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과 열매

55:10-13; 65:9-13; 8:1-11; 13:1-9; 18-23

 

[기독인의 부끄러움]

 

지난 주 인터넷에 실린 한 기사를 보면서 부끄러움을 감출수가 없었습니다. 그건 남한 청년 남성 2명과 여성 1명이 부다카야 마하보디 사원 내부에서 기타를 치고 찬송가를 부르다가 쫓겨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에도 봉은사 절에 들어가서 절이 무너지기를 기도하는 땅밟기 영상으로 인해 사회적 물의가 일어난 적도 있었고, 아프카니스탄에 교회 선교팀이 들어갔다가 두 명이 희생당해 국제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바도 있었습니다만, 이웃종교를 폄훼하는 일들이 기독교인들, 특히 한국인들에 의해서 계속된다는 점에서 부끄러움을 금치 못합니다. 부다카야는 유네스코가 정한 인류문화 유적지로 석가모니께서 보리수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곳으로서 탄생지인 룸비니, 최초 설법지인 사르나트, 열반지인 쿠시나가르와 함께 4대 성지 중 하나인 곳입니다. 이들이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기도를 하자 한국말을 이해 못하는 외국인들은 이들이 당연히 불자들이 석가모니를 찬양하는 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그곳에서 작년 9월부터 묵언 수행 중이던 법수 스님이 그들의 몰상식한 행동을 발견하고 제재를 하신 것입니다. 오죽 했으면 9개월간 진행하던 묵언수행을 깨트리고 말을 했겠습니까?

 

불교의 성지에서 어떻게 이런 행위를 할 수 있느냐.’ 라고 하면서 즉각 중단하고 사원을 나갈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때 그들이 잘못했다 인정하고 바로 일어섰으면 좋았을 것을 적반하장이라고 이들은 하나님만이 오직 구원이다, 구원받지 못한 이들이 불쌍해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다.’라고 자신들의 잘못된 행위를 정당화했습니다. 그 때 법수 스님이, ‘여기에서 벌인 일을 한국에 알리겠다.’ 라고 말하자 그제야 그들이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고 합니다. 자기네들 교회 안에 스님들이 들어와서 목탁을 두드리며 불경을 외우면 그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서로의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는 기본 상식조차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랑을 얘기하는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지 저는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이들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고 만민을 제자 삼으라는예수님의 명령에 따른 믿음의 행동이라고 말하겠지요. 그러면 너희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예수님의 말씀은 어떻게 해석되어져야 하는 것인가요? 전도 선교하면 사도 바울이 으뜸인데,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복음의 핵심을 십자가로 그리고 십자가의 핵심을 사랑으로 이해했고, 그리고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말씀에도 지켜야 하는 우선순위가 있고, 같은 말씀이라도 상황에 의한 다른 이해가 가능한 것입니다. 신자가 되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 기본 상식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 남한의 기독교인들이 성서를 배우기 전에 먼저 사람됨의 기본 상식을 배워야할 것이라고 봅니다. 올 여름에도 동남아시아로 수많은 교회들이 선교여행을 가는데, 제발 이렇게 상대방의 문화나 전통들을 무시하고 폄훼하는 이런 일들은 시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인가? 광신인가?]

 

불교에 비하면 기독교의 교리는 너무나 쉽게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합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구원의 확신은 자신이 죄인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이기에 당연히 더욱 겸손하여야 합니다만, 대개는 자기 의인화에 쉽게 빠지고 맙니다. 자기 절대화에 빠지는 것입니다. 절의 신도들이 서로 싸워 절이 갈라졌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습니다만, 교회가 갈라지는 경우는 너무나 흔하게 일어납니다. 이는 하느님은 자기편이라는 자기 절대화를 너무나 쉽게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반대하면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으로 이해하지를 않고 하느님을 적대하는 사탄으로 이해합니다. 이는 자기 성찰이 부족한 탓이고 성서 말씀을 자기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며 구원의 확신이 아닌 구원의 광신입니다.

 

인도의 성지에 가서 찬양을 한 청년들이 내세웠던 성서구절은 사도행전 412절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를 힙 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는 없습니다.” 성서 말씀 해석에 있어 기본이 되는 첫 번째 원칙이 있는데, 그건 그 말씀이 갖고 있는 역사적인 의미입니다. 그 시대에서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었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나서 이 말씀이 오늘 이 시대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첫 번째 작업을 소홀히 하면 성서 말씀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는 없습니다.’라고 사도들이 말할 때, 당시에는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던 다른 이름이 있었다는 것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그 이름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그 이름이 지금 이 시대에서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그 말씀을 제대로 해석해 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시대 로마 식민지 시대에 예루살렘 사람들이 구원의 주로 고백하고 있는 다른 이름이 무엇이었나요? 그건 가이사였습니다. 가이사는 로마 황제를 말하지만, 당시 사람들에 있어 가이사는 우리가 이해하는 로마 황제 이상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장에도 등장하는 로마제국의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본래 이름은 옥타비아누스였습니다. 그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물리침으로 오랜 내전을 끝내고 로마에 평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평화의 왕으로 불리었고, 그가 죽자 로마 원로원은 그를 신의 자리로 올려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붙인 것입니다. 아우구스투스는 황제의 이름이 아닌 신의 이름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을 포함한 로마제국내의 사람들은 로마의 신전에 나아가 예물을 드리고 아우구스투스를 평화의 왕으로 신의 아들로 믿고 구원의 주님이라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로마는 단순한 나라가 아니라 신성제국 신의 나라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행전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나사렛 예수 이름 밖에는 없습니다.’라는 말의 본래 의미는 다른 종교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로마 황제라는 세상 권세를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로마라는 세상 권력이 나사렛 예수를 죽였지만, 나사렛 예수는 오히려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셨다는 결국은 세상에 힘이 없는 약자가 오히려 승리한다는 역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만약 이 이름을 종교적 의미로 해석한다면 우리는 종교전쟁에 다시금 빠져들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자녀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그리고 또한 살해당하는 어리석은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 많은 가르침이 있지만 가장 우선시되는 말씀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역지사지의 관용의 정신이고 인간의 생명은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평화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모든 성서의 말씀 중에 가장 으뜸이 된다고 하여 황금률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이 아무리 깊다고 해도 그 믿음으로 인해 사람 사이에 분쟁이 일고 그래서 생명이 다치게 된다면 그건 잘못된 믿음이요 잘못된 교리입니다.

 

[‘하나님용어에 대한 신학적 성찰]

 

이런 의미에서 우리 남한의 개신교인들이 신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는 하나님이란 단어도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의 언어는 제한적입니다. 언어는 인간 사고의 한 부분을 드러내 줄 따름이지 전체를 보여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고 했듯이 때로 언어가 인간의 사고를 지배합니다. 백여년 전 처음 성서가 번역될 때에는 하나님이 아닌 하늘에 계신 님이라는 의미가 담긴 하느님’(하늘님)이었습니다.(다른 해석: 무한히 크다는 뜻의 과 생명기원의 이 결합된 ᄒᆞᆫᄋᆞᆯ혹은 무한이 크다는 공간적 개념의 과 무한이 길다는 시간적 개념의 이 결합된 한늘의 기원설도 있음) 그런데 서양선교사들이 이 땅의 전통적인 종교를 모두 미신으로 치부하고 기독교의 유일신을 강조하면서 어느 순간 하나님으로 굳어졌습니다. 제 어렸을 때만 해도 하느님하나님이 혼용되어 사용되었습니다만, 지금은 하느님용어는 마치 유일신을 부정하는 이단들이 사용하는 용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서 원어로 보면 창세기 11절을 포함한 제1성서에서 하느님으로 번역된 히브리원어는 엘로힘이라는 단어인데, 이는 을 뜻하는 의 복수명칭입니다. 정확히 번역하려면 하느님들혹은 하나님들이라고 번역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 첫 인간을 만들면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라는 복수 신이 등장한 것입니다. 이것을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느님으로 설명하는데, 그건 교리적인 해석이고 원어로 보면 성서의 하느님 또한 유일신(唯一神)론이 아닌 다신(多神)론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성서에 나오는 신의 이름은 유대민족의 신인 야훼(야웨)’입니다. 예전 성경에는 여호와로 번역되어 있는데, 세계 대부분의 성서는 야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는 출애굽기 313절에서 모세가 자기를 보내시는 분에게 그 이름을 물었을 때, ‘나는 곧 나다.’라고 번역되어 있는 구절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본래 히브리어 성서는 모음이 없었고, 특히 신의 이름은 사람이 부를 수가 없어 모음이 없는 이 네 개의 자음 글자가 나오면 이를 아도나이’(나의 주님)라고 읽었습니다. 20세기에 들어 학자들이 연구하여 모음을 붙여 읽어보니, 히브리어로 야훼 아쉐르 야훼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훼혹은 여호와는 하느님이 자신을 지칭하면서 부르는 란 말이지 이게 이름은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이름을 물었는데, ‘나는 곧 나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고 답하신 것은 나는 이름이 없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부르는 자에게 속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종이 주인의 이름을 부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종의 이름을 정해주고 부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느님이 아담에게 동물들의 이름을 짓도록 했다는 말은 아담에게 속했다는 상위적 의미입니다. ‘나는 곧 나다.’라는 말은 지금까지는 너희 인간들이 파라오니 바알이니 마르둑이니 하며 신의 이름을 지어 불렀지만, 나는 그들과 달라 스스로 존재하는 신이니 이름을 붙이지 말라 그런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신을 야훼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편의상 그렇게 부르고 있는 것이지 신의 이름이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금까지 이를 신의 이름으로 알고 불렀다면 이는 신에 대한 모독이라고 하는 성찰과 반성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누군가가 부모님의 이름이 어떻게 되느냐고 물으면 어떻게 하십니까? 아버님 함자(銜字)... 하고 말하면서 부를 수는 없는데, 한자 한자 떼어 자()를 붙여 부르는 것은 바로 이름을 부를 때에 생겨나는 상위 개념에서 벗어나기 위함입니다. 사람의 이름도 우리가 이렇게 조심스럽게 부르거늘 하물며 우리가 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첫째 야훼가 신의 이름은 아니다라는 사실 그리고 할 수 없이 부를 때는 사람 이름 부르듯이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불러야 합니다.

 

더구나 남의 거룩한 신전에 가서 자신이 믿는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 신전이 무너지길 바라는 행위는 신에 대한 찬양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신으로부터 저주받을 일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우리가 유일신을 믿거들랑 이웃종교는 없어져야 한다고 하는 배타적인 신앙에서 해석할 것이 아니라, ! 저 사람들은 자기네 방식대로 내가 믿는 신을 부르고 있구만 하는 포용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나는 곧 나다라는 야훼 하느님을 알고 숭배한다고 말하겠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라면 이름 좀 달리 부른다고 해서, 다른 방식으로 예배한다고 이를 적으로 규정하는 그런 분은 아닌 것입니다. 예수 복음을 기쁜 소식이라고 하는 것은 민족과 인종, 이념과 주의를 넘어 모두를 하느님의 형상을 띈 하느님의 자녀로 곧 하나의 인류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차이가 오늘 로마서에서 바울 선생이 말하는 죽음을 가져오는 육적인 것과 생명을 가져오는 영적인 것의 근본적인 차이로 이해합니다. 먹고 똥 싸는 것은 육적이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이 영적인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돈을 버는 일은 육적이고 교회에 와서 예배하는 것이 영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 어버이의 마음을 품어 모든 이들을 형제자매로 받아들이는 일이 영적인 일이요 반대로 자기만을 의롭게 여기는 행위가 육적인 것입니다.

 

[하늘나라 열매와 자본주의 사고의 충돌]

 

오늘 예수께서 하신 마태복음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우리가 익히 아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비유 말씀을 이해할 때, 앞의 말씀은 다 빼고 좋은 밭에 떨어진 씨앗이 3060배 혹은 100배의 열매를 맺었다는 말씀만을 기억합니다. 자본주의적 사고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늘나라 비유로 자본주의적 사고에 반대하기 위해 주신 말씀인데, 이런 비유말씀조차 그렇게 이해하고 자신의 삶에 풍성한 열매가 맺어지지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 마음 밭에는 좋은 밭 외에 길밭과 돌밭과 가시나무 밭이 있음을 먼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선 우리는 농부가 씨앗을 조심해서 잘 뿌리지 아무렇게 뿌리는가? 하는 질문을 갖게 됩니다만, 이는 팔레스타인 농법과 우리가 하는 농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고대 팔레스타인에서는 경작지가 너무 좋지 않기에 일단 뿌려놓고 밭을 갈았습니다. 씨앗의 효율성은 떨어지지만, 그래야 품이 덜 듭니다. 그러다보니 길바닥은 떨어진 씨앗은 새들이 와서 쪼아 먹고 돌밭에 떨어진 씨앗은 뿌리를 깊게 내릴 수가 없어 쓰러져 죽었고,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들은 뿌리를 내리고 잎을 내었지만, 가시나무의 기운에 눌려 열매를 맺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길밭형은 말씀에 전연 관심이 없는 사람, 세상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긴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경우를 악한 자가 와서 말씀을 빼앗아 갔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말씀은 그냥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요? 그런데 왜 이는 악한 자가 빼앗아갔다고 표현하는 것일까요? 말씀은 단순히 문자가 아니라, 어떤 에너지가 담긴 힘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씨앗이 먹을 양식을 내듯이 하느님의 말씀은 사명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곧 씨앗에 생명이 담겨 있듯이 말씀에도 생명이 담겨 있습니다. 악한 자가 빼앗아 가면 악한 일에 쓰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건 말씀이 악한 일에 사용된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외면하고 거부한 그 사람이 악한 자의 소유가 되어간다는 말입니다.

 

둘째는 돌밭형입니다. 이는 말씀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 마음에 뿌리가 내리지 않아 오래가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닥쳐오면 곧 넘어지고 마는 사람입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좋은 일에는 나쁜 일이 으레 생기는 법입니다. 고진감래(苦盡甘來) 고생 끝에 낙이 오는 것입니다. 말씀을 깨닫고 시작은 곧잘 하는데, 얼마 있지 않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먼저 마음에 숨어 있는 돌을 제거해야 하는데, 이 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는 어렸을 때 받았던 심한 상처일수도 있고, 원한과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의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과거의 깊은 상처로부터 치유를 받아야 합니다. 질병은 육체의 질병만이 아닌 마음의 질병도 있습니다. 자신 마음 속에 있는 돌, 마음의 병을 먼저 알아채고 이를 없애야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입니다. 자라기는 자라지만, 가시의 기운에 눌려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이는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에 매인 사람을 두고 한 말입니다. 걱정 없는 사람은 없지만, 대부분의 걱정은 불필요한 것들이고 자신에게 유익이 아닌 해를 가져옵니다.

 

[이누이트족의 노래]

 

새벽이 밝아오고 태양이 하늘의 지붕 위로 올라올 때면

내 가슴은 기쁨으로 가득 찹니다.

 

겨울에 인생은 경이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겨울이 내게 행복을 가져다주었습니까.

아니오, 나는 신발과 바닥창에 쓸 가죽을 구하느라

늘 노심초사했습니다.

어쩌다 우리 모두가 사용할 만큼 가죽이 넉넉하다 해도

그렇습니다, 나는 늘 걱정을 안고 살았습니다.

 

여름에 인생은 경이로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름이 나를 행복하게 했습니까.

아니오, 나는 순록 가죽과 바닥에 깔 모피를 구하느라

늘 조바심쳤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늘 걱정을 안고 살았습니다.

 

빙판 위의 고기잡는 구멍 옆에 서 있을 때

인생은 경이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기잡이 구멍 옆에서 기다리며 나는 행복했습니까.

아닙니다. 물고기가 잡히지 않을까봐

물고기가 물어도 바늘이 끊어질까봐

나는 늘 낚시 바늘을 염려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늘 걱정을 안고 살았습니다.

 

잔칫집에서 춤을 출 때 인생은 경이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춤을 춘다고 해서 내가 더 행복했습니까.

아니오. 나는 내 노래를 잊어버릴까봐

늘 안절부절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늘 걱정을 안고 살았습니다.

 

내게 말해주세요, 인생은 정말 경이로 가득 차 있는지.

그래도 내 가슴은 아직 기쁨으로 가득 찹니다.

새벽이 밝아오고 태양이 하늘의 지붕 위로 올라올 때면.

 

[도전과 창조라는 열매]

 

지내놓고 나면 왜 그렇게 노심초사했을까? 후회할 때가 많습니다. 잠자기 전에 수많은 걱정들이 아침이 되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죽음을 앞둔 노인들에게 인생에서 제일 후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대부분이 쓸데없는 걱정을 하느라 시간을 허비하고 실패에 대한 걱정으로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합니다. 다시 살게 된다면 차라리 실패를 한다 할지라도 한번 해보겠노라고 말합니다. 모험 없는 남이 걸어간 길을 따라 걷는 길은 안전합니다. 반면 자신이 직접 길을 만들어 가며 가는 삶은 힘듭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자신의 혼이 담긴 다른 길을 만들었다는 도전과 창조의 기쁨이 있습니다.

 

저는 좋은 땅에서 맺어지는 3060배 백배의 열매를 차라리 이러한 도전과 창조의 정신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향린교회의 근본적인 정신은 다른 교회가 시도해보지 않은 도전과 창조의 정신입니다. 평신도 주인 정신과 민족 화해와 통일을 선교의 최우선 과제로 여기고 교회가 아닌 이 땅의 민중들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 선교, 우리 조상들의 얼과 혼이 담긴 민족 가락을 통해 드리는 국악 예배 그리고 교회 성장은 높은 건물이나 교인의 큰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쪼개고 나누는 분가에 있다는 고백 그렇게 함으로 공동체 정신을 지켜가는 것은 향린교회만의 도전 정신입니다. 저는 이러한 예수께서 설파하신 복음의 근본 가르침에 입각한 개척 정신이 계속 이어질 때, 향린교회는 좋은 밭으로 남아 이웃에 향기를 품어내는 하늘나라 열매를 계속 맺어가리라 확신합니다.

 

내가 좋은 밭이 되기 위해서 무엇을 하여야 하고 우리 교회가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