잃어버린 학생들이 있기에 이 날들을 즐겁게 보내기가 어렵습니다. 5월말 예정이던 교회수련회 또한 취소했습니다.

 

예배의 대상은 야훼 하느님이지만, 우리가 바라는 기도의 핵심은 이 땅에 임하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래서 예전이나 지금이나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도적같이 돌아오는 주인의 비유나 언제 부풀었는지 모르는 누룩의 비유등을 통해 답변을 주셨는데, 이를 신학적으로는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약간은 모호한 말로 말합니다. 이미 시작했지만, 아직 완성은 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결국 우리는 죽음과 부활 사이에 있는 간()존재인 것입니다. 이 유한과 무한이라는 틈바구니에는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슬픔이 가장 큰 아픔입니다.

 

남편을 잃은 아내를 과부라 하고 아내를 잃은 남편을 홀아비라 하고 부모를 잃은 자식을 고아라 하는데, 자식을 잃은 부모를 말해주는 단어는 없습니다. 그건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의 마음을 한 단어로는 표현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이를 잃은 어느 외국인 엄마가 쓴 시입니다.

 

[옳은 말]

 

제발 내가 그것을 극복했는지 묻지 말아 주세요.

난 그것을 영원히 극복하지 못할 테니까요.

지금 그가 있는 곳이 이곳보다 더 낫다고 말하지 말아 주세요.

그는 지금 내 곁에 없으니까요.

더 이상 그가 고통받지 않을 거라고는 말하지 말아 주세요.

그가 고통받았다고 난 생각한 적이 없으니까요.

내가 느끼는 것을 당신도 알고 있다고 말하지 말아 주세요.

당신 또한 아이를 잃었다면 모를까요.

내게 아픔에서 회복되기를 빈다고 말하지 말아 주세요.

잃은 슬픔은 병이 아니니까요.

내가 적어도 그와 함께 많은 해들을 보냈다고는 말하지 말아주세요.

당신은, 당신의 아이가 몇 살에 죽어야 한다는 건가요?

내게 다만 당신이 내 아이를 기억하고 있다고만 말해 주세요.

만일 당신이 그를 잊지 않았다면.

신은 인간에게 극복할 수 있는 만큼의 형벌만 내린다고는 말하지 말아 주세요.

다만 내게 가슴이 아프다고만 말해 주세요.

내가 내 아이에 대해 말할 수 있도록 단지 들어만 주세요.

그리고 내 아이를 잊지 말아 주세요.

제발 내가 마음껏 울도록

지금은 다만 나를 내버려둬 주세요.

-리타 모란-

 

누가복음 7장에는 외아들을 잃은 나인성 과부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 밖을 나서던 이 장례행렬과 예수 일행이 부딪힙니다. 전염병과 전쟁, 기근이 횡횡하던 시절에 이런 장례행렬은 하루에도 몇 차례씩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이 행렬을 세우고 죽었던 아들을 살려냅니다. 그건 홀로 남은 어머님의 애끓는 슬픔이 예수의 간장을 끊어놓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이후 얼마나 살았는지 이로 인해 이 엄마가 얼마나 기뻐했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이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구절을 어떻게 받아 들이냐는 것입니다. 보통은 우리는 이런 기적 사건을 대하면,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이니 무조건 믿어야지 생각합니다. 믿지 않으면 하느님께 큰 죄를 짓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런데 내가 만약 이를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면 그 순간 하늘에서 불이라도 떨어지는 것입니까? 도대체 이 성서의 기록을 믿는 사람과 부정하는 사람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세월호 참사로 자식을 잃은 부모님이 이 구절을 믿는다고 해서 죽었던 자식이 다시금 살아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를 믿는 믿음의 이점은 무엇입니까? 왜 복음서는 이런 기적 얘기를 수없이 전하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가 가진 기적의 힘을 증명하기 위해서?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수백 번 수천 번 고백을 해도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중병의 아픔을 완하 시키고 억울한 죽음에 대해 속시워한 답을 주지 못한다면 도대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신학자 마커스 보그는 지금 저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성서 이해 방식을 역사-은유적 성서 이해라고 말합니다. 2천년 전 기록을 아무런 전제 조건없이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잘못일뿐더러 오히려 기적 사건 자체를 무의미한 사건으로 만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2천 년 전 사람들에게는 사실이 담보된 역사였겠지만, 지금 우리들에게는 은유로 밖에는 해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말씀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복음서 저자들은 기적 사건 자체에 관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로 인한 예수와 주위 사람들의 인식의 변화에 관심을 두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살아난 아들이나 그 어머니의 기쁨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고 이로 인해 그 마을 사람들이 갖게 된 신앙의 변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장례 행렬을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고 했으니 그날 이 나인성은 큰 축제분위기에 싸였을 것입니다. 전쟁과 전염병으로 인한 죽음의 공포를 뚫고 모두가 힘을 내어 희망의 꽃을 노래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했을 것입니다. 저자는 한 개인의 기쁨보다는 공동체의 기쁨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죽은 자들을 위한 애도와 더불어 살아난 사람들이 이 애도를 이겨낼 수 있는 승리의 얘기도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그분들의 희생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자기 책임을 방기한 승무원들도 있었지만, 죽음으로 자기 책임을 다한 승무원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바닷물이 차는 선실에서 자신의 구명동의를 친구에게 양보하고 다른 친구들을 구하기 위해 선내에 뛰어들었다가 생을 마친 아름다운 정차웅 학생, 그 아버지는 장례비용이 국민이 낸 세금에서 나온다하여 수의와 관을 모두 값싼 것으로 사용했습니다. 이분들은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아들이자 아버지입니다. 남윤철 최혜정교사도 학생들을 비상구로 인도한 뒤 나머지 제자들을 탈출시키려고 끝까지 배안에 있다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승무원 박지영씨는 구명동의를 양보하고 같이 나가자는 학생의 얘기에 너희들 다 구하고 난 나중에 나갈게. 선원이 마지막이야.’라며 끝까지 자기 책임을 다했습니다. 알바생 김기웅씨와 승무원 현순씨는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로 승객들을 대피시킨 뒤 다시 선내로 들어가서 구조활동을 벌이다 목숨을 잃었습니다.

 

선원 양대홍사무장은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피신의 얘기는 없이 자신의 죽음을 예고했습니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서도 먼저 피하지 않고 커튼과 소방호스로 40명의 학생들을 끌어올린 김홍경씨를 비롯한 몇 분도 있었습니다. 구조되었지만 인솔자로서의 책임을 통감하고 시신을 찾지 못하는 녀석들과 함께 저승에서도 선생을 할까라는 유서를 남기고 떠나 강민규교감선생님도 계십니다. 동영상을 보면 세월호 난파선에 바짝 붙어서 생명들을 구했던 자그마한 어선들의 어부들은 죽음의 공포를 넘은 사랑과 자비를 보여주었습니다. 해경의 경비함은 세월호에서 떨어져서 그냥 서 있었지만, 어부들은 침몰하는 배에 바짝 붙어 한 생명이라도 더 건지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이분들이야 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들이요 이 나라의 희망입니다.

 

민간자원봉사 다이버들 그들은 사고 소식을 듣자말자 생업을 중지하고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지금도 팽덕항과 안산고에는 실종자의 가족들을 돕는 이름 없는 봉사자들이 수없이 많고 유족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기 위해 물에 젖은 시신을 미리 주물러 펴고 깨끗이 닦아내는 봉사자들도 있습니다. 전국각지에서 몰려드는 위로 물품들, 우리 교인들 가운데서도 현장을 다녀온 분들도 계시고 홍승권집사나 노경선집사님은 의사로서 유가족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지금도 분향소를 찾는 끝없는 행렬들. 극도로 개인주의화된 우리 사회에 한줄기 밝은 빛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이런 판국에 정부를 비판했다고 종북 논리를 펴는 국회의원이 있는가 하면 재벌가이자 여당 서울시장 후보로 나선 한 정치인의 아들은 국민이 미개하니까 국가가 미개하다고 트위터에 썼다가 시민들의 큰 분노를 불러일으키자 아버지가 나서서 부랴부랴 사과를 했습니다. 이런 망발들은 우리 국민 다수의 생각이 아니라 일부 정치인들 특히 청와대의 권력에 아부하는 특수층이 사람들 곧 미개인들의 발언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세월호의 참사는 단순히 한 여객선의 선장이나 그 한 배의 결함이 아니라, 남한 사회 전체가 안고 있는 불법과 부정에 따른 빙산의 일각이라는 것을. 이는 성장제일주의의 신화에 따라 황금을 숭배한 결과이고 돈이 되는 일이라면 규정이란 규정은 모두 완화한 결과인 것입니다. 대통령 후보 시절의 공약을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져버리는 것을 보면서 그 밑의 정부 각료들은 어떤 거짓말을 해서라도 순간의 위기만 피하면 된다는 무사안일 도피주의의 결과인 것입니다. 자신의 자리를 걸고 한 생명이라도 더 구하겠다고 달려든 행정기관장이 보이지 않습니다.

 

부서 장관이라는 사람은 배가 고프면 밖에 나가서 조용히 먹지 유족들이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는 슬픔의 자리에서 컵라면을 먹고 어느 국장은 죽음의 현황판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등 상식 이하의 행동들만 보입니다. 1년 전 국회에서 보고할 때는 청와대의 국가안전실이 국가적 재난의 컨트롤타워라고 모든 재난에 대처하는 준비가 다 되어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더니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자 아니라고 발뺌을 하였는데, 그 사람은 다름 아닌 과거 김정일위원장과 악수할 때 뻣뻣하게 고개를 쳐들어 군인다운 면을 보였다고 칭찬을 들었던 김장수 청와대안보실장입니다. 그러나 권력의 자리에 앉아 있다 보니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비열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사람들이 국가 권력의 핵심부에 앉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국가가 가장 기본적 임무인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지도 못하는 것을 보면서, 국민들은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에 분노하며 국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갖게 됐다." 이 말은 2004년 노무현대통령시절 이라크에서 알케이다에 납치되어 살해된 김선일씨의 죽음을 두고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한 말입니다. 저 멀리 중동에서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살해당한 한 생명에 대해 대통령의 책임을 엄중히 묻고 있는 그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일어난 300명의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 건가요? 유족들의 압력에 밀려 청와대 각료회의 석상에서 열흘 만에 한 사과가 오히려 더 큰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적어도 사과를 하려면 팽덕항 현장의 유가족 앞에 가서 고개를 숙이며 눈물 한 방울 정도는 흘리면서 해야 되는 것 아닌가요?

 

영국의 가디언지는 만약 이런 일이 서구에서 일어났다면 대통령은 그 자리에 앉아 있기가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것이 동양이기에 가능하다고 말하는데, 저는 이들이 동양문화를 이런 식으로 평가하는 방식에 대해 모멸감을 느끼면서도 권력의 잘못에 분노할 줄 모르는 이 백성들로 인해 대꾸할 말을 잃게 됩니다. 다른 날 기사에서는 정부가 달려들어 침몰 이후 한명도 구하지 못한 이번 선박 사고는 선례가 없는 하나의 기적이라고 야유하고 있습니다. 엊그제 그리스의 에개해에서 암초 추돌 사고가 있었음에도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두 구조되었음을 보았습니다.

 

지금 이 권력은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희생양을 만들어 내기 위해 공작을 하고 있고 얼마 있지 않아 지방선거를 앞두고 또 다시 간첩단 사건 등 북풍 사건들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현재의 위치에서 절대로 이동하지 마십시오."라는 정부의 말을 믿고 살아가다간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나라가 통째로 침몰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위기의 순간에 수명을 연장한 노후 지하철 추돌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세계 언론은 이 사건을 세월호 참사와 함께 보도하고 있습니다. 국가적 대망신입니다. 국가신뢰는 세우기는 오랜 시간이 걸려도 망가뜨리는 것은 일순간입니다.

 

[풀리지 않는 의문점들]

 

저 개인적으로는 이번 사건에서 몇 가지 풀리지 않는 의혹들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1. 애초 승객들의 증언에 의하면 배가 뭔가에 심하게 부딪혔다고 했습니다. 함께 앉아 커피를 마시던 부부 중 한 사람은 의자가 쓰러지면서 벽에 부딪힐 정도로 큰 충격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배 위에 실었던 컨테이너가 무너지면 위에서 아래로 힘이 가해지기에 소리는 클지언정 승객들이 옆으로 넘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초기에는 암초설이 나왔습니다. 지금 충돌 얘기는 쑥 들어갔습니다.

 

2. 인터넷을 쳐보면 KBS 2에서 당일 720분에 세월호 조난사고가 있었다고 특보를 트위터 계정을 통해 내보냈고, 주위의 어부들은 8시부터 그 배가 한 자리에 서 있었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사고 신고는 정부가 말하는 850분보다 훨씬 이전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난신고도 학생이 먼저 했다고 말합니다. 삼십 명 가까운 승무원들은 조난 신고도 할 줄 모르는 바보가 되었습니다.

 

3. 처음에는 늦게 출발하여 빨리 도착하기 위해 정상보다 속도를 높였고 그리고 빨리 꺾으려다 파도에 밀려 배가 넘어졌다고 말했습니다. 지금은 빨리 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급하게 꺾었기 때문에 넘어졌다고 보는데, 무엇 때문에 항해사는 급하게 꺾으려 했던 것일까요? 갑자기 앞에 무언가가 나타나서 충돌을 피하려했던 것은 아닐까요? 여성 항해사는 꺾을 때에 생각보다 더 많이 꺾였다는 마치 외부로부터 충돌이 있었기라도 한 것처럼 모호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4. 지금 원인을 알기 위한 제일 좋은 방법은 살아난 선원들을 기자들이 속시원히 인터뷰하도록 하면 좋은데, 이들이 언론에 노출하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아마 입을 다 맞추기 전까지는 인터뷰가 안 될 것입니다. 의심이 가는 대목은 선원들 8명을 가장 먼저 해경이 구조를 했고 그 시간부터 특별관리에 들어간 것입니다. 다른 승객들은 주위 어선들이 구조를 하도록 하고, 선원들만 가장 먼저 구출해야 할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그런데 그중 어떤 승무원은 탈출하려는 이 위기의 순간에 자기 방에 들어가 겉옷과 휴대폰을 가지고 왔다고 말합니다. 이게 한 사람인지 두 사람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지금 언론은 이 승무원들을 비난의 대상으로 사건의 책임자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분들도 기본 인격을 갖춘 사람이라면 죽은 승무원들과 마찬가지로 일말의 책임성은 갖고 있었다고 봅니다. 그중 누군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저 많은 승객들은 어떻게 하고 우리가 왜 먼저 나가야 하느냐?’ 그때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지금 이것은 해경으로부터의 명령이다. 우리보고 먼저 나오라고 했고, 승객들은 그들이 책임지고 모두 구출할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야 우왕좌왕하며 불안에 떠는 승객들 곁을 지나쳐서 겉옷과 휴대폰을 가지러 간 사람()의 여유가 해석이 됩니다. 아직 우리는 그들로부터 직접 얘기를 들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진실을 파악하기 전까지는 희생양을 만들어내기 위한 정부나 관제 언론에 부화뇌동하여 함부로 돌을 던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5. 동영상을 보면 선장은 속팬티 차림에 맨발로 해경 구조선에 올랐습니다. 이는 잠자다 급히 나온 모습입니다. 깨어 있었다면 분명 그는 바지를 입고 신발을 신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다가 급히 일어나 지갑만 들고 나왔다면 선장은 그때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몰랐다는 것이고 선실에 그냥 그대로 있으라는 선내 방송은 선장이 내린 명령이 아니고 어쩌면 선장보다 높은 권위를 가진 외부로부터 온 명령일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기자가 선장의 병실을 찾았을 때, 5만원과 두 장과 만 원권 몇 장을 말리고 있었다는 행동이 설명이 됩니다. 자기 책임으로 인해 수백 명이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는 절박한 상황에서 미친 사람이 아니라면 이런 행동을 할 수는 없습니다.

 

6. 사고 첫날 아침 11시경부터 한 시간이 넘게 주요 TV 방송이 모두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세월호의 정지된 한 화면만을 방영하면서 승객 전원이 구조되었다고 하는 기사를 큰 자막으로 계속 내보냈습니다. 저는 당일 여러 목사님들과 식당에 들어갈 때부터 나올 때까지 그 장면만을 계속 보았기에 확실히 기억합니다. 왜 구조되는 실제 장면은 보이지 않는지? 그래서 채널을 돌려보아도 같은 사진에 같은 기사만 나와 일말의 의구심이 들었지만, 모두가 구조되어 참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는 단순한 방송 오류가 아닌 국민들과 언론의 관심을 따돌리기 위한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강한 의심이 듭니다. 한 방송이 아니라 주요 방송국이 모두 똑같은 장면의 한 사진을 똑같은 허위 기사를 그토록 오랜 시간 내보낸 것은 외부로부터 조종이 아니고서는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때는 이미 두 시간 전인 오전 10시에 국가안전대책본부가 결성되었고 935분부터는 생존자들을 통해 침몰 소식이 널리 알려진 이후입니다. 이는 방송통제이지 방송오류가 아닙니다.

 

만약 선박사고였다면 방송사는 바로 방송 헬기를 띄우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러니까 이를 막기 위한 방식은 아니었는지 의심이 드는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방송사들은 전원구조라는 기사가 누구로부터 받았는지 TV 화면에 나온 사진을 어디에서 얻었는지 말을 하면 되는데, 말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말을 하면 안 되는, 말을 하면 다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권력의 핵심부에서 나온 통제가 아니고서는 해명이 되지 않습니다.

 

7. 해경이 1시간 50분가량의 동영상을 갖고 있음에도 극히 일부분만 공개했습니다. 늦게 공개를 한 이유가 선장을 보호하고 있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언론은 물론 청와대 수장까지 나서 선장을 살인자로 지목하여 비난하는데, 왜 해경은 굳이 선장을 보호하려 하는가? 그건 사고 원인이 선장의 잘못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아마 시간이 흐르면 공개가 될 테인데, 그때는 천안함마냥 수정작업을 거친 후일 것입니다. 또 해경은 세월호와 관제센터간의 교신 내용이 담긴 녹음파일에서 잡음을 없앴다고 발표했습니다. 녹음파일에 손을 댔다는 것은 내용을 조작했다는 말입니다.

 

결론으로 말하면 이 선박사고에는 뭔가 국가적 비밀이 숨어 있고, 이 사고의 직접 원인을 감추기 위해 선원들만을 먼저 구조해서 관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선박의 연령, 구조변형에 따른 결함, 초과적재, 평형수의 부족, 항해사의 미숙함, 나아가 해양수산부의 비리, 더 나아가 선주의 개인 비리와 그의 신앙문제에까지 비화하고 있습니다. 이는 국민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일입니다. 지금 사고 원인으로 말하는 초과적재는 이날만 있었던 일이 아닙니다. 이는 오랫동안 해온 관행이었습니다. 사고는 초과적재와 더불어 왜 항해사가 평소의 다니던 길 대신에 다른 길로 가야 했는지 선장은 잠을 자고 있는데, 경력 4개월의 초짜 3등 항해사가 지 마음대로 행로를 바꾼 것이 아니라면 누구의 명령인지? 그리고 그가 급히 키를 꺾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는지가 먼저 해명이 돼야 합니다. 천안함의 생존자들은 군인들이라 통제가 가능했겠지만, 살아난 학생들과 민간인들은 정부가 통제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사실을 감추려 하다가는 천파만파 전 국민의 저항에 부딪힐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은 슬퍼하면서 동시에 분노해야 할 때라고 믿습니다. 마틴 루터 킹목사는 진짜 비극은 악한 사람들의 폭행과 잔인함이 아니라 다수의 선한 사람들이 그런 악행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루가가 전하는 엠마오 도상의 예수 현현 이야기 그리고 이어지는 사도행전 2장의 이야기는 단지 초대교회의 시작을 알리는 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로마의 정치범으로 십자가에 살해당한 갈릴리의 예수가 부활하였음을 거리로 나가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찔림을 받아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고 그 결과로 하루에도 삼천 명이 세례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는 단순한 종교적 회심사건이나, 초대교회의 급성장을 언급하는 기사가 아닙니다. 이는 유대 사회에 엄청난 변혁이 밑바닥에서부터 일어나고 있음을 말하는 정치적 사건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예수 부활을 전했다고 해서 초대교인들은 국가기관에 끌려가 매를 맞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부활은 하늘 기운이 땅의 부정한 것들을 몰아내는 힘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뛰어넘어 진실을 전하는 일 그것이 부활을 믿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부활을 살아가는 참 신앙입니다.

 

이 부조리하고 거짓된 현실 속에서 여러분은 어떻게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고 계십니까?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시인하여 고백하는 것이 믿음의 전부가 아니라면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미 시작한 그러나 아직 도래하지 않는 하느님 나라를 어떻게 선포해야 할까요?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