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와 칼의 역설] 남북화해주일

20:7-13; 69:7-10, 16-18; 6:4-11; 10:24-39

 

[한반도 정의 평화 실현을 위한 국제협의회]

 

지난 한 주간 WCC 세계교회협의회가 남북교회의 지도자들과 세계 35개 교단 대표 60여명을 초청하여 에큐메니칼 교육원이 있는 스위스 보세이라는 마을에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매우 뜻있는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는 공식적으로는 4년 만에 남북교회가 함께 한 자리였고, 정부 차원이나 민간 차원에서의 남북간에 만남이 거의 없는 현재의 분단 상황을 고려한다면 역사적인 자리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한국전쟁 발발 64돌을 기억하고 이를 넘어서고자 하는 남북화해주일이기에 이렇게 남북교회 만남의 보고를 드리는 일이 더욱 뜻 깊은 일이 됩니다. 남북간의 교류와 만남은 2000615일 김대중대통령과 김정일국방위원장의 정상 회담을 통해 활발하여졌고, 이어 200710.4 정상회담을 통해 강화가 되어 왔습니다. 그러다가 이명박정권과 더불어 금강산관광이 중지되고 개성공단이 축소되고 524 대북제재 조치가 시작되면서 남북간의 만남은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남한교회 또한 작년 세계교회협의회 10차 부산 총회를 앞두고, 조선그리스도교련맹(조그련)으로부터 평양 방문 초청장을 두 번이나 받았지만, 남측 정부의 불허로 말미암아 무산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년 부산 총회에서는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성명서를 채택하였습니다. 남한 정부에서는 이를 방해하는 작업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만, 이 성명서에는 미국이 주도하는 대북 적대정책 포기와 60년 이상 지속되고 있는 경제봉쇄 해제, 그리고 군사훈련 중지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일 등 한반도의 평화 구축을 위한 일련의 원칙들을 천명하였던 것입니다. 이번 만남은 조그련이 참석한 가운데 다시 한 번 세계교회가 이 원칙들을 확인하고 어떻게 실천하여 갈 것인가를 논의하였습니다. 이제 다음 주 세계교회협의회 중앙위원회가 모이면 여기서 논의된 사안들을 사업 정책으로 채택하게 될 것입니다.

 

[분단이념과 노예의식]

 

저는 이번 모임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화해통일위원장으로 참가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하였습니다. 왜 우리는 불과 차로 두세 시간이면 만날 수 있는 가까운 장소를 놔두고 하루 24시간이나 걸려 지구의 반 바퀴를 돌아 다른 나라에서 만나야 하는가? 노래 가사처럼 택시 값 단돈 5만원이면 서울서 평양까지 갈수 있는데, 왜 그에 수십 배에 달하는 비행기표를 사야만 하는가? 왜 이런 일이 지난 10년의 두 민주 정권을 제외하고 지난 70년의 분단 역사 속에서 60년이나 지속되어야 하는가? 도대체 이런 어리석음은 어디에 그 뿌리가 있는 것인가? 이렇게 살면서 우리는 자주민주독립국가라 과연 말할 수 있는 것인가?

 

1984년 세계교회협의회는 남북교회의 지도자간의 만남을 일본 도잔소에서 주선하였는데, 올해는 바로 그 만남의 30돌이 되는 해입니다. 30살이면 성인을 지난 나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남북교회는 세계교회협의회의 도움을 받아서야 만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오늘의 비극적인 현실이 참으로 제 마음을 괴롭혔습니다. 누가 우리의 만남을 방해하고 있는 것인가? 말도 다르고 피부색깔도 다르고 문화도 생각도 다른 민족을 만나는 것은 하나도 문제가 안 되는데, 왜 같은 언어에 한두 다리만 건너면 친척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남북의 한 형제자매들이 만나는 것은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 도대체 누가 이런 반인륜적인 못된 법을 만들어 놓았단 말인가?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 대해 저항과 독립의 외침을 외치지 못하고 오히려 여기에 노예와 같이 동조하고 있는가?

 

누가 순수한 종교인들의 만남을 방해하고 있는 것인가?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우리를 향해 불순 세력이라고 말하는데, 도대체 누가 불순 세력인가? 인류 형제애에 기초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명령하신바 서로간의 장벽을 허물고 하나가 되라는 평화의 사도인 우리 그리스도인이 불순 세력인가? 아니면 이를 방해하는 미국을 비롯한 외세와 박근혜정부의 통일부가 불순 세력인가? 조그련의 대표들을 만나는 기쁨도 있었지만, 동시에 자주권을 상실한 우리 민족을 생각할 때, 창피와 회오가 동시에 일어났었습니다.

 

이번 회의는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을 대표하는 위원장 강명철목사님과는 처음 만나는 자리였기에 우리 모두는 강목사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았었는데, 성찬식을 포함한 여러 예배와 성서공부 그리고 회의와 식사 자리를 통해 서로를 깊이 알아갈 수 있었고, 남북교회 지도자간에 신뢰를 쌓을 수 있었음은 하느님의 은혜와 섭리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강목사는 정의와 평화의 행로에 관한 고찰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정의란 조선말로 표현하면 올바른 것이고 그와 반대되는 올바르지 못한 것은 부정의, 불의입니다. 평화는 무장충돌같은 것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그와 반대되는 무장충돌같은 것은 비평화적이고 폭력과 전쟁입니다. 성경에서는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춘다고 (85:10) 하였고 정의가 당신 앞을 걸어 나가고 평화가 그 발자취를 따라간다(85:13)고 하였으며 정의는 평화를 가져온다(32:17)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평화는 정의로운 것이여야 하고 정의의 열매이어야 합니다.”라고 일일이 성서 구절을 언급하며 정의와 평화를 말할 때에 참석자들은 모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제가 설교 후에 강목사님의 원고를 직접 받아왔기에 교회 홈페이지에 그분의 설교 전문을 싣고자 합니다. 저의 영문 발제문 또한 조그련 교회에서 보관용으로 달라고 해서 주었습니다.

 

휴식시간에 강목사님에게 물어보았습니다. 할머님을 기억하고 계시냐고. 그랬더니, 대뜸 말하기를 어린 시절에 주로 할머님 밑에서 자랐는데, 이때 할머니는 장난감 총마저 갖고 놀지 못하도록 했다고 말하였습니다. 함께 참석한 노정선목사께서는 이 할머니가 되시는 강양욱목사님의 부인이 어떤 분인가를 이렇게 증언합니다. 미국 보스톤에서 목회할 때에 반주자로 있던 여집사님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자신이 강명철목사의 아버지가 되는 고 강영섭목사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던 사람이었음을 밝히면서, 그때 피아노 레슨을 하기 위해 그 집 현관문을 두들길 때마다, 사모님께서는 성경이 펴진 채로 들고 문을 열어주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제가 접해본 조그련의 어느 목사님보다 성서 구절을 자주 인용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할머니의 영향이 아닐까 추측해 보았습니다.

 

특별히 이번 모임에는 파리 국회에서 일제 정신대 피해 증언을 하기 위해 여행 중이시던 88세의 길원옥 할머님의 증언이 있었습니다. 할머님께서는 여러 번에 걸쳐서 전쟁이 일어나면 나 같은 피해자가 다시금 생길 수밖에 없으니 제발 전쟁만은 막아달라고 부탁할 때, 참석자 우리 모두는 깊은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역사의 모순]

 

그런데 이렇게 스위스에서는 남북간의 오랜 단절의 역사를 깨고 전쟁을 반대하고 세계평화를 향한 화해와 기도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반면에 지구 반대편 한반도와 이를 둘러싼 동북아시아 내에서는 그 반대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은 역사의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본 아베정권의 재무장 움직임 그리고 한미일 국방장관 사이의 협약을 통한 군사정보 공유 이에 새로 부임하는 미국 대사는 북의 핵 포기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북미간의 대화는 없다고 잘라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자신들이 갖고 있는 수천발의 핵은 선한 핵이고 북이 갖고 있는 몇 발의 핵이 악이 되는 그 근거는 무엇인지? 이야 말로 힘이 곧 정의라고 하는 제국의 논리가 아닌가? 게다가 우연히 본 어제 저녁 뉴스에서 미국은 대북경제봉쇄정책을 1년간 연장하기로 했다는 소식은 남북만남을 통한 저의 희망찬 마음에 찬물을 쫘-- 끼얹고 말았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외세들이 자국 이익의 논리에 따라 남북대결을 부추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우리 민족 내부에서 조차 이런 남북대결을 당연시 여길뿐더러 이를 하느님의 뜻이라고 얘기하는 몰상식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사람이 문창극국무총리 후보 지명자입니다. 그는 일제의 35년 식민지 지배와 남북분단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고, 심지어는 한국전쟁도 미국을 붙잡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정도가 되면 이는 단순히 친미를 넘어선 종미 노예적 발언입니다. 도대체 아무 일에나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가 남북으로 서로 갈라져 이산가족으로 한평생을 살아왔을 때에도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할 것인가? 세월호에 자기 아들딸이 죽었어도 그렇게 말할 것인가? 자기 혼자 괜찮다고 자기 가족 하나 무사하다고 이웃의 아픔에 이렇게도 무심한 사람을 과연 우리는 인간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일까? 인간(人間) 인자는 한자로 수 사람이 서로 기대는 모습이고, ()은 틈과 사이 곧 관계적 존재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웃의 아픔, 민족의 비극적 사건을 하느님의 뜻으로 말하는 곧 인간의 기본됨을 상실한 사람이 그간 언론사의 중책을 맡고 교회의 지도자로 일하고 게다가 지금 국무총리 후보로까지 언급되고 있다는 남한의 정치 현실에 저는 그만 입을 닫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간 남한 교회의 근본적인 신앙을 갖고 있는 소수의 목사들이 수만 명이 죽은 인도네시아의 쓰나미나 일본의 후쿠시마 핵폭발로 인한 비극을 향해 이들이 이런 비극을 겪는 것은 하느님을 믿지 않아 벌을 받은 것이다라고 말해 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건 정신 나간 일부 신앙인의 극단적 발언으로 치부하면 그만입니다. 물론 이로 인해 수많은 지성인들이 교회를 떠나고 젊은이들이 교회를 향해 침을 뱉고 등을 돌려온 것은 사실입니다. 기독교 내에서의 이런 일들은 이미 엎질러진 일이니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백성의 생명이 달려 있는 남한 정치의 핵심을 다루는 국무총리 후보자가 통일을 위해서 남북협상 같은 것은 필요 없고 하나님의 터지로 그냥 이루어진다고 말한다면 그는 단순히 기독교 신앙 근본주의자가 아닌 제가 보기에는 정신분열자로 보입니다.

 

역사의 퇴보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과연 이렇게까지 우리 역사가 퇴보해야 하는 것일까? 아직도 우리가 가야 하는 그 끝은 먼 것인가? 자괴감으로 인해 어찌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지금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시아의 정세는 이명박정권 아래 524 대북제제 조치가 시작된 이래 어떠한 희망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올해 초 남북이산가족 상봉을 통해 뭔가 길이 열리던가 싶더니 평양 점령을 목표로 하는 키리졸브 한미군사훈련이 이어짐으로 인해 남북충돌이라는 막다른 길을 향해 달려오고 있습니다. 6,70년대 박정희 유신정권 탄생의 주역을 담당한 공안검사 출신의 김기춘씨가 계속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있다고 하는 현실은 우리가 세상 달력으로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는 2010년대의 중반을 보내고 있지만, 실제 남한의 정치 이념 현실은 1960,70년대의 유신독재정권에서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꾐? 주님의 억지?]

 

오늘 예레미야 예언자가 당한 현실이 바로 그러합니다. “야훼여, 저는 어수룩하게도 주님의 꾐에 넘어갔습니다.” 예레미야는 가난한 민중들이 계속 힘 있는 자들의 손에 의해 휘둘리는 역사의 퇴보를 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정의와 진보를 외칠 수밖에 없는 자신을 보면서 하느님의 꾐에 넘어간 어수룩한 자로, ‘주님의 억지에 말려든 바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웃음거리가 되고 모든 사람에게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그는 날마다 욕을 먹고 조롱받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역사의 진보를 믿는 하느님의 사람들이 걸어가야 하는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야유와 비난 그리고 조롱을 넘어서서 야훼 하느님의 역사 진보의 승리를 고백하는 예레미야의 비장한 신앙과 확신에 찬 찬양이 오늘 우리의 살아 있는 신앙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남북분단을 하느님의 뜻으로 말하는 비정상적인 신앙인이 아니라, ‘우리는 주님 안에서 정의와 평등과 평화가 이뤄짐을 믿는남북분단은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 저지른 중대한 죄임을 고백하고 이를 넘어서기 위한 용서와 화해야 말로 진정한 하느님의 뜻임을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세상 권력은 예수와 그 제자들 그리고 초대교인들을 박해하였던 것과 같이 참 신앙인들을 박해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집 주인을 가리켜 베엘제불이라고 부른 사람들이 그 집 식구들에게야 무슨 욕인들 못하겠느냐?’ 예수를 향해 사탄의 두목이라고 부르는데, 나를 따르고자 애쓰는 너희들이야 무슨 욕인들 못하겠느냐?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감추인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 그렇습니다. 권력자들이 별의별 방식으로 자신들의 불의를 감추고자 하여도 시간이 지나면 모든 비밀은 절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겪는 오해나 비난은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은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세상 권력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영혼과 육신을 동시에 죽일 수 있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하느님께서 동행하신다는 확신이 들면 그 길에 묵묵히 걸어가면 되는 것입니다. 설사 그 길이 십자가 죽음의 길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평화의 외침 속에 담긴 칼의 역설]

 

그런데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는 말씀은 참으로 해석이 어려운 부분입니다. 이 말만 따로 떼어내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모두 칼을 드는 폭력주의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고, 왼뺨을 때리거든 오른뺨까지도 돌려대라고 하는 예수님의 원수 사랑과 평화의 정신에 위배되는 말씀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와 맞서고 딸은 어머니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맞서는 그래서 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다.’라는 오늘의 말씀 또한 현재 불화가 있는 가정이 서로를 변호하기 위한 말씀으로 변질될 수도 있고, 나아가 남북분단의 현실을 정당화하는 말씀으로 오용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서의 한 구절을 인용할 때에는 그 말씀이 성서 전체 맥락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잘 파악해서 인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는 말씀은 폭력을 사용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사람들 곧 권력자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 핵심입니다. 평화를 꾀한다고 해서 거짓과 불의에 침묵하고 동참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참 평화를 지키기 위해 거짓 평화를 외치는 세상 권력자들에게 불의함에 대항하기 위해 칼을 들어야 할 때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평화를 이루기 위한 저항의 상징이자 동시에 죽음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비록 우리가 세상 권력자들이 가진 더 큰 칼의 희생자가 된다 하더라도 저들의 거짓 평화에 입을 닫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평화실현과 가족이기주의]

 

자기 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라고 하는 말씀 또한 예수를 따름에 있어 때때로 가족들이 걸림돌이 될 때가 있다는 말씀이지 가족을 버려한 한다는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사도 요한이 말씀하는 바와 같이 눈앞에 보이는 가족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거짓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예수께서 강조하는 것은 살다보면 우리가 정말 예수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가족들과 맞서는 순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단지 제상에 절을 하느냐 절을 하지 않느냐는 그런 낮은 단계에서의 신앙 차원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의 정의로움과 평화를 위해 가족이기주의를 넘어서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를 어떻게 각 가정에 적용할 것인가는 각 가정마다 처한 형편과 처지가 다르기에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인간이 인간으로서 동물과 다른 점이 있다면 제 자식만 위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자식까지도 제 자식으로 사랑할 줄 아는 인류 보편 사랑일 것입니다. 숫사자의 경우를 보면 자기 씨앗을 전파하기 위해 암사자가 기르고 있는 새끼 사자들을 죽입니다. 인간 또한 동물이긴 하지만 이를 뛰어넘었을 때 비로소 인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월호에서 자신의 구명대를 친구에게 줌으로 친구는 살리고 대신 죽었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자기 자식들에게 들려주면서 너희들도 이런 경우를 당하면 그렇게 하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제 자식에게 그렇게 가르칠 수 없다면 그 부모는 아들이나 딸을 예수보다 더 사랑하는 곧 예수를 따르는 자격을 상실한다는 말씀입니다.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자기 목숨을 얻을 것이다.'라는 의미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자기 집안 식구가 자기 원수라는 말은 사회의 공익을 위해 사사로운 이익을 포기하는 사람이 되도록 가르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지난 목요일 한겨레에 실린 한 독자의 글을 인용함으로 오늘의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지금 한국교회에는 세습, 탈세, 성폭력 등 이 사회의 문제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신도가 고객이 된 지 오래다. 예수는 혁명적이지만 교회는 세속적이다. 예수는 희생을 택했으나 교회는 권력을 추구한다. ‘개독교와 빤스목사가 난립해도 공산당 타령이다.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에 가장 앞장 서는 이들은 다른 아닌 선민의식으로 가득한 기독교인들이다. 기독교식으로 보자면 인간은 신 앞에 평등한존재다. 지금 이 시대를, 이 땅을, 예수가 살아간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예수는 스스로 지배자가 되지 않고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섬겼다. 그것이 하나님의 터치.(34쪽 이라영)

 

오늘은 특별히 한국전쟁이라는 과거의 반목과 미움을 넘어 화해와 상생의 미래를 열어가고자 다짐하는 남북화해주일입니다. 지난 몇 년동안 우리는 매년 이 날을 맞아 남북나눔헌금 약정을 하여왔습니다. 점점 그 약정자가 줄어들고 있는 현실이 바로 민족통일을 향한 우리의 관심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은 아닌가 하여 걱정이 됩니다. 이는 단지 물질로 얼마를 돕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우리가 남북의 평화 통일이 지금 우리들 신앙의 핵심임을 다짐하고 함께 기도하자는 의미인 것입니다. 한 주에 단돈 천원이라 하더라도 그 액수에 상관하지 마시고 향린교인 모두가 빠짐없이 참여하기를 기도합니다. 바란다면 한 주에 한 끼를 금식하면서 그 금액을 나눔 헌금으로 드릴 수 있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오늘의 시편기자의 고백이 우리 민족의 고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몸은 하느님을 위하여 욕을 당했고 온갖 모욕을 다 받았습니다. 동기간에게는 따돌림을 받았고, 당신 향한 욕설이 이 몸 위에 쏟아집니다. 내가 단식하며 목매어 울었더니 그것이 도리어 놀림거리가 되었습니다. 야훼여 당신 사랑 어지시오니 들어주소서, 당신의 종을 외면하지 마옵소서, 가까이 오셔서 이 목숨 건져주시고 원수들에게서 이 몸을 속량하소서.”

 

세상 민족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이 치욕의 남북분단이 하루 속히 끝나고 화해와 통일의 새 역사가 우리 한반도에 펼쳐지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