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역사: ()에서 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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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사건 이후 맞은 첫 선거에서 정치권의 큰 변화는 보이지 않습니다. ()나 여() 모두 서로의 승리를 주장할만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조선일보가 선거 다음날 머리기사로 뽑았듯이 이번 선거는 야도 여도 아닌 전교조의 승리인 것이 분명합니다. 전국 거의 모든 지역에서 진보적 가치를 지향하는 민교협 출신의 교수들과 전교조 출신의 교사들이 교육감으로 당선된 것입니다. 조선일보는 이를 하나의 위협으로 간주하여 머리기사로 뽑았지만, 저는 오히려 그 반대로 인간 사회는 아무리 보수가 자신에게 유리한 오늘의 부조리한 현상을 유지하고자 하여도 진보를 향한 발걸음은 조금씩 조금씩 전진하고 있다는 하나의 징조로 이해합니다. 교육백년대계라는 말이 있듯이 교육은 먼 미래를 내다보고 씨를 뿌리는 일입니다.

 

저는 경제나 효율의 가치보다 생명과 평화의 가치를 더 소중히 여기는 진보적 교육감이 대거 선출되었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의 앞날에 희망을 품습니다. 그간 우리나라의 교육은 시장자본주의 사회가 필요로 하는 기술적 인간을 양산해내는 데 초점을 두어왔습니다. 그러나 교육의 근본은 기술적 인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인간을 사랑할 줄 아는 가슴 따뜻한 인간에 있습니다. 저는 이번 결과가 세월호 참사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세월호 희생자들의 넋이 한탕주의, 승자독식의 경쟁주의, 맘몬만능주의로 침몰해가는 우리 사회를 견인해 내었다고 믿습니다. 이제 이 배가 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더욱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이자 876월 민중항쟁을 기념하는 주일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은 복음서의 후편으로 예수의 부활 승천 이후 제자들이 하느님 나라 운동을 펼쳐가는 이야기입니다. 같은 사람이지만, 제자라는 말 대신에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의 사도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 사도들의 활동에 있어 그 행간을 보면 그들이 독자적으로 행동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성령의 뜻을 따라 행동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늘로 올라가면 보혜사 성령께서 오실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곧 예수를 대신하여 거룩한 영 곧 성령이 그들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다른 말로 성령행전이라고도 부릅니다.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가 어떻게 시작하였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교회의 생일이기도 합니다. 부활한 예수께서 40일간을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가 승천을 하시고 나자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예수께서 다시 오실 것을 기도 중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모여 기도한지 열흘이 되었을 때, 하늘에서 세찬 바람과 함께 뜨거운 기운이 내려오면서 그곳에 모여 있던 120명의 제자들이 모두 그 뜨거운 기운에 휩싸여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 변화를 흔히 성령의 역사(役事)라 부릅니다. 이 날은 본래 유대민족이 애굽의 노예생활로부터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과월절 후 50일째가 되는 날로 보리의 첫 수확을 드리는 감사절 절기였습니다. 성서에서는 이 날을 50일째라 하여 오순절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일곱 번의 주간을 보낸 후라 하여 칠칠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오순절 감사의 절기가 초대교회에서는 성령강림절로 바뀐 것입니다. 단순한 감사를 넘어 새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된 날이 된 것입니다.

 

[방언은 소통을 위한 도구]

 

그런데 성령강림 혹은 성령충만에 관련한 오늘 본문은 많은 교인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그건 특별히 방언에 대한 이해입니다. 지금 교회에서 방언이라 함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이상한 언어를 말합니다. 그러나 첫 성령강림절에 내린 방언은 그냥 말 그대로 지방말 외국어였습니다. 성령에 충만한 120명의 예수 제자들이 외국어를 말하게 되었다는 것은 당시 각국에서 모여든 순례자들이 그동안은 서로의 말이 달라 소통이 되지 않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그 사회가 소통이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곧 성령에 의한 방언은 소통을 위한 도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후에 특히 고린도교회를 보면 방언이 오히려 불통의 언어가 되어 교회 내에 분란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하기를 천 마디의 방언 보다 한마디의 예언이 더 소중하다고 말하고 은사 중에 가장 큰 은사는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창세기 10장에는 인간들이 한 언어로 소통하면서 하늘까지 닿는 높은 탑을 짓게 됩니다. 이는 인간이 신을 대신하고자 하는 교만을 뜻합니다. 그러자 신이 인간의 언어를 흩어 서로 소통하지 못하도록 벌을 내립니다. 불소통의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러자 세상에는 강자가 나타나 약자들을 지배하는 전쟁과 약탈, 살인, 차별, 소외가 끊임없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탑을 창세기에서는 바벨론제국을 뜻하는 바벨탑 사건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오늘 첫 번 성령강림절에 방언이 임해 모든 외국인들 사이에 소통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성령의 역할이 많이 있는데, 그중 첫 번째는 소통입니다. 우리가 소통을 잘하기 위해서는 먼저 잘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잘 들으려면 자기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따라서 성령의 사람이란 곧 겸손한 사람입니다.

 

두 번째로 성령강림 이후 저들에게 나타난 중요한 변화는 거리에로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그간 그들은 스승 예수와 같이 죽임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속에서 집안에 숨어 있었는데, 성령을 체험하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고 거리로 나가 예수 부활을 외친 것입니다. 문을 닫고 집안에 머물던 제자들이 문을 박차고 거리로 나간 사건이 바로 성령강림의 사건입니다.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성전의 벽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사흘이란 부활 예수의 몸으로서의 성전을 말하는데, 이때의 성전은 곧 예수 사건이 일어나는 민중 현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건물은 인간이 만든 규약과 제도가 존재합니다. 일종의 통제가능한 곳입니다. 교회가 시작되기 이전의 유대사회는 예루살렘 성전 체제 다른 말로 하면 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이 만들어놓은 율법과 조약의 통제 가능한 체제였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하늘로부터 내렸습니다. 이는 통제가능 한 율법 체제를 깨트리고 누구나가 하느님의 사도로 일할 수 있는 복음의 공적 체제로 나아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중요한 것은 거리로 나갔다고 해서 다 성령강림의 사건은 아닌 것입니다. 사도들은 예수 부활을 외쳤습니다. 로마와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을 향해 너희들이 죽인 갈릴리의 예수가 부활하였다고 외친 것입니다. 이는 권력자들을 향한 비판이었습니다. 그러자 저들은 사도들을 회유하고 때리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어제 향린교우들이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과 함께 명동 한 복판에서 하루 종일 진상규명법 제정을 위한 서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제 향린교회가 천막을 친 그 자리는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어느 교회가 활동하던 곳이었습니다. 자리를 내놓으라는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습니다.

 

향린교회와 이 교회는 모두 복음 활동을 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어느 것이 보다 성서적인 복음 활동입니까? 그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건 불의한 권력자들의 비위에 거슬리는 활동이냐 아니냐에 있습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교회에 대해 세상 권력자들은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저들의 활동은 국민들의 시선을 오늘의 현실이 아닌 저 세상으로 돌려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독인들은 이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데, 이는 곧 국가권력을 감시하고 세상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결국 성령강림 사건이란 믿는 자들을 사()적 영역에서 거리라고 하는 공()적 영역에로 나아가게 만든 사건입니다. 여기서 사냐 공이냐 하는 기준은 그것이 개인이냐 집단이냐 하는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소수가 다수를 통제하는 일이 가능하냐? 아니냐?에 있습니다. 국가나 기업 혹은 교회와 같은 집단은 양으로만 본다면 모두 공()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권력이 형성되면 그 집단은 한 두 사람의 말에 의해 좌지우지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를 독재국가, 사기업 혹은 담임목사 중심의 사적 교회라고 부릅니다. ()적이라고 하는 것은 권력이 골고루 분배됨으로 소수의 사람들이 이를 통제할 수 없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성령강림 사건은 바로 공이 사로 변한 당시의 사회를 다시금 공으로 돌려놓은 사건입니다.

 

오늘 민수기 본문 말씀은 이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70명의 장로를 진 밖으로 따로 불러 모읍니다. 거기에서 하느님의 영이 내리게 되고 저들은 모두 영에 사로잡혀 예언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함께 있지 않았던 두 장로 엘닷과 메닷 또한 영을 받아 예언을 합니다. 그러자 여호수아가 이를 모세에게 알립니다. ‘모세 지도자님, 저들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저들을 그대로 두면 질서가 어지럽히게 되고 지도자의 권위가 손상당합니다.’ 그러자 모세가 그를 타이릅니다. ‘너는 지금 나를 생각하여 질투하고 있느냐? 차라리 야훼께서 당신의 영을 이 백성에게 주시어 모두 예언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저는 여기서 모세의 위대함을 봅니다. 그는 자신의 권위가 하느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나온다고 하는 고백은 곧 통제가 가능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권력자들은 모든 것을 통제하고자 합니다. 통제 밖에 있는 사람들을 빨갱이로 몹니다. 정당도 해산시키고자 합니다.

 

민주주의 사회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한 표를 행사하는 각자의 생각과 주장을 펼 수 있는 곧 권력자들의 통제가 불가능한 사회를 말합니다. 그러기에 불의한 권력자들이 관심하는 것은 언론 장악입니다. 쿠데타가 일어나면 가장 먼저 장악하는 곳이 방송과 신문의 언론기관입니다. 오늘 사도행전 말씀을 보면 성령강림 사건을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언자 요엘을 통해 말씀하신 것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모든 사람에게 나의 성령을 부어 주리니 너희 아들딸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계시의 영상을 보며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때에는 남종과 여종에게도 나의 성령을 부어 그들도 예언을 하리라.”

 

여기서 우리는 아들딸들이 하는 예언의 내용이 무엇인지, 젊은이들이 본 계시의 영상이 무엇인지, 늙은이들이 꾼 꿈의 내용이 무엇인지 종들이 한 예언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로 인해 그 사회는 생명이 약동하는 사회가 되었고, 권력자들이 자기들의 입맛에 맞도록 통제할 수 없는 사회가 된 것입니다.

 

근래 남한 사회는 세월호 참사 이후 도덕적 불감증 확산과 관련하여 관료들의 집단 이기주의에 대해 공공성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부정한 방법으로 당선이 되고 부적격한 관료들을 제멋대로 임명하는 오늘의 사적으로 변해버린 국가권력에 대해 어떻게 공적인 민주주의를 바로 세워나갈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전국적으로 번져가고 있는 촛불집회는 바로 이런 물음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남한 사회는 냉혹한 무한경쟁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로부터, 무차별적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개인주의로부터 어떻게 공공의 윤리를 지켜내어 약자들이 죽음으로 내어 몰리지 않도록 할 것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에 직면해 있습니다.

 

오늘 상당수의 교회는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기업집단을 닮아있습니다. 최근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유병언의 구원파 뿐만이 아니라 대다수의 대형교회들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담임목사는 그 왕국의 왕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들은 모두 제명의 대상이 되고 축출의 대상이 됩니다. 이를 주제로 한 쿼바디스라는 영화가 10월말 마틴 루터의 교회개혁 기념주일을 맞아 상영될 것이라고 합니다. 교회가 교회다움을 빨리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는 오늘 성령강림절을 맞아 성령강림을 통해 유대종교와 유대사회를 본래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변화를 가져온 것을 기억하고 오늘의 교회가 걸어가야 할 길을 찾아내야 할 것입니다. 죽은 교회와 생명이 있는 교회는 단순히 목사가 부활을 외치고 있느냐? 외치고 있찌 않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성전 문을 열고 그 벽을 허물고 거리로 나가 예수 부활로서의 성전을 세우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의 사회적 약자들이 교회의 문을 두들길 때, 교회가 얼마만큼 저들을 향해 다가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교회의 생명력은 4층 식당이 얼마나 활기차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얼마나 세상 곧 거리에서 약자들의 권익을 위해 활동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찬예식을 갖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함께 나누기 위함입니다. 우리 안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 밖의 사람들과도 함께 나누기 위함입니다.

세례란 사적인 세계에서 공적인 세계에로 나아가는 출발점입니다.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게 된 첫 번째 변곡점 또한 세례였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에 하늘에서 비둘기모양의 성령이 내려왔습니다. 비둘기는 고대시대에 전령의 역할을 했습니다. 곧 하늘의 뜻이 예수에게 전달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는 세례를 통해 그간 30년동안 사인(私人)으로 살아왔던 삶을 청산하고 공인(公人)으로서 하늘의 뜻을 펼쳐나가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성령강림주일은 단순히 이천년 전 그런 일이 있었다는 과거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주일이 아닙니다. 120명의 사도들과 같이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보면서 모두가 예언을 하고 계시의 영을 보고 꿈을 꾸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예언을 하고 계십니까? 젊은이들은 어떤 계시의 영을 보고 계십니까? 어르신들은 어떤 꿈을 꾸고 계십니까? 난 어려요 난 이미 늙은 몸이에요 라고 스스로 자신을 규정하거나 통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로 하여금 좌절하거나 안주하지 않고 미래에로 나아가도록 우리의 등을 떠미시는 분이십니다. 미래를 향해 자신을 활짝 열어 재치시기 바랍니다.

 

향린교회는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에서 가장 큰 변환점이 되어 온 876월 민중항쟁의 불씨를 가져온 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된 장소입니다. 민주주의 역사의 살아있는 장소입니다. 달리 말하면 이천년 전 유대사회를 변혁시킨 마가의 다락방이 바로 향린교회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예언이고 우리가 보는 계시이고 우리가 꾸는 꿈입니다. 사에 매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공의 사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오늘 예수는 말씀하십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향린교회가 계속하여 이 민족과 이 사회에서 변화를 이끌어내는 출발점이 되고 목마른 민중들이 와서 목을 축일 수 있는 연대와 나눔의 교회가 되기를 바라면서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