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사제가 보는 광주민중항쟁과 세월호 참사

시편 31:1-2,14-16; 사도 7:55-60; 벧전 2:4-5,9; 요한 14:15-21   

김명진 교우 / 정영훈 집사 / 이정임 집사 / 박채훈 교우

   

 

[김명진 교우]

 

안녕하십니까, 저는 성공회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있는 새날청년회 김명진입니다. 진도를 다녀와 보니 한국은 세월호와 같이 침몰하고 있었습니다.

 

2014416, 850여분경, 한동안 구경하지 못했던 짙은 안개가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그때 즈음 인천에서 출발한 청해진해운의 세월호는 침몰하고 있었습니다. 누구도 그날의 아침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대 재앙이 일어날지는 몰랐을 겁니다. 270여명이 실종이라는 속보를 보았을 때 저는 기겁했습니다. 초대형 해상 재난이 눈앞에 벌어진 것입니다. 바다 속에 270여명이 실종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진도실내체육관을 처음 들어간 그 순간, 평소라면 선선해야할 체육관이 뜨거운 습기로 저를 처음 맞이했습니다. 수많은 실종자 가족들이 그 넓은 체육관을 가득 매우고 있었습니다. 실내체육관은 그저 비바람을 피할 수 있어서 다행일 뿐, 말 그대로 난민촌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실내체육관과 30분 떨어진 팽목항은, 마땅한 장소가 없어 임시 천막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항구로 시신이 들어올 때면 수십, 수 백 명이 되는 희생자 가족들이 모여들었고, 깊은 고요함이 팽목항을 짓눌렀습니다. 시신을 운구하는 119대원들이 걸을 때마다 나는 자갈바닥소리와 취재진의 셔터소리를 빼면,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옆 사람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의 뼈아픈 고요함이었습니다.

 

취재하는 내내, 로마서 1215절의 말씀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습니다. 기쁨을 함께, 슬픔을 함께. 진정한 국민에 의한 국가였다면, 슬픔을 함께하고 적극적인 대처를 해야 하는 것은 국가였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수많은 국가기관이 진도로 내려와 있었지만 그 모든 기관을 조율하는국가는 부재했습니다. ‘억압하는국가만 있었을 뿐입니다. 하는 말은 해경 다르고 해수부 다르고 팽목항 다르고 체육관 달랐습니다. 서해지방해경청장 브리핑 듣고 있는데 그 와중에 속보가 뜹니다. 브리핑은 아직 못 들어갔다는데 속보는 진입이 성공했다 합니다.

 

현장에서 가장 답답해 보였던 것은 119였습니다. 119의 해상 구조범위가 민물까지인 규정 덕에, UN국제구조대 등급분류 최상위등급인 헤비HEAVY’급을 보유하고 있는 소방방재청 중앙119구조본부는 해경의 뒷바라지만 하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경찰은 뭐하고 있었습니까? 체육관 안에 등산복 입은 사복경찰 들여보내고, 기동대 배치하여 가족들 움직임 통제하고 있습니다.

진도 현장에서 국민의 방송 KBS는 국민의 방송이 아니었습니다. 국가재난주관방송사인 KBS는 현장최다인력인 120여명의 스텝을 진도로 파견했지만 그들은 취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보도 자료를 읽는 수준에 그쳤습니다. 아픈 자의 목소리를 들어주고,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 취재하기 위해 뛰어다니는 언론은 오히려 JTBC를 비롯한 뉴스타파, 국민TV등의 언론이었습니다. 또한 피해자 가족 분들이 카메라 다 나가라고 소리쳐도 남아있을 수 있는 언론사는 외신이었습니다. 국내 언론에 대한 불신을 단번에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5.18당시에도 비슷한 상황은 연속이었습니다. 정부는 국민을 외면했습니다. 정말 국가가 광주광역시의 시민들을 생각했더라면, 그런 만행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언론은 정부의 권력에 이기지 못하고 통제 당했습니다. 그 억압의 틈에서 광주의 현장을 타전한 언론사가 있었습니다. 외신이었던 CBS 브루스더닝 기자는 kwangju - south korea. 로 끝나는 현장 리포트로 광주의 모습을 정부의 통제 없이 타전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세월호사건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언론을 통제하는 방법만 늘어났을 뿐입니다.

 

국민의 보호가 의무인 국가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처음 사고 현장에 도착한 이들은, 또 세월호에 다가가 절반 넘는 생존자를 구조해 낸 이들은 유조선인 돌라에이스, 진도군 관공선 진도아리랑, 그리고 전라남도 어업지도선이었습니다. 해상구조의 최일선에 있어야했던 해양경찰은 뒤늦게 도착해 우왕좌왕하기만 했습니다. 누가 지금 그들의 이웃입니까?

 

 

[정영훈 집사]

 

제가 처음 우연찮게 평신도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시간이 짧아 원래의 원고를 대폭 줄였으니, 행간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교사라서 설교도 잘 할 것으로 보실 수도 있지만, 40분 수업에 익숙하여 더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침에 오면서 제 설교문을 검토했는데, 제 풀에 눈물이 많이 나서 이 자리에서는 더 나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요즘 여기저기에 울타리 장미가 활짝 피어나고 있습니다. 그 장미에 얽힌 사연이 많고, 낭만적인 추억들도 있었지만, 올 해는 꽃 감상할 기분이 아니고, 그 장미꽃을 보며 갑자기 세월호에서 죽어간 아이들이 연상되었습니다. 꽃다운 나이의 아이들이 죽지 않았다면 지금쯤 저렇게 아름답게 피어나지 않았을까, 아니, 이 선홍빛 장미꽃은 그 아이들이 흘린 피의 모습일지도 몰라, 혹은 그 한스럽게 스러져간 아이들의 영혼이 장미꽃으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19805.18즈음이 떠올랐습니다. 그때도 제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목포에도 빨간 장미꽃이 많이 피어 있었습니다. 그때 아름답게 피어난 장미가, 머잖아 검붉은 핏빛 장미로 보였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저는 고 3이었습니다. 광주에서 학살 소식이 들려오는 가운데, 광주로 가는 길은 차단된 상태에서 시민들은 목포역 광장에 모여 목포 시내를 돌면서 전두환은 물러가라, 김대중씨 석방하라를 목 터지게 외쳤습니다. 그때 목포에도 계엄군이 몰려 올 거라는 공포스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앞장서지는 못하고 시위대를 따라 다니면서 구호를 외치고, 길가의 붉은 장미꽃을 보며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시를 쓰거나 발표되지도 못할 연설문을 쓰기도 했습니다.

저의 집안은 찢어지게 가난했습니다. 아버지 집안, 그러니까 할아버지 중의 한 분이 한국전쟁 당시 경찰 하급 간부쯤 되셨는데, 인공치하가 되자 그 지역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그쪽으로 전향하여, 사람들을 많이 살게 하셨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로 인한 감옥살이와 연좌제적 피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집안의 전답을 다 팔아 바쳤는데도 실패했답니다. 아버지는 그 과정에서 배우지도 못하고 재산도 없이 착하게 사셨지만, 5학년때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어릴 때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양심이었고 희망이었으며, 교회에서 노래와 성경암송 등으로 인정을 받아 큰 힘이 되었습니다. 중학교 다닐 때까지 학교 끝나면 집에 와서 농사 일을 도와야 했고, 시험을 앞두고도 주말이나 주일, 휴일은 일하는 날이었습니다. 저는 독서를 좋아해서 학교도서관의 책을 순서를 정해 놓고 읽으며 가능하면 늦게 집에 가곤 해서 엄마한테 혼도 많이 났습니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인문계 쪽은 장학생제도가 별로 없었고, 금오공고 등 공업고 쪽으로는 3년 장학생으로 갈 수 있다 하니 학교나 집에서는 그쪽을 강권했습니다. 저는 저의 적성이 아니라서 공고는 못 간다고 했고, 그러면 고등학교 못 보낸다고 하여 많이 울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마리아회 고등학교라고, 생긴지 3년된 인문계고등학교에서 각 중학교에서 전교 1, 2등 학생을 대상으로 3년 장학금과, 기숙사를 제공하며 공부할 수 있도록 스카웃하는 기회가 있어서 그 곳에 진학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210.26이 있었습니다. 그 때까지 저는 지역이 목포였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대통령만이 유일한 대통령이고, 그가 아니면 당장 북한에서 쳐들어와서 나라가 망할 줄 알았습니다. 제가 일류대학 진학의 사명을 띄고 장학생으로 갔지만, 저는 입시공부에만 매달리지는 못하는 학생이라 선생님께 혼도 났고, 별명이 소크라테스였을 만큼 사색을 하는 편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전혀 깨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장례식이 끝난 뒤 신문 방송이 변했고, 선생님들 말씀이 달라졌습니다. 그동안 너무나 몰랐던 사실들을 접하면서 배반감이 컸습니다. 기독교 정신이기도 한 진리 탐구-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구하라 얻을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왔는데, 이렇게 정치적으로 잘 못 세뇌를 받아왔다는 사실에 분개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사회, 민주주의와 정의가 꽃 피는 나라가 되기를 더욱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5.18 당시 학교는 2달간 휴교를 했습니다. 3 때라 다른 10여명의 장학생들은 낙향하여 공부를 했지만 저는 시위대와 함께 다녔습니다. 그러나, 당시 민주시민들의 절규는 진압되었고, 무참한 죽음으로 끝난 듯 보였습니다. 그때 저는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 즉 절망에 빠져 유서를 썼습니다.(거기서 안죽고 살아난 에피소트가 있지만 생략합니다.)

 

그 후 저는 명문대 대신(좋은 조건으로 갈 점수가 안됨) 학비가 거의 없는 서울교대를 갔고, 거기서 한국 교육과, 사회, 문화, 교육대학의 전면적 개혁론, 인간의 진화와 현대 인간론 등의 논문을 쓰고, 학원민주화에 참여하여 무기정학도 받았습니다. 1986년 간신히 교사가 된지 10개월만에 교육민주화 활동으로 해직 당하고 87년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후, 88년 복직했습니다. 전교조가 등장할 때 해직 대신 정직을 맞고 현장에 남아 지금껏, 나름 제가 근무하는 학교와 나라의 참교육-민족 민주 인간화(전교조의 3대 정신중 인간화는 제가 당시 회의에서 강력히 주장하여 결정되었습니다.)를 위해 줄기장창 노력하고 싸워왔습니다.

 

한편, 역사성과 영원성이 본질이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악마적 화려한 외출은 심판을 받았고, 광주정신과 민중은 화려하게 부활했습니다.

 

이번에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광주민중들의 죽음이 떠올랐습니다. 하느님께 등 돌리고, 악한 영의 지배를 받는 세력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학살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런 세력들의 연장선에 있는 자들에게 300명정도의 침몰과 참사는 그렇게 처절한 비극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얼마 전 오마이뉴스에 실린 후, 강남향린교회 주보에 오늘의 시편으로 실리기도 했던 거룩한 분노라는 세월호사건에 대한 정신을 나름 최선으로 나타낸 제시를 낭송하며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거룩한 분노

온 산 온 들에

푸르른 잎새 저리도 눈부시고

아름다움의 결정, 갖가지 봄 꽃들이

지천에 가득한데,//

새 순 피어나는

싱그러운 나무같은 그대들, 어디로 갔는가!

진정 꽃보다 아름다운 우리 아이들, 선생님들, 사람들,

어디로 사라졌나!//

~

하늘로부터

꽃보다 초목보다 귀하게

보물같은 선물로 받은 아이들, 생명들,

누가 이 생때같은 우리 아이들,

바다에 빠뜨리고,

끝내 구조하지 않았는가!//

생살 뜯기는 처절한 통곡앞에

의례적 사과와 애도, 슬픔만의 시나 노래는

부실한 세월호나 다름없다.//

하염없이 흐르다

또 다시 흐르는 눈물도

내 몸같이 사랑하는 우리 아이들

원혼을 다 달래지 못하는

맹골수로물의 일부가 될 뿐.//

분노하라, 하늘같은 사람들이여!

이 나라의 주인공들이여, 거룩하게 분노하라!//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우리 아이들, 생명들

침몰시키고,

끝내 수장시킨 이들에 분노하라!//

생명을 담보로 돈벌이에 매몰된 이들과

그런 무리 감싸주고 비호해 온 기관들,

청와대부터 하부까지

부실과 불법, 부정,

조작과 무사안일의 무풍지대에

또아리를 틀게 한 총책에 까지//

분노하라, 거룩한 분노!

맹골수로보다 물살 빠른

명랑해전의 울둘목 바다처럼 물결쳐라.

 

 

[이정임 집사]

 

저에게 주어진 이 시간을 한구절의 시로 시작하고자 합니다.

 

가을 하늘 아래 서면

화살처럼 꽂히는 햇살에 맞아

아프고 부끄럽더라.

얼마쯤 잊어버린 죄책감을 꺼내어

맑은 물에 새로이 헹궈

깃대 끝 제일 높이 매달고 싶더라.

크신 분의 목소리가 내 귀에 대고

괜찮다, 괜찮다고 속삭일 때 까지

밤새도록 참회록을 쓰고 싶더라.

 

저는 희년여신도회 소속 이정임입니다. 제 고향 광주에 가면 고백교회가 있는 데 군부독재로 살벌하던 때 민주화와 5.18진상 규명을 위하여 앞장섰던 의롭고 용감한 교인들에 의해 198312월에 시작되었으며 저에게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친정과 같은 곳입니다. 어찌어찌 흘러와 향린공동체 안에서 여러분께 배우고 함께 할 수 있어서 감사드립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라 할 때 저는 5.18보다는 517일 오후를 잊지 못합니다. 저는 80학번으로 따끈따끈한 대학 새내기였구요. 요즘처럼 별,콩 또는 천사 coffee shop이 없던 때였고 광주에는 충장로 가장 중심에 우체국이 있었습니다. 그 앞 넓은 계단쯤에 서서 기다리는 곳을 우리는 우다방이라 부릅니다. 한 시간 서있으면 초중고 친구라던가 혹은 헤어진 옛 남친의 휴가 나온 소식까지 들을 수 있는 곳입니다. 517일 오후 저도 우다방에 있었는데 뜬금없이 나타난 군인들이 아무 대책도 없이 모두를 쫓고 쫓기는 상황이었지요.

 

많은 일이 있었던 금남로는 충장로에서 80m 쯤 되는 곳 이구요. 저희 집은 공수부대원들을 실어 날랐던 기차역과 전남도청의 중간쯤에 있었는데 517일 오후 걸어서 20분이면 갈 수 있는 길을 큰 길을 나가지 못해 골목길로만 찾아다니면서 2시간을 걸려 집에 도착했습니다. 그 후로 열흘 동안 광주는 온갖 흉흉한 소문과 공포로 혼돈의 도시였습니다.

 

오늘 또 518일이 되었지만 저는 그 해를 기억할 때마다 무거운 부담감이 있습니다. 한 번도 시위대 가운데 서지 못 했으며 열의 뒤쪽 또는 도망가기 쉬운 곳을 택해 겨우 참여했으며 집으로 와서는 총알이 뚫지 못한다는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있기도 했습니다. 다쳐서도 걸려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 저의 마음이 되고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지요. 파출소에 끌려가 훈방조치라도 받고 싶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

 

7910월에 있었던 부마항쟁에서 이어지는 805, 전두환의 일당들은 광주를 타깃삼아 수백 명의 생명을 무자비하게 빼앗고 그들의 정권을 탄생 시켰습니다.

 

2014년 봄 우리 모두는 국상을 당한 듯 처참한 심정입니다. 카톡에 쓰는 말투라든지 동영상에서 보듯이 배가 기운 다음 아이들끼리 수학에서 나오는 공식을 대입해보려고 ', 기울기 어떻게 푸냐, ~ 이거 아닌데'라는 천진함, 희생자 시신을 확인하는데 특징으로 나이키, 아디다스 바지 이런 식으로 하는 걸 보고 ' 아가, 그런 메이커 옷 못 사줘서 미안하다'는 어느 엄마의 절규를 보면서 원통하고 분하고 이런 뭐 개XX같은 경우가 있나 하면서 아파합니다만 저는 또 하나의 고백을 해야 합니다.

 

저에게도 희생자들과 똑같은 고등학교 2학년 딸이 있습니다. ? 저이가 쉰둥이를 낳았나 놀라지 마세요. 하느님께서 주실 때는 선물이었는데 저하고 살면서 까탈쟁이가 되어버린 딸 셋을 키우다보니 약간~ 아주 약간 삵았답니다. 사건이 터지고 저는 딸아이에게 학교전체가 간다는 23일 봉사활동을 두고 '너희는 배 안타지? 정말 다행이다' 말하고 있는 저 조차도 어처구니없는 마음이지요? 부끄럽습니다.

 

공포로 정권을 잡은 80년의 사태나 호통과 질책으로만 통치하는 청와대는 이 사회에서 어떤 곳입니까? 저는 오늘 이 두 가지 사건을 생각하면서 어찌 이것 밖에 안 되나 가슴 먹먹합니다. 아직도 밝히지 모하는 발포명령자에 대해서, 그저 이벤트로 다녀가는 여자대통령의 얼굴에서 첫째 진실함이 없습니다. 그때는 상무관에 뉘어있는 자식, 지금은 바다 속의 아이들, 주검을 찾아 헤매는 부모의 아픔에 공감하는 감정도 없는 듯합니다. 둘째 정권을 지키려고 몇 백명쯤 본때로 해치우는 그들에게는 눈물도 없고 생명의 소중함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셋째 누구를 탓하기 전에 먼저 내 속에 있는 이상 애매한 완악한 마음을 꺼내어 여러분과 함께 치유 받고자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구절 요한복음 831,32절에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하십니다. 주어진 복음서의 본문에서는 우리가 계명을 지키면 진리를 영이 우리와 함께 하고 고아처럼 그냥 버려두지 않는다 하십니다.

 

서신에서는 우리를 거룩한 제사장이라 일컬으시며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빛에 들어가게 하신다 했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알고 따르며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이며 곱하기가 아니라 나누기이며 쌓기가 아니라 버리기입니다. 나를 비울수록 충만해지는 것이 성령의 존재감이며 높은 곳을 바라보던 눈길을 낮은 곳으로 돌리는 것이 십자가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 읽었던 시의 뒷부분을 한 번 더 읽음으로 제 시간을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크신 분의 목소리가 내 귀에 대고

괜찮다, 괜찮다고 속삭일 때 까지

밤새도록 참회록을 쓰고 싶더라.

 

 

[박채훈 교우]

안녕하세요. 안산에 살고 있는 박채훈입니다. 제 소개를 이렇게 시작하게 되었네요. 저를 기억하지 못하실까봐 말씀드리자면, 거의 10년 전부터 있는 듯 없는 듯 예배에만 참석하다가 작년 후반부터는 그마저도 제대로 하지 않는 부끄러운 사람입니다.

 

이런 저런 핑계로 이젠 교회에서 저의 존재 자체도 흐릿해 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레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은 저의 첫 인사와 관련 있습니다.

 

저는 정확히 10년전 첫 아이의 출산과 함께 안산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입시학원에 취직하였던 것이 올해로 10년이 넘었습니다. 안산 내에서 제법 규모가 있는 학원이고, 그만큼 많은 중고등학생들과 선생님과 학생으로 인연을 맺어 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저를 이 자리에 서게 한 이유입니다.

416, 그 날 이후 한 달간 제게 일어난 모든 일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전문가가 전하는 얘기도 아닌, 기자가 전하는 얘기도 아닌, 그리고 내가 아는 누군가의 얘기가 아닌, 지난 한달 간 저에게 일어났던 '제 이야기'를 하려 용기를 내서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제가 학원에서 직접 함께했던 13명의 학생들이 이번 세월호 참사로 인해 희생되었습니다. 거기에다 현재 중등부에 수강하고 있는 학생의 언니가, 3 학생의 동생이, 2 학생의 너무 많은 친구들이 차가운 바다 속에 갇혔습니다.

 

또한 학원 재원생의 부모님 중 한분인 단원고 선생님은 이 모든 일을 짊어진 채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와 인연을 맺었던 몇몇의 생존 학생들이 고통의 시간을 감내하며 치유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시신이 뭍에 올라와 안산으로 온 첫날인 421일부터 지난주까지 저와 연이 닿았던 모든 학생들의 장례식에 학원 동료선생님들과 빠짐없이 함께 다녀왔습니다. 부모님의 슬픔에 비할 바 있겠습니까만, 도저히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으로 겨우 찾아간 첫 학생의 장례에서 저는 쏟아지는 눈물로 정작 부모님과 가족에게는 아무런 힘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속절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는 제게 그 어머니는 "선생님, 힘내세요..."라며 오히려 제 어깨를 감싸 안아 주었습니다. 여기계신 모든 분이 마찬가지셨겠지만 참사 직후 심장이 터지고 미쳐버릴 것 같던, 아무리 애써도 마음을 추스를 수 없던 저를, 위로해주고 상처를 치료해 준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희생 학생의 어머니었습니다. 그렇게 한명, 두명... 학생들의 마지막 길을 지켜봐오고 있습니다. 중학교 시절에는 말썽꾸러기 개구쟁이었던 아이들이었는데, 영정 속 17살 학생들은 한창 때의 너무나 잘생기고 예쁜 얼굴들이었습니다. 그 모습에 더 속이 미어집니다.

 

구조는 완전히 실패하고, 시신 수습조차 더디던 57, 저와 인연을 맺었던 모든 아이들은 부모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제가 갔던 장례식장에서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부의금을 받지 않습니다. 편지와 함께 약간의 부의금을 동봉해 전하면, 한사코 거절하시며 "선생님, 이거 편지만 있는거 맞죠? 저 봉투 열어서 확인합니다..." 라며 겨우 겨우 옅은 미소를 띠우며 마음만 받아 주십니다.

 

키가 크고 수줍은 미소가 인상적이었던 한 남학생의 장례에는 두 부모님이 없이 한 살 위 누나가 조문객을 맞아 하고 있었습니다. 조심스럽게 부모님에 대하여 물었더니, 아들의 시신을 거둔 후 두분 다 기력을 잃고 쓰러져서 병실에서 수액을 맞고 있느라 어쩔 수 없이 조문객을 맞이하지 못한다는 안타까운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그 부모님이 바로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고자 아들의 15분짜리 휴대폰 동영상을 언론에 공개한 박수현군의 아버지였습니다. 죽을힘을 다해 아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싸우고 있는 그 아버지를 누군가는 저들이 쓰는 더러운 말들로 덧칠하고 있으니 정말 얼마나 더 부모의 마음을 누더기처럼 만들어야 성에 찰 런지....

 

끝까지 애를 태우다가 제게는 마지막으로 이별을 한 대현이라는 학생의 부모님은 저희에게 장례식에 와줘서 감사하다며 연신 허리를 굽히시는데, 면목이 없었습니다. 그 아버님께서는 최근까지 새카맣게 타들어간 가슴으로 진도에서 지옥과 같은 시간을 보내셨는데, 바싹 마른 입술을 겨우 떼시며 저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나라가 제대로 정신차리고... 100%는 아니어도 60%, 아니 40%라도 안전에 대하여 고민하고 고쳐나갔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우리 아이들이 다시는 이런 일을 겪지 않지요..... 이번 단원고 부모님들이 끝까지 함께 힘을 모으기로 했어요..."

 

저는 이 말을 들으면서 고개가 끄덕여 지는 것이 아니라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저런 말씀을 하실 수 있지? 내 자식이 죽었는데, 나 같으면... 남의 자식이 알게 뭐야. 다 죽든 말든...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이렇게 생각할 텐데...' 성인과도 같은 그 부모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오히려 너무나 화가 났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나라가 어려우니 잠자코 있으라고, 해주는 대로 받으라고, 혹시 다른 수작이 있는 거 아니냐는... 짐승의 심장을 가진 인간들 때문입니다.

 

지난 16일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꼬박 한 달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렸던, 제게 오히려 힘을 내라고 하셨던, 거의 첫날 시신이 수습된 학생의 어머니가 한 달이 지난 그때 분향소 유가족 쉼터에서 거의 한 시간이 넘도록 오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디선가 얼핏 듣기로 남겨진 가족에게 가장 위험한 때가 이별 후 '한달'이라고 하더군요. 그동안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겠다 약속하고 위로했기에, 슬퍼하며 분노하며 겨우 버텼는데, 한 달이 지난 지금, 모든 것이 사라졌다는, 기억마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갑작스레 엄습한 것은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그리고 이제 이런 슬픔은 나머지 가족에게도 차례로 나타날 것입니다. 저는 그들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제, 금요일에 학원 선생님들에게 피자 여러 판이 배달돼 왔습니다.

삼우제를 마친 한 학생의 부모님이 딸의 가는 길에 함께 해 줘서 고맙다는 마음을 그렇게 전하셨습니다. 차마 목으로 넘어 가지 않는 피자 조각을 바라봅니다. 안산은 이렇게, 공동체가 더디지만, 지혜롭게, 차근차근 상처가 아물 도록 서로 보듬고 있습니다.

 

여기 함께 계신 향린 가족 여러분, 긴 시간 제게 눈을 맞춰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 실종자, 생존자 및 가족대책위원회가 호소문을 냈습니다.(http://i.wik.im/172524) 진상규명을 위한 천만인 서명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서명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내일, 월요일 낮에 제가 일하고 있는 학원의 직원 모두가 다시한번 합동 분향소에 갑니다. 그 길에 주변 사람들에게 받았던 서명지와 향린가족의 서명지를 가족대책위원회에 전달하려고 합니다. 한동안 예배에 참석도 안하다가 이렇게 불쑥 나타나 부탁을 드려 죄송합니다. 그리고 저를 보듬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