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산 제물

51:1-6; 138; 12:1-8; 16:13-20

 

[김영오님과 동조단식]

 

어제는 처서(處暑)였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벌써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처서는 가을의 문턱을 알릴뿐 아니라 낱알이 익어가기 시작하는 절기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안으로 익어가는 절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이 시대의 최대 화두는 세월호이고 이에 희생자 유민이의 아빠 김영오씨가 수사권과 기소권이 있는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광화문에서 목숨을 건 단식을 시작하셨습니다. 40일을 넘어 단식을 하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싸움입니다. 예수께서도 하느님 나라 운동을 시작하기에 앞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자 광야에 나아가 홀로 40일 단식을 했습니다. 성서에서 숫자 40은 하느님의 숫자입니다. 거룩의 상징이자 하느님이 인간 역사에 개입하셨다고 하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제가 지난 목요일 39일째 단식일에 광화문에 갔다 김영오씨의 천막이 닫혀 있고, 누워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내일이면 40일째로 하느님께서 개입하시는데, 우리가 무심코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는 하느님의 명령이다라고 생각을 하면서 전 교인들에게 하루 동조단식에 참가해달라는 글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옆의 천막에는 이미 향린 교우 4명이 일일 단식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외에도 여러 분들이 이미 단식에 참여하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문자가 나간 이후 수십 명의 교우들이 함께 하겠다고 또 이렇게 교우들과 함께 단식할 기회를 주어서 고맙다는 답글을 보내왔습니다. 우리가 단식을 시작한 금요일 아침 8시에 의사 홍승권집사께서 김영오씨가 위험하다고 판단이 되어 반강제로 병원으로 후송을 하셨습니다. 시간적으로 보면 우리는 김영오씨의 단식을 이어가는 제2의 김영오가 된 셈입니다. 아직도 김영오씨는 단식을 그치지 않고 있고, 또 세월호 가족들은 청와대 앞 길거리에서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며 이틀째 철야 농성 중에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 원인에 대해 정부는 지금까지 유병언씨에게 그 책임을 돌려왔습니다만, 이는 눈 감고 아웅하는 식입니다. 우리가 세 살 난 아이들입니까? 도대체 청와대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충분히 구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314명이라는 생명이 그대로 수장되는 엄청난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선장 이하 많은 선원들은 구조를 받았습니다. 자신들이 탈출하면서 승객들에게 탈출하라는 얘기를 하지 않은 것은 위로부터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원인 규명이 안되면 314명의 한 많은 영혼들이 구천을 떠돌며 우리 국민들의 양심을 괴롭힐 것입니다. 그로 인해 더 큰 사고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고 원인을 제대로 규명하고 책임이 있는 사람을 처벌하겠다는 것이 도대체 문제가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여당은 전례가 없다고 말하지만, 설사 전례가 없더라도 그래서 특별법이 되는 것입니다.

 

이미 인터넷상에는 영상과 함께 침몰 원인에 대한 여러 설명들이 떠돌아다닙니다. 한미군사훈련에 참가하던 잠수함 충돌설로부터, 세월호의 진짜 주인은 국정원인데 제2의 천안함 사건을 만들기 위해 혹은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일부러 침몰시켰다는 등 도대체가 있을 수 없는 얘기들이 계속 떠돌아다닙니다. 진실 규명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나라 전체가 사분오열되어 바다 속으로 빠져들 상황입니다. 여기서 청와대가 결단을 내리지 못하면 정부는 국민의 신뢰를 잃게 되고 그렇게 되면 미국의 퍼거슨시마냥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미국 인종 차별의 현실과 배경]

 

미국의 흑백 인종차별은 뿌리 깊은 사회의 구조 악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한 사건만 놓고 보면 대부분은 흑인의 폭력과 백인경찰의 정당방위로 판결이 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건들을 모아 놓고 보면 거기에는 역사적으로 인종차별이라는 백인들의 더 큰 폭력이 그 배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인 20대 흑인 남성 가운데 대학생보다 감옥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사실은 개인 개인을 떼어 놓고 보면 개인의 책임으로 볼 수 있지만, 전체를 놓고 보면 이는 사회의 구조 악이라고 하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1960년대 말에 갑자기 동양인 이민 문호가 열리기 시작합니다. 그전까지는 유럽 백인들 외에는 이민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동양인을 갑자기 사랑하기 시작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법적으로는 흑인 노예제도가 없어졌지만, 현실은 식당을 비롯한 공공장소는 흑백의 구별이 있었습니다. 버스마저도 백인은 앞으로 흑인은 뒤로 타야했습니다. 그러던 중 1960년대에 앨라배마 버스보이콧 운동을 비롯한 마르틴 루터 킹 목사를 중심한 흑인시민운동이 일어납니다. 수십년 후 흑인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흑백 충돌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백인들은 흑인들과의 직접 마찰을 피하기 위한 중간에 완충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동양인들에게 이민 문호를 연 것입니다. 이 얘기는 제가 오래 전에 한 백인 사회학자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1992LA에서 백인경찰이 과속으로 달리던 흑인 로드니 킹을 끌어내어 집단 구타하였고 이를 아파트 창문에서 찍은 비디오가 언론에 공개되어 흑인 폭동이 일어났고, 그 피해는 대부분 흑인 지역에서 장사를 하던 한인들이었습니다. 2,300개의 가게들이 불타거나 부서졌는데, 그중 반이 한인 가게였습니다. 그러자 소수의 한인들이 가게를 지키고자 무기를 들었습니다.(절반의 무게는 장난감총이었음) 이에 미국 언론은 기다렸다는 듯이 1면에 크게 띄웠습니다. 그러자 이 사진을 본 흑인들의 반한 운동이 더욱 거세졌습니다. 백인 경찰들은 중간에 있는 한인타운은 일부러 내버려두고 훨씬 뒤에 있는 백인 할리우드 지역만 무장 병력을 배치했습니다.

 

세월호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여당 국회의원은 이를 교통사고에 비유합니다. 국회 내에서 농성을 하는 희생자 가족을 노숙인에 비유하기도 하였습니다. 자기 자식이 죽었다면 결코 이런 태도를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고등학생 90% 이상이 더 이상 정부를 신뢰하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어떤 아들이 농담으로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아빠가 나를 낳아준 것은 정말 기쁜데, 대한민국에 낳아준 건 정말 슬퍼요.’ 그러자 아버지가 정말 진지한 얼굴로 미안하다고 답변을 합니다.

 

[국가의 제일은 백성의 신뢰]

 

공자에게 제자 안희가 물었습니다. 국가에 가장 중요한 3가지는 무엇입니까? 백성들을 먹여 살리는 식량과 국가를 지키는 군대와 백성들의 신뢰이다. 이중에서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무엇을 버려야 합니까? 군대이다. 그러면 남은 식량과 신뢰 중 부득이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그건 무엇입니까? 식량이다. 국가의 생명은 경제에 있는 것도 아니고 군대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국가의 존립 근거는 백성들의 신뢰이고 이 신뢰는 국가가 정의를 행하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세월호 진상 규명 요구를 과격분자 몇 사람만의 요구로 이해하고 이를 무시하고 방패의 힘으로 누르다가는 큰 일이 납니다. 여야가 뭔가를 주고받으며 대충 이 문제를 넘기려다가는 더 큰 국민적 반발에 부딪힐 것입니다. 지금 정부는 언론을 통해 군대 내의 폭행 사건이나 야당 국회의원 뇌물 사건을 연속 터트려가며 진상 요구를 애써 외면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번 아시아 게임에 북조선의 응원단을 허락함으로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려 할 것 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미 교황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습니다. 교황 가슴에 달린 노란리본과 희생자 두 아버지가 수백킬로를 지고 걸어온 고행의 십자가가 로마 교황청으로 옮겨감으로 이미 세계인들의 양심 속에 심어졌습니다.

 

사고 당일 박근혜씨의 7시간의 행적도 논란의 대상입니다. 처음에는 김기춘 비서실장이 이는 프라이버시에 해당한다며 이를 비밀로 했습니다. 그러자 C일보가 어떤 남성과 있었다고 기사화하자 산케이 신문이 L호텔에서 정모라는 남성과 있었다고 염문설을 보도했습니다. 그러자 청와대는 이를 부인하고 이제는 청와대 내에 있었다고 말하면서 20번이 넘게 보고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당일 7시간 만에 나타난 박근혜씨는 다들 노란 조끼 구명복을 입었는데, 구조가 그렇게 어렵냐?’고 전연 뚱딴지같은 얘기를 하였습니다. 모든 국민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을 혼자만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슨 보고를 받았다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됩니다. 지금 세계 언론이 비웃고 있습니다.

 

[야훼 종교의 특징]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외칩니다. “나의 말을 들어라. 정의를 추구하고 야훼를 찾는 자들아!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아라. 땅을 굽어보아라. 하늘은 연기처럼 스러지고, 땅은 옷처럼 해어져 주민이 하루살이처럼 꺼지리라. 그러나 내가 베풀 구원은 영원하고 내가 세울 정의는 넘어지지 않는다.” 삼천년 전 중동지역에서 유대민족은 매우 작은 소수민족이었습니다. 주변 강국으로부터 끊임없이 침략을 당했고 지배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약한 민족의 종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성장할 수 있었던 힘은 한마디로 그 종교가 주장했던 정의의 목소리였습니다. 다른 모든 민족들이 외치는 정의는 권력자가 말하는 정의와 일치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서의 히브리 후예들이 믿는 야훼 하느님의 정의는 노예들의 해방과 자유와 평등이었고 권력자를 끊임없이 견제하고 비판하는 정의였습니다. 따라서 성서가 말하는 정의 곧 민중의 해방과 평등의 자유는 그냥 얻어지지 않습니다. 모세가 경험했듯이 애굽의 통치자 파라오들과의 대결을 통해 얻어지는 것입니다. 진정한 정의는 권력과의 투쟁을 통해서만이 얻어집니다.

 

길목에 실린 김규항씨의 글을 소개합니다.

 

[분노와 용서는 하나]

 

불의한 사회 현실 속에서 분노와 용서는 늘 균형을 잃곤 한다. 현실에 분노하고 싸우는 사람들은 대개 용서를 모른다. 그래서 많은 경우 증오와 보복의 악순환으로 빠져 들어간다. 한편 용서를 말하는 사람들은 분노할 줄 모른다. 그들의 분노 없는 용서, 진실과 정의를 가리지 않는 무작정한 용서는 불의한 현실을 덮고 그 현실에서 영화를 누리는 세력에게 봉사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에게 분노와 용서는 늘 병행한다. 성전 뜰에서 그의 생애 중 가장 분노하는 모습을 보인 예수는 곧 이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용서를 말한다. 두 가지 모습은 얼핏 개연성이 없어 보이나, 모두 예수의 모습이다. 예수는 분명히 분노하여 진실과 정의를 가리지만, 끝내 용서함으로써 증오와 보복의 고리를 끊어 낸다. 우리는 흔히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말의 순서를 바꾸어 볼 필요가 있다. '사람을 미워하지 말되 죄는 분명히 미워하라.' 우리는 끝내 용서하되, 먼저 분명히 분노해야 한다. 진정 분노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진정 용서할 줄도 모르며, 진정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진정 분노할 줄 모른다. 분노와 용서는 실은 하나다.

 

그제 광화문 농성장을 들렸더니 이런 글을 들고 있는 분이 계시더군요. “희생을 당한 사람들보다 희생을 당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분노하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이다.” -철학을 행동하는 사람들-

 

[‘반석에 대한 해석의 차이]

 

어느 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더냐?’고 묻습니다. 곧 세상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이에 어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 어떤 사람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예수는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에 베드로가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 너무나 유명한 구절입니다. 이 구절에 대한 해석에 있어 가톨릭과 개신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서 교회가 세워지는 반석을 가톨릭은 베드로라 여기고 개신교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가톨릭은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받들고 교황들은 권세의 상징인 커다란 금 열쇠를 내리 전합니다. 반면 개신교는 교회를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가톨릭은 교황이 파송한 신부가 없는 교회는 교회로 인정받지 못하지만 개신교는 목사가 없어도 교회로 인정을 받습니다. 저는 여기서 누구 주장이 옳은 것이냐 하는 교리적 논쟁은 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교리의 정당성은 현재 교회의 모습을 두고 판단하는 것인데, 가톨릭이나 개신교는 각기의 장점과 단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모두 공감하는 부분은 대형 교회들의 부패와 수많은 교파들의 난립으로 인해 개신교의 감소가 계속되는 가운데 교황의 방문으로 저울추가 가톨릭으로 상당히 기울 것이라는 예상이고 이미 지난 주 성당은 예전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출석을 하였다는 소식입니다.

 

[신앙고백과 아픔의 현장]

 

그런데 오늘 우리가 정작 주의해야 할 점은 교회가 세워지는 반석의 해석이 가톨릭이 옳으냐 개신교가 옳으냐는 신학적 논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작 중요한 것은 이 대화가 일어났던 장소가 중요합니다. 오늘 대부분의 개신교신학자든 가톨릭 신학자든 이 점을 놓치고 있습니다. 오늘 마태를 비롯한 같은 이야기를 전하는 복음서 저자들에게 있어서 정작 중요한 것은 당신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이 아니라, 사실은 이 고백이 일어난 현장이 어디냐가 중요했던 것입니다. 이 고백은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과 필연적으로 엮어져 있습니다. 이를 빼면 이 고백은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허공을 때리는 메아리에 불과합니다. 필립보는 헤롯왕의 아들로서 당시 갈릴리 지역을 다스리던 로마의 분봉왕이었습니다. 가이사리아는 말할 것도 없이 당시 로마 황제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이 질문은 필립보 가이사리아 도시 한 가운데 있는 로마 신전에 모인 사람들이 가이사리아 황제야 말로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구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고백인 것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진실을 감추고 창칼로 백성들의 자유와 해방의 외침을 억누르는 국가폭력에 대한 저항의 고백이었지, 단순히 교회 건물 안에서 예배 시간에 별다른 생각 없이 말하는 교리적 고백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이 질문을 가이사리아 도시가 보이는 위에서 묻습니다. 현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바울이 말하는 우리들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우리들이 드릴 진정한 예배라고 말한 숨은 의도입니다.

 

[평신도목회의 기본정신]

 

일차적으로 바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물론 교회를 바로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후에 주시는 말씀을 보면 교회 공동체 내에서 서로간에 화목하고 하나되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간하도록 하십시오.” 자기 마음대로 행하지 말고 하느님의 뜻을 찾아 거기에 복종할 것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모두가 목회자의 심정을 품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평신도 목회란 다름 아닌 교인 모두가 교회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말에 주인(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주인됨이란 무슨 의미인지를 명확히 인식해야 합니다. 주인에게는 권리도 있고 의무도 있습니다. 그런데 잘못하면 의무는 소홀히 한 채 권리만 주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배가 산으로 가는 경우는 의무는 소홀히 한 채 권리만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가정에 비유하면 주인됨의 의미가 좀 더 쉽게 이해가 됩니다. 아버지가 아들딸을 앉혀 놓고 왜 우리 집안은 사랑이 없냐? 하고 말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어머니가 내 오늘은 밥할 기분이 나지 않으니 각자 알아서 끼니를 해결해라. 이는 자기 본분을 망각한 얘기입니다. 우리 모두가 교회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감정에 치우친 자기 뜻을 고집하지 않고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를 분간하고 거기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잘못하면 예수천당불신지옥을 외치는 하나만 아는 균형 잃은 신앙인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 바울은 여기에 경종을 울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말고 믿음의 정도에 따라 분수에 맞는 생각을 하십시오.” 그러면서 예로 설명하는 것이 몸과 지체의 비유입니다. “사람의 몸은 하나이지만 그 몸에는 여러 가지 지체가 있고 그 지체의 기능도 각각 다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수효는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각각 서로 서로의 지체를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에 붙은 각기 다른 지체로 말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눈이 손더러 너는 필요가 없다. 머리가 발더러 너는 소용이 없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가장 약한 지체가 오히려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몸 가운데서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부분을 더욱 조심스럽게 감싸고 또 보기 흉한 부분을 더 보기 좋게 꾸밉니다. 그러나 보기 좋은 지체들에게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도 변변치 못한 부분을 더 귀중하게 여겨 주셔서 몸의 조화를 이루게 해 주셨습니다.”(22-24) 변변한 사람들은 변변치 못한 사람들을 감싸야 할 책임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평신도목회는 바로 우리 각자가 목회자 곧 어버이의 심정이 되어 서로를 받들어주는 목회입니다.

 

[교회의 존립목적]

 

목공소의 연장들이 모여 회의를 합니다. 사회는 평소와 같이 망치가 맡아보았습니다. 그런데 회의 도중 사회자에 대한 불만이 터졌습니다. ‘망치는 항상 깨고 부수며 늘 소란을 피웁니다. 여기서 떠나야 합니다.’ 그러자 망치가 말합니다. ‘좋습니다. 나 스스로도 나의 결점을 인정하므로 이곳을 떠나겠습니다. 하지만 나와 함께 떠나야 할 자가 있으니 바로 대패입니다. 왜냐하면 대패가 하는 일에는 전혀 깊이가 없고 늘 남의 껍질을 감싸기보다 벗기기만 하니까요.’ 이에 화가 난 대패가 말합니다. ‘나뿐만 아니라 자()도 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는 자기 혼자만 옳은 체하며 항상 남을 측량하므로 모두에게 덕이 되지 못하니까요.’ 그러자 조용히 듣고 있던 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톱을 가리키며 말합니다. ‘톱은 연합운동보다 분리운동만 하고 있으니 우리들 중에 가장 필요 없는 놈입니다.’ 이 말을 들은 톱은 사포를 향해 소리칩니다. ‘사포야 너도 너무 거칠어그 와중에 목수가 하루의 작업을 시작하기 위해 도착합니다. 작업복을 입더니 망치와 대패와 자와 톱과 사포를 필요에 따라 골고루 사용하여 복음이 선포되는 아름다운 강대상을 만들어냅니다.

 

사탄은 우리가 서로 헐뜯는 것을 즐깁니다. 사탄은 우리의 차이를 부각시킴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의 목적을 위해 부름을 받은 각기 다른 도구라는 사실을 망각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사탄은 우리가 교회성장만을 위해 부름 받았고 또 교회성장이 곧 하느님 나라의성장이라고 현혹합니다. 아닙니다. 교회는 교회 자체를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위해 존재합니다. 예수가 성전 숙청을 한 이유는 성전이 성전의 존립만을 위해 일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야할 자리는 세상의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는 낮은 자리입니다. 굳이 교황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교회가 거리의 먼지로 더러워지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은 본질적으로 세상 사람과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모순덩어리에 죄인들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낮고 추한 자리에 머무를 때, 그래서 이웃의 아픔과 사회적 모순을 함께 느끼며 저들의 얼굴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발견할 때, 그때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의 거룩한 산 제물이 되는 것이고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는 것은 세상을 외면하거나 회피하라는 말이 아니라 세상의 바닥 밑으로 내려가 세상을 하느님의 선하신 뜻에 맞도록 변혁해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늘 기도로 깨어 일하는 향린인들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