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조건

18:1-4, 25-32; 25:1-9; 2:1-13; 2:25-32

 

[조상 탓]

 

우리가 살아가면서 불행한 일이 생기면 자연히 그 원인을 묻게 되는데, 그때 우리는 자주 남에게 그 책임을 돌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쓰는 말에 남 탓과 관련한 말이 여럿 있습니다. '잘되면 제 탓 못되면 조상 탓' '못살면 터 탓' '소경이 넘어지면 막대 탓' ‘목수의 연장 탓그래서 제사로 인해 가족관계가 나빠지고 사주팔자가 성행하고 이사를 해도 손 없는 날을 선택해서 하게 됩니다. 2주전에 교회 일로 부동산 중개소를 갔는데, 오고가는 말에 손 없는 날이라는 말이 나오더군요. 처음에는 손이 없는 날이 있으면 발이 없는 날도 있나? 혼자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래 인터넷을 뒤져보니 두 가지 어원이 있더군요. 하나는 손해(損害)라는 손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고, 손님의 준말이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손해 손자는 이해가 되는데, 손님 손자는 이해가 되지 않아 읽어보니 이 손님이라고 하는 것이 악귀나 악신을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악귀가 돌아다니지 않는 날이 손 없는 날이라고 하면서 음력으로 날자가 910으로 끝나는 날을 말하더군요. 여기에는 복잡한 사주팔자 이론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 좋은 날이 한 달에 기껏해야 여섯 날밖에 되지 않으니 이 날은 이사비용도 비싸고 이날이 만약 주말이면 결혼식장 빌리기도 쉽지 않다고 합니다. 인공위성이 하늘을 날고 스마트폰 하나로 세계 곳곳의 소식을 주고받는 이성과 과학의 시대에 아직도 이런 습관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허약한 존재인가를 알 수 있고, 이는 역으로 무언가 집안에 액운이 끼면 이는 손 있는 날 이사하고 결혼해서 그랬다는 남 탓의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성서에도 심는 대로 거둔다는 말이 있고,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말이 뜻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어떤 잘못된 결과가 나오면 그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아야지 남을 탓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지금도 사회적 문제가 되는 세월호 참사의 책임을 유병언이라는 한 개인에게 돌리고 심지어는 경제 침체를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돌리는 어처구니없는 남 탓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남 탓하는 사회가 된 것은 지난 70년동안 남과 북의 정권이 자기들의 문제를 남은 북에게 북은 남에게 떠넘기는 남 탓 비난을 일관하여온 결과입니다.

 

이스라엘에도 조상 탓을 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아비가 설익은 포도를 먹으면 아이들의 시가 시큼해진다.’는 속담이 그것입니다. 인과응보의 원칙에 따라 조상들이 저지른 잘못을 후대가 그 벌을 받는 것은 마땅하기도 합니다만, 때로 그것이 지나치면 현재의 불행을 운명으로 여겨 거기에 매몰되는 잘못을 범하게 되기도 합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신들이 노예로 살아가는 것은 조상들의 잘못으로 인한 하느님의 벌로 받아들였습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도 미래에 대한 희망도 포기하고 살아가는 인생의 낭비였습니다.

 

이들을 향해 예언자 에스겔이 말합니다. “‘아비가 설익은 포도를 먹으면 아이들의 이가 시큼해진다는 속담이 너희 사는 땅에 퍼져 있으니 어찌 된 일이냐? 주 야훼가 말한다. 죄지은 장본인 외에는 아무도 죽을 까닭이 없다. 옳게 살던 자라도 그 옳은 길을 버리고 악하게 살다 죽는다면 그것은 그가 악하게 산 탓으로 죽는 것이고 못된 행실을 하다가도 그 못된 행실을 털어버리고 돌아오기만 하면 죽지 않고 살리라. 그러니 이스라엘 족속들아 살려거든 너희의 행실을 고쳐라.” 공동체 책임 대신에 개인 책임을 강조한 것인데, 사실 이는 어느 한쪽이 단적으로 옳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가 속해 있는 공동체나 사회가 갖고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일은 결코 쉽지 않는 것이고, 반면에 공동체의 모순과 제약을 모든 개인에게 일률적으로 책임지우는 것도 문제가 됩니다.

 

[원죄 교리와 바울의 의인론]

 

기독교 교리 중에 원죄라는게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 아담과 하와의 자손들로 저들이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은 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가르침입니다. 이 또한 죄인으로 태어났으니 의인으로 살아가야 하겠다는 동기 부여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정말 이런 일이 있었다면 수십만년 전 사건인데, 그때 일어난 어느 개인의 잘못을 아무런 관련도 없는 나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이성적인 결론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교회 안에는 이 원죄 교리가 뿌리 깊게 내려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의 설교에서도 이 죄인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 설교는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캥기는게 한두개 쯤은 있게 마련인데, 그러다보니 이 죄인 교리가 효과를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원죄 교리에 근거하여 두 번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함으로 우리 인간은 의인으로 회복이 된다는 의인론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여전히 죄인의 상태인데, 하느님께서 의인으로 인정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 사도는 그가 남겨 놓은 글 전체를 놓고 보면 결코 행위를 부정하거나 얕잡아 보지 않았습니다만, 마음으로 믿어 고백한다는 믿음에 의한 의인 구원론은 행위를 배제하는 오해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지난 주 모인 99회 기장 총회에서도 논란이 되긴 했습니다만, 현재 개신교내에 기승을 부리고 있는 여러 이단들의 주장은 주로 예수의 피를 강조하는 구원의 교리를 말하고 그 예수의 참된 피는 바로 자기 교단의 교주에게서 나온다는 것이 주된 요지입니다. 사실 이런 소수 집단 구원론은 초대교회 시기 때로부터 계속 있어왔던 주장입니다. 다만 시대가 혼란스러우면 그런 교리들이 더욱 기승을 부린다는 것이고, 특히 우리 남한은 짧은 교회 역사에도 불구하고 세계에 자랑할 만한 대형교회들도 많지만, 동시에 갖가지 이단들의 온상이 되어 온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 작은 땅덩어리에서 지난주에 99회 총회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회의를 개최한 장로교단만도 200개가 넘는 현실은 세계 어떤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매우 기이한 현상입니다.

 

바울은 믿음에 의한 의인 구원론을 주장하는 같은 갈라디아서에서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자비와 친절과 선행과 진실과 온유와 절제라는 행위의 단어로 설명하고 있지만, 바울의 구원론을 쫓아가는 대부분의 이단 교회에서는 성령의 열매를 신유와 방언이라는 신비 체험으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사실 바울이 없었다면 유대교의 한 분파인 예수분파가 오늘의 세계적 기독교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에 대해서는 심히 의문입니다. 결코 바울의 공로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만, 동시에 제1성서의 핵심인 토라 곧 모세 율법을 하나의 공로사상으로 너무 단순화시킨 잘못이 있고, 동시에 이를 대치하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믿음과 행동을 십자가 피에 기초한 예수에 대한 우리의 믿음으로 바꿔버림으로 기독교의 구원관을 매우 협소하게 만들어 놓은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예수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으면 예수의 제자들로부터 예수께서 선포하신 말씀을 보다 깊이 공부할 필요가 있었음에도 그는 부활 예수의 직접 계시를 강조하고 나섬으로 역사적 예수에 대한 객관성을 상실하게 되었는데, 오히려 그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무지를 수치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신은 거기에는 관심이 없고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만을 알겠다고 주장하고 이를 자랑하는 것은 신앙의 독선과 오만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그가 제자들로부터 예수께서는 나더로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 어버이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는 말씀만이라도 제대로 듣고 마음에 새겼다면 오늘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오늘 마태복음 말씀 또한 같은 맥락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시어 기도하는 집강도의 소굴로 만드셨다며 환전상들과 비둘기와 양을 파는 사람들을 모두 내어 쫓으셨습니다. 다음 날 성전에 들어가니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묻습니다. ‘당신이 무슨 권한으로 이런 무례한 일을 합니까?’ 예수께서 반문합니다. “너희가 내 질문에 대답하면 나도 대답하겠다. 요한은 누구에게서 권한을 받아 세례를 베풀었느냐?” 요한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았다고 하면 왜 너희들은 요한을 믿지 않느냐고 다그칠 것이고, 그렇다고 반대로 사람에게서 나왔다고 하면 군중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진퇴양난에 처한 지도자들은 모른다고 답을 하였고 이에 예수께서도 답을 하지 않겠다고 하신 후에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두 아들의 비유]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거라 했더니 처음에는 싫다고 하더니 나중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고, 둘째 아들은 가겠다고 하더니 가지 않았다. 누가 아버지의 뜻을 받든 아들이냐?’ 당연히 일하러 간 맏아들이 되겠지요. 이는 말이 중요한게 아니라, 신앙 고백이 중요한게 아니라, 행위가 중요한 것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께서 덧붙인 말씀이 뭐냐 하면 나는 분명히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 요한이 너희를 찾아와서 올바른 길을 가르쳐 줄 때에 너희는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치지 않고 그를 믿지 않았다.”

 

이는 대사제들과 원로들은 둘째 아들과 같이 믿음 고백은 잘 하지만, 결국 행동을 하지 않은 것을 빗댄 것이고, 세리와 창녀들은 믿음의 고백은 없었지만, 오히려 행동으로 하느님의 뜻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남은 질문은 나는 지금 대사제들과 원로에 속하는가? 아니면 세리와 창녀에 속하는가? 물론 표면적으로 본다면 우리는 둘 다 아닙니다. 여러분은 지금 대사제와 같은 종교적 지도자들도 아니고 또 그렇다고 사회의 지도자들인 원로도 압니다. 또 동시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세리나 창녀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대사제들과 원로라는 둘째 아들 그룹과 세리와 창녀라는 맏아들 그룹을 오늘 이 시대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우리 자신에게는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남습니다. 이제 이 두 그룹의 내면적 특징과 그 차이를 살펴보면 우리는 내 자신이 어느 그룹에 속하고 있는지를 판단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크게 보아 두 가지 서로 다른 특징과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는 신앙적인 차이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인 차이입니다. 우선 신앙에서 본다면 대사제들과 바리새인들은 당시 지도자들로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에 들어와 다른 사람과 같지 않는 자신의 의로운 종교 행위를 자랑하며 떳떳하게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 세리와 창녀들은 죄인들로 규정을 받아 성전에 마음대로 들어올 수도 없었지만, 들어와서도 기둥 뒤에 숨어서 이 죄인을 용서해 달라며 가슴을 치며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신앙이 다른 사람을 비교 대상으로 삼아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여러분은 대사제들과 원로 그룹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보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 앞에 선 자신만을 바라보면서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기도를 드린다면 여러분은 세리와 창녀 그룹에 속할 것입니다.

 

두 번째 다른 특징은 대사제들과 원로들은 당시 사회의 기득권자들로 현 사회가 계속되기를 바랐습니다. 반면 세리와 창녀들은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런 직업을 택하였기에 그들은 하느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그래서 현 사회가 뒤바꿔지기를 원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금 이 사회가 그대로 유지되기를 바란다면 여러분은 대사제와 원로 그룹에 속하는 사람일 것이고 그러나 반대로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되는 사회의 대역전을 기도한다면 여러분은 세리와 창녀들의 그룹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 한번 물어볼까요? 대사제와 바리새인 그룹에 속한다고 생각하시는 분 손들어 보세요. 난 세리와 창녀 그룹에 속한다고 생각하시는 분 손들어 보세요. 어느 쪽도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분 손들어 보세요.

 

종교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이미 교회에 떳떳하게 나와 예배드리는 사람들이니 이미 세리와 창녀 그룹으로부터 탈락한 사람들입니다. 저를 두고 말한다면 제가 비록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되는 대역전이 일어나는 하느님의 나라를 대망한다 할지라도 저는 교회의 목사로서 이 사회의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교회 밖에 있는 세리와 창녀들을 찾아나서 저들의 고통의 소리를 듣고 함께 아파하고 하느님의 정의가 실현되도록 노력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대사제들과 원로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잘라 말씀하시지 않고, 세리들과 창녀들이 먼저 들어가고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둘째 아들의 착각과 회심]

 

저는 여기에 예수께서 성전을 숙청하신 의도가 있고, 성전을 허물고 예수 부활의 몸으로서의 성전을 세우라는 말씀의 의미가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둘째아들 그룹을 향해 주신 말씀입니다. 교회에 나아와 아버지의 말씀에 예 오늘 포도밭에 나가 일하겠습니다.’ 라고 우리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나가지 않습니다. 왜 둘째아들은 가지 않았을까요? 단순히 게을러서 가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대사제들이나 원로들도 하루 종일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열심히 하였으니까요?

 

강도 만나 거리에서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사람을 피해갈 때, 사제와 레위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피해갔나요? 자기에게는 이 사람을 구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하느님의 일, 곧 성전을 돌보고 제사를 인도해야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말하자면 하느님 탓을 한 것인데, 이는 실은 저들이 믿는 야훼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입니다. 성전에 있을 것이라고 고백했던 야훼 하느님은 피 흘리고 있는 그 사람과 함께 아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놓친 것입니다. 야훼 하느님은 정작 지금 고통당하는 약자들과 함께 아파하고 있는데, 우리들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통해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착각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의 조건은 예배를 통한 믿음의 고백이 아니라, 포도밭에 나가 다른 이들과 함께 거하는 삶에 있는 것입니다.

 

그제 이름을 대면 대부분 알만한 한 예술인을 만났습니다. 그가 말하길 자기 집안 식구들은 목사로부터 장로 대부분이 기독교인인데, 자기는 교회에 나가지 않을뿐더러 종교에 대한 거부감이 강한데, 그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자기 신자들끼리만 소통하고 이웃에 대한 배려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이웃 사랑의 이웃은 지리적인 이웃이 아닙니다. 지금 내 옆에 앉아 있는 교인이나 여러분 옆집에 사는 이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공간과 시간에 살고 있지만,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받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들의 이웃입니다. 내가 나의 자리에서 내려와 그들이 있는 곳까지 가지 않으면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예수께서 내 몸같이 사랑하라 명령하시는 사랑의 대상인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흑백 인종차별이 법으로 규정되어 있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는 교회도 백인교회와 흑인교회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고난주일을 앞둔 흑인교회인 성시온교회(Saint Zion Church)에서 특별한 행사를 마련했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정신을 본받아 고난주일에 누구든 자신이 정말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의 발을 씻도록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세족식이 행해지던 그날 저녁 그 흑인교회에 한 백인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당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판사로 대법원장에 내정된 올리버(Oliver)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집 흑인 여종 마르다 포트윈에게서 이 얘기를 듣고 그의 발을 씻기겠다고 교회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리곤 그는 그 흑인 여종 앞에 무릎을 꿇고 발을 정성껏 씻길 뿐더러 그녀의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렇잖아도 그의 등장으로 술렁이던 교회는 그 순간 사람들의 숨조차 멎을 정도로 숙연해졌습니다. 그러자 올리버 판사는 일어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마르다는 내 집 종으로 오랜 세월 내 자녀들을 돌보아왔습니다. 내 자녀들의 발을 씻겨주는 것을 수없이 보아왔습니다. 정말 고마운 사람입니다.” 이날 이후 이 사건으로 내정됐던 대법원장 자리가 취소됐으며 판사직도 박탈을 당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성시온교회 흑인목사님이 그를 위로키 위해 방문했을 때 그는 말합니다. “판사직도 사회의 다른 지위도 무덤에 갈 때는 먼지가 아닙니까? 그런 먼지보다 하느님이 주신 사랑과 감사가 더 소중합니다.” 그는 지위에 있어서는 둘째 아들이었지만, 실천에 있어서는 맏아들에 속한 것입니다.

 

[남을 낫게 여기는 비결]

 

오늘 빌립보교회에 보낸 편지의 글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힘을 얻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위안을 받습니까? 성령의 감화로 서로 사귀는 일이 있습니까? 서로 애정을 나누며 동정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사랑을 나누며 마음을 합쳐서 하나가 되십시오. 무슨 일에나 이기적인 야심이나 허영을 버리고 다만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요즘 세상은 자기 광고시대요 경쟁의 시대입니다. 자기를 드러내어야 살아갈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성서는 그 반대를 말합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자기가 남보다 더 나은데 어떻게 해야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길 수 있을까요?

 

어느 프로 골퍼가 우승을 눈앞에 두고 마지막 홀에서 마지막 퍼팅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퍼팅을 앞두고 많은 사람들이 보는데서 머리를 숙이고 짤막하게 기도합니다. 그리고 퍼팅을 했습니다. 그러자 볼이 홀컵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승을 축하하는 가운데 친구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축하하네, 그런데 자네 아까 마지막 퍼팅 전에 진지하게 기도하던데, 우승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나?’ 그러자 그가 답하기를 아니, 반대로 기도했네, 하느님! 우승컵에 대한 욕심이 없어지게 하소서.’ 이는 래리 넬슨이라고 하는 유명한 프로 골퍼의 이야기입니다. 기도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마음은 우승하겠다. 성취하겠다, 이름을 날리겠다가 아닙니다. 우리들의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는 기도 제목으로 인해 하느님이 보이지 않고, 너무 큰 소리로 외치는 바람에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를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비우는 것이 진정한 기도입니다. 그래 어떤 신앙인이 말하기를 기도한 후에 더 나은 사람으로 일어서는 사람이야 말로 진짜 기도응답을 받은 사람이다.’ 일의 성취에 관계없이 마음을 비우고 일어서는 자세야 말로 진짜 기도응답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초대교인들은 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를 닮기 원하고 그래서 교회 이름도 예닮교회가 많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오늘 빌립보 본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란 하늘 자리를 내어놓고 종의 신분으로 이 땅에 내려오신 일이며 그리고 십자가에 목숨을 내어주기까지 당신 자신을 낮추신 일입니다. 저는 감히 여러분에게 저도 할 수 없는 십자가의 죽음을 요청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발을 씻어주는 일은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목사님 내가 어떻게 그 사람의 발을 씻어줍니까? 얼굴 쳐다보기도 싫은데, 발을 씻어주라고요? 저는 죽었으면 죽었지 이것만은 못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참 교회의 모습이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구원의 조건]

 

구원의 차별은 없습니다. 누구나 가능합니다. 다만 하나의 조건은 있습니다. 그건 하느님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인정한다는 말은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말이 아니라, 죽어도 못하는 그 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대신 내 안에 계신 주님께서 나를 대신하실 수 있도록 자기를 내려놓는 일입니다. 세리와 창녀는 당시 시대에서 가장 손가락질 받는 사람들이요, 구원의 문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이요, 당시 시대의 불온한 자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러기에 저들은 자신을 비웠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손가락질 받는 사람들은 누구이며 불온한 사람들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이웃 사랑이란 그 사랑으로 인해 자신에게 손해가 일어날지라도 그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포도원이란 누구나가 똑같은 작업복을 입고 땀을 흘리며 일하고 한 식탁에서 식사하는 하느님 나라의 이 땅의 상징입니다. 구원에 별다른 조건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그곳으로 가서 자신의 모든 세상 지위와 조건을 내려놓고 손가락질 받는 저들과 함께 어울리는 그것뿐입니다. 우리가 그들과 함께 한다고 해서 그들의 고통이 줄어들거나 그들의 지위가 높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파하는 자와 함께 하는 것은 아파하는 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실은 자기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우리가 아파하는 자와 함께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깨어지기 쉬운 연약하고 불완전한 자신의 실상을 보게 됩니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나와는 다른 사람으로 보였지만, 가까이 가서 보니 저들이야 말로 나의 본래 모습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거기서 우리는 부활의 몸으로서의 하느님의 거룩한 현존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자리를 세상 사람들은 냄새나는 마구간이라고 고개를 돌리지만, 우리는 그곳에서 타지 않는 가시떨기의 불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곳이니 신발을 벗으라는 하늘의 음성을 듣고 자신을 역사의 현장으로 내어 보내시는 그분의 음성을 듣는 거룩한 자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