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자의 길

시편 23:1-6, 예레 31:31-34, 마태 7:7-11

 

문 동 환 목사

 

 

여러 해 만이군요. 여러분 다시 뵙게 돼서 많이 울렁거립니다. 그동안 캄캄한 한국사회에서 빛이 되려고 삶의 소금이 되려고 앞장서신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신문을 통해서 늘 듣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이 영이 여러분과 같이 계시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이렇게 늙은 사람을 여기에 청해주는 것도 이 교회의 따듯한 심정 때문인 줄 압니다.

 

안병무 박사는 중학교때 저의 일 년 후배입니다. 안박사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은 제가 잘 압니다. 그는 탐구자입니다. 휴전선인 다시 펼쳐져서 우리 동포들을 남과 북으로 다시 갈라놓고 앞날에 의한 분노가 찰 때 안병무 박사는 젊은 동지들과 같이 탐구를 시작했습니다. 무엇이 도대체 우리를 이렇게 만드는 것인가? 어떻게 새 내일을 초래할 것인가? 성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을 찾았습니다. 목사가 되는 것이 그에게는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리를 찾는 것이 그의 목표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꾸준히 찾고 찾다가 전태일 분신자살을 계기로 민중의 역사의 주라는 것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민중신학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그 민중신학이 우리 교회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사실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리는데 있어서 이 민중신학의 역할이 굉장히 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를 무너뜨리고 봤더니 그 뒤에 더 흉측한 괴물이 있었어요. 그것이 산업문화입니다. 다다익선(多多益善)이 삶의 목표가 되고 이것을 위해서는 힘을 함부러 도용하고 종교까지도 이용하는 이 산업문화, 이것이 우리 앞에 맞닿았습니다.

온 세계는 산업문화에 휩싸여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물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우리는 다시 찾아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봤더니 우리가 읽는 성서란 탐구자의 기록이다. 그렇게 저는 보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의 탐구자의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하느님은 진흙으로 된 몸에 그의 생명의 영을 불어넣어서 산 사람이 되게 했다 하는 이 말에 깊은 비밀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몸은 힘을 행사해서 자기의 탐욕을 채웁니다. 가인이 약자 아벨을 쳐 죽인 것이 바로 그것을 말합니다. 그 뒤에 거인족들이 나타나서 사회를 혼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로 노아의 홍수가 오고, 바벨탑이 높이 치솟았습니다.

 

이 바벨탑이라는 것은 강자들이 하느님에게 맞서는 한 상징이기도 합니다. 이런 무서운 세상에 하느님은 경륜이 있었습니다. 약자 아벨 대신으로 셋을 아담과 이브에게 주었습니다. 약자의 후손입니다. “셋의 후손이 야훼를 예배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약자 셋의 후손이 야훼를 예배할 것이다. 에덴동산을 회복할 것이다.” 그런 얘기가 됩니다.

 

어떻게 약자의 후손이 에덴동산을 회복하느냐? 우리는 그것을 출애굽기 이야기에서 봅니다. 방방곳곳에서 모여든 하비루들, 떠돌이들이 애굽이라는 바벨탑 밑에 와서 노예가 됐습니다. 수 백 년 동안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앞이 캄캄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하비루 속에 있는 하느님의 영이 머리를 들고 일어서기 시작했습니다.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구하고 찾았습니다. 그 앞장을 선 것이 모세입니다. 그래서 정의와 평화가 강처럼 흐르는 새 내일을 찾았습니다. 그 약자들이 가나안 땅에서 정의와 평화와 강처럼 흐르는 에덴동산을 되찾았다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구하고 찾는 자들에게 주시는 야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야훼 하느님은 약자들 속에 있는 영을 깨우쳐서 역사의 주체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는 우리 인류 역사 안에서 되풀이됩니다. 그 첫 예를 다윗 왕국에서 봅니다. 왕을 가지지 말라고 한 사사시대 300여년이 지난 뒤 다윗은 힘을 길러서 왕이 됩니다. 그리고 그 힘을 통해서 주변의 약소민족을 침탈해서 노예로 삼습니다. 그 다윗이 야훼를 자기의 수호신으로 만듭니다. 수호신이라는 것은 왕의 뜻을 받드는 신입니다. 우상입니다. 이렇게 해서 야훼 이름을 높이 부르면서 다윗왕조 바벨탑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약자들을 깨우치셔서 역사를 새롭게 하시는 야훼 하느님을 전투의 신으로 만들었습니다. 다윗왕이 싸워서 이기는 모든 전투는 야훼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다.”라고 해석합니다. “성전을 지어서 야훼 하느님을 모시고 모두 여기 와서 제사를 드리라. 그러면 야훼 하느님이 축복을 주신다.”하는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거짓 힘의 문화입니다. 모두 그 문화를 믿고 성전에 와서 제사를 드립니다. 이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보는 예언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엘리야, 아모스, 호세야, 이사야, 미가, 예레미야 이런 예언자들이 이것이 얼마나 거짓된 종교이냐 하는 것을 명확히 보았습니다. 그래서 성전에 와서 외쳤습니다. “야훼 하느님은 너희들이 드리는 제사에 구역질이 난다. 다 치워라.” 미가는 농민들의 피땀을 뽑아서 예루살렘을 세우고 성전을 세웠구나. 하느님의 심판이 내릴 것이다.” 외쳤습니다. 그런데 강자의 문화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백성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나갔습니다. 악을 악이라 하고 이것을 버리라 하고 강자의 문화를 버리라고 아무리 외쳐도 다윗문화가 이스라엘 백성을 사로잡아서 들은 척 만 척 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종교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허깨비였습니다. 그릇된 야훼를 예배하는 성전이었습니다. 이것을 본 예레미야는 오늘 본문에서 읽은 것처럼 너희들이 고생해야 된다. 앞으로 두고두고 고생해야 한다. 고생을 해야 악이 무엇인지 몸으로 느끼고, 고생을 해야 자유와 정의의 새 내일을 갈구하게 되고, 고생을 해야 마음의 변화가 올 것이다. 마음의 변화가 와야 한다. 다윗 문화가 재창한 그 악한 이념의 사로잡혔던 문화가 마음이 변해서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누구든지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하는 깨우칠 필요가 없게 된다. 모두가 그렇게 깨달아서 서로 위하고 아끼는 세상이 오게 된다.” 이 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고난을 통해서 악을 악으로 보고, 마음의 변화가 생겨서, 생명이 소중한 것을 알아서 서로 위하고 아끼는 생명문화가 태어나야 한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바벨론에 잡혀간 무리들은 고생을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넓은 땅에서 자기들의 농사를 하며 살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마음의 변화를 알지 못했습니다. 야훼가 질투해서 자기들을 바벨론에 잡히게 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질투의 신을 만듭니다. “이방사람들 쫓아서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망했다. 예언자들의 말은 과부, 고아, 떠돌이를 문제 삼는데, 이 예언자들은 이방인을 따라서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망했다. 그러기에 이제 이방신들하고 결연하고 야훼만을 섬기기만 하면 다윗의 후손에서 메시아가 올 것이다.” 하는 메시지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다윗문화의 변형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어긴 다윗왕의 후손에서 메시아가 나와서 시온 산이 높이 올라가고 모든 백성이 그 밑에 올라와서 축복을 받는 그런 세상을 만들 것이다. 하는 거짓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는 이문화가 이스라엘 백성을 완전히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그 뒤에는 로마 제국이 있습니다. 로마황제를 평화의 신이라 하고 그 평화의 신 로마 황제를 섬기면 그 황제가 거져 주는 축복을 받는다고 하는 종교가 팽배했습니다. 여기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이 메시아사상 밑에서 저주받은 사람들은 갈릴리 사람들이었습니다. 농민들이었습니다. 모두 농토에서 쫓겨납니다. 지주들은 도시에 있습니다. 소작농들 아니면 날품팔이들이 일을 합니다. 그들이 쫓겨나서 떠돌이가 됩니다. 떠돌이가 된 사람 가운데서 그래도 재간이 있는 사람은 수공업을 합니다. 깨끗한 수공업을 한 사람은 중산층에 머리를 들고 올라갑니다. 더러운 수공업을 한 사람은 죄인취급을 받습니다.

 

예수의 아버지는 목수였습니다. 중산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먹고 사는 데는 걱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어렸을 때부터 아팠습니다. 자기하고 같이 놀던 친구들이 거지 떼가 되었습니다. 모두 갈 바를 알지 못합니다. 어린 감수성의 예수님의 마음은 아파했습니다. 이 아파했다는 말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아파할 줄 모르는 사람은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릇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오늘 청와대에 있는 그 아가씨가 아파할 줄 압니까? 온 세계를 지배하는 거부들이 아파할 줄을 압니까? 아파하는 마음이 없이는 아무것도 안됩니다.

 

예수님은 자라면서 회당에서 구약성서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 이야기들이 아픈 마음을 다스리지 않습니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청년 된 예수는 집에 붙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친구들이 독립군이 되어 나가는 것을 보고 자기 아들이 쫓아 나갈까봐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에게 늘 타이릅니다. “메시아를 기다려라. 다 해결이 될 것이다. 정의와 평화의 세계가 올 것이다. 안달을 하지 말고 메시아만 기다려라.”하고 앉아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앉아서 메시아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이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을 예수님은 꿰뚫어 보았습니다. 그래서 가출을 했습니다. 그래서 목자 없는 양들과 같이, 여우도 굴이 있는데 머리 둘 곳이 없는 그런 생활을 했습니다. 그 증거는 이차대전이 끝나면서 발견한 도마복음서에 나옵니다. 도마복음서에 예수님이 뭐라고 했는가 하면 나를 따르려면 네 부모와 형제를 미워해야 한다. 부모와 형제를 미워하지 않는 사람은 나를 따를 자격이 없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이 동네 안일하게 앉아있는 것이 견딜 수가 없어서 탈출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예수가 하루는 소식을 듣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회개하라,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했더니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다른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전엔 사람을 몰면 내가 메시아다라고 로마와 싸우다가 비참하게 참사를 당하곤 했습니다. 예수님 나시기 전인 4년 전에 이천 명이 갈릴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회개하라,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음을 돌려서 봐라. 그래야 하느님의 나라가 온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를 두고 예수님은 세례요한 운동에 가담하려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고 물에서 나오는데 네가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 말을 우리는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야훼 하느님의 마음에 든다는 것입니다. 안일하게 새 내일만 기다리며 기도하는 것은 야훼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려야 야훼 하느님의 마음에 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마귀의 정체를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면서 찾던 악의 정체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요즘의 같은 시험입니다. 많을수록 좋다. 이것을 위해서는 힘을 길러야 한다. 야훼 하느님의 이름까지 써도 좋다. 그것이 예수가 발견한 악마의 정체입니다. 예수는 그것에 단호했습니다. 끊어버렸습니다. 그러고는 반대로 나누고 용서하고 섬기는 길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어디로 찾아가느냐? 갈릴리로 찾아갔습니다. 고생 고생한 갈릴리로 찾아갔습니다. 셈의 후손입니다. 하비루의 후손입니다. 이 땅 위에도 셈의 후손이 수두룩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찾아 가셨습니다. 그들을 찾아가서 저처럼 목사님처럼 설교부터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삶으로서 그의 새 마음을 생활화하였습니다. 나누고 용서하고 섬겼습니다. 너희들은 죄인이 아니다. 저 놈들이 죄인이다. 너희들이 하느님의 나라에 더 가깝다. 사랑으로 그들을 당당한 하느님의 자녀로 대접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 사이에 완전한 변화의 마음이 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들 가운데 하느님의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졌다.” 마음의 변화가 이룩된 그들 속에 서로 위하고 아끼는 문화가 창출됐다는 이야기입니다. 생명문화가 창출됐다. 우리는 이 생명문화를 창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생명문화를 창출했습니다. 그리고 땅 끝까지 가서 이것을 전하라 내가 너희들과 같이 있으마.”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은 선교를 이렇게 끝마쳤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옛 부대는 아무리 하느님의 이름이 써졌더라도 쓸데없다는 것입니다. 아파하면서 참 삶의 길을 찾은 이 새 부대에 하느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것을 생명문화 공동체라고 부릅니다. 문화가 그렇게 중요합니다. 문화 속에서 우리는 호흡하면서 삽니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 문화를 마시고 삽니다. 서로 위하고 아끼는 심정을 가진 자들이 모여서 새로운 생명문화를 창출하면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그대로 그것을 마시며 사는 것입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만날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어 주실 것이다. 안병무는 이 길을 택했습니다. 따라서 향린 교회를 창출했습니다. 향린교회는 탐구자의 공동체가 돼서 생명문화를 창출하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찾고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알 것을 알고 참된 생명문화를 창출해내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