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97() 향린교회 하늘뜻펴기

 

희망-절망의 진창에서 핀 연꽃

(에제키엘 33:7~11, 로마서 13:11~14, 마태로 18:15~20)

고상균

 

추석연휴가 시작되었습니다. 예배를 함께 모시는 가운데 말씀드렸듯 많은 교인들께서 전국각지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지들과 서로 덕담을 나누며, 함께 즐겁고 맛있는 음식 가득한 연휴를 보내고 있을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들 중 많은 교우들께서도 예배 후에는 보고 싶은 이들을 향해 평소와 달리 돌아가는 걸음을 일찍 재촉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풍성하고 넉넉하며, 행복한 시간을 만끽할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희망 절망의 진창에서 핀 연꽃)

BC 5백년 경, ‘하느님의 영이 임금과 영원히 함께하고, 왕국은 영원무궁하리라는 왕조중심 신앙이 유다의 권력층 대다수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당시의 정황은 또 다른 예언서 예레미야에 잘 드러나고 있는데요, 분명 국가적 위기가 임박한 상황에서도 왕조번영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혔던 예언자 하나니야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칩니다.

 

만군의 야훼께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으로서 하시는 말씀이오. ‘나 야훼는 바빌론 왕의 멍에를 부수기로 하였다.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이 이곳에서 바빌론으로 약탈하여 간 내 집의 모든 기물을 이 년만 있으면 이곳으로 되돌려 오리라. 유다 왕 여호야킴의 아들 여고니야와 함께 바빌론으로 사로잡혀 간 유다인들도 모두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똑똑히 말해 둔다. 내가 바빌론 왕의 멍에를 부수리라! (예레미야 28:2~4)

 

한 마디로 걱정 하지 마! 다 잘 될 거야!’라는 이 호언장담에는 당시 지배층의 사상, 즉 하느님과 계약되어 있는 다윗왕가는 영원할 것이고, 그들의 지배도 장구하리라는 꿈이 반영되어있습니다. ‘유다멸망이라는 결론을 알고 있는 지금의 우리들이 보기에 참 허망하다 못해 애처로운 웃음이 나오기까지 하는 이들의 주장에는 다음과 같은 시대 상황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136년 전인 BC722년 북 왕국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게 멸망한 후, 유다 또한 사실상의 주권을 잃고 속국이 되었습니다. 이 와중에 개인의 영달을 위해 점령국에게 아첨하는 무리가 생겨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앗시리아로부터 권력을 허락받는 댓가로 국가의 주권, 온 백성의 생활터전과 기반 등을 송두리째 넘겨버렸고, 제국의 신을 야훼인양 섬기게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네 역사 중 일제 강점기에 사회 각 영역에서 생겨난 친일인사들의 행각을 통해 쉽게 이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을 짓밟은 대가로 획득된 절대 권력이 영원할 수는 없는 법! 앗시리아는 왕권다툼과 신바빌로니아의 도전으로 급격하게 국운이 기울기 시작합니다. 이와 같은 국제정세를 예리하게 살피던 암 하아레츠즉 땅의 사람이라 불리는 정파인물들이 마침내 반정(反正)을 통해 친 앗시리아계 왕과 지배계층들을 몰아내고는 요시아를 왕을 옹립하게 됩니다. 이들은 앗시리아와 많은 거리를 두려는 성향을 지니고 있었던 반면, 인근의 신흥강국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바빌로니아와는 종전보다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려는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이와 함께 제국 내 문제가 수습 국면에 들어간 전통의 강호 이집트에 대해서도 일정부분 관망하는 자세를 갖는 등, 반정 인물들은 어느 국가에도 기울지 않는 외교정책, '등거리 외교'를 지향했습니다. 이는 후금과 명 사이에서 균형 외교를 펼쳤던 조선 광해군의 정책에서도 볼 수 있듯 약소국이 강대국 사이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최고의 방안 중 하나였던 것입니다. 기존 지배국가의 약화로 인한 공백과 함께 등거리 외교를 통해 획득된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암 하아레츠들은 자신들이 소망했던 국가 공동체의 이상들을 실현시켜 나가기 시작했고, 여기에 어리지만 영민했던 왕 요시아는 그 국가개혁의 추진동력이 되었으며, 이를 통해 유다는 종교, 정치, 외교, 국방 등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의 부흥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신흥정치세력들의 꿈은 마침내 이룩되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BC609년 이 꿈은 갑자기 스러져버리고 마는데요, 그것은 변화의 상징이었던 요시야왕의 사망 때문이었습니다. 바빌로니아의 공격 앞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앗시리아가 팔레스타인 일대를 넘기는 조건으로 이집트에 원군을 요청했고, 세력 팽창을 꿈꾸던 파라오 느고는 이에 화답하여 전군을 몰고 북상하였습니다. 이때 마흔이 채 되지 않았던 요시야는 등거리 정책의 균형이 무너질 것을 염려했던 나머지, 유다 단독으로 이집트 대군을 막아서기에 이릅니다. 이는 젊은 나이에 모든 일에 승승장구했던 그의 자신감과 함께 하느님께서 이번에도 승리하게 해 주실 것이라는 종교적 열망도 강하게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열망과 신념은 이집트 대군의 말발굽 앞에서 처참하게 쓰러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허망한 죽음에 대해 열왕기는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립니다.

 

~그러나 요시아는 므기또에서 파라오 느고와 접전하자마자 전사하였다. (열왕기하 23:29b)

 

이 충격적인 패배와 국왕의 사망이후, 암 하아레츠들은 요시아의 아들 여호아하즈를 왕으로 세우지만, 바빌로니아에게 패전 후 귀환 중 후환을 없애기 위해 침공한 파라오 느고에 의해 폐위 된 후, 반정세력들은 모두 숙청당하게 됩니다. 이후 유다지배층은 자신들을 세워준 이집트에 조정당하는 허수아비가 되었고, 결국 일대의 패자로 등극한 바빌로니아를 바로 인식하지 못하는 결정적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나는 유다 왕 시드키야에게도 같은 말을 전하였다. “너희는 바빌론 왕의 멍에를 메어라. 그 왕과 그 백성을 섬겨라. 그러면 모두 죽지 않으리라.” (예레미야 27:13)

 

보기에는 일본을 섬겨야 잘 살수 있다던 이완용의 연설 같기도 한 이 구절은 상기 설명했던 상황에서 이집트가 바빌로니아를 막아줄 것이라는, 헛된 희망에 빠져있었던 위정자들을 향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제발 살아서 다음을 도모하자고 외쳤던 예레미야의 절규입니다. 예레미야 등과 함께 비운의 왕 요시아와 유다의 스러진 부흥을 안타까워하며, 현실을 외면한 채 헛된 행복에 즐거워하던 당시 지배계층을 향해 직언을 날렸던 또 하나의 예언자가 바로 오늘 본문의 주인공, 개신교인들에게는 에스겔이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한 에제키엘입니다. 그는 당시의 상황 속에서 친 이집트계 지배층이 영원한 왕국과 영광의 야훼를 노래하고 있을 때, 너무도 비관적인 이야기를 서슴지 않습니다.

 

밖에서는 칼이 번뜩이고 집 안에서는 염병과 기근이 노린다. 들에 있는 자는 칼에 맞아 죽고, 성 안에 있는 자는 기근과 염병으로 쓰러져 죽을 것이다. 산으로 도망친 자도 모두 제 죄벌을 받아 비둘기처럼 신음하며 죽을 것이다. 사람마다 맥이 풀리고 오줌을 싸서 무릎이 젖고, 몸에는 삼베를 걸치고 부들부들 떨면서 머리를 깎이고 창피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게 되리라. (에제키엘 7:15~18)

 

사제가문의 일원으로 비록 중앙사제라는 지배계급이었지만, 비 예루살렘 계통인 암 아하레츠 및 요시아의 개혁정책을 지지했던 그는 희망의 상징이었던 왕과 개혁세력의 몰락, 구세력의 귀환, 이 가운데 급격하게 다가오고 있는 멸망의 먹구름을 안타깝게 지켜보며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신의 이야기를 요즘 말로는 돌 직구로 외치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모시는 에제키엘의 말씀은 바로 그러한 때의 심경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해야 될 바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아마도 같은 가문인 사제들로부터는 조롱을, 정치인들에게는 경멸을, 살기 바쁜 서민들에게는 무관심을 받았을 그의 목소리에서는 점차 힘이 빠져나갔을 것입니다. 그러한 때에 전해지는 신의 음성은 이것이었습니다. ‘내가 너를 파수꾼을 세웠는데 하고 싶지 않으냐? 그 성에 임박한 재앙을 피할 수 없어 사람들이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해도, 그 재앙이 임박했다고 외치지 않은 파수꾼에게 죄 없다 할 수 있겠느냐? 너는 알고 있지 않으냐?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저에게 잘못이 없다 하겠느냐? 너는 파수꾼이다!’

이후 국가멸망을 직설적으로 외치던 그는 바빌로니아의 1차 침공 때 국왕 여호야긴과 함께 포로가 되어 슬픈 타향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BC586년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마지막 왕 시드기야의 두 눈이 뽑혔으며, 성전은 잿더미가 되고 수많은 백성들이 비참한 죽음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2차 포로민들을 통해 듣게 됩니다.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의 절망적인 상황 앞에 선 에제키엘....... 많은 이들이 극한의 상황에서 절망의 나락에 떨어져버렸거나, 또 다른 권력자에게 빌붙어 자신만의 살길을 도모했음직한 그 때, 지금까지 살벌하리만치 부정적인 이야기만을 외치던 그가 돌연, 희망을 외치기 시작합니다.

 

일러주어라 내가 맹세한다. 죄인이라고 해도 죽는 것을 나는 기뻐하지 않는다.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죄인이라도 마음을 바로잡아 버릇을 고치고 사는 것을 나는 기뻐한다. 돌아오라. 이스라엘 족속아, 어찌하여 너희는 죽으려고 하느냐?’ (에제키엘 33:11)

 

너무도 유명한 바퀴달린 네 생명체 환상, 되살아나는 마른 뼈 환상, 두 나무 막대가 하나가 되는 신탁, 새로 일어서는 성전 등, 에제키엘서 곳곳의 이야기들은 지극한 절망을 직시하는 가운데, 다음의 희망을 일궈나갔던 에제키엘과 그의 지지자들이 비참하고 척박한 진창에서 피워 낸 한 송이 연꽃이었던 것입니다.

그래! 인정할게. 우리는 어렵다. 나는 너무 힘들어. 성전은 무너졌지.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의 저 장엄한 성전이 우리와 함께 할 거야. 우리들은 쓰러졌어. 하지만 죽은 것처럼 보이는 우리가 언제든 되살아날 거야. 우리는 인접한 에브라임을 외면할 만큼 상대방에게 적대적이었지. 그러나 훗날 우리들은 지체로 만나 연합할거야. 희망은 그것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현실이 되어 다가올 거야! 힘을 내자!’

 

(직면한 어려움 속에서 다음을 보려는 바울로의 염원)

어려움을 직시하는 가운데 다음의 희망을 꿈꾸는 이들의 소망은 2성서의 로마서에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찍부터 제국의 수도에 형성되었으며, 브리스가와 아굴라로 대표되듯 경제적으로도 안정적인 교인들이 다수였던 로마의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이 외형상 참 번듯하고 행복해 보이는 교회는 실상 커다란 위기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상대적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던 유대공동체가 유대전쟁 이후,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로마당국에 유사단위로 비춰질 수 있었던 예수공동체와의 차별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제기했던 견제와 민원, 그리고 성전과 신상이 없고 저항하다 죽은 이를 섬기는 종교집단이라는 점 등으로 인해 발생한 지역 담당 행정관들의 불신이 그것이었는데요, 결국 팍스 로마나즉 모두가 그저 조용히 있는 것을 '평화'로 인식했던 로마의 지배자들에게 있어 늘 소란의 중심에 있고, 불온한 집단으로 보였던 로마공동체는 황제의 추방령으로 모든 기반을 버리고 다른 도시로 쫓겨 다녀다니는 신세가 되어야 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 추방령이 해제된 후 간신히 돌아와 소중한 공동체를 재건한 이들에게 전해진 바울로의 서신이 오늘 우리가 함께 모시고 있는 로마서입니다. 당시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라는 사명을 문자적으로 지키려했던 바울로에게 당시 지중해 주변인들에게 땅 끝으로 인식되던 스페인 선교를 위한 중간 기착지 및 물심양면의 지원을 받아야 동역자들의 공동체, 로마교회는 참 소중한 모임이었던 반면, 제국의 심장부에 있었던 이 공동체는 상기와 같은 이유로 늘 불안함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울러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불신, 민원의 결과로 점점 더 많이 부과해야 할 세금 등으로 공동체 내부에서는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어. 죽을 때 죽더라도 한번 덤벼봐?' 식의 공세적인 행동을 취하자는 입장이 강하게 제기되기도 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로에 대해 부정적 시선이나 혐의를 거두지 않는 이들에게 있어 그 대표적인 근거로 제시되는 13, 다시 말해 권력자에게 복종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는 오늘의 본문은 바로 이러한 위기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앞서 예레미야나 에스겔이 친 바빌로니아계 인사로 비칠 수 있는 것과 같이 바울로의 로마서는 그의 사상이 친 로마, 친 권력적이라는 혐의를 얻기에 충분해 보임직도 합니다. 그러나 대통령에게 순종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설교하던 대한민국조찬기도회 기도문 같은 이 구절은 소름끼치도록 놀라운 반전을 오늘의 본문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야 하는 여러분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왔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처음 믿던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밤이 거의 새어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로마서13:11~12)

 

다시 말해, ‘기분 나쁘지만 통치자에게 세금을 내줍시다. 억울하더라도 우리를 미워하는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자구요. 하지만 여러분! 이것은 굴종도, 포기도 아닙니다. 그들이 지배하는 밤은 이제 곧 끝날 것입니다. 새벽의 날, 곧 주님의 날이 임박했음을 믿으며 우리 지금의 어려움을 견뎌갑시다!’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는 본문은 이렇듯 외형상 번듯한 공동체의 본질에 당면한 어려움을 직시하는 가운데 소중한 공동체를 보전하는 한편, 차분하게 다음을 준비하면서 예수의 가르침을 더욱 멀리 전하려 했던 바울로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어려움 가운데 희망을 꽃피우려는 공동체의 의지)

공동체에 주어진 어려움을 극복하는 가운데 다음의 희망을 꽃피우려는 의지는 이제 주님의 가르침 속에 공동체의 신앙고백과 소망을 아로새긴 마태오복음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형제가 죄를 지으면~’으로 시작하는 오늘의 본문에서도 알 수 있듯, 무언가 좋지 않은 상황에 직면해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마태오공동체는 1장에서 예수의 계보를 아브라함에서 찾는 점 등의 특징을 통해, 유대인들이거나 유대교 전통에 기반 했던 예수공동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빌라도가 도대체 그 사람의 잘못이 무엇이냐?”하고 물었으나, 사람들은 더 악을 써가며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하고 외쳤다. 빌라도는 그 이상 더 말해 보아야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것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폭동이 일어나려는 기세가 보였으므로 물을 가져다가 군중 앞에서 손을 씻으며 너희가 맡아서 처리하여라.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하고 말하였다. 군중은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지겠습니다.”하고 소리쳤다. (마태오 27:23~25)

 

민중에 대한 잔혹한 처형과 가혹한 탄압에 기겁한 황제가 총독직을 파면했을 정도로 무자비했던 역사적 빌라도를 소리치는 대중에 겁박당하 인물로 묘사하여,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유대인들에게 있는 것으로 그리고 있는 본문의 다른 내용을 통해, 우리는 마태오 공동체가 또한 유대인 및 유대교인들에게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음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동족이었거나 오랜 기간 같은 유대교를 믿었던 이들에게 마태오 공동체는 왜 이토록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요? 이는 AD 70년 이후에 일어난 반로마 무력시위 및 예루살렘 함락 이후의 상황에 기인합니다. 이 와중에서 요하난 벤 자카이 등의 친 로마계 랍비 들은 독립 세력들을 비판하면서 로마에 투항하여 목숨을 부지한 후, 흩어진 유대인들을 여러 공동체로 다시금 규합하였습니다. 이후 로마에게는 더 이상 유대인 공동체가 제국에 위험한 존재가 아님을 변증했고, 안으로는 소요나 극단적인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율법을 통해 통제했습니다. 이 와중에서 조금이라도 이상하다 여겨지는 존재들은 율법의 이름으로 이단이 되어 처단되어야 했고, 이에 따라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은 배척의 대상이 되어갔습니다. 결국, 예루살렘 파괴와 학살이라는 광풍과 함께 공동체로부터의 배척이라는 이중의 아픔을 겪었던 공동체....... 게다가 이 과정에서 예수 신앙을 주창하다 처음부터 쫓겨난 이들도 있었던 반면, 어떤 이들은 신앙을 버리고 유대교로 입문하려다 종국에는 축출되어 돌아온 이들이 포함되기도 하면서, 공동체는 전쟁과 배척이라는 외부요인과 함께 분열이라는 안팎의 시련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공동체는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우리는 문제없어요.'라면서 당면한 문제를 덮어두거나, '넌 틀렸어!' 라는 식의 싸움으로 가는 것을 지양하면서 '함께하는 곳에 주님이 계심'을 천명하게 됩니다. 얼핏 보기에는 설득되지 않으면 돌아보지 말고 버리라는 의미로 읽혀지는 본문의 처음을 상세히 읽으면 잘못한 형제를 버리지 말고, 공동체의 이름으로 계속 타일러 함께 할 수 있도록 하라는 가르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잘못한 이는 그 공동체의 권면에 이전의 과오를 뉘우치고, 함께 살아감의 장으로 나오라는 제안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결국 이와 같은 노력을 통해서만 오랜 갈등은 해결될 수 있음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지요. 쓸데없이 하늘에 대고 간구하지 말고 땅에서, 즉 우리가 함께 풀어야한다는 말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공동체의 하나 됨을 위한 염원은 본문의 마지막에서 더욱 극대화됩니다. ‘너희들이 간구하면 하느님께서는 다 들어주실 거야. 그런데 조건이 있어. 그건 비록 두 세 사람일지언정 함께 모인 이들이 염원하는 것을 들어주신다는 거야. 혼자는 절대 안 돼. 힘들어도 함께 만들어가는 가운데 하느님은 함께 하실 거야!’

 

사랑하고 존경하는 향린교우 여러분!

우리가 다 알고 있듯 오늘은 즐거운 추석연휴이고, 생명을 노래하는 창조절의 처음입니다. 이러한 때에 절망, 어려움, 위기 등 너무 어두운 이야기만 길고 재미없게 늘어놓고 있다 여겨지실 수도 있겠고, 일주일 만에 교회 왔는데 위로는 주지 못할망정, 또 마음 무겁게 한다는 생각이 드실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진정으로 여러분에게 행복한 추석연휴가 되시길 마음모아 기원 드립니다. 그런데 그 행복함이 또한 함께 하는 이들을 살피는 가운데 일어나는 참된 마음이기를 소망합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을 잘 차려진 밥상 앞에서 나눌 때, 그 음식을 위해 수고한 이들의 애씀을 당연스레 생각한다면, ‘결혼 해야지? 언제 할 거야?’, 혹은 '결혼을 했으면 애를 낳아야지? 사람구실 안할래?' 또는 이젠 취직해야지?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니?’ 등 무수히 아픈 말을 어른의 덕담이라는 이름하에 일방적으로 풀어놓는다면 그 행복함이란 기실 함께하는 이들의 현실을 외면하여 얻게 된 허상일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가 예배를 마치고 일어서 인사 나눌 때, 지체의 어려움을 살피지 못하는 가운데 그저 형식적으로 추석 잘 보내세요!’라는 말을 남긴다면, 자칫 이런저런 이유로 홀로 연휴를 보내야 하는 이의 마음에, 연휴 내내 아파하는 가족의 병상을 지켜야 하는 교우들에게, 휴일이 지나자마자 걸려올 입금독촉전화로 긴장되는 마음과 시작되는 수시로 인해 마음을 졸여야 하는 수험생 및 그 가족들에게 무척 날카로운 말의 비수를 던지는 격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상대방의 마음과 상황을 잘 살펴 그 혹은 그녀와 함께, 아울러 공동체 구성원모두에게 따스한 마음 가득한 추석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끝으로 이 사회의 행복이 실은 무척 슬픈 이들의 상황을 도외시 하고 얻어지는 어떤 것이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하며, ‘민생 경제 활성화’, ‘국론 통합이라는 명분 앞에서 슬픔도, 사랑하는 이가 죽어야했던 원인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도 비난받아야 하는 세월호 가족들과 함께 하는 추석이 되기를 마음 다해 희망합니다. 그것은 비단 기간 동안 광화문 농성장을 찾는 등의 적극적인 활동 뿐 만이 아니라 가족 예배 및 모임 가운데 세월호와 관련된 의미와 진실을 나누고, 연휴 이후 삶의 자리 곳곳에서 계속 아픔과 진상규명을 향한 염원을 기억하는 내적 활동 또한 중요한 연대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이의 슬픔을 외면하고 얻어지는 기쁨은 본질적으로 허상일 것이고, 종국에는 자신이 슬픔에 직면했을 때 아무도 나와 함께 울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힘 있는 이들이 '평화'라 말할 때, 이면에서 말하지 못하고 울고 있는 이들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내가 그 힘 있는 이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우리 함께 시대와 공동체, 그리고 각자가 지고 있는 어려움과 슬픔을 직면하고 끌어안읍시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에서 함께 하는 이들과 함께 소박한 희망의 꽃 한 송이를 피워냅시다. 그런 희망의 추석, 생명의 창조절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잠시 침묵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 생명을 자유롭게 창조하신 하느님의 마음을 느끼며,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그러나 여러분!

진정한 자유란 다른 이들을 느끼며, 어려움과 아픔을 직면하는 가운데서 얻어질 수 있는 것임을 기억하며 김남주 시인의 글로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이다.

피와 땀과 눈물을 나눠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 할 수 있으랴!

 

공동체의 축복기도 나누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