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도행전 17:22~31/ 베드로전서 3:13~17/ 요한복음 14:15~21

여는 찬송 65/ 응답찬송 517/ 결단찬송 국악189

 

(사랑하고 존경하는 향린의 모든 여러분!)

한 주간, 아니 두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함께 하늘뜻을 모시기에 앞서 지난 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린 점에 대해 사과를 드리며, 함께 마음모아 염려해 주신 덕분에 저를 포함한 8명이 함께 건강한 모습으로 예배드릴 수 있게 된 점에 깊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말도 안 되는 해산명령, 그럼에도 순순히 해산하기 위해 인도위로 올라선 시민들을 대한 체포, 연행자들에 대한 비하와 폭언, 그리고 연행된 여성들에 대해 자살방지를 명분으로 속옷을 벗기고 압수하는 등의 모욕적 행위 등 이어지는 경찰의 불법적, 반인권적 행위는 저로 하여금 한 단어를 떠올리게 하였습니다. !!.......서민생계의 파탄과 그에 따라 이어지는 비극적 희생들,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청년실업과 수많은 노동문제 그리고 사회적 양극화, 개발 자본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파괴되어도 무방한 생명과 생태적 가치, 그리고 지난 한국의 근현대사 속에서 눈물과 핏방울로 진전시켜 온 절차적 민주주의의 총 후퇴 등, 지금 한국사회는 도무지 위기가 아닌 곳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위기의 단면이었던 그날 밤, 불과 백여 명의 시민을 잡아들이겠다고 헬멧 흑광 번뜩이며 달려들던 수천의 공권력, 계속해서 순순히 체포에 응하라! 시키는 대로 해라! 가만히 있어라!’를 요구하는 그들을 보며 저는 오늘의 본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레오파고스 언덕위에서)

먼저 사도행전의 오늘단락은 저 유명한 아레오파고스 법정연설 장면입니다. 내용 중 소아시아를 넘어 유럽으로 선교영역을 넓힌 바울로는 아테네에서, 초기 예수공동체의 주요거점인 회당의 유대인 뿐 아니라 저자거리와 연해 있는 아고라 즉 광장에서 철학자들과 논쟁을 벌입니다. 이에 대해 사도행전은 그 학자들이 당신의 그 새로운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 줄 수 없겠소?”라며, 바울로를 아레오파고스 법정으로 청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여기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셨나요? 세상 어느 곳의 법정이 무언가 모르는 것을 청해 듣기위해 열린단 말입니까? 고대 아테네의 법정은 지금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기관이었던 것일까요? 아니면 법정이라는 번역이 틀린 것일까요?

아레오파고스, 기실 이곳은 지금으로 치자면 약식기소나 즉결심판을 행했던 법정으로 일심제 재판을 통해 잡범들에 대한 벌금과 간단한 태형, 혹은 경우에 따라 외국인에 대한 추방명령 등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섰던 법정은 사도행전의 묘사처럼 무언가 알려주는 선생의 자리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의 저자는 왜 이 장면을 왜곡했던 것일까요? 일반적으로 사도행전은 예수공동체의 행적에 대한 변론목적의 글로 작성된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에 따라 내용도 무척 이상적인 장면으로 묘사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베드로의 한 번 연설로 삼천 명이 개종했다는 내용은 그 대표적 예라 하겠습니다. 아울러 사도행전은 베드로, 주님의 형제 야고보 등 예루살렘 중심의 초기 예수 공동체보다는 유럽지역 디아스포라에 더 무게중심을 두고 기술되어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는데요, 이에 따라 유럽 선교의 핵심인물인 바울로를 법정에 끌려간 잡범으로 묘사할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론적으로 바울로의 아레오파고스 연설은 연단에 선 강사의 강연이 아닌, 법정에 선 피의자가 자신을 변호하려 했던 변증발언임에 분명합니다.

 

저는 대학원석사과정동안 지중해 동부지역의 초기기독교 공동체 유적 답사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아레오파고스 유적도 직접 살펴볼 수 있었는데요, 그곳은 파르테논 신전으로 잘 알려진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 연해있는 큰 바위언덕입니다. 이곳에 서면 뒤로는 파르테논 신전, 앞으로는 고대 아테네 항구 유적을 볼 수 있고, 오른편의 아고라 유적과 왼편의 제우스 신전터의 위용도 살필 수 있습니다. 비록 이 모든 유적들이 오스만투르크 등에게 오랜 시간 지배를 받는 동안 파괴되어 폐허로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저는 동서남북의 그 압도적 풍광에 한동안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 속 바로 그 당시의 역사적 바울로는 어떠했을까요? 고대 지중해 문명권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아테네, 게다가 고대 유럽의 사변철학과 인문학에 있어 그 심장부라 할 수 있는 그곳에서 혈혈단신 예수의 도를 전하던 바울로는 급기야 이단논설자로 지목되어, 아고라에서 그를 고발한 군중들에 붙잡혀 바람 부는 아레오파고스 언덕 한중간에 세워졌습니다. 상황에 따라 선교는커녕 매질을 당하거나 심지어 다시는 아테네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르는 절대 절명의 위기에서 바울로는 다른 지역에서는 표현되지 않는 역사적 연설을 남깁니다. “제가 보았을 때 당신들은 무척 신심(信心)이 깊은 분들임에 분명합니다. 심지어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한 사원도 있는 것을 보았으니까요. 제가 전하고 있는 신앙은 바로 당신들이 이미 경배하는 있는 그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한 것입니다.” 이웃종교와의 실로 대담한 지평융합을 시도하는 바울로의 이 연설은 앞서 설명 드렸던 위기상황에서 자신을 구출해냈을 뿐 아니라, 해당 법정의 법정 판사를 포함한 몇 명의 개종자를 얻는 성과를 이끌어내기에 이릅니다. 눈앞에 직면한 위기상황 속에서 만약 바울로가 기세등등한 군중이나 압도적 건축물들에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면 역사적 아테네 선교활동도, 혹은 그 이후 지중해 지역의 예수공동체 운동의 향배도 가늠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지 않았어요!)

오늘 우리가 모시고 있는 두 번째 본문인 베드로전서, 신약성서학에 있어 태풍의 눈으로 명명되는 이 글은 공동체에 주어진 위기상황을 다음과 같이 반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옳은 일을 하다가 고난을 받는다 해도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을 협박하더라도 무서워하거나 흔들리지 마십시오.” 오랫동안 학계에서 베드로의 직접저작 혹은 그에 상당한 영향을 받은 이의 서신으로 평가되고 있는 베드로전서는 지금의 터키 공화국 곳곳인 갈라디아, 가빠도기아, 아시아 등에 위치한 공동체가 의로운 일을 하다가 당하는 고난, 협박 등에 노출되었거나 곧 그리될 상황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주후70년 유대전쟁이 예루살렘과 마다사 요새의 학살로 마무리 된 후, 유대인은 영원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없다는 로마 황제령에 의해 산산이 흩어진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유대종교지도자들은 흩어진 지역에서 유대교 공동체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대외적으로는 지역 집정관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한편, 내적으로는 강력한 율법을 통한 단결을 모색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 했었던가 봅니다. 가장 약한 존재를 모두가 괴롭히면서 가학적 쾌감과 저급한 동질감을 획득하게 되는 예를 왕따 문화 등에서 찾아볼 수 있지요? 흩어진 유대교공동체, 즉 유대디아스포라는 가혹한 통치자 로마를 향해선 감히 표현 할 수 없었던 울분을 이단이라는 명분으로 공동체내의 소수자들을 향해 쏟아놓기 시작했고, 과정에서 나자렛도당 즉 초기 예수신앙인들을 결국 동족들로부터 2차 폭력을 당하며 내쫓깁니다. 이 때문에 베드로전서는 서신의 여러 부분에서 1성서의 원 신앙고백과 같이 자신들을 나그네로 지칭하고 있으며, 그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원주민들에게 책잡힐 짓을 하지 말고 통치자에게 잘 보이라(2:11~14)’, 실로 가슴 아픈 권면을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아무리 몸을 낮추어도 다가오는 위기는 피해 갈 수 없었던 것일까요? 서신은 중반을 넘어가며 마침내 공동체가 직면할 수밖에 없는 고난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더라도 하느님이 계신 것을 생각하며 괴로움을 참으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베드로전서를 신앙 고백하던 이들은 이후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혹은 그녀들은 공동체가 직면한 위기를 극복했을까요? 아쉽게도 이에 대한 더 이상의 자료를 오늘날의 우리들은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국가공동체의 비극적 패망과 소중한 신앙공동체로부터의 배척, 그리고 각자의 망명지에서 소수자로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각종의 고난 앞에서 적어도 우리 신앙의 선배들인 베드로전서 공동체는 너무 두려운 나머지 그저 가만히 있었거나 혹은 회피하였거나, 또는 그건 어려움이 아니라는 식의 자기부정을 하지 않고, 떨리는 두 손을 서로 모아가며 직면한 위기를 직시했다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악을 행하다가 고통을 당하는 것보다야 얼마나 낫겠습니까?” 베드로전서 공동체는 그렇게 생존이냐 죽음이냐의 기로 앞에서 담담하게 신앙의 길을 걸어갔고, 이천 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참 무서웠지만, 우리는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옳다고 생각한 그 길을 계속 걸어갔어요. 무척 억울했지만 악을 악으로 갚지 않기 위해 노력했어요.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희망을 듣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전했습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지 않았어요!”

 

(성령이 함께 합니다! 행동합시다!)

사람들은 너희를 회당에서 쫓아낼 것이다. 그리고 너희를 죽이는 사람들이 그런 짓을 하고도 그것이 오히려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가 올 것이다!” 공동체에 불어 닥친 위기를 주님의 계시 형태로 증언하고 있는 요한복음은 오늘의 본문을 통해 자신들을 부모 잃은 사람들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주후 90년 경 요한공동체는 앞서 살펴본 베드로전서와는 또 다른 위기감을 느끼게 되는데요, 자신들에 비해 확고한 공동체를 형성한 유대교 디아스포라의 배척과 박해, 확고한 신앙을 강조했던 바울로의 신학을 곡해한 결과 믿는다고만 하면 다 의롭게 된다.’는 식의 값싼 구원론이 대세를 점유하던 당시 대다수 그리스도교의 모습, 형식만 강조되고 의미를 퇴색되어가던 각종의 예전 등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요한공동체는 관계 맺는 모든 존재들에 대한 사랑과 그 사랑에 대한 구체적 실천을 강조합니다. 요한복음의 말미에 느닷없이 자신을 버린 제자들을 찾아온 부활예수가 변함없는 사랑을 밤샘 노동에 지친 제자들을 위해 손수 마련한 아침밥으로 표현한 후, 두려움으로 식어버린 제자들의 마음속 사랑을 세 번의 질문을 통해 깨우면서, ‘내 양을 먹이라는 말을 통해 실천을 촉구하는 묘사는 그와 같은 실천의 예를 예수에게서 찾겠다는 공동체의 의지이며, 직면한 위기로 인해 무겁게 가라앉아있는 공동체를 향한 외침, 가만히 있지 맙시다! 사랑합시다! 움직입시다!’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잠자코 있지 않고 무언가 말하는 이가 가질 수밖에 없는 두려움과 부담을 깊이 공감하며 공동체는 본문에서 예수의 입을 빌어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생각보다 참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걱정하지 마세요. 주님께서는 다른 협조자, 즉 여러분의 두려움을 함께 지고 갈 성령을 여러분 각자의 마음 곁으로 보내실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행동하세요!’

 

(사랑하는 향린의 모든 여러분!)

위기는 언제가 우리들을 두려움에 빠지게 합니다. 마치 계속된 학대를 경험한 강아지가 막대기만 봐도 벌벌 떠는 것처럼, 위기는 우리들이 그저 두려워서 가만히 있기를 바라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무섭지? 두렵지 않아? 그러니 잠자코 가만히 있어!’ 우리는 이렇게 으름장을 놓는 위기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어제 오랜만에 밀양 지킴이 어르신 중 한 분인 송루시아 할머니와 통화를 했습니다. 가 뵙지 못하는 죄송스러움과 걱정됨에 드린 연락이었는데, 언제나처럼 씩씩하게 말씀을 이어가시던 할머니는 오히려 김진철 집사의 공식적으로는 말할 수 없는 병증과 저의 허리디스크를 염려해 주시더군요. 지난 사순절기 중 찾아갔었던 밀양에서 송할머니는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꿈속에서 경찰들이 우루루 몰려와 나를 끌고 나가는 거예요. 너무 놀라 깼는데 한참동안 심장이 떨려 아무것도 못하겠더라고.......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있으면 끝까지 싸울 겁니다. 이 싸움을 해 나가면서 점점 그런 확신이 생겨요. 바로 이 천막에 하느님이 함께 하신다고요!’ 송루시아 할머니를 포함해 이제는 4곳이 남은 밀양 송전탑 건설저지 현장의 어르신들은 두려움에 맞서는 이 시대의 바울로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난주일 밤, 두렵게 밀어닥치는 경찰들을 향해 떨리는 마음에도 당당히 공권력의 부당한 행위를 외치던 분들과 불법연행에 대해 한마음으로 분노하며 염려와 기도로, 거리기도회로, 각종의 행동으로 움직이신 여러분들은 오늘날의 베드로전서 공동체입니다.

지금 여러분 앞에 놓인 위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함께 이야기 나눈 시국상황이거나 마음 속 한가득 담긴 걱정거리, 혹은 참 풀기 어려운 가족관계입니까? 또는 경제적 어려움이나 선명하지 않은 미래입니까? 아니면 교회 공동체가 다음을 향해 나가기 위해 겪는 진통입니까? 그 모든 것들이 위기로 느껴질 때, 그것들은 우리에게 그저 힘들어하며 가만히 있으라고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위기들의 윽박지름 앞에서 이제 우리 함께 말했으면 합니다. ‘그래, 너로 인해 힘든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겠어! 행동하겠어! 작지만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지 두 가지를 실천하겠어!’

 

참 반가운 향린의 모든 여러분!

이제 작고 작은 움직임을 통해 한스럽게 스러진 세월호의 생명들을 은폐된 진실의 드러남으로 부활시킬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 소중한 한 걸음을 통해 아직 돌아오지 않는 16명을 마중 나갔으면 합니다. 조심스레 뻗은 손길을 통해 무척 작은이가 더는 혼자가 아님을 알 수 있었으면 합니다. 떨리고 작은 소리이지만 멈추지 않고 말함을 통해 더 많은 이들이 함께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이렇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움직임으로 개인과 공동체, 이 시대가 직면한 위기를 극복해 갔으면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각양의 삶의 자리와 이 시대의 요한 공동체가 됩시다!

 

침묵 가운데 살펴 오시는 마음 곁의 조력자, 곧 성령의 기운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침묵기도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