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린에 띄우는 연서

이사야 44:6-8; 시편 86:11-17; 로마 8:12-25; 마태 13;24-30

 

이 영 라 전도사

 

 

저는 향린교회에 다니다가, 2008년부터 미국에서 신학 공부를 하고 있는 이영라라고 합니다. 타지에서 생활하면서 제가 가장 그리웠던 것은, 한국 음식, 특히 감자 옹심이와 추어탕, 8살짜리 조카 정호, 그리고 향린이었습니다. 새신자 교육을 함께 받았던 서형식 집사님, 어수남 집사님, 최재우 교우님. 우리 성가대 알토팀, 향린지 식구들, 청소년부 아이들과 동료 교사님들. 72 73 또래 모임. 그리고 무엇보다 떠나기 전 함께 성경공부하면서 저를 무지 이뻐해주셨던 권사님들, 백경신 권사님, 윤여증 권사님, 안정연 권사님, 임송자 권사님, 보고 싶었습니다  

 

오늘 이 설교는 향린공동체에 보내는 저의 연애편지입니다.


사실 왜 그렇게 그리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이유를 여전히 뭐라고 확실하게 열거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공부하는 과정에서 문득 문득, 때로는 절실하게 그 이유를 일부 나마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연서를 쓰는 누구나가 그런 것처럼, 저 역시 설렘과 긴장을 안고 향린이 왜 그리도 그리웠는지 고백하려고 합니다  


저에게, 맨처음 향린을 상기시킨 것은, 신학 기초과정에서 반드시 이해해야 할 핵심 개념의 목록에서 민중신학네 글자를 발견했을 때입니다. 미국의 신학자들은 민중신학으로부터 서구 기독교 신학의 한계를 넘기 위한 새로운 대안을 배우고자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뭔가 우쭐하기도 하고, 울컥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차차 시간이 지나면서, 끊임없이 향린의 이름을 되새길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해방신학자들, 서양의 목회자들이 모두 씨름하며 찾고 있는 새로운 교회의 모습이, 바로 제가 경험한 향린공동체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만난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하느님 나라, 혹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모두가 함께 평등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포용의 공간으로 새롭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런 새로운 정의는 선인과 악인, 하느님 자녀와 그렇지 않은 사람이 절대적으로 구분될 수 있다는 견해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죄를 짓지 않는 선한 사람만이 갈 수 있는 배타적인 곳으로 보는 견해가 차별과 억압을 정당화해왔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분법적 견해는 교회 역시 선한 사람만이 다닐 수 있는 완벽하고 우월한 공동체로 상상하게 만들어왔습니다. 여기서 선한 사람이란 대개 성서의 말씀과 성직자의 권위에 무조건 순종하는 사람을 의미했습니다.



이런 배타적인 선의 세계로서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정의와 여기에 깔린 선과 악이 절대적으로 구분될 수 있다는 논리는, 정치권력자들의 지배를 도와 왔다고 합니다. 성서신학자들은 로마의 권력자들이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종말론적 신앙이 그들의 권력 유지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정 부분 묵인했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을 악으로, 도래할 하나님 왕국을 선으로 규정하면서, 현실의 사회구조를 바꾸기 위해 투쟁하는 대신 체념한 채 심판의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거 독재정권들이 북한을 공산당을 악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이를 척결한다는 명분으로 법과 규칙을 만들어 그들의 권력을 유지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세월호 사건을 통해, 정부는 유병언 씨를 공공의 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제가 사는 안양 평촌의 아파트에서, 간첩 전단지를 연상시키는, 현상금이 걸린 유병언 씨의 검거 전단지가 전 아파트에 배포되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인 제 조카가 그 전단지를 들고와서는 자기가 잡겠노라고 다짐했습니다. 자주 다니는 김밥집 할머님은 현대통령이 나라를 구하고 있다고 칭송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런 현실을 목도하면서, 현장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은, 하느님 나라, 혹은 교회를 선하냐 악하냐, 죄인이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곳이 아닌, 각 사람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자유를 평등하게 누리는 곳이라고 다시 정의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중요한 것은, 각 사람의 차이, 나아가 거기서 비롯되는 한계와 약함이 존중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우린 모두 다릅니다. 다른 부모에게서 태어나,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각각의 환경속에서 씨름하며, 우리 각자는 누구에게도 쉽게 내보일 수 없는, 오직 하느님과 나만이 아는 상처와 약점을 품고 삽니다. 생계를 유지하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때로 비겁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옆자리에 앉은 교우가 혹은 친구가 누구인지, 무슨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지 쉽게 단정지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최근의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하느님 나라, 교회를 합의와 순종이 아닌 갈등과 대립, 비판의 장소로 특징 짓습니다. 차이와 다양한 견해를 인정할 때, 긴장과 갈등, 대립은 불가피하기 때문입니다. 갈등을 받아들이고 비판을 수용하면서 설득의 노력을 기울일 때에만, 누구도 배제되지 않고 약자가 보호되는 공동체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갈등과 대립, 비판과 논쟁은 바로, 우리 각자가 있는 그대로 존중받고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교실에서 만난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이런 하느님 나라, 교회로의 변화를 위해 다양한 신학적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지상의 제국의 모습으로, 하느님을 가장 높은 왕좌에 앉아 심판하고 통제하는 황제처럼 묘사하는 성서구절을 비판합니다. 다른 종교들과 대화하면서, 대립과 차별을 심화시키는 이분법적 언어 대신, 소통과 포용, 화해의 언어를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해방신학에서 해체되어야 할 권력구조를 대표했던 가부장제라는 말을 주인의 지배라는 말로 바꿔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가부장제는 남성과 여성을 적으로 만들고 억압받는 남성을 소외시키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이들은 대안이 될 모델을 찾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고민을 함께 하면서, 제가 이미 그들이 만들고자 하는 공동체를 경험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향린 교회가 바로 그런 곳이라고 손을 번쩍 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왜 향린을 그리워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향린식구들은 각기 다른 배경과 직업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차이를 존중했습니다. 짐작할 수 없는 서로의 고통과 상처에 대해 배려했습니다. 서로를 설득하고 납득시키기 위해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전 향린에서 처음으로, 저의 한계와 실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향린은 웬일인지 착한 척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저를 드러낼 용기를 주었습니다. 존중받는다고 느꼈고, 저 자신에 대한 사랑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 그 당시엔 그리 깊이 깨닫지 못했었습니다. 회의 때의 긴 토론이 가끔씩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희청실에서 긴 시간 답이 나오지 않는 논쟁을 반복하다보면, 때로는 이전에 다녔던 보수 교회의 순종하는 분위기와 뒤따르는 평화, 카리스마 있는 목사님의 강력한 한 마디가 그리워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의 공부는 사실, 향린이 얼마나 귀중한 곳인지를 깨달아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여러분, 향린이 합의 하에 선을 이룬 완벽한 공동체라고 생각해서 이곳을 선택하셨나요 ? 만약 그렇다면 언젠가 떠날 이유를 찾게 될지도 모릅니다. 전 여러분들이 그런 이유로 향린을 선택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경험한 향린에서는 갈등과 긴장, 고민들이 통제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졌고, 더디더라도 서로의 차이와 약함과 한계를 탓하지 않고 보듬어 함께 나아가기를 선택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 아니라 자유인이라고 고백합니다. 얼마 전 페이스북에서 길목협동조합에서 올린 글을 보았습니다. “실수를 저지르고, 실패를 반복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글귀였습니다. 우리 각자의 불완전함과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이고, 갈등과 대립을 이해하고 극복하려는 용기, 그것이 사랑이며 진정한 신앙이며, 바로 하느님을 알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향린을 통해 배웁니다 


오늘 읽은 본문들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권능과 주권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좋은 씨와 가라지를 대조시키면서, 하느님의 구원을 받을 하늘 나라의 자녀와 불덩이에 던져질 악한 자의 자녀가 구분된다고 말합니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와 그렇지 않은 사람이 확연히 구분되는 것처럼 들립니다. 하느님은 언뜻 우리를 엄하게 심판하는 재판관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향린의 마음으로 좀 더 깊이 본문을 읽어보면, 인간이 약하고 고통받는 존재라고 전제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의 약함을 불쌍히 여기고, 위로하며, 힘을 주는 어질고 너그러운 분입니다. 다윗의 하느님은 친밀한 하느님입니다. 다윗은 야훼를 나의 하느님, 당신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가라지를 추려내는 분, 선인 혹은 의인과 악인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느님이라는 점에 주목해야할 것 같습니다

 

로마서 14장과 15장에서 바울은 약자와 강자, 혹은 선인/악인을 판단하는 것은 오직 하느님의 몫이라고 강조하면서, 교회 안에서 스스로 이를 판단하며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경계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판단 기준은 무엇일까요 ? 그것은 우리 인간의 기준과 다를 것입니다. 우리를 은밀히 살피시고 돌보시는 하느님은, 우리의 다름을 아시고, 때로 성서에 죄라고 기록된 어떤 행동을 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누구도 미처 알지 못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상처와 한계를 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향린을 이런 하느님의 마음을 닮아가려고 노력하는 공동체로서 사랑한다고 고백 한다면, 저를 사랑에 눈이 멀었다고 하실 분이 계실까요   


강정에서, 밀양에서, 광화문에서, 혹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여러 곳에서, 자신의 시간과 노력, 생명의 일부를 희생해서 서로를 일으켜 세우며, 고통받고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이웃을 위해 온 정성을 기울이는 한 사람, 한 사람의 헌신이 향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향린의 헌신은, 선한 사람으로 인정받아서 천국에 가고자 하는 욕망이나 죄인이 될 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약하지만, 불완전하지만, 그 모습 그대로 더불어 의지하며 살아가겠다는 자유인으로서 선택이며 결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카와 즐거운 시간을 가졌고, 감자 옹심이도 먹었습니다. 오늘 그리워하던 여러분과 마음을 나눴습니다. 이제 추어탕만 먹으면 되겠네요. 그리웠습니다. 사랑합니다. 저의 불타는 사랑을 받아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