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하느님

(열왕기상 3:5~10, 로마서 8:31~39, 마태로 13:31~33)

고상균

 

오늘은 하늘뜻펴기를 시작하며 여러분께 공적으로 징징거리려 합니다. .......아픕니다! 많고 분들이 알고 계시듯, 저는 지난해 10월부터 허리디스크가 발병했습니다. 당시에는 진통제를 두어 시간에 한 번씩 먹지 않으면 허리를 펴는 것 자체가 어려웠었는데, 저의 주치의이신 전형준 집사님의 치료덕분에 거의 통증이 없는 상태까지 좋아졌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약 한달 반 동안 들녘농활, 강정평화기도회, 새교우 영성훈련, 희남수련회 등의 바깥으로 나가는 활동이 이어지고, 고민해야 할 교회의 크고 작은 일들로 인해 몹시 피곤했다는 핑계를 댄 결과로, 혹은 임송자 권사님께서 권해주신 약수동의 약침 용한 한의원과 김우신 권사님께서 애써 확인해 주셨던 선릉역 4번 출구에 있는 정형외과를 너무 바빠서라는 이유로 찾지 못했던 끝에, 또는 한 달 전쯤의 부부싸움에 원인을 두고 있는 아내의 추론과 같이 제 성질이 못되어 먹어서그럴 수 도 있겠습니다만, 실은 모두 저의 게으름으로 인해 차츰 악화되었던 저의 허리는 급기야 일주 전부터 날 좀 보소하는 듯 통증을 왼다리 전체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시금 세계적 통증의학의 권위자 전 박사님의 열과 성의를 다한 치료가 시작되었고, 분명한 병세의 호전이 있습니다만, 통증으로 설치는 밤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덕분에 다른 때보다 더욱, 혼자만의 조용한 새벽을 긴 시간 가질 수 있다는 장점도 있는데요, 그 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나는 지금 아픈 것일까? 이 시간 가운데 있는 하느님의 뜻은 무엇일까?’ 영성수련 초짜의 특성상 기도 중 일어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삼천포로 명의이전을 하기 시작하는데요, 여러분도 다음을 함께 생각해 주시겠습니까? 하느님의 뜻....... 삼라만상은 하느님께서 주관 하신다. 동의하시나요? 우리에게 발생하는 모든 일들 가운데는 하느님의 뜻과 계획이 담겨있다. 동의하시나요? 이 말을 한국의 근현대사로 옮기면 이렇게도 표현될 수 있지 않을까요? 모든 것은 하느님의 계획안에 있다. 그러므로 일제에 의한 식민통치도, 이 땅의 분단도 모두 하느님의 뜻이다.’ 이제는 동의하기 어려우신가요? 모두가 아시듯, 이는 얼마 전 국무총리지명절차를 희대의 개그로 승화시킨 박근혜 정권에 의해 발굴된 스타, 문창극의 발언 중 일부입니다. 그는 온누리교회 등에서 행했던 이 발언에 대한 비판이 일파만파에 이르자, 그 강연은 신앙의 측면에서 봐야 한다며 "교회 안에서 교인들에게 행한 강연으로 고난도 허락하시고, 이를 통해 단련을 시키셨으나 그 고난 후에 길을 열어 주셔서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된 것이라는 내용이었다는 해명을 당당하게 내놓으면서 오히려 강연 중 일부내용만을 공개한 언론을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최근 현 정부와 KBS슬그머니 해당 기사를 보도했던 <뉴스9> 관계자들을 중징계 하겠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습니다.

이 어처구니없는 해프닝 가운데 오늘 주목해보고자 하는 것은 문창극의 당당함입니다. 자신의 발언에 대해 신앙의 눈으로 보았을 때 전혀 잘못이 없다는 그의 주장은 합리적 이성을 가진 이들이라면 당연히 분노를 넘어 실소를 지었겠지만, 저변에 깔려있는 모든 것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예정하시고 주관하신다신앙관 혹은 역사관은 사실 무척 신앙심 깊게 느껴질 수도 있겠고, 바로 그 강한 신앙심이 그에게 짧은 활동 내내 보여주었던 과도한 자신감으로 드러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께 다시 여쭙겠습니다. 정말 모든 일은 지극히 정의로운 하느님께서 계획하시고, 진행시키시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이렇게 완벽한 신께서 운행시키고 있는 세상에서 왜 용산참사는 일어난 것일까요? 그리고 세월호에서 왜 수 백의 생명은 구출되지 못했던 것일까요? 또 어찌하여 지금 이 시간에도 팔레스타인에서는 이스라엘에 의해 자행되는 학살이 신의 이름으로 저질러지고 있는 것일까요? 이와 같은 고민 속에서 저는 오늘의 하늘말씀을 떠올려보았습니다.

 

나의 하느님 아훼여! 당신께서는 소인을 제 아버지 다윗을 이어 왕으로 삼으셨습니다만, 저는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으므로 어떻게 처신하여야 할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소인은 수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백성 가운데서 살고 있는 몸입니다. 그러하오니 소인에게 명석한 머리를 주시어 당신의 백성을 다스릴 수 있고 흑백을 잘 가려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감히 그 누가 당신의 이 큰 백성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열왕기상 3:7~9)

 

왕위 등극 후, 하느님과의 처음 대면을 묘사하고 있는 본문에서 신 앞에서 자신을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로 표현되고 있는 솔로몬은 야훼에게 아버지 다윗으로부터 물려받은 수많은 백성, 즉 세금징수와 노역, 징집의 대상으로 왕권의 기틀이 되는 존재들의 많음보다도, 신이 베푸는 판단력을 구하고 있습니다. 강력한 군대, 카리스마적 통치력 등 고전적 의미에서 다분히 남성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요소들과는 사뭇 다른 지혜구하고 있는 솔로몬의 모습은 성전, 왕궁 등 거대 토목공사를 가차 없이 진행하고, 이를 위해 동족도 노예로 부리며, 제사장이 있음에도 본인이 직접 성대한 제의를 진행하는 등 열왕기 다른 단락의 전제적이고 패권적인 모습과는 상충되기까지 합니다. 더욱이 지혜간구기사 직후 등장하는, 다시 말해 신께서 하사하신 그 위대한 지혜를 사용하는 첫 이야기가 이름도 등장하지 않는 성매매여성 두 사람의 친 아이 소송’, 즉 저 유명 솔로몬의 재판임을 생각해 볼 때, ‘솔로몬의 청이 마음에 들었다는 야훼의 흡족함이 가진 저의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나간 시간에 있었다는, 참으로 위대한 왕의 역사.......그것이 대체 후대 어느 순간에 필요한 것일까요? 우리는 이에 대한 대답을 대한제국 말기 조선상고사를 집필했던 단재 신채호에게서 찾아 볼 수 있겠습니다.

역사는 非我의 투쟁임을 천명했던 단재는 당시 조선의 역사를 평가절하하려는 일제의 소위 실증주의사관에 맞선 역사투쟁을 한반도의 고대사를 통해 전개했는데요, 이를 통해 고구려의 정복군주 광개토대왕 등을 민족 영웅으로 부각시켰고, 고조선 등 한반도 태고사는 중국의 그것과 대등한 것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단재의 민족주의사관이 진정 어디까지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조선상고사라는 책의 저술의도가 과연 실제로 있었던 일을 실증적으로 밝혀내는 것에 있었겠느냐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국운 앞에서 아마도 단재 신채호 선생은 다음과 같은 마음으로 그 책을 집필하지 않았을까 여겨집니다. ‘어쩔 수 없이 지금은 명운이 다했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절망하고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실로 찬란한 역사를 소유한 이들이다. 이전에 했었던 것은 언제고 이후에 다시 이루어 낼 수 있다. 역사는 그와 같이 그 의미를 지켜가려는 자와 이를 말살하려는 자들 간의 투쟁인 것이다. 이 투쟁에서 기억을 통해 반드시 승리하자!’ 현재의 쓰라린 상황에 대한 극복의 희망을 찬란했던 과거에서 찾겠다는 발상, 바로 이와 같은 점에서 조선상고사와 오늘의 본문이 열왕기는 만나게 됩니다. 지금의 경상남도 정도크기에도 미치지 못하는 국토 대부분이 강대국에 의해 유린되었고, 수도 예루살렘 및 인근정도밖에는 통치력을 미치지 못했던 남유다 말기의 상황에서, 비참한 현재에 대한 원인을 신에게서 멀어졌음에서 찾았던 사관들은 전해지던 옛날 왕들의 이야기를 조선상고사의 영웅들처럼 크고 웅대하게 묘사했을 것이고, 이 과정에서 경상도 남짓했던 그들의 영토는 남으로는 이집트, 북으로는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가 북쪽에 이르는 대제국으로 확대 되었고, 무척 소박했을 것임에 틀림없을 그들의 성전역시 대제국의 위상에 걸맞도록 묘사되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에게로 돌이키자라는 역사편찬자들의 간절한 소망은 역설적이게도 영웅 솔로몬을 그대로 일인 카리스마의 자리에 두지 않습니다. 대제국을 호령하는 대왕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신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그저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구하며, 그토록 어렵게 얻은 지혜를 가지고 당시로서는 사람이라 칭하지도 않았던 이들의 송사를 살피는 참 작은 왕와 그를 좋아해주는 작은 신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가멸망의 국가적 재난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이렇게 작은 존재들에 희망이 있다고 했던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였을까요? 그리고 본문의 신앙고백에서 우리는 신의 강력한 전지전능을 찾아볼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신의 권능에 대해 이와 같은 역설적 설명은 두 번째 하늘말씀인 로마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 되셨으니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서겠습니까? (로마서 8:31)

 

신이 우리 편이 되었으니 아무도 우리와 맞설 수 없다!’이토록 장쾌하게 서두를 시작하는 본문은 참 이상하게도 이후, 고소, 단죄, 환난, 역경,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험 등의 어려움을 입에 담더니, 급기야 죽음을 언급하기에 이릅니다.

 

우리의 처지는, “우리는 종일토록 당신을 위하여 죽어갑니다. 도살당할 양처럼 천대받습니다.”라는 성서의 말씀대로입니다. (로마서 8:36)

신이 우리의 편이 되어 아무도 맞설 수 없다던 선언이 실상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대한 반증이 되어 있는 본문.......고소와 단죄 등 당시 실제 법정에서 사용하던 그리스어가 사용된 본문의 특성상, 상기 내용이 분명한 현실적 위기상황임을 명백히 하고 있는 본문은 제국의 심장부 로마에서 주후49년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박해를 배경하고 있습니다. 당시 확고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던 유대교 공동체는 제국의 심장인 로마에서 그 독점적 권한을 공고히 하기 위해 밖으로는 통치자들에게 순종하고, 안으로는 강력한 통제를 통한 단결을 도모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유입된 나자렛 도당 즉 초기 예수신앙인들은 동족임에도 눈에 가시였을 수 밖에 없었고, 곧 이들에 대한 공동체 내 배척움직임이 진행됩니다. 이로 인해 잠잠하던 로마 내 유대교사회가 시끄러워지자, 팍스로마나를 염원하던 황제는 곧바로 유대교인과 예수신앙인 모두에 대한 로마시로부터의 추방령을 단행합니다. 이로 인해 코린토로 이주했던 추방된 예수신앙인 부부 아퀼라와 리스킬라는 그곳에서 열정적 전도자 바울로를 만나게 되었고, 바울로는 본인이 세우지 않은 예수공동체와 교인들을 인지하게 됩니다. 훗날 황제의 추방령 해제에 따라 제국 내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던 로마의 예수신앙인들은 다시금 공동체를 건설하게 됩니다. 로마공동체를 거점으로 당시 사람들에게 땅 끝으로 인식되었던 스페인 선교를 염원했던 바울로에게 공동체의 유지는 그 어떤 것보다 중요했을 것이고, 바로 이와 같은 입장에서 상기 언급했던 박해들. 그 안타까웠던 경험을 다시금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의미 있는 것은 여기에서도 하느님과 연합된 존재들이 무슨 대단한 권력을 누리거나, 지배계층이 된다는 것이 아니고 여전히 수많은 고난에 직면하는 작은 존재들이지만, 결코 그것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고, 하느님은 고난의 과정에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8:39)

 

이렇듯 바울로는 그의 현존 최후 서신인 로마서를 통해 하느님의 전지전능성이란 박해를 계획하고 집행했다가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풀어주는 훈육관이 아니라, 억울하게 찾아오는 고난 속에서 모두가 우리를 떠나갈 때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시고, 그 슬픔의 현장, 아픔의 자리에서 우리와 언제나 함께 하신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약하고 조용하게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아주 작은 존재를 통한 하느님의 활동은 이제 비유를 통해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고 있는 마태오복음의 오늘 본문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두 개의 비유 중 처음은 농경지 갈릴리에서 지천에 자라는 잡풀인 겨자풀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 풀이 자라 새들이 깃들만큼 큰 나무가 될 것이다공동체 구성원들의 직업적 특성을 염두에 둔 듯, 씨 뿌리는 사람, 가라지, 전 재산을 들어 좋은 밭을 구입하는 이, 좋은 물고기를 선별하는 어민 등 전원적인 묘사에 집중하고 있는 13장의 일부인 본문은 역시 전체적 특성과 부합되는 묘사를 하고 있는데요, 농사에 익숙한 공동체에게 잡풀은 매우 익숙한 식물이었을 것이고, 그것이 자라봐야 결국 풀에 지나지 않으리라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그들에게 바로 그와 같이 하찮은 풀이 나무가 되는 기적이 하느님나라라는 가르침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그래, 우리는 그렇게나 작고 보잘것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하느님나라는 바로 우리와 같은 작은이들에 의해 시작됩니다. 아시겠습니까? 여러분!’ 뭐 이런 뜻이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이 같은 비유 앞에서 작은 공동체 구성원 모두는 떨리는 마음으로 그 지극히 작음 속에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임재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비유에서는 작은이가 행한 일이 어떻게 하느님나라를 만들어 가는지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이름도 없이 그저 어떤 여인으로 묘사되고 있는 한 여성이 밀가루 서 말 속에 넣은 누룩에 대한 비유.......무언가 매우 익숙한 것을 들어 분명하게 설명하는 것이 비유의 목적이라 보았을 때, 여성의 가사활동을 비유로 들고 있다는 점은 마태오공동체의 다수 구성원이 여성임을 알게 하는 단초가 되게 하는데요, 가부장적 남성사회 속에서 존재를 인식받기 어려운 여성, 바로 그녀의 어떤 활동이 서말이나 되는 밀가루를 온통 부풀어 오르게 하는 누룩과 같이, 하느님나라 운동을 일으킬 것이라는 가르침에는 위대한 남성적 영웅도, 그녀로 하여금 누룩을 밀가루에 넣게 하시겠다는 전지전능한 하느님의 계획도 없습니다. 그저 그것이 하느님나라라는 증언만 있을 따름입니다. 루가공동체의 복음서와 달리 다섯 명의 여성들을 예수족보에 명시한 마태오공동체는 그렇게나 작은이들에 의해 하느님 나라는 시작될 것이라고, 그리고 그토록 소박한 하느님이 바로 우리 같은 작은이들과 함께하는 신임을 신앙고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존경하는 향린 공동체의 모든 여러분!

구체적인 사건들을 거론할 필요도 없이 지금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는 너무나 가슴 아프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매일 저녁 집회에 나가고, 장대비를 맞고 함께 그 자리를 지켜도 뭐가 크게 바뀌는 것은 없어 보입니다. 무기력감이 들기도 합니다. 한편 그와 같은 사건은 비단 사회적이거나 역사적인 거대사건만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평생을 함께하고 있던 가족과 친구의 임종 혹은 와병 앞에서 아무것도 해 줄 것이 없다 여겨질 때, 참 열심히 했던 것이 한순간 무너져 내리려 하는데 도무지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 없을 때, 아무리 생각을 달리 가지려해도 밀려드는 죄책감과 열패감을 쉽사리 떨치지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순간 때로 우리는 이 모두지 어찌 해 볼 수 없는 상황을 끝장 내 줄 강력한 존재를 열망하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광화문 네거리를 막고 밀려드는 전경들을 일순간 날려버리고, 청와대 안에 숨어있는 이를 끌어다 내팽게 쳐줄 수 있는 헤라클레스 같은 영웅, 이 모든 것을 다 통제하고 있어서 언제고 강력하게 요청하면 척척 해결해주는 전지전능의 신과 존재 말입니다.

 

사랑하는 향린의 교우 여러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전지전능한 하느님은 실은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 출발한 간절한 염원이었다고, 그리고 지금은 힘을 지니게 된 상황에서 그 힘센 하느님의 말씀은 약한 이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도구가 되고 있다고 말입니다. 위정자들의 잘못으로 일순간 절망의 나락에 떨어져야 했던 구한말 민중들의 피눈물을 다만 하느님께서 정신 차리게 하시려고 계획하신 것이다라고 하는 문창극의 발언이나, 비참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절규를 그저 하느님의 약속으로 포장하여, 팔레스타인에 대한 인종청소 수준의 학살을 가하고 있는 현대이스라엘의 만행은 모두 그 자신들이 만든 신의 전지전능성을 자신들이 전지전능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일 것입니다.

또한 저는 그렇게 신앙 고백 합니다. 신이 만약 전지하시다면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안타까움을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이고, 그 혹은 그녀가 전능하시다면 그 모든 안타까움의 자리에 다 위치하고 계신다는 것일 것이며, 그분께서 언제나 정의로운 분이시라면 불의에 의해 신음하고 눈물 흘리는 이들과 함께 언제 어디서나 함께 고통당하고 계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께서 언제 어디서나 그렇게 고난당하고 계신데, 우리가 그 곳으로 가야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울러 저는 감히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하느님께서 매일 밤 잠 못들게 하는 통증을 일순간 없애주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아니 오히려 순간 순간 몰려오는 통증을 통해 지금 이 순간 병상에 계신 공동체의 많은 어르신들을 잠시나마 생각할 수 있는 것이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아픔보다 수 천배 이상 고통스러울 세월호의, 팔레스타인의 많은 자매형제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내 것으로 느낄 수 있음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뒤척거리는 잠자리에서 저와 같이 힘겨워하고 계셔주시는 작은 하느님을 가슴 떨리게 사랑합니다. 여러분의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조용함 가운데 작은 하느님의 위로를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침묵기도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