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약속

시편 100:1-5; 출애 19:2-8; 로마 5:1-8; 마태 9:35-10:8

 

조 은 화 목사

 

한 주간 잘 보내셨습니까? 이 자리에 서게 되는 두 번째 시간이지만 언제나 떨림으로 다가옵니다.

 

지난 시간 저는 10년 지기 친구를 저의 부족함으로 인해 소원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관계가 되면서 그동안 참 소중했던 부분들, 그리고 아껴줄 수 있는 것들을 많이 놓치고 살았음을 아쉬움의 마음으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관계 안에서 어려움의 시간을 보내던 중 지난 수요일 무거운 소식들을 접했습니다. 송전탑 반대를 위해 목숨을 걸고 버티며 싸우던 밀양주민들이 경찰들의 무력 진압에 내몰려져 몸과 마음의 상처를 받은 소식입니다. 지난 번 우리에게 맛난 고추를 보내주셨던 할머니를 비롯하여 향린교회에 인연이 되어 함께 아픔의 이야기를 나누어 주셨던 분들이 겪었을 큰 상처와 아픔을 생각하면 함께하지 못해 참으로 죄송하고, 결과만 보려고 하는 정부에 화가 납니다. 같은 날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에 대한 이야기로 또다시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민심을 사려는 노력은 어디로 가고 한 나라의 중요한 일을 이끌어야 할 국무총리 후보를 일제식민지와 남북분단이 하느님의 뜻이었다는 하는 역사의식과 종교성마저도 없는 사람을 현 정부에서 후보로 내세웠다는 것은 참으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나라는 돈과 권력에 눈이 멀어 제 나라를 팔고 역사의식도 없고 정신도 없는 나라로 전락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섭니다.

 

오늘의 본문은 돈과 권력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삶이 결코 정당화 될 수 없음을 알게 합니다.

 

[어디로부터가 아닌 누구로부터의 해방]

 

출애굽기 하면 어떤 장면이 떠오르십니까? 보통은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 이집트를 탈출하게 되는 장면으로 노예 신분으로 살다 자유를 찾은 장면을 떠올리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출애굽기라는 이 책에 붙여진 이름은 우리를 혼동스럽게 만든다고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떠나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출애굽 자체가 아닙니다. 출애굽은 중요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과정입니다. 그 목적은 이스라엘과 계약, 약속을 맺으시는 사건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는 사건입니다. 어디로부터의 해방이 아닌, 누구를 향하여 해방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보게 하고 있습니다.

 

[출애굽의 이유]

 

오늘의 출애굽기19장은 왜 출애굽이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왜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이 탈출하도록 하셨는가? 그 무조건적인 해방에 대한 야웨 하느님의 뜻이 무엇이었는가를 함께 고민해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9장은 시내산에서 고대 헷족속의 종주-봉신 조약을 빌어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두 당사자 사이에 의무가 서로 부과되는 계약의 형식을 취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계약은 고대근동세계에서의 가장 기본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고 그 약속은 영원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 대하여 지금까지 어떻게 해방의 길로 인도하셨는지, 어떻게 독수리 날개에 태워 나르듯 하느님의 품으로 오도록 인도해 주셨는지를 기억하게 하십니다. 그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시면서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택하심을 받은 목적이 무엇인지를 언급합니다. 이스라엘이 좀 더 넓은 목적으로 성취되어 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약속을 맺도록 이끄십니다.

 

우리는 195절에서 다음과 같은 주님의 말씀에 귀기울이게 됩니다.

너희가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준 계약을 지킨다면, 너희야말로 뭇 민족 가운데서 내 것이 되리라. 온 세계가 나의 것이 아니냐?”(19:5)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자발적으로 응답하기를 기대하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 야웨께서 세워준 약속을 지킨다면 이스라엘은 주님의 귀한 것이 될 것임을 약속하십니다. 주님의 것, 귀한 것은 귀한 보물 이라는 뜻을 함께 갖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계약을 맺는다면 왕이 자기 왕궁 깊숙이 간직하고 있으면서 귀하게 여기고 남몰래 혼자서 보는 보물처럼 이스라엘을 소중한 존재로 삼아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사제의 직책을 맡은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주님의 뜻을 세상에 펼치는 사제로서 중재자로서 하느님의 뜻을 확장시키는데 헌신하도록 요구합니다. 힘에 의존하며 정치가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나라가 아니라 야웨의 뜻을 따라 운영될 나라, 억압하는 나라가 아니라 섬기는 나라로 이끄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주님의 이 같은 요청에 야웨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두 그대로 실천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 대답과 함께 이스라엘은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로 돌입합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19장은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계약, 약속의 맺게 되는 것이 왜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을까요? 하느님의 사랑이면 그저 다 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출애굽을 시켜주셨듯이 앞으로도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그냥 보호해주시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왜 인간의 결단이 담긴 대답을 들어야 하고 그런 약속의 관계를 요구하는 것인가?

 

출애굽기19장이 쓰여질 당시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바벨론 포로기로, 북이스라엘과 후에 남유다가 이웃나라들에 의해 패망하면서 그동안 주님께서 약속해 주신 약속의 땅, 민족, 모든 것들을 잃어버리는 어려움을 맞이하게 됩니다. 주님이 약속하신 땅에서 살고 나라가 세워지고 민족이 번영됐던 것은 주님의 백성으로서 영원한 결과물이자 받은 복이라 믿고 누렸습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 간에 귀한 약속이 이행되고 있다는 변하지 않는 증거로 인식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세월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축복이라 여겼던 삶에서 아무것도 없이 고난의 포로기를 겪어야 했던 이스라엘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잃어버림의 이유]

 

왜 축복이라 여겨진 모든 가졌던 것들을 잃어버리게 되었는가? 라는 질문이 던져집니다. 과연 이런 고난이 왜 찾아왔고 무엇 때문에 우리는 힘을 잃게 되었는가?

 

포로기를 겪으면서 이스라엘은 고난 가운데서 드디어 답을 찾게 됩니다. 그 답은 바로 지금 겪고 있는 고난은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늘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이 중간에 파기된 것은 야웨 하느님이 아닌, 바로 이스라엘 자신이 그 약속을 파기했다는 고백입니다. 돈과 권력, 외세의 화려한 문화에 취해 눈이 멀어, 결국 생명과 정의와 평화로 오신 하느님의 뜻을 잃어버리고 말씀을 따르겠다는 약속을 저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말씀과 멀어진 이스라엘은 땅과 나라와 모든 것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하는 방법은 오직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해방의 길로 인도해주신 뜻을 깨달아 그가 세워주신 말씀을 따르는 삶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세운 희망의 약속을 기억해내고 다시금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노예 된 신분에서 해방으로 이끄신 주님의 뜻 안에서 발견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과 약속을 맺음으로 그 결단가운데 어린아이처럼 어떤 일을 해도 용납하고 불평과 어리광부리는 나약한 민족이 아니라 이제는 새로운 관계를 통해 책임을 질 수 있는 민족, 이 세상에 주의 뜻이 이뤄지도록 헌신할 수 있는 힘 있는 민족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새로운 관계와 세상을 보는 눈]

 

이스라엘 백성은 고난의 원인을 어떤 다른 것이 아닌 자신들에게서 찾았습니다. 고통 받는 이유가 하느님의 말씀을 잃어버렸기 때문이기에 이제 다시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말씀을 찾아 살아가는 과제가 남은 것 입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통해 역사 속에서 실제로 역사하시는 야웨를 구체적으로 체험했습니다. 인도와 보호 그리고 그 가운데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맛보았습니다. 시내산에서 약속을 맺는 사건은 주님께서 왜 이스라엘을 도와 해방케 하셨는지에 대한 답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자유의 몸으로 살게 인도했듯이 너희들도 이 세상에서 그와 같은 존재로 평화를 위해 정의를 위해 생명을 위해 일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방법으로 주님은 이스라엘이 나아가기를 바라시며 약속의 관계를 맺습니다. 이러한 역사 속에서 희망의 약속은 어김없이 주어졌고 이스라엘은 그 약속을 다시 붙들고 따라간다면, 약속을 파기했던 이스라엘이 돌아온다면 주님이 함께 하시겠다고 하는 희망의 약속을 찾게 될 것이고 회복하게 될 것임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살아가는 모습은 이제 새로운 관계로 들어가게 되고 그러면서 우리가 속한 세상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마태오복음 9장 본문 저자는 예수가 목자 없는 양같이 시달리며 허덕이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추수할 것은 많으나 추수꾼이 없는 안타까움을 내보이며 주인에게 추수할 일군을 보내달라고 간곡히 청하라는 말씀입니다.

 

마태오복음 936절에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며 허덕이는 군중을 보시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라는 말씀 속에서 그 중 특별히 동사 두 개에 주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동사는 불쌍히 여기다라는 스플랑크논입니다. 창자에서 유래된 말로 당시 사람들은 창자에 동정심이라든지 긍휼히 여기는 마음 등이 담겨 있다고 보았습니다. 창자로부터 동정심이 우러나와 마음이 움직이는 것 이것은 창자가 찢어질 정도로 고통스러운 마음을 나타내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두 번째 동사는 시달리는 뜻을 담은 스퀼로라는 표현입니다. 이는 찢다, 난도질하다. 괴롭히다. 내던지다. 팽개치다. 탈진 약탈상태를 뜻합니다. 당시 목자없는 양 즉 민중의 상황이 극심한 고통으로 곤두박질한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낙인찍힌 힘없는 민중들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압박자에게 벗어날 수 없는 상태, 절망적인 상태였음을 알게 됩니다. 주님은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목자 없는 양들처럼 땅바닥에 내던져져서 뒹굴고 있는 민중들의 아픔을 보았습니다. 그 내던져진 양들은 들짐승들에게 짓밟히며 괴로움을 당하듯 온갖 질병과 굶주림, 악한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짓밟히고 있었습니다. 하여 주님은 죄인으로 낙인찍혀 사는 민중들을 고쳐주고 귀신을 쫓으며, 권세자들에게 민중은 일어날 수 있는 이들임을 보이시며 해방의 물꼬를 여셨습니다. 이어 제자들을 통해 그 혁명적 해방의 길을 가셨습니다.


[희망의 약속]

 

오늘의 마태오의 복음서 본문은 출애굽기를 통해 맺어온 희망의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겨 그들을 압제에서 벗어나게 인도해주신 것처럼 오늘 마태오복음에서도 예수가 그와 같은 눈으로 억압받는 민중들을 보고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불러주셔서 이끌어주신 구원의 손길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주님의 뜻 깊은 사랑을 체험한 이들은 이제 주님께서 말씀해주시는 삶을 따르겠다는 약속을 맺습니다. 그 약속은 우리를 좀 더 성숙한 삶으로 좀 더 깊은 차원으로 이끌어 주님께서 보여주신 해방의 물꼬를 우리들이 삶 안에서 열도록 인도하십니다.

주님께서 늘 지켜주고 계시는 희망의 약속을 우리는 오늘 되찾아야 합니다. 돌아가야 합니다. 매너리즘의 신앙생활이 아닌 새로운 관계로 언제나 그 자리에서 부르고 계시는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성공의 논리로 세상의 힘으로 뭘 해보겠다는 의지를 그 습성조차도 내버려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의 지도자들이 제대로 세워지고 우리의 자녀들이 온전한 사랑 속에 뜻을 세워가며 살게 될 것입니다.

    

요즘 제가 교회 7개월째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요즘 교우들이 종종 저에게 물어보시는 말씀은  교회에서 뭐가 제일 힘드냐는 질문입니다. 그럴때 저의 대답은 그렇게 힘든것은 없습니다. 다만 제가 처음 향린에 오게되며 기대하고 꿈꾸었던 향린의 공동체가 재개발로 인해 불협화음과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해 아쉽다고 말합니다. 이로 인해 상처를 받은 교우들이 많습니다. 재개발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 다들 옛날에는 안그랬다고들 하십니다. 향린공동체가 많이 변했다는 것이지요. 지금의 어려움은 왜 오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무엇인가를 놓친 것이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 보았으면 합니다. 서로의 아픔을 만져주고 하느님의 뜻 가운데 처음 향린공동체가 세워졌던 때의 고백을 다시 찾아야 할 것입니다. 눌린 자들이 자유케 되는 세상, 교회가 교회되는 공동체, 주님의 말씀을 실제적 삶 안에서 행동하는 희망의 세상을 위해 향린공동체는 세워졌습니다. 이제 그 뜻을 가졌던 정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지금 이순간 어쩌면 우리가 놓치고 있는 부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고통 받고 있는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세월호 침몰로 희생당한 학생들과 유가족들, 평생 살던 터를 잃어야 하는 밀양의 주민들, 말할 수 없는 아픔으로 고통에 싸여 난도질당한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향린공동체 안에서도 어려움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주님과 맺은 희망의 약속을 되돌아 보았으면 합니다. 그래서 믿음과 기쁨의 향린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