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선포하자

즈가 9:9-12; 145;8-14; 7;15-25; 마태 11:16-19; 25-30

 

미국의 한 기독교단체에서 사회 여론조사를 했습니다. “‘예수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무엇인가?”였습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내놓은 대답은 지혜’ ‘수용’ ‘긍휼’ ‘은혜로움’ ‘겸손함등이었습니다. 이어 크리스챤이란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무엇인가?”라고 물었더니 이번에는 배타적’ ‘자칭 의인’ ‘편협함’ ‘억압적등의 대답이 가장 많이 나왔다고 합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이란 예수를 따르는 사람으로 이해하는데 반해 세상 사람들은 예수에 적대적인 사람들, 곧 예수의 배반자들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유하랴?]

 

오늘 예수님의 첫 말씀이 우리의 폐부를 깊게 찌릅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마치 장터에서 아이들이 편 갈라 앉아 서로 소리 지르며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았다.’ 하며 노는 것과 같구나.” 저희 어렸을 때, 남자들의 놀이는 딱지치기, 구슬치기, 자치기, 팽이돌리기 등이었습니다. 반면 여자애들은 공기, 고무줄넘기, 술래잡기 등이었습니다. 예수가 살았던 시대에 아이들의 놀이는 어른들을 흉내낸 결혼식과 장례식 놀이였습니다. 남자 여자 둘로 편을 갈라 남자애들이 피리를 불고 장단을 치면 여자애들은 춤을 추면서 결혼식의 흥겨운 모습을 보여주었고, 여자애들이 가슴을 치며 곡을 하는 장례식 모습을 보여주면 남자애들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염을 매고 상여를 매고 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놀이였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남자애들이 피리를 불며 결혼식 모습을 보여주는데도 여자애들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여자애들이 가슴을 치며 곡을 하여도 남자애들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가장 천진스런 아이들조차 놀이에 몰입하지 못하고 무감각한 반응을 보였다면 이는 세월호와 같은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그 사회가 얼어버린 상태이고 광주항쟁과 같은 국가 폭력으로 백성들의 입이 닫힌 비상 상황을 말합니다. 이는 소통부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입 닥치고 숨죽이고 가만있어야 하는 통제 사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가끔 만나는 이수호선생께서 {겨울나기}라는 시집을 또 내셨습니다. 평생을 국어교사로 시대의 부름을 받아 전교조위원장과 민주노총위원장을 역임하셨고 기장의 한 작은 교회에서 교사로 성가대원으로 봉사를 하시는 집사님이십니다.

 

시 제목은 [가만있어라]

 

그 큰 배가 흔들리며 한쪽으로 기우는데

방송은 움직이지 말고 가만있어라만

반복하고 있었다

의심과 저항은커녕

자율과 자주도 불온으로 배운

열일곱 우리 청소년들

방송 조회 교장 선생님 훈시로 여겨

몸도 가누기 힘든 경사 바닥에

옹기종기 손 마주잡고 엉켜 붙어 있었다

교사들도 그랬다

움직이지 마라 지시대로 따라라 외치며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기능은 거세된 채

사랑한다 아이들아

끌어안고 울고만 있었다

 

오늘도 이 땅 여기저기서

가만있어라 한다

 

용산참사 유족들도 가만있어라

쌍차 불법 정리해고 노동자도 가만있어라

강정마을 주민들도 가만있어라

밀양 송전탑 주민들도 가만있어라

현대차 불법파견 비정규직 노동자도 가만있어라

유성기업 노조 파괴당한 노동자도 가만있어라

철도노조 부당해고 강제전보당한 노동자도 가만있어라

농토에 쌀값까지 뺏긴 농부도 가만있어라

재개발에 밀려난 철거민도 가만있어라

부양의무제 등급제에 불타 죽는 장애인도 가만있어라

불법 체류에 쫓기는 노동자도 가만있어라

최저임금이라도 제대로 달라는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도 가만있어라

연수생이란 이름으로 날밤을 세우는 고등학생들도 가만있어라

노동자의 이름도 못 쓰게 하는 특수고용노동자들도 가만있어라

아무런 안전대책도 없는 수많은 아르바이트 노동자들도 가만있어라

가난의 고통에 몰려 번개탄을 피우는 세 모녀도 가만있어라

가만있어라 가만있어라

가만있어라

 

우리 학교가 자율과 자주를 가르치고

우리 사회가 의심과 저항을 가르쳐야 한다

나라가 나라의 몫을 못하는 나라에서 국민이 스스로 살아남게 하기 위해

이제는 가만있을 수가 없다

아니 가만있지 않겠다

 

[호모 레지스탕스]

 

이방인』 『페스트』 『시지프의 신화등 여러 문제작을 남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알베르 까뮈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철학자 데카르트의 말을 인용하여 나는 저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그는 실제로 히틀러에 대항한 프랑스의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면서 국가 폭력에 저항하는 자유인 호모 레지스탕스의 인간형을 외쳤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21세기 스마트폰 시대에서 사람들은 생각을 싫어하고 자기 성찰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생각이 없고 성찰이 없으니 자기와는 무관하다고 여겨 국가 폭력에 대해 저항하지 않습니다. 물론 저항하면 얼굴에 빨간색이 덧칠해지고 영장과 벌금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건 내 일이 아니다라고 잠잠하면 배와 함께 침몰합니다. 우리가 언제부터 배가 기울고 물이 차올라 오는 비상상황에도 판단을 보류하고 스피카에서 나오는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에 복종하는 로봇형 인간으로 전락하기 시작했을까요? 제가 11년 전 24년만의 외국 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온 직후 아니 지금도 받는 문화적 충격은 아파트 방안에 설치된 스피카를 통해 경비실에서 알리는 소리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농촌을 가면 대형스피카에서 노래가 울려나오고 이장의 '오늘은 민방위 날입니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는 조지오웰이 동물농장1984을 통해 고발하고자 했던 국가통제의 한 방식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부자와 성공이라는 신기루에 정신이 팔려 자기 안에 갇힌 누에 인생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민족이니 공동체니 하는 단어가 사라진지 오래되었습니다. 젊은이들의 입에서 통일이라는 단어가 사라진지 오래되었습니다. 배낭 메고 외국을 그리 돌아다녀도 다른 나라 사람들이 자기 나라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전연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자기됨의 근본을 잃고 파편화된 이기적 삶을 살게 되기 시작한 것은 남북분단으로부터 출발합니다. 형제자매간에도 심지어는 부모와 자식 간에도 서로를 의심하고 고발하도록 만든 분단이념 갈등이 우리 모두를 파편형 인간으로, 독방형 인간들로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동무라는 아름답고 순수한 우리말을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고, 사람 인()에 백성 민() 인민(人民)이라고 하는 좋은 단어가 있음에도 이 단어를 쓰면 불온시 여김을 받게 되자 국민(國民)이라는 일제군국주의가 심어준 단어를 마치 제 것인 양 자랑스럽게 사용하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끝나지 않은 전쟁]

 

남한의 언론에는 짧은 몇 마디로 보도가 나왔지만, 북조선 최고 권력기구인 국방위원회는 지난 3074 남북기본합의서 20돌을 맞이하면서 상대방에 대한 비방 중상을 전면중지할 것을 호소하고 모든 군사적 적대행위도 선제적으로 중지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과 우리 민족끼리의 정신으로 남북관계 개선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나가자고 남한 당국에 제안했습니다. 그간 박근혜정부가 김대중정부의 615 남북공동선언이나 노무현정부의 104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래도 자기 아버지가 합의한 74 남북기본합의서에는 반응을 보일까 하여 제의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인천아시안게임을 비롯해 남북 사이에 활발하게 벌어질 교류와 접촉의 사전분위기를 마련하기 위해 "올해 8월 미국과 함께 벌리게 된 '을지프리덤 가디언' 합동군사연습 계획을 즉시 취소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건 맞는 얘기이지요. 곧 북조선의 선수들이 남한에 체류하며 동아시아의 우애와 평화를 위해 경기를 치룰 예정인데, 남한에서 북조선 사람을 죽이는 군사훈련을 한다는 것은 사리에 어긋난 행동이지요. 제가 어느 나라를 방문하려고 계획 중인데, 그 나라에서 남한 사람을 죽이는 군사훈련을 한다고 하면 제가 갈수 있겠습니까?

 

그래 제가 위원장으로 있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화해통일위원회는 특별성명을 내어 남한 정부가 이러한 북조선 정부의 요청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남북대화에 적극 나설 것을 요구하였습니다만, 실망스럽게도 남한 정부는 단 하루 만에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진의파악을 위해 한번 만나기라도 해 보았으면 좋으련만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식으로 매몰차게 내치고 말았습니다. 물론 별반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여운을 남겨두는 역제안이라도 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안타까움을 넘어 일종의 분노와 수치를 느끼는 것은 저만이 느끼는 일일까요? 남북대결로 북조선이 당해야 하는 고통은 말할 것도 없지만, 우리 남한 또한 그 손해가 막심합니다. 우선은 이산가족들입니다. 이제는 모두 나이가 들어가며 한 분 한 분 돌아가시고 있습니다. 피를 나눈 가족이 60년 이상 만나지 못한다는 건 인간이란 동물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야만과 어리석음의 극치입니다. 이를 당연시 여기고 체념하는 우리 모두는 인간 이하 개만도 못한 존재들입니다.

 

이렇게 서로에 대한 적개심만 키우다보니 무기 생산과 쓰지도 못할 신무기 구입에 엄청난 세금을 투입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조그련의 이정로목사님께서 이렇게 말합니다. “탱크 하나와 생필품 공장 하나가 맞먹습니다. 우리는 공장을 짓고 싶은데, 한미 군사력에 대항하기 위해 탱크를 만들 수 밖에 없습니다.” 북쪽만 그러나요 남쪽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통령 후보 시절의 복지 공약들이 휴지 조각이 되고 말았습니다. 특히 65세 이상 모든 어르신들에게 월 20만원 주겠다고 그렇게 큰소리치더니 이제는 하위계층만 준다고 합니다. 상위 하위 나누면 자존심 상해서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최저 2만원으로 정말 껌 값 수준입니다. 그리고 다수의 하위 계층은 이미 생계형 지원을 받고 있었는데 이를 끊고 대신 노인복지 명복으로 주겠다고 하니 결국은 눈 감고 아웅입니다. OECD 국가 중 남한의 복지 예산 비율은 최하위입니다. 대신 군사비 지출 비율은 최고입니다.

 

결국 남북대결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남과 북의 가난한 민중들입니다. 게다가 사회가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으니 반대급부 현상이 일어 권력이 있거나 돈이 있는 사람들은 비리나 주식 부동산투기로 더 많이 차지합니다. 그러니 언제까지 가만있으라는 권력자들의 말을 믿고 살아가야 할까요? 자기들이 알아서 할 테니 가만있으라고 하는데, 벌써 70년입니다. 통일도 가족들이 살아 있을 때 해야지 다 죽은 다음에 그 후손들이 만나면 뭘 할 겁니까? 족보 들고 친척이라고 기뻐하겠습니까?

 

남한 정부가 왜 그렇게 여유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상대방이 애써 자존심을 낮춰가며 손을 내밀었을 때에는 못이기는 척하고 받아주는 것이 정치이지 끝까지 오기를 부리면 결국 자기 손해입니다. 이러다가 또 다시 서해상에서 무력 충돌이라도 일어나면 인명피해는 말할 것도 없지만, 정작 손해는 해외 교역에 의존하고 있는 남한이 보는 것이지, 70년 가까이 경제봉쇄를 당하고 있는 북조선은 손해 볼 것도 없습니다. 남한 헌법에는 북조선 땅도 국내 땅입니다. 그렇다면 북조선에서 흘리는 피는 자기 몸에서 나오는 피가 아닙니까? 그래 더더욱 우리는 세계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는 것이구요.

 

[아류, 대한민국]

 

해외를 다니다가 서로 얘기를 하면 반드시 어느 나라 사람이냐는 질문을 받게 되는데 가끔 중국 사람이라고 답하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코리아라고 하면 꼭 사우드나 노드냐고 묻기 때문이고, 가끔 어떤 친구는 아예 처음부터 너 노드 코리아에서 왔냐고 묻기도 하는데, 그러면 저는 아니라고 사우드코리아라고 답을 하고 사우드와 노드 코리아의 차이에 대해 설명을 하려고 하면 이미 자기는 내가 사우드코리아에서 온 줄 알면서도 노드코리아에서 왔느냐고 일부러 물어 보았다는 뉘앙스가 풍기는 묘한 표정을 짓습니다. 그러면 제 안에서 속 불이 나지요. 다음번에 누가 물으면 챠이니즈라고 말해야지 하고 마음을 먹지만, 막상 질문을 받고 보면 또 다시 아이엠 코리안이라고 답을 합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아이 앰 언 사우드코리안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from North, from South 는 성립이 되도 사우드코리안 노드코리안이라는 단어는 성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민족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아베 정부는 재무장의 길을 시작했고, 미국은 여기에 잘한다고 박수를 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만 혼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번에 중국 시진핑주석과 공동성명을 낼 때, 일본재무장에 반대한다고 하는 성명을 내면 좋은데, 미국 눈치 보느라고 내지 못했습니다. 이 나라가 진정 독립국가가 맞나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대신 아무런 효과도 없는 한반도비핵화를 얘기했습니다. 중국은 이미 핵폭탄 수백 발을 갖고 있으니 남의 나라 핵에 대해 갖지 마라는 말을 할 자격도 없는 나라이고, 남한 또한 핵무기는 없어도 미국의 핵우산 아래 있으니까 북쪽 보고 핵 포기하라고 하는 것은 논리가 맞지 않습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 하면 답은 쉽게 나옵니다. 그리고 설사 북에 핵이 없다하더라도 남쪽의 핵발전소 몇 개만 터트리면 같은 효과가 나옵니다. 물론 땅덩어리가 워낙 작으니 북도 핵재앙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일본은 남북간에 싸움이 일어나면 한반도에 군사를 파견하여 싸움에 개입하겠다는 겁니다. 남한 정부는 이럴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남한의 전시작전통제권을 갖고 있는 미국이 이를 요청하면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현재의 패권을 유지하려고 하지만, 점점 늘어나는 해외 주둔비를 감당하기가 어렵고 양키고홈의 반미운동도 점점 거세지고 있어 계속 이 상태로 나가기가 어렵습니다. 주한 미군들의 문제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심각합니다. 영내 밖으로 나가면 폭력이 몸에 밴 청년들이다보니 술만 먹으면 폭행 겁탈 살인 등등의 사고를 치기 일쑤이고 그렇다고 영내에만 머물도록 하니 모두가 정신이상자가 되어 정신안정제를 복용하는 군인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라크나 아프카니스탄 전쟁터에서 죽은 청년들은 말할 것도 없고, 고향에 돌아와서도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물론 전쟁 후유증으로 자살자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미국은 일본의 재무장을 통해 이 지역의 안보를 담당하도록 하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을사늑약을 가져온 1905년의 태프트-가츠라 밀약의 현대판이자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기는 꼴입니다. 일본은 섬나라로 기본적으로 대륙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강한 욕망을 갖고 있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후쿠시마 사태로 국토의 상당 부분이 핵물질로 오염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정신 차리지 않으면 제2의 일제 식민 시대가 올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 내부는 어떠한가요? 남과 북이 이런 식으로 다투면 결과는 뻔합니다.

 

이번 주 사회선교센터 길목에서 진행하는 박노자교수의 월례강좌 제목은 아류 제국주의 국가, 대한민국입니다. 미국의 군사보호령으로 주식 이윤의 60% 이상이 외국으로 빠져나가는 세계화된 나라이면서 동시에 동남아시아와 중남미 그리고 이라크에서 미국이 흘린 떡고물을 주워 먹고 사는 아류 제국주의쉽게 말하면 미국 똘만이라는 것입니다. 동남아시아의 의류봉제업체의 사장은 한국인입니다. 여기서 생산된 제품들은 곧장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남한 기업인들은 그동안 남쪽에서 배운 노동착취기술을 여지없이 발휘하여 하루 열 시간 이상의 강도 높은 노동에 한 달 월급 14만원을 주어왔는데, 최근 방글라데시와 캄보디아에서 노동자들의 강력한 임금인상 투쟁 파업에 부딪히고 있으며 미국인을 대신하여 어글리 코리안으로 낙인이 찍혀가고 있습니다.

 

과연 잘 산다는게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디에 삶의 목표를 두고 살아가야 합니까? 제 몸 하나 잘 건사한다고 해서 행복해지나요? 나라가 통째로 침몰하여 가는데 외제 차 샀다고 넓은 평수에서 산다고 희희낙락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가 맞습니까? 성서에 어떻게 살라고 말하고 있나요?

 

[비참한 인간, 비참한 사회]

 

오늘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오호라 나는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나를 이 죽음의 육체에서 구해줄 것입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람답게 살아가보고자 애쓰는 우리 향린의 고민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자기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하지 못하고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전도인가요? 선한 행위인가요? 뭔가요? 이런 것은 100%는 아니라 하더라도 하고 있지 않았나요? 또 스스로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일인데 하고 있는 일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무슨 범죄행위였을까요?

 

그가 고민하고 있는 것은 육체에서 나오는 인간 실존의 한계였습니다. 그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에 관한 최고의 시를 썼습니다. “내가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에 불과하고 내가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갖고 산을 옮길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견딥니다. 믿음과 희망 사랑 세 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지만 이중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

 

인간이 쓴 글 가운데 사랑에 대하여 이보다 더 뛰어난 글은 없습니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사랑에 대한 최고의 시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를 헤치려는 적대자들을 생각할 때마다 분노가 치밀어 올라옵니다. 적대자들이 자기가 가는 곳마다 쫓아다니며 방해하고 모함합니다. 바울은 그들을 머리로는 용서하고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그들을 미워하는 자신을 본 것이지요.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믿음으로 이를 넘어서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주십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어서 나는 과연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따르지만, 육체로는 죄의 법을 따르는 인간입니다.’라고 단서를 붙인 것을 보면 여전히 그에게는 두 마음이 여전히 다투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최근의 바울 연구는 바울의 이러한 고민을 단지 인간 내면의 영과 육이라는 결코 해결될 수 없는 인간 실존의 갈등 차원의 심리를 해석하는데 머물지 않고 예수께서 인간 해방을 위해 예루살렘 성전 권력과 헤롯의 권력과 맞섰던 것처럼 로마 제국과의 갈등으로 설명하려 하고 있습니다. 바울 그가 결국 고민했던 지점은 개인의 영혼 구원이 아니라 예수께서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투쟁했던 것과 같이 정치 사회의 구조 개혁을 통해 성취되는 이 땅의 하느님 나라 건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과연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따르지만 육체로는 죄의 법을 따르는 인간입니다.”라는 고백에서 죄의 법이란 아담으로부터 출발하는 원죄나 모세 율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 제국이 강제하는 황제숭배와 같은 정치권세의 법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사망으로 인도하는 육체를 따라 사는 죄의 법이란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동물보다 못한 노예제도를 유지하게 하는 세상 권세의 법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또한 성공이라는 신기루에 붙잡혀 세상 권세라는 죄의 법에 눌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평화를 선포하자]

 

해결책은 없는 것인가요? 오늘 제1성서의 말씀에서 예언자 즈가리야는 바빌론제국에 의해 포로로 붙잡혀갔던 백성들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수도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수도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너를 찾아오신다. 정의를 세워 너를 찾아오신다. 그는 겸비하여 나귀 어린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시어 에브라임의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의 군마를 없애시리라.” 우리가 흔히 말하는 메시야 통치시대의 도래를 말하고 있습니다.

 

메시야 통치의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정의를 세우는 통치입니다. 정의란 약자의 편에 서는 일입니다. 둘째 어린 나귀를 타는 통치입니다. 보통 통치자가 타는 동물은 말입니다. 말은 군사용으로 전쟁터에서 사용되는 동물입니다. 나귀는 농산물을 싣고 다니는 동물입니다. 둘 다 하느님의 선한 뜻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말은 죽임과 전쟁의 상징이 되었고, 나귀는 살림과 평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병거를 없애고 군마를 없애겠다는 겁니다. 지금 어떻게 한반도에서 그리고 미국과 중국 일본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 흩어진 미사일과 핵무기 그리고 탱크와 전투기를 없앨 수 있을는지, 그날이 언제일지, 과연 올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을 믿고 따르며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고백하는 선택된 무리들을 향해 즈가리야 예언자를 따라 이 평화의 선언을 외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이런 얘기를 들으면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별 미친 놈 다 있구만하고 코웃음을 칠 것이고 철부지 어린아이들은 하느님 나라의 장단에 맞춰 소리 모아 외칠 것입니다.

 

정희성 시인의 [희망공부]란 시입니다.

 

절망의 반대가 희망은 아니다

어두운 밤하늘에 별이 빛나듯

희망은 절망 속에 싹트는 거지

만약에 우리가 희망함이 적다면

그 누가 이 세상을 비추어줄까

 

교회는 꿈을 꾸는 사람들이 그 꿈을 나누는 곳입니다. 한 사람이 꾸면 개꿈이 되고 말겠지만, 모두가 꾸면 현실이 될 것입니다.

 

세상이 보여주는 경쟁의 멍에와 성공의 짐을 지고 평생을 헐떡이며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온유의 멍에와 연대의 짐을 지고 평화를 누리면서 살아갈 것인지는 우리들 스스로가 선택해야 할 몫이자 믿는 자들에게 주는 은혜의 선물이기도 합니다. 지금이 바로 은혜의 때입니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