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종

28:5-9; 89:15-18; 6:12-23; 10:40-42

 

세월호 참사 사건 이래 우리 남한 사회는 물밑에 잠자고 있던 온갖 비리와 불의한 일들이 계속해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 저희들이 한국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아픔을 넘어 화해와 상생이라는 미래를 향해 남북화해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던 그 시간, 동부 철책선 부근에서는 한 병사에 의한 총기사건이 일어나 5명의 군인이 죽고 여러 군인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근래 보기 드문 총기 사건이었습니다. 저는 남한이 세계 제일의 자살률 국가가 된 것이 단순히 개인들에게 그 책임이 있다기보다는 사회적 구조에 있다고 보는 것과 같이 이번 총기사건 또한 문제 있는 병사의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군대라고 하는 명령/획일/권위 집단이 갖고 있는 잠재적인 폭력성이 겉으로 드러난 또 하나의 세월호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관심(문제) 병사와 국가주의]

 

관심병사로 불리는 병사들은 심리적 육체적으로 군 생활에 어려움을 겪어 동료들로부터 왕따를 당하는 병사들뿐만 아니라, 상관의 부당한 명령에 항의하거나 혹은 밀양이나 강정과 같이 국가폭력에 시달리는 마을 주민들 편에 서서 정의로운 행동을 하였던 사람들 또한 관심(문제)병사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어떤 틀을 만들어 놓고 이에 맞지 않는 병사들을 모두 문제 병사로 구분하는데, 이는 그야말로 개인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는 반민주적인 작태인 것입니다. 히틀러시대에 순수 독일인이라는 틀을 정해놓았습니다. 머리 크기는 얼마? 눈은 무슨 색깔? 그리고 이 틀에 맞지 않으면 순수 게르만의 피를 더럽히는 이방인으로 분류했습니다.

 

21세기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틀과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앞으로 자라나는 아이들은 대부분 현재의 분류방식으로 가면 모두 문제병사가 될 것입니다. 학교 교육에 적응하지 못한다고 해서 문제 학생이라고 한다면 에디슨과 아인슈타인이야 말로 문제학생이었습니다. 정작 문제는 학교 교육은 부모가 대신할 수도 있고 대안학교도 있지만, 군대는 대안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징집을 거부하면 모두 감옥에 넣고 있습니다. 단순히 문제병사로 구분만 할 것이 아니라, 대안복무제도를 만들어 다양한 방식으로 군복무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그리고 남북이 평화 협정을 통해 군인의 수를 최소한으로 줄여나가는 군비축소정책을 하루속히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20대 초반의 젊은 시절,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의 창의력이 가장 왕성한 시절에 획일적인 틀을 강요받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희생일 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엄청난 손실인 것입니다. 이번 총기사고로 희생을 당한 가족들 위해 하느님의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하면서 이번 기회를 통해 세월호에서와 같이 막연한 애국심을 넘어 국가주의와 군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점입가경(漸入佳境)의 박근혜정권]

 

그런데 점입가경이라고 이런 일들을 책임지고 나아가야 할 정부는 점점 더 국민의 바람과는 반대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주 우리는 희극이라면 희극이요 비극이라면 비극이랄 수 있는 사건이 청와대에 의해 행해졌는데, 그건 세월호의 책임을 물어 사표를 처리한 국무총리를 다시금 유임한 일입니다. 세계 정치사에서도 매우 드문 희극입니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손님이 음식이 상해 먹지 못하겠으니 새로 만들어달라고 요구하니까 주방장이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고는 부엌에 들어가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 것처럼 이것저것 시도 해보더니 아무래도 맛이 나오질 않아 결국 가져갔던 그 접시를 다시금 갖고 나와 먹으라고 강요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문제가 어디에 있는가? 그건 그 집 식당에 준비되어 있는 재료가 모두 상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까기 마사오라는 친일과 유신이라는 독재자 자기 아버지 박정희를 찬양하는 뉴라이트라는 구시대의 틀에 맞는 재료만을 준비해 놓았기에 그 안에서 아무리 섞어보았자 손님들의 입맛을 맞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나라에 국무총리 할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할 사람은 많습니다만, 첫째는 현재의 관권선거라는 불법으로 탄생한 권력과는 생리적으로 많지 않은 것이고, 두 번째는 뜻이 맞으면 그건 그 사람은 불법과 부정으로 얼룩져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옛날 같으면 관제 언론을 통해 다 무사통과할 사람들이지만, 지금은 SNS 시대에 비밀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꿈속에서 한 얘기를 빼놓고는 모조리 드러나고 있습니다. 아무리 바꿔보아도 그 나물에 그 밥이라 결국 세월호 사건 책임을 지고 물러났던 총리를 다시금 유임시키는 악수를 두고 말았는데, 이는 결국 따지고 보면 세월호 사건 책임지지 않겠다는 얘기입니다.

 

현 정부는 유병언이라는 한 개인에게 그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우려고 별 짓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요즘 세월호 재판이 시작되면서 새로운 사실들이 계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어떤 물체가 갑자기 튀어나와 이를 피하려고 급히 키를 꺾었다는 항해사의 발언, 조금만 꺾었는데 갑자기 더 많이 꺾였다는 애초의 기자회견 발언들을 고려해보면 지금은 수면 아래로 들어간 충돌설이 가장 유력해 보입니다. 물론 배를 끄집어 올리면 더 확실해지겠지만, 천안함마냥 어떤 충돌에 의해 천천히 두 쪽으로 갈라진 것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북 잠수정에서 발사한 어뢰로 인한 폭발로 규정하는 이 비이성적인 불법 사회에서 세월호에 구멍이 났다 한들 그건 바다 밑 바위에 의한 충격 때문이다라고 하면 끝나는 것입니다.

 

[두 부류의 예언자]

 

오늘 로마서에서 바울 선생은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진실한 가르침을 통해 죄의 권세를 벗어나서 정의의 종이 되었습니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지만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란 무엇입니까?

 

그건 말씀 첫 부분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결국 죽어버릴 육체의 욕망에 굴복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죄의 지배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또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기어 악의 도구가 되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육체의 욕망에 굴복하는 일이 죄요, 그런 일을 행하게 되면 인간은 악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욕망이란 자기 자신만의 유익을 꾀하는 이기적인 행동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의와 유익을 보다 중요한 판단의 기준으로 생각하지 않고 눈앞에 닥친 자신의 의와 이익만을 생각하여 취하는 행동을 말합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또 다른 예언자 하나니야에 맞서 이렇게 말합니다. “야훼께서 당신이 말한 그대로 성전 기물과 포로들을 바빌론에서 이곳으로 되돌려 주신다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소. 잘 들어두시오, 예전부터 우리 선배 예언자들은 나라에 전쟁과 기근과 염병이 있겠다고 예언하였소. ‘잘되어간다고 예언하는 예언자는 그 말이 맞아야만 참으로 야훼께서 보내신 예언자인 것이 드러날 것이오.” 예레미야는 거리의 예언자입니다. 하나니야는 국가 권력을 대변하는 예루살렘 성전의 예언자입니다. 예레미야는 힘없는 백성들 편에 서서 불의한 국가 권력을 향해 비난과 심판이 있을 것임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하나니야는 권력자들의 편에 서서 시련은 잠시 모든 것은 잘 되어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뜻에 의한 평안과 축복을 말합니다.

 

이번에도 문창극총리 후보자에 대해 여러 대형교회 목사들이 그를 옹호하는 성명서를 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니야와 같이 정의로운 자들의 편에 서시는 하느님의 대변자들이 아닌 국가권력의 대변자들입니다. 이번 행동은 무너져가는 남한의 기독교를 더 빨리 무너지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듯이 예레미야는 듣기 싫어하는 얘기를 한다고 권력자들과 백성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하나니야는 점점 더 많은 인기를 누립니다. 그러나 결국 유다 왕국은 예레미야가 예언한 것처럼 나라는 멸망당하고 성전은 폐허가 되고 맙니다.

 

{예언자}라는 탁월한 책을 펴낸 에이브라햄 헤셀은 말합니다. “예언자의 말은 가혹하고 쓰며 가시가 돋아 있다. 그러나 그의 엄격함 뒤에는 사랑과 인류에 대한 동정심이 숨어 있다. 실로 장래에 닥칠 재앙에 대한 예언은 한마디 한마디가 뉘우침을 권하는 말이다. 그는 파멸의 메시지로 시작하여 희망의 메시지로 끝난다. 그에게 맡겨진 근본적인 사명은 지금 여기에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며, 현재에 숨어 있는 것을 보다 분명히 드러내기 위하여 미래를 선포하는 것이다.”

 

저도 우리 모두가 듣기 좋고 말하기 편한 이제 시련은 끝났습니다.’ ‘평안한 세상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하느님의 축복을 누리십시다.’라고 외치고 싶습니다. ‘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형통할 것입니다.’ 라고 축복 선언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제 양심과 이성이 이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시험을 앞둔 제 자식에게 기도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가르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뜻하고 말하지만, 하느님이 원한다고 해서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이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비와 구름은 하느님께서 주관하시지만, 땅에서 하느님의 사람들이 해야 할 몫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느님이 바라시는 좋은 세상이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독생자 아들 예수께서 마굿간을 통해 이 땅에 오신 이유이고 로마제국에 의해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신 이유인 것입니다.

 

[‘침노애씀의 이중성]

 

마태복음 1112절은 매우 해석하기가 어려운 구절입니다. 공동번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번역은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11:12)라고 번역함으로 하느님의 나라는 애쓰고 노력하는 자의 몫이라는 긍정적인 해석을 해놓았습니다만, 우리가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공동번역은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해 왔다. 그리고 폭행을 쓰는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고 번역함으로 하늘나라가 폭행을 쓰는 자들에 의해 빼앗기고 있다는 부정의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쓰인 희랍어 동사 비아조(Biazou)라는 폭행을 사용한다는 부정의 의미와 애를 쓰고 노력해서 얻는다는 긍정적 의미가 함께 있습니다. 문법적으로는 양쪽 다 번역이 옳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몫이라는 번역을 사용하고 있는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이를 이렇게 번역을 하면 구원이 곧 행위에 의한 것임을 뜻하기에 구원은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이라는 기본 교리에 위배된다고 보아 이렇게 번역을 해놓고서도 이것이 행위가 아님을 적극 증명하려고 하는 반면에 공동번역은 이를 폭력이라고 번역함으로 행위 자체를 스스로 차단해 놓고 말았는데, 문제는 정작 그러면 이러한 폭행에 대항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이 뒤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평행 구절인 누가복음 1616절과 비교하면 어떤 해결이 나오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요한 때까지는 율법과 예언서의 시대였다. 그 이후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되고 있는데 누구나 그 나라에 들어가려고 애쓰고 있다.” 이 구절은 다른 번역들도 공동번역과 대동소이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애쓰고 있다고 번역된 희랍어 동사는 마태복음에서 침노/빼앗다/폭행으로 번역된 동사와 같은 동사입니다.

 

그러니까 공동번역은 하느님 나라와 관련하여 마태복음에서는 폭행을 행하다라는 부정의 의미로 번역하고 누가복음에서는 애쓰고 있다는 긍정의 의미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분명한 자체 모순입니다. 물론 같은 단어라도 문맥에 따라 다르게 번역할 수는 있지만, 공동번역은 전연 반대로 번역을 하는 그 근거가 제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여기서 마태복음의 공동번역이 잘못된 것으로 판단합니다. 말씀 자체에 기초하기 보다는 교리에 좌우된 번역입니다.

 

그 판단의 근거는 이렇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그런데 모든 예언서와 율법이 예언하는 일은 요한에게서 끝난다. 너희가 그 예언을 받아들인다면 다시 오기로 된 엘리야가 바로 그 요한임을 알 것이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왕국이 가장 잘나가던 시절의 아합왕과 이방 여인 이세벨 왕비가 행했던 국가 폭력에 대해 야훼 하느님의 이름으로 가장 극렬하게 대적하고 갈멜산의 대결을 통해 백성들과 더불어 악한 세력을 물리친 예언자 중 가장 두드러진 인물입니다. 한마디로 엘리야는 기도의 예언자였지만, 정치적 투쟁을 가장 치열하게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아합왕의 뒤를 잇는 예후를 왕으로 기름 부어 세운 일종의 역성혁명을 주도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하늘나라는 세상 권력에 대항하는 투쟁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의미에서 말씀한 것이고 그러한 투쟁 또한 끝나가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이러한 세례 요한과 엘리야가 취했던 불의한 권력에 대항하는 의의 투쟁없이 새로운 시대로 건너 뛰어 가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폭행으로 번역된 희랍어 동사는 투쟁으로 번역되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폭행이 아닌 애씀과 투쟁]

 

우리가 Biazou 동사가 갖고 있는 긍정적 의미에서의 애씀과 투쟁이라는 시각을 가질 때에만이 오늘의 마태복음 말씀 1040절로 42절까지의 말씀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지난 주 1034절과 38절의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는 말씀과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라는 말씀과 함께 해석되어져야 하는 말씀이지 이 구절만 때로 데어놓고 해석하여서는 안되는 말씀입니다.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며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사람이다.” 누구나 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합니다. 진보든 보수든 정통이든 이단이든 여든 야든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예수를 맞아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앞서 하신 말씀 자기 목숨을 잃는 일과 연계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들이는 일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엘리야를 맞아들이는 일은 국가 폭력에 저항함으로 정치적 고초가 뒤따르는 일이었습니다. 옳은 사람을 옳은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정의 규정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강자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닌 약자의 편에 서는 일입니다. 밀양 할매들 편에 서고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 편에 서는 일이고 강정마을 사람들의 편에 서는 일입니다. 재판을 하면 언제나 이들은 불법을 행하는 사람으로 형을 받습니다. 따라서 옳은 사람을 옳은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자기 희생을 불러 올 수밖에 없는 일들입니다. 이번 주 금요일에도 향린공동체가 주도하는 제주 강정 해군기지 건설 현장 앞에서 평화기도회가 열립니다.

 

지금 이 남한 사회는 옳게 살아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사회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들을 보면 옳게 산 사람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시민 사회 원로들이 모여 성명서를 발표하였습니다. 제목은

 

[계속 민심을 거스르면, 파국을 면치 못할 것이다]

 

(첫 부분만 읽어보겠습니다.) [박근혜정권의 인사 참극이 도를 넘고 있다. “일제 식민지는 하나님의 뜻이다를 공공연히 발언할 정도로 반민족적인 신념을 안고 한평생 우편향의 길을 걸어온 문창극씨를 총리 후보로 지명한 것이 그 극단적인 사례이기는 하나, 2002년 차떼기 당시 의원 매수 사건의 주역이고 1997년 안기부 대선 개입 사건에도 연루 의혹을 받고 있는 이병기 국정원장 후보, 제자 논문 가로채기와 표절이 확인된 것만 해도 무려 12건에 이르고 국정교과서 체제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김명수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 후보, 국가 공식 추념일로 지정된 제주 43사건을 공산주의 세력의 무장봉기로 규정한 정종섭 안전행정부 장관 후보, 그리고 세월호 참사를 부른 각종 규제완화를 적극 주장하며 경제 민주화, 복지 정책을 공개적으로 부정할 뿐 아니라 규제를 완화하여 부동산가격 참사를 초래할 위험이 있는 최경환경제부총리 후보 등 내각후보 대부분이 국민들이 수용할 수 없는 부적절한 인물들이다.

 

내각만 그런 것이 아니다. YTN 노동조합으로부터 권력만 바라보는 인물이라는 비판을 받은 윤두현 YTN플러스 사장을 청와대 홍보수석에 앉히고, 국방부장관 시절 일어난 군사이버사령부의 대선개입 사건에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대내 심리전은 국민을 오염으로부터 막기 위한 불가피한 작전이라고 강변하던 김관진전국방장관을 국가안보실장으로, 검사 시절 맥주병으로 기자의 머리를 내리친 김영한씨를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친일과 독재 미화로 물의를 일으킨 박효종씨를 방송통신심의위원장에 임명하는 등 줄줄이 문제되는 인물들로 점철되어 있다. 따라서 김기춘 비서실장 등 인사 참사에 책임 있는 사람들의 해임 등으로 책임을 묻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정의의 종]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남한사회의 윗물이 이렇게 혼탁하여 있으니 아랫물이 맑기를 바라는 것은 연목구어입니다. 박정희독재 정권도 결국 민심을 거스르다가 파국을 맞이했습니다. 캄보디아의 폴 포트 정권처럼 백성 2백만쯤 죽여도 된다고 주장하던 차지철을 경호실장으로 두고 자기방식만 고집하다 역사의 죄인으로 사라졌습니다. 지금의 정권 또한 아버지를 따라 계속 민심을 거스르고 자기만의 방식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국민들과 대화는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귀와 눈을 닫은 지 오래 오로지 입만 열려 있습니다.

 

정희진교수는 말합니다. “예전에 아우슈비츠 이후에는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 있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 모두가 아우슈비츠에 갇히게 되었다. 인양되지 않는 바닷속 폐선에, 밀양 송전탑 위에, 왕따 당한 탈영병의 총부리 앞에, 곳곳이 분향소다.”(한겨레 2014.6.28. 2) 맹목적으로 정부를 믿고 따라가기에는 너무나 위험한 세상입니다. 국가 권력의 부패로 인한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모호하게 된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예수님과 성서의 말씀에 귀를 기우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온몸을 더러운 일과 불법의 종으로 내맡기어 불법을 일삼았지만 이제는 온몸을 정의의 종으로 바쳐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정의의 종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특히 향린교회는 지난 61년의 역사가 말해주듯이 이웃과 이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정의의 종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듯이 하느님의 나라는 예언자 엘리야의 정신으로 세상 권력의 불의함을 비판하고 예수께서 그러했듯이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하는 연대 투쟁을 통해서만이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더욱 힘써 정의로운 길로 나아갈 것을 다짐하며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