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살리는 사랑의 마음

(요나 3:10-4:11, 필립비 1:21-30, 마태 20:1-16)                                   

김정호목사(아틀란타 한인교회)

조헌정목사님이 제게 향린교회 설교를 부탁하셨을때 너무 기뻤습니다. 나도 이제 대한민국 기라성같은 목사님들이 설교하신 강단에서 설교할 수있다는 생각때문입니다. 그런데 설교하겠노라 답을 한다음 크게 후회했습니다. 왜냐하면 조목사님이 설교하는 교회이고 스승 홍근수목사님이 설교하신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조목사님을 뵈면 저는 항상 내가 속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깨끗하시고 분명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홍목사님 밑에서 목회를 배운지 30년이 넘었는데도 지금도 설교를 할때 머리 위에서 홍목사님이 설교 정도밖에 못하냐?” 야단 치시는 같습니다. 제가 23살때 전도사부터 교육목사 부목사를 했는데 매주일 야단 맞았습니다. 항상 레퍼토리는 같습니다. “너를 보니 앞으로 감리교회의 미래가 암당하다.” 그런데 제가 24살때 목사님이 1 안식년 하시면서 임시담임으로 세우고 가셨습니다. 어린 감리교 목사를 그당시 미국 이민교회 가운데 대표적이었던 교회 임시담임으로 세우셨다는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습니다. 저의 영원한 목회스승 홍목사님이 설교하셨던 향린교회에서 설교를 한다는 것이 엄청난 부담이었지만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리에 섰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있습니다. 요나는 자기 의로움의 잣대로 볼때 니느웨 성에 있는 사람들이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성안에 어린아이 12만명이 있는데 어찌 그들을 죽일수 있겠느냐 살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본문에서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주고 계십니다. 내가 사람들을 어찌 살리지 않을수 있겠느냐는 하나님 마음과 예수님 뜻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이 읽은 한마리 찾고 천하를 얻는 기쁨을 말씀하시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사람을 살리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현실은물론 교회마저도 너무 하나님 마음과 예수님 뜻과 거리가 멀때가 많습니다.

저도 30 넘게 목회를 했으니 많이 했다고 할수 있는데 교인들 가운데도 공부많이 분들 세상에서 나름대로 성공해서 먹고 사는 분들 가운데 신기하게도 가난한 사람들 억울함 당하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에 대해 말할 야박하고 때로 잔인한 마음 씀씀이를 가지는 봅니다. 당황스럽고 마음이 아픕니다.

그럴까?

미국에 불법체류자들이 천만명이 넘습니다. 거의 대부분 먹고 살려고 국경을 넘어온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가장부자나라와 가난하고 정치적으로 불안한 남미 나라들이 붙어 있으니 어쩔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인들 가운데 일찍 미국에 와서 공부하고 자리 잡은 사람들도 그렇고 어렵게 영주권 얻어서 고생하며 살아온 사람들도 그렇고 불법체류자들이 살수 있도록 법을 열어주는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실 자기들에게 손해나는 일도 아닌데 그렇습니다. 특별히 예수 열심히 믿는 같은 사람들이 그러니 목사로서 당황스러울때가 많습니다.

사실 제가 한국에 오는데 저를 많이 아껴주는 교인들 가운데 제게 부탁하는 것이 광화문광장에 가지 말라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정말 목사를 아끼는 마음으로 그러시는 것이니다. 가지 말라고 할까요? 세월호 문제해결을 위해 금식하는 분들 만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말 교회생활 잘하시고 목사를 많이 위해주는  분들입니다. 우리교회에도 저를 종북이니 빨갱이니 뒤에서 비난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도 교회 헌금내고 교회생활 하시니 저는 항상 고맙기만 합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그러는 것은 당연하지만 아무 정치적인 관심도 없고 그냥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착한분들 가운데도 여하튼 세상 시끄러운 싫어하는 분들은 제가 광화문에 가는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한신 출신은 아니지만 고재식 홍근수 곽노순 목사니이 모두 스승이셨으니 기장의 적자는 아니고 서자는 될텐데 어려서부터 기장성에 대해 배운 것은 욕먹어도 욕을 바가지로 먹어도 하나님 예수님 말씀이면 가는 겁니다. 그래서 한국에 오자 마자 조헌정목사님 함께 광화문에 갔습니다. 가서 금식하는 김홍술목사님 옆에 잠시 있다 왔습니다.

그런데 김홍술목사님 옆에 함께 계시던 조화순목사님이 저를 보시더니 야단을 치십니다. “너희 젊은 목사놈들 나쁜 놈들 나같은 80 넘은 늙은이도 여기를 지키는데 나쁜 놈들…” 그래서 제가 목사님, 미국에 있쟎아요. 미국에 있는데 어떻게…” 말씀을 드렸더니 상관없어! 너희들 그러는 아니다.”하시면서 야단을 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옆에 앉아서 노인 마음 풀어드리려고 손을 잡고 안아드리고 애교를 부렸더니 갑자기 목소리가 낮아지시더니 김목사, 마음이 아프다. 평상시에도 제대로 먹을 먹는 김홍술이가 금식하는데 너무 가슴 아프다. 옛날 동일방직 여자 노동자들도 금식할때 보면 먹고 살아서 이틀만 되면 쓰러졌다. 지금 김홍술이 26일째 금식인데…” 말씀을 들으면서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하나님 어머니 마음을 느꼈습니다.  제가 젊어보여도 나름대로는 미국 연합감리교회 한인총회 총회장도 지냈는데 저에게 이놈 저놈 나쁜 호통을 치시는 노인을 보고 같이 미국에서 젊은 목사들이 당황했던 같습니다.그래서 제게 묻더군요. 도대체 노인데 누구신데 목사님에게 이놈 저놈 하시느냐고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나같은 사람에게 이놈 저놈 나쁜 하시는 어른들이 계시다는 것은 나에게 큰축복이다. 그리고 기억해라. 저런 어른들 때문에 오늘 우리들이 있을 있다는 것을

본문 내용을 들여다 봅니다. 포도원 주인이 추수를 앞두고 일용직 노동자를 구하러 노동시장에 나간 것이다. 지금은 불법체류자 단속때문에 보기 힘들지만 제가 사는 애틀란타에도 새벽부터 하루 일용직 목놓아 뽑히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일꾼들이 그런 사람들이라 생각합니다. 포도원 주인이 아침 일찍(아마도 새벽 5 전후로) 데나리온에 합의를 보고 품꾼들을 고용해  포도원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데나리온은  직업군인이나 일용직 품꾼들의 하루 품삯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아침 아홉 시경 다시 노동시장에 나갑니다. 성경은  먼저 일꾼들이 일을 못했다거나, 아니면 일꾼이 필요하여 시장에 나갔다고 쓰여 있지 않습니다. 그냥 주인은 그저 나갔고 해가 높도록 ‘장터에 놀고 있는’ 사람들을 포도원 품꾼으로 고용했습니다. 이번엔 데나리온이라는 구체적인 임금을 이야기하지 않고 ‘상당하게’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표준 새번역에서는 “적당한 품삯” 영어로는 whatever is right(KJV)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 하루 일당을 쳐주기엔 늦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주인은 정오, 오후 시쯤 같은 말을 하고 품꾼을 샀습니다. 심지어 오후 다섯 , 이제는 파장 무렵의 인력시장에 나가 때까지 있던 사람들까지 고용했습니다.

저녁이 되어 하루 일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주인은 가장 늦게 사람들, 그러니까 오후 5시가 되어서야 일을 하기 시작했던 사람들에게 품삯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데나리온을 받자, 처음 새벽부터 와서 일을 사람들은  기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들이 데나리온이라면, 하루 종일 일한 자신들은 분명 받을 거라는 예상이었습니다.  그들의 기대는 정당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주인은 이후 모든 사람들에게, 심지어 새벽부터 일한 그들에게조차 데나리온을 품삯으로 지불했고 드디어 불만은 터졌고 이들은 주인에게 투덜거렸습니다.

불평은 -  “마지막에 사람들은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도, 찌는 더위 속에서 온종일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였습니다.   부당하다는 지적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들이 분명 데나리온에 합의를 하고 일하기로 결정했음을, 그리고 주인은 돈을 지불했음을 상기시킵니다. 그들과 계약위반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은   “당신에게 주는 것과 같이 마지막 사람에게 주는 것이 뜻이요. 것을 가지고 뜻대로 없다는 말이오? 내가 후하기 때문에 그것이 당신의 눈에 거슬리오? 그렇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이야기의 마지막을 이렇게 장식합니다.   “이와 같이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것이다. 그런데 다른 고대 사본에는 다음의 구절이 첨가되어 있다고 합니다. “부름 받은 사람은 많으나, 택함 받은 사람은 적다. 우리나라 개역성서와 표준 새번역은 뒷부분을 생략했습니다, 제임스 버전에는 For many are called, but few chosen." 덧붙였습니다.

이런 질문들을 한번 던져봅니다.   번째,  주인은 기왕 데나리온씩 것이면 일찌감치 아예 불러다 일을 시킬 일이지, 찔끔찔끔... 그리 일꾼들을 불러 들였을까? 두번째  질문은, 해가 높도록 혹은 인력시장이 거의 문을 닫을 시간까지 남아있던 사람들은 그랬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칫 잘못 생각하면 사람들은 게으른 사람들, 삶의 목적이 없이 빈둥거리는 건달들이나 한량으로 보이기 쉽습니다. 가난한 것은 게으르거나 무슨 문제가 있어서 그럴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오후 다섯 시에 나가 그들에게 던진 주인의 질문, 그리고 그들의 대답을 생각해 보면 이유를 알것 같습니다.  “왜 당신들은 온종일 이렇게 하는 없이 빈둥거리고 있소?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켜주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 일하고 싶은것입니다. 일해서 식구들과 함께 밥먹고 살고 싶은 것입니다.

오늘날도 인력시장의 현실은 어떨까요? 인력시장이 열리자마자 새벽 일찌감치 품꾼으로 뽑혀 가는 사람들은 젊고 건장하고 튼튼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일꾼을 구하는 사람들의 경우 그날 하루 가장 많은 량의 노동, 혹은 가장 효율적인 노동을 있는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고르겠죠. 만약 일이 숙련된 기술을 요하는 일용직이라면 품꾼들의 이력을 결정할 것입니다. 결국 시장 문을 닫기 시간 전까지 곳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모르기는 몰라도 이것도 저것도 자격이 안되는 사람들…특별한 기술도 없는 사람들일 확률이 큽니다. 뽑혀 가고 마지막에 남은 사람들 그리고 그럼에도 그들이 그곳을 떠나지 않고 서성이고 있었던 까닭은 그들 자신 혹은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벌이가 필요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것이 힘없는 사람들의 현실이었을 것입니다.  로마의 식민지배, 유대제사장과 헤롯..정치경제  이중삼중적 착취를  매일 겪고 있던 그들 중에 남의 도움을 필요하지 않으면서 알아서 먹고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되었겠는가? 분명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루씩, 자신들의 노동력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한 데나리온’은 그들과 그들의 가족이 최소한의 생계, 배고픔을 느끼지 않을 만큼 먹고 비바람과 추위를 피할 있을 만큼의 거주가 유지되도록 하는 최소비용이었을 것입니다. 최소비용은 모든 인간에게 필요한 것인데, 그것을 벌기위한 일자리는 제한되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생존경쟁은 치열하고  가장 빨리, 가장 많이, 가장 효율적으로 일할 있는 사람들이 뽑혀 뒤에, 남아있던 사람들. 오전 아홉시의 2등급 인간’, 정오의 3등급 인간’, 오후 시의 4등급 인간. 그리고 오후 다섯 .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지만, 그러나 그들에게도 최소한의 생계비용은 필요했을 ‘최하위 등급의 인간’들을, 포도원 주인은 자신의 포도원 일꾼으로 초청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한동안 한국의 청소년들 사이에 유행하는 단어 ‘잉여인간’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남아도는 인간” “아무도 필요하다 불러주지도, 알아주지도 않는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땅에도 여러 기준으로 이런 ‘잉여인간’들이 어떤 모습으로 오늘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제시하시는 천국은  “이와 같이 나중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자로서 나중되리라. “부름 받은 사람은 많으나, 택함 받은 사람은 적다.”의 원칙이 있는 세상입니다.  듣는 사람 입장에 따라 엄청 기분 나쁠 있고 좋을 수도 있는 말씀입니다.   나중 자가 먼저 되고 먼저 자가 나중 되다니... 그럼 아침부터 빠지게 일한 사람들의 운명이 ‘나중됨’이란 말일까요? 아무리 하나님의 ‘가난한 지향성’을 이해한다 해도 그런 뜻이라면 정당하지 않습니다. 이러면 누가 일찍 나와서 일을 할까요? 그런데 문제를 해결해 주는 말씀이 어떤 성경번역에는 있고 없는  “부름 받은 사람들은 많으나, 택함 받은 사람은 적다.”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부름은 모두가 받았습니다. 그러나 새벽 다섯 팀부터 오후 다섯 팀까지, 노동시장에 있던 사람들이 포도원 주인의 부름을 받았다 하지만 ‘하루 데나리온’의 선포를 알게 되었을 ,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라는 것을 듣게 되었을 , 이를 ‘기쁜 소식’(희년의 소식, 복음)으로 알고 기뻐하고 감사했을 사람들, 행복함이 가장 컸을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당연히 시간 일한, 가장 나중에 자들일 것입니다. 이들이 기뻐한 까닭은 겨우 시간 일하고 받아서는 아닐 것입니다. . “하하, 사람들은 쌤통이다. 하루 종일 일하고도 나랑 똑같이 받다니. 그런 심보에서 기뻐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나를 ‘필요하다고’ 불러 일을 시켜준 고마움도 큰데, 데나리온이면, 돈이면 .우리 식구 오늘 굶지 않겠구나…아이들이 학교 있겠구나.. 하나님 나라는 이러하다는 ! 데나리온이 보장된 질서가 실현되는 순간 듯이 기뻐하는 순서는 분명 가장 나중된 자가 가장 먼저, 가장 으뜸으로, 가장 절절히 기뻐할 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체험입니다.

저는 은혜 목회의 기본을 홍근수목사님에게서 배웠습니다. 조목사님이 제가 홍목사님의 최초 부목사였다는 말씀을 하셨지만 옛날 홍목사님 40초반 저는 20 초반때 보스톤 한인교회에서 사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철저하게  헌신적이고 진실된 목회를 하셨는데도 괴롭히는 교인들이 있었습니다.어느 해인데 교인총회때 너무 목사님에게 못되게 구는 인간이 있었습니다. 당회장실에 내려가서 제가 목사님을 위로한다는 마음으로 집사 욕을 하면서 가만히 놔두면 안된다고 화를 내고 있었더니 목사님이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김목사, 우리교인들이 모두 성인들이라면 너나 나나 월급받으며 목회를 하겠냐? 나는 솔직히 사람 사랑하기 어렵다. 그러니 김목사가 집사 사랑해야 한다. 사람이 교회에 와서 사랑받지 못하면 어디에서 사랑받고 살수 있겠니. 정말 나를 위하는 부목사가 되려면 사람 예수님 마음으로 사랑해라.”

                  자신이 많이 일했다고 생각하는 사람, 받을 자격과 권리가 있다고 믿는 사람, 그게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일 수록 은혜의 질서를 받아들이기 힘들 것입니다. 기뻐하기는 더욱 힘들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들이 그런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탕자의 비유에서 아들처럼 이런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 나라 은혜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가장 나중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영영 받아들일 없어서 택함을 받지 못할 수도 있을 일입니다. 경우 첫째였던 사람들, 그들은 꼴찌가 것입니다. 그들의 수고가 헛되어서도 아니요, 그들의 능력이 무시되거나 평가절하되어서도 아닙니다. 다만, 약하고 병들고 경쟁력 없고 가난하고 뒤처진 사람들 마지막 남은 사람들에게도 ‘꼭같이 데나리온’을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질서를 받아들일 없음으로 인해, 질서를 기뻐할 없음으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꼴찌가 되는 것입니다.

                  천국의 질서가 무엇인가요?  모든 인간이 인간답게, 공평하게, 평화롭게, 서로 섬기고 나누며 서로를 살리고 건설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구약의 희년법에 나타난 기본 정신이 그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원칙은 “누구든지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구원을 얻고 멸망치 않으리라…. 이것이 예수님 구원의 원칙입니다.

                  이런 시가 있습니다. <로마의 히뽈리또. 3세기>

시간부터 일한 사람은/정당한 보수를 받습니다.

늦게 사람은/감사하며 기뻐합니다.

오정때쯤 도착한 사람이라 하여/적게 받지 않기에 걱정하지 않습니다.

오후가 되어 늦게 사람도 /주저않고 다가옵니다.

해질 무렵에 사람은 /늦게 왔다 하여 겁내지 않습니다.

주인이 관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지막에 사람까지도/ 먼저 사람처럼 즐겨 맞아들이시고 /모두에게 휴식을 주십니다.

마지막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푸시고/제일 먼저 사람에게는 상을 주십니다.

먼저 사람에게는 것을 주시고 /마지막 사람에게는 거저 주십니다.

일한 사람들을 존중하시고/일하려는 뜻을 지닌 사람도 칭찬하십니다.

여러분은 모두 주님의 기쁨에 참여하십시오.

처음에 사람도 다음 보수를 받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함께 기뻐하며

주님의 모든 선하심을 즐기십시오.

  향린교회가 나라 민족 천국 은혜의 기쁨을 증거하는데 쓰임받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