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는 용서의 샘

50:15-21; 103:8-13; 14:1-12; 18:21-35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카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 516, 17, 18절은 성서의 수많은 구절 중에서 가장 짧은 절이면서도 가장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 말씀을 하나하나 깊이 묵상해 보면 항상 기뻐할 수 있는 힘은 감사에서 나오고 기도 또한 불평이 있는 한 할 수가 없고 오직 감사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 가능합니다. 이렇게 보면 감사야 말로 신앙의 핵심이자 출발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감사의 징표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왠지 가까이 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유없이 멀리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 곁에는 사람들이 항상 함께 모이지만, 어떤 사람 곁에는 별로 사람들이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대체로 감사하는 사람 곁에 사람들이 모이고 불평하는 사람 곁에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이렇게 단지 대인관계에서만 중요한게 아니라, 건강에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뇌과학자들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 뇌 좌측에 있는 긍정의 전두피질이 활성화되면서 스트레스를 완화시켜 주고 행복감을 가져다준다고 말합니다. 감사의 마음은 컴퓨터의 `리셋트(재설정)` 버튼을 누르는 것과 같아 고민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마음을 갖게 한다고 말합니다.

 

감사의 과학이란 책을 집필한 로버트 에몬스교수는 "생리학적으로 감사는 분노나, , 후회 등 불편한 감정들을 덜 느끼게 할뿐더러, 훨씬 활동적이고 매사에 적극적이고 열정적이며, 주위 사람들과도 친밀감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12살에서 80살 사이의 사람들을 상대로, 한쪽 사람들에게는 감사 일기를 매일 또는 매주 쓰도록 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루에 일어났던 사건을 기록하도록 했습니다. 한 달 후 중대한 차이가 발생했는데, 감사 일기를 쓴 사람 중 4분의 3은 행복지수가 높게 나타났고, 수면이나 일, 운동 등에서 더 좋은 성과를 냈습니다. 그저 마음으로 감사했을 뿐인데 뇌의 화학구조와 호르몬이 변하고 신경전달물질들이 바뀐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사람의 얼굴이 달라지고 자꾸 뭔가를 주고 싶어집니다. 사랑과 감사가 하나의 뿌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비싼 보약이나 맛있는 음식 사먹으려고 이곳저곳 헤매는 대신에 하루를 감사의 기도로 시작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 감사 일기를 쓰는 것이 더 낫다는 과학자들의 결론입니다. 감사나 불평은 환경에 하나의 습관입니다. 불평하는 습관이 있는 사람은 어떤 좋은 환경에서도 꼭 한두 가지 불평의 조건을 찾아내고, 감사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은 어떤 나쁜 환경에서도 꼭 한두 가지 감사의 조건을 찾아냅니다. 의도적으로 매 순간 감사하는 습관을 갖기를 바랍니다. ‘지금 감사할 이유 3가지를 명상 제목으로 정하면 더욱 좋겠습니다.

 

감사에는 상대적 감사가 있고 절대적 감사가 있습니다. 상대적 감사는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감사입니다. 그런데 비교의 대상을 항상 자기보다 더 큰 불행을 겪거나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만 삼는다면 이 사람의 감사도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기에 자기보다 더 나은 사람들과 비교하게 되는 경우도 생기고, 더욱이 부당한 방법으로 부와 세상 권세를 누리는 사람들을 보면 분노가 치밀게 되니 자연히 감사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됩니다. 이는 상대적 감사가 갖는 약점이다.

 

[운명을 섭리로]

 

이에 반해 절대적 감사는 하느님과 나 사이의 관계 속에서 나오는 감사입니다. 나는 그냥 이 세상에 우연히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태어났다는 자각 속에서 나오는 감사입니다. 엄마의 뱃속에서 생명이 잉태되는 그 순간을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에는 수많은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뱃속에서 9개월동안 자라고 어느 가정에 태어나면서 당신만이 갖는 독특한 길이 주어집니다. 이를 세상에서는 운명이라고 부르고, 성서에서는 섭리라고 부릅니다. 저는 이를 섭리로 부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운명으로 해석하는 순간 내 안의 긍정적 창조성이 침해를 받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언제 어디서 누구로부터 태어날지에 대해 선택권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운명 혹은 숙명이라고 부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에 있어 내가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삶은 전연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같은 유전자에 같은 날에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난 쌍둥이들 또한 전연 다른 삶의 길을 걸어가는 것은 운명이 아닌 각자의 삶의 태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벗어날 자유와 창조성이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형상을 띄고 태어났다는 말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운명은 우리의 외부 곧 경험의 세계를 만들도록 하지만, 동시에 신의 형상을 받은 우리는 이러한 운명을 딛고 일어설 내면의 영적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힘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 지구를 거쳐 간 인구가 수백억쯤 될 테인데 모든 인간은 다른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창조성을 갖고 태어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당신만의 선물을 갖고 이 세상에 온 것입니다.

 

물론 때때로 이 선물은 고통과 아픔일수도 있습니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그 이유를 모릅니다. 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사람들은 저마다의 슬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고, 중요한 것은 어찌되었든... 그것을 고통이라 부르든 아픔이라 부르든 혹은 행복이라 부르든... 중요한 것은 당신에게는 그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당신만의 선물이 있다는 것이고 보다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그런 선물이 있는지도 모른 채, 포장도 뜯지 못한 채, 그냥 박스채로 놔두고 세상을 떠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선물 박스는 오직 그 사람만의 지문에 의해 열리기에 만약 그 사람이 그 선물 박스를 열지 않는다면 그건 그냥 포장된 그대로 역사의 물결 속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신은 나만이 열수 있는 선물을 주셨다는 것 그리고 이것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의 삶은 전연 다른 삶이 됩니다.

 

만약 우리가 자신의 삶에 대해 이런 깨달음을 갖게 된다면 우리들의 삶은 자연히 이 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이 내안에 들어왔고 그래서 신과 내가 하나가 되었기에 신이 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연히 신이 나는 것입니다. 신이 나면 자신을 감싸고 있는 어떤 악조건이라 하더라도 이는 단지 앞을 향해 나아가는 디딤돌이 될 따름이지 걸림돌은 되지 아니합니다.

 

[걸림돌을 디딤돌로 만든 사람]

 

여기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위의 배다른 형들이 열 명이나 되었지만, 아버지는 돌아간 아내의 첫사랑을 잊지 못해 유독 그 만을 사랑했고, 그는 그 누구보다 꿈 많고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사랑에 시샘을 낸 형들은 그를 지나가는 장사꾼들에게 돈을 받고 팔려버렸고, 그래서 그는 머나먼 외국 땅 어느 대궐 집에 노예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모든 꿈은 사라졌습니다. 그래도 그는 살아 아버님을 만나야겠다는 희망을 품고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주인의 총애를 입어 집의 모든 일을 관리하는 집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운명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아 그는 안주인의 계속되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끝내 이를 거부하자 안주인은 오히려 그를 겁탈 죄로 뒤집어씌워 옥에 갇히게 됩니다. 이쯤 되면 하느님을 원망하고 자포자기의 인생을 살만도 한데, 그는 자신은 신의 뜻에 의해 이 땅에 태어났고, 또 자신만의 독특한 선물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기에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감옥에서도 성실했기에 그는 간수장의 총애를 받아 그의 도우미가 되었고, 그래서 여러 죄수들을 만나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왕의 노여움을 산 두 사람의 대관이 옥에 갇히게 됩니다. 이 두 사람이 각기 다른 꿈을 꾸게 되는데, 그는 이 꿈을 해몽을 하여 주었는데, 그 해몽대로 한 대관이 복직이 되었고 다른 대관은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왕이 꿈을 꾸었는데, 그 나라의 소위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어느 누구도 이 꿈을 해몽하지 못합니다. 그때 이 대관은 옥에 있을 때, 자기 꿈을 해몽해준 이 청년을 떠올리게 되고 이 청년은 왕 앞에 나가 명쾌하게 꿈을 해몽을 하자, 이 왕은 그 꿈을 해결하는 국정 책임을 맡깁니다. 지금 제 하는 말이 수수께끼로 들리는 사람들은 오늘 집에 가셔서 창세기 41장 이하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차저차 하여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은 저차이차 하여 유대 땅에 살던 형들을 만나게 되고 아버지 야곱을 포함한 모든 가족이 애굽으로 이주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배다른 형들은 자기 동생을 팔았던 과거의 죄책에 매여 있습니다. 처음 요셉을 만났을 때, 자기들에게 복수하겠구나 생각했었습니다. 그때 요셉이 말했습니다. “형님들이 나를 팔아넘겼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목숨을 살리려고 이곳에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자각이 없었다면 이렇게 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가 죽자 형들은 또 다시 복수에 대한 두려움을 갖습니다.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자기가 당한 온갖 억울함을 앙갚음할지 모른다.’ 그래 요셉에게 나아가 이제 우리의 목숨을 지탱해주고 차라리 종으로 삼아 달라고 말합니다. 요셉은 오래 전에 이미 용서를 해 주었건만 요셉의 형들은 아직도 그 과거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건 그들 자신에게 주어진 자신만의 인생의 선물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왔다는 증거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경험만으로 동생 요셉을 판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입니까?’]

 

요셉은 그게 너무 슬펐습니다. “형님들 두려워하지 마세요. 내가 하느님입니까? 나에게 죽을 짓을 한 사람들은 형님들이 분명하지만,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를 선으로 만드셨습니다.” 요셉이 만약 비교 속에서 나오는 상대적 감사를 추구했다면 형들을 용서할 수는 있었겠지만, 이 순간 결코 이렇게 말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형님들 염려하지 마세요. 쓰라린 과거 노예로 살았던 고통과 감옥에 갇혔던 억울함을 잊기는 정말 어렵지만, 저는 형님들에게 복수할 마음이 없습니다. 복수한다고 제 과거가 돌아오겠습니까?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전 힘들지만 이미 과거를 잊기로 했고 마음으로 이미 용서했습니다.’ 요셉이 상대적 감사를 추구했다면 이렇게 얘기할 수는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전연 자기를 주어로 삼지 않은, 자기라는 주어가 삭제된 아니 오히려 자신의 불행을 이용하여 하느님께서 선을 행하셨다는 하느님 주체의 역사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은 절대 감사 곧 자신만의 선물에 대한 깊은 자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과거의 쓰라린 역사가 오히려 이 선물을 펼쳐 보이도록 하기 위한 섭리의 과정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하늘 은총의 깨달음이요 거룩함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미래에 대한 열려진 확신, 경험의 축적이라는 자아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자신은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자유혼의 철저한 자각 속에서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는 절대 감사가 형성이 되고 이 절대 감사의 샘을 통해 용서의 샘물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상대 용서와 절대 용서]

 

예수님 당시 율법은 세 번까지의 용서를 가르쳤습니다. 한 번의 용서도 쉽지 않거든 세 번을 용서하다니요? 여러분의 자녀가 같은 실수를 세 번이나 반복했는데도 용서할 수 있다면 그 분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수제자 베드로는 자신이 바리새인들의 가르침과 다르고 자신의 깨달음을 강조하기 위해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일곱 번의 용서. 이는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도인의 경지입니다. 베드로의 경지 또한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이는 490번의 용서를 말하는 것이 아닌, 무한대의 용서 곧 절대 용서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온전하신 것처럼 너희들도 온전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용서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 당신이 아님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 자체가 불신앙적인 일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가 누구냐? 너의 정체가 뭐냐? 너는 만달란트라는 어마어마한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아니냐? 너의 목숨을 내논다고 한들, 네 가족을 다 종으로 판다고 한들 그 빚을 갚을 수 있느냐? 그런 네가 누구를 용서한다고? 야 이 놈아 주제 파악 좀 해라! 이런 말씀입니다. 용서에 관련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의 핵심은 오늘날로 말하면 10조원의 빚을 탕감 받은 자가 10만원을 빚진 형제에게 으스대며 자네의 형편을 보니 빚 갚을 형편이 안 되는 것 같구만. 자네가 나에게 진 그 빚 10만원 탕감하기로 마음을 먹었네. 나로부터 받은 자비를 기억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게나.’ 예수께서는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렇게 파렴치한 짓거리이다라는 말씀입니다.

 

[‘분노를 통한 치유’]

 

그런데 우리가 용서를 얘기할 때에 개인과 개인 사이에 일어나는 고통과 집단과 집단 특히 국가권력이 개입된 집단 고통에 대해서는 달리 접근해야 합니다. 스티븐 체리라는 신학자가 쓴 용서라는 고통의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본래 제목은 Healing Agony입니다. 분노를 통한 치유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번역입니다. 이 책은 집단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강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상처와 피해는 부당한 권력을 통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518 광주항쟁의 피해자들에게 전두환을 용서하라고 강요하지 말라는 것이고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이제는 모두 잊고 용서하고 일상으로 돌아가자고 요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특히 신을 빙자하여 국가 권력의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말하는 것은 성서뿐만 아니라 예수 말씀에 대한 곡해라는 것입니다. “의외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구약성서와 마찬가지로 신약성서도 분노를 적대시하지 않는다. 분노의 지속이나 악화에 대해서는 경고하지만 분노를 엄연한 삶의 한 단면으로 인정하다. (예수에게 있어) 분노는 하느님의 나라를 갈구하는 마음속에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요소다.”(116)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성서 본문의 주제가 용서이고 또 오늘 한가위감사주일로 지키기에 용서와 감사를 주제로 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탐욕과 부정이 판을 치고 억울한 죽음의 원인을 밝혀달라는 사회적 약자의 아픔에 나 몰라라 내 팽개치는 이 몰지각하고 불법이 난무하는 남한 사회를 바라보면서 감사와 용서만으로 오늘의 말씀을 끝맺기에는 가슴 한편이 뻥 뚫려 있습니다.

 

지금 세월호 유가족들은 진실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광화문광장 청운동과 국회의사당 길거리에서 노숙 농성을 해온지 벌써 한 달이 넘어갑니다. 이분들에게 모든 것을 용서하고 과거는 잊고 가자고 얘기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아직 죽음의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는데, 아니 원인은 분명 있습니다. SNS상을 통해 드러난 여러 동영상들을 보면 누가 이 참사를 일으켰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국정원과 청와대가 여기에 어떻게 관여했는지에 대해서도 많은 얘기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덮고 가자고 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반역이자 진실을 향해 침을 뱉는 인간 모독이자 짐승의 짓입니다.

 

[역사 반역을 넘어]

 

불과 이틀 전 우리는 지금 청와대의 권력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분명히 보았습니다. 지난 대선에서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의한 선거 개입의 불법성이 십만 건이 넘는 트위터 글로 증거물로 뻔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권력형 해바라기 이범균부장판사는 정치에는 개입했지만, 대선에는 개입하지 않았다, 사람을 죽인 건 맞지만, 살인은 하지 않았다는, 술을 먹은 건 맞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라고 하는 해괴망칙한 논리로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아니 1년 전 그는 서울시 야당의원이 다른 사람의 트위터 글을 한번 리트윗했는데, 이를 선거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내려 의원직을 박탈시켰던 당사자입니다. 결국 이범균판사는 작은 도둑은 엄하게 다스리지만, 큰 도둑과는 한패가 되겠다고 공적으로 선언을 한 것입니다.

 

오죽하면 동료 김동진부장판사가 법원 내부 게시판에 법치주의는 죽었다라는 글을 게시하고 이번 원세훈 무죄 판결은 (이범균판사가)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심사를 목전에 두고 입신영달을 위한 사심의 판결이라고 비난을 하고 법치주의의 죽음이라고 얘기를 하였을까요? 오죽하면 오죽했으면 그는 옷 벗을 각오를 하고 이렇게 작심하고 글을 올렸을까요? 그러자 민심의 동요와 자기 양심에 찔린 대법원장은 이를 3시간 만에 직권으로 삭제했습니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수 있을까요? 겨울의 추위로 광화문 농성장에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고 해서 진실이 묻혀질까요? 70년도 안 되는 우리의 반쪽 역사에서 독재 권력에 의해 법치주의가 죽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요. 말이 삼권분립이지 실은 삼권일체입니다. 오죽했으면 변호사 출신 노무현대통령이 평검사들을 향해 우리 한번 제대로 된 토론 한번 해보자고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을까요?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인 법치주의가 무너진 이 남한 사회의 종착점은 어디일까요? 지금 여러분과는 직접 관계가 없다고 해서 모른 채 하면 그게 그냥 사라질까요? 아니면 몰래 뒤 돌아와 여러분의 뒤통수 정수리를 가격할까요? 경제지상주의와 복지를 외치면서 대기업과 부자들에 대한 징수 대신 서민에게 부담을 주는 담배값 주민세 자동차세 대폭 인상을 통해 세수를 채우려는 얄팍한 꼼수의 끝은 어디일까요? 원세훈 전 국정원장 판결 날짜에 맞춰 이를 발표하는 것은 우연일까요 아니면 여론 장난일까요?

 

하느님 나라는 도둑같이 그 때를 알 수 없이 오지만, 그렇다고 그냥 오지는 않습니다. 여인이 밀가루와 누룩을 섞어 반죽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고 누군가는 주인 몰래 겨자씨를 밭에 뿌리는 저항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그 날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고 그 준비 중에 가장 우선시되는 것은 우리들 각자가 먼저 하느님의 특별한 선물을 갖고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유일무이의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는 일입니다. 신의 은총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요셉 마냥 역사 섭리에 대한 자기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이런 조건에 감사하고 저런 순간에 용서하는 상대성을 뛰어 넘어 어느 조건에도 감사하고 어떤 순간에도 용서하는 절대성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고, 그때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활동하고 있을 것입니다.

 

성찬의 예식은 단지 예수와 제자들이 나누었던 마지막 저녁식사를 반복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꿈꾸었던 정의와 평등과 평화의 하느님 나라의 꿈을 나누기 위함입니다. 주님께서 꾸셨던 그 꿈을 함께 나누기 위해 침묵 가운데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