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성만찬주일 향린공동체 연합예배”


[들꽃향린 김성희] 

이사야 5:7 “전쟁으로 고통받는 이웃들 이야기”
 이스라엘은 만군의 주님의 포도원이고, 유다 백성은 주님께서 심으신 포도나무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선한 일 하기를 기대하셨는데, 보이는 것은 살육뿐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옳은 일 하기를 기대하셨는데, 들리는 것은 그들에게 희생된 사람들의 울부짖음뿐이다.

 세계성만찬의 날을 맞이하여 전쟁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자리에 잠시 서보고자 합니다.


[자료화면]


시리아와 이라크,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등 중동지역에서 일어나는 전쟁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민족과 종파(코란을 중시하는 수니파와 혈통을 중시하는 시아파)간의 갈등이 내재하고 있는 가운데 1차대전 이후 유럽제국들이 그동안 차지해온 남의 나라 땅을 그 나라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국경을 마구잡이로 3등분할하여 갈등을 심었습니다. 미국은 석유자원을 욕심내며 2천년 전 땅을 찾으라고 유태인들을 부추겨 이스라엘 건국을 지원(영국과 함께)하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갈등의 씨앗을 심고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민중을 압박하는 불의한 제국이 되었습니다. 중동지역은 제국들의 탐욕이 지속적으로 분쟁을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부시는 대량살상무기를 사찰한다는 명분으로 이라크전쟁을 시작하였고 결국 화학무기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 한 명분없는 전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생존의 수단으로서의 무기와 더 많이 차지하려는 소유의 무기는 근본적으로 다를 것입니다. 평화군이라는 명분으로 파병되지만 누구를 위한 평화인지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상황은 이사야시대나 지금 우리들의 시대나 너무나 흡사한 상황에 놓여져 있음을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한 형제이면서도 서로 적대적 관계에 놓여져 있었고 이스라엘은 시리아와 동맹을 맺어 유다를 공격하였고, 유다는 앗시리아 제국을 끌어들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무너지고 유다는 앗시리아를 섬기는 신하의 나라로 전락하여 무거운 세금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중동지역도, 우크라이나도, 남과 북이 갈라진 한반도도 서로의 형제자매를 이념이 다르고, 종파가 다르다고 적대하면서 제국의 손을 빌어 제국이 개입할 명분을 주고, 주권이 상실되어 국민들의 혈세가 제국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유다와 같은 상황을 재연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포도원으로 유다를 포도나무로 전제하고 있습니다. 땅과 나무는 (포도원과 포도나무는)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로 포도원인 땅의 기운을 받고 포도나무는 열매를 내며 함께 먹고 사는 것을 선하고 옳은 일로 보고 있습니다. 더불어 사는 상생의 원리를 펼치지 못하는 모든 잘못된 힘의 사용이 있는 곳마다 우리는 끊임없이 공존과 상생을 외쳐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나비효과라고 들어보셨나요?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개짖이 미국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이론이고 현대과학의 파동이론은 이것이 가능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중단없이 평화를 염원하는 날개짖을 하면서 일상을 살아 갈 때, 하나님의 영이 들불처럼 번져 평화의 물결이 세계의 양심과 만나서 갈라지고, 어긋난 것들을 이어줄 것을 믿습니다.

 우화를 하나 말씀드리고  마치고자 합니다. 동굴에서 수도사가 신과 합일하기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생쥐한마리가 자꾸 부스럭거리며 돌아다니자, 수도사는 “좀 조용히 하거라, 난 지금 신과 합일하려고 기도중이란다.” 생쥐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생쥐인 나하고도 친하게 지내지 못하는데 어떻게 신하고 하나가 될 수 있나요?”



[강남향린 이승무] 

시편 19편 12, 13절
“그러나 어느 누가 자기 잘못을 낱낱이 알겠습니까? 미처 깨닫지 못한 죄까지도 깨끗하게 씻어 주십시오. 주님의 종이 죄인 줄 알면서도 고의로 죄를 짓지 않도록 막아 주셔서 죄의 손아귀에 다시는 잡히지 않게 지켜 주십시오. 그 때에야 나는 온전하게 되어서, 모든 끔찍한 죄악을 벗어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지난 9월 말에 타이완에서 개최된 탈핵 아시아 포럼(No Nukes Asia Forum)에 참가하고 왔습니다. 한국, 일본, 타이완, 홍콩, 필리핀, 인도, 몽고, 터키 등 여러 나라에서 온 발표자들과 참가자들이 여러 방면에서 자기 나라에서 계획되고 건설되고 수명이 연장되고 있는 핵 발전소의 문제에 대해 고발하고 핵 없는 아시아와 온 세계를 위해 마음을 모으는 시간이었습니다.

 특별히 의미가 있었던 것은 타이완의 역사에 대해 알 기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타이완에는 현재 핵 발전소 1기, 2기, 3기가 있고 제4기의 건설이 거의 마무리되는 중이었습니다. 올해 4월에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국회를 점령하는 등의 거센 저항이 있었고, 타이완의 민주주의의 상징적인 인물인 린이슝 선생이 4월달에 8일 동안을 단식하면서 공사중단을 요구하자 9일째 되던 날에 타이완 행정원은 공사의 중단과 폐쇄를 선언합니다.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어도 그렇지 8일 동안 단식한 것 가지고서 우리의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안 가는 일이 타이완에서 있었습니다. 
 
 타이완은 장개석의 국민당 정권이 대륙에서 공산당에게 패배하고 타이완으로 쫓겨오면서 1987년까지 계엄령 하에 있었습니다. 린이슝 선생은 1980년 초에 민주화 운동 때문에 군사정권에 체포된 직후에 집에서 괴한이 침입하여 어머니와 일곱살 먹은 쌍둥이 두 딸이 칼에 찔려 살해당하고, 큰 딸은 중상을 입는 비극을 겪었다고 합니다. 그후 군사법정에서 12년형을 언도받고 옥살이를 한 후에 그 참극이 일어난 집터를 국내외의 여러 친지들과 함께 민주화 운동 기념관과 재단으로 만들어서 시민들을 위한 교육장소로 바쳤습니다.
임 선생은 그후 민진당 의장까지 지냈지만, 그가 열심히 당선을 위해 도운 천수이벤이 대통령이 된 직후에 갑자기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환경운동과 핵 발전소 반대운동과 같은 사회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됩니다. 이번에 임선생이 그 기념관으로 탈핵 아시아 포럼 참석자들을 초청해서 그곳을 참관하고 저녁식사를 같이 했습니다. 임선생은 후쿠시마 재앙이 일어나기 9년 전인 2002년도에 열린 탈핵 아시아 포럼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탐욕과 널리 퍼진 무지에 직면하여 우리 비핵 아시아 회원들은 다음과 같은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핵 수출업자들에 맞서서, 이렇게 고발합니다. 그들이 핵발전소를 수출할 때마다,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핵폭탄을 이 나라에 배치하고 있는 것이며, 지방의 민중을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폭발의 두려움 가운데 끊임없이 처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에 핵발전소를 수출하는 것과 그 나라에 핵폭탄을 던지는 것 간에 차이가 없습니다. 이는 테러리스트의 행동과 동일합니다. 미국이 다른 지역의 사람들의 안전을 염려할 생각이 없고 핵발전소를 수출한다면, 그들은 미국 사람들을 해치는 테러리스트의 행동을 비난할 권리가 없습니다. 일본이 핵발전소를 수출한다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핵폭발을 기념하는 일체의 활동들은 터무니없고 우스운 것이 될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아시아의 모든 정부들을 이렇게 추궁합니다. 어떤 정부가 대안적인 에너지원을 찾아내지 못하고 핵발전소를 지음으로써 그 민중의 안전을 도외시한다면 그런 정부는 존재할 가치가 없고, 그 민중에 의해 쫓겨나야 한다고 말입니다.

 셋째, 수출국들과 핵발전소를 구매하는 정부들의 탐욕을 멈추는 데는 엄청난 힘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 힘은 아시아의 민중에게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아시아인들은 아직 그들이 처해 있는 위험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시아에 사는 민중을 일깨우는 것이 우리의 가장 관건이 되는 일입니다.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은 후쿠시마의 사고가 나자마자 한국에게 핵발전소 수출 경쟁에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말했으니 그런 말을 하는 정신적 수준이 어떤 것입니까? 한국과 일본은 지금 핵발전소를 외국에 수출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참석자는 핵무기를 위해 핵에너지를 다른 나라 정권들을 뒤에서 조종해서 퍼뜨리는 미국이 가장 나쁜 나라이고, 그 다음으로 나쁜 나라는 한국과 일본이라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무지한 상태에서는 죄를 짓거나 잘못을 범해도 그것이 죄인지 모르기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갈등을 일으키고 고통스러운 경우는 무지한 상태에서 깨달음으로 가는 과정에서 생겨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현대화된 예배당에 모여서 많은 조명등을 켜고 예배를 드립니다. 사람들은 전등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기는 쉽지만, 전기가 자연을 파괴하면서 생산된다는 생각은 잘 하지 못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 기독교 교회는 예배와 신도들의 모임과 행사를 위해서라면 에너지를 마구 쓰는 데 관대한 기관으로 통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다가 전기를 생산하는 원료인 석유, 석탄이 기후변화를 일으킨다는 것, 우라늄은 끔찍한 사고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 사실을 명확히 알게 되는 것은 고통스러운 과정입니다. 그 다음부터 우리는 행동을 다르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가 자기 잘못을 낱낱이 알겠습니까? 미처 깨닫지 못한 죄까지도 깨끗하게 씻어 주십시오. 주님의 종이 죄인 줄 알면서도 고의로 죄를 짓지 않도록 막아 주셔서 죄의 손아귀에 다시는 잡히지 않게 지켜 주십시오. 그 때에야 나는 온전하게 되어서, 모든 끔찍한 죄악을 벗어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이 시편을 쓴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기도문을 썼다고 생각합니다. 나 같으면 별로 신앙심이 깊지 않기 때문에 그런 기도를 드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대신에 이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삶의 조건, 나를 위해 마련된 의식주와 내가 하루 중에 깨어 있는 동안 하는 일들이 이 땅 위의 다른 누군가를 해치고 고통스럽게 하고 생명을 단축시키는 것이 있다면, 그런 것이 무엇인지를 환히 깨달아서 그런 일이 계속되지 않게 하고 싶다. 그런 깨달음이 내게 생기더라도 그 동안의 타성 때문에 삶의 변화가 생기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런 타성을 정말이지 깨뜨리고 싶다. 그래야 나는 하늘 아래 자유인으로 부끄럼 없이 살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이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행동과 분리할 수 없는 앎, 행동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 앎이라 할 수 있는 깨달음을 위의 기도문을 읽으면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속 안에 있어서 마음으로 올라오는 바람은 어디서 온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 자체가 미래를 내다보게 해 주는 것은 아닐까도 생각해 봅니다.

 끝으로 임선생이 1991년 타이완민주운동기념관인 추나 재단 창립 행사에서 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히말라야 산맥 밑에는 한 대나무 숲이 있어 많은 새와 짐승들이 삽니다. 어느날 세게 바람이 일어 대나무들이 서로 부대끼어 불이 일어납니다. 불은 점점 더 커졌고 짐승들은 도망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한 마리 앵무새가 하늘로 날아올라 숲의 불을 피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새는 자기가 자라났던 곳인 그 대나무 숲을 사랑했고 자신에게 둥지를 제공한 그곳에 감사했습니다. 게다가 자기 친구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근처 연못에 가서 자기 날개를 적셔서 날아 올라가 불 위에 물을 뿌렸습니다. 이런 효과 없어 보이는 행동을 계속 반복했습니다. 그 앵무새의 자비심과 그의 헌신적 행동이 신을 움직였습니다. 신이 하늘에서 내려와 앵무새에게 말했습니다. “너의 행동이 가상하구나. 하지만 네 날개로 모은 물방울로 불을 어찌 끌 수 있겠느냐?” 앵무새가 대답했습니다.“감사와 자비의 마음으로 하는 일은 반드시 이루어질 수 있어요.” 결국 신이 감동하여 불 끄는 것을 도왔습니다. 하지만 십만 아니 백만의 앵무새가 동시에 같은 행동을 했더라면, 불을 끄는 데 신의 도움은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이 이야기 속의 앵무새의 깨우침과 그에 따른 행동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린이슝 선생의 깨달음이 실천으로 이어져 타이완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그나마 내실 있어 보이는 민주주의를 이루어가도록 하고 타이완 시민들이 탈핵을 위해 마음을 모을 수 있는 힘이 된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런 깨달음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향린 김숙영] 

 제가 나눌 말씀은 마태복음 21장 37절에서 40절입니다. 성서에 대해 나름대로 묵상한 것과  우리의 노동현실에 대해 짧게나마 생각을 나누겠습니다.

 본문말씀은 예수께서 그에게 적대적인 대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비유를 들어 질타하는 내용 중 일부입니다. 포도밭 주인은 소작인들에게 세를 주고 여행을 간 뒤 수확철이 되어 소출의 얼마를 받아오라고 종들을 여러 번 보냅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종들을 매번 능욕하고 때리고 죽였습니다. 그러자 마지막으로 주인은 자신의 아들을 보냈습니다.

 여기서 전 의문이 들었습니다. 주인은 왜 그렇게 했을까요. 이미 종들이 죽고 박해 당했는데 왜 또 아들을 보내어 위험에 처하게 했을까요.


그림1. Ken Hendricksen, <Poor Boy>

 이러한 저의 의문을 현재의 자본체제와 노동현실에 옮겨보겠습니다. 파키스탄의 어린이노동자 이크발에 대해서 들어보셨을 텐데요. 이크발은 네 살 아기였을 때 부모의 빚 때문에 양탄자 공장에 팔려가 노예부역을 시작했습니다. 하루 이십원의 임금을 받으며 열 시간씩 일을 합니다. 후에 탈출해서 아동노동의 참상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운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겨우 열두 살에 산업마피아에 의해 살해당하고 맙니다.


그림2. John Leech, <Cheap Clothing>

 영국과 다른 유럽국가들 또한 어린이와 여성의 저렴한 노동의 핏값으로 일찍 산업화를 이룩했습니다. 우리나라 기업의 이윤극대화는 살인적입니다. 대기업들이 올해 사내에 쌓아 논 보유금이 700조라고 하는데, 노동자는 최소한의 장비가 없어 죽음으로 내몰립니다. 10만 원짜리 안전펜스가 없어 1000°C 용광로에 빠져죽고, 감시인력이 하나가 없어 선로작업을 하다가 열차에 치입니다. 조선소에서는 다섯명의 윤식이가 죽어야 배 한척이 만들어진다고들 말합니다. 윤식이는 일하다 사망한 청년입니다. 삼성반도체의 황유미가 백혈병으로 죽은 지금도 수백 종의 독성물질 중 특성이 채 밝혀지지 않은 것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대한민국 정부는 화학물질 관리와 같은 기업활동의 규제를 내년부터 완화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야만적인 자본위주와 노동경시는 한국을 OECD국가 중 산재사망률 1위라는 부끄러운 나라로 만들고 있습니다.

 왜 하느님은 살인자본이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도록 방치하는 걸까요. 그러나 이 물음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낍니다. 우리가 노동의 죽음에 무관심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에 대한 답은 아니지만 우리는 마태복음의 뒷부분, 41절에서 44절을 통해 어느 정도 영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12장과 누가복음 20장에도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돌아오면 '그 악한 자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고 제때에 도조를 바칠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원을 맡길 것입니다‘라는 결말입니다. 
 
 그것은 마치 혁명과도 같습니다. 버려진 돌이 머릿돌이 되듯, 버려졌던 백성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것’이라고 예수님은 표현하시기 때문입니다. 포도원주인은 종들에게 소출을 받아오라고 할 때 가만히 있으라 하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종들은 서로 힘을 합쳐 봉기해야 옳았습니다. 왜냐하면 당대에 소작인 농부는 소자산가 계급에 속했고 대사제들과 패를 지어 바리사이즘을 형성한 불의한 권력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들어 착취당하는 민중이 권력에 맞서 투쟁하여 참 주인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자본은 결코 스스로 이익을 내놓은 적이 없습니다. 그 이익은 모두 노동에서 나온 것인데도 말입니다. 수많은 목숨이 스러져간 후에야 노동법이 시행되었습니다. 소년 이크발은 순응하지 않고 싸웠기에 많은 어린이 노동자를 해방시킬 수 있었습니다. 전태일이 항거했기에 청계 노동조합이 결성됐고 노동운동이 확산됐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노동자입니다. 저도 대학 강단에 서는 비정규직 교육노동자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목소리를 내고 부당한 것에 각자의 방식대로 저항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림 3. Banksy, <Workers of the World Unite!>

 끝으로 지금 보시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벽화를 그린 미술가에 대해 짧게 소개하고 마치겠습니다. 뱅크시라는 가명을 사용하는 이 미술가에 대해선 아무것도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미술테러리스트 라고 불리는 그는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가입니다. 그의 저항수단은 낙서입니다. 그는 세계 전역에 나타나 담벼락에 몰래 그림을 그려놓고 사라집니다. 그의 그림은 권력, 전쟁, 자본을 비판합니다. 뱅크시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가 그린 그림의 담벼락 주인은 이것을 수십억원에 경매하기도 합니다. 여하튼 그의 미술은 수많은 아류들을 양산해 불의에 저항하는 익명의 목소리들이 전 세계에 울려 퍼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저항의 감수성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것이 오늘의 본문과 여기저기의 거리에서 저항하는 이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시대의 하늘말씀입니다.


[섬돌향린 조익상]  

필립비 3:10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게릴라 가브리엘 마르티가 된 가브리엘 데 라 세르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작품 속에서는 이야기가 더 이어지지만, 오늘 본문 말씀의 의미를 알려주는 내용은 다 살펴보았습니다. 가브리엘은 그리스도를 알려 하다가 마을 사람들을, 콘셉시옹을, 반정부 게릴라들을 알았습니다. 종국에는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고 콘셉시옹 마르티의 ‘죽으심’을 본받습니다. 콘셉시옹의 ‘부활의 능력’, 그것은 곧 가브리엘의 삶입니다.

저는 게릴라들의 이 이야기를 빌립보서 말씀과 함께 읽으며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말씀을 이렇게 다시 읽습니다. 민중의 이름을 그리스도와 한 자리에 두고 읽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전태일을 알고, 전태일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전태일의  고난에 동참하여, 전태일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이크발 마시흐를 알고, 이크발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이크발의  고난에 동참하여, 이크발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제국에 저항했던 사람들을 알고, 그들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들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마지막 월세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세 모녀를 알고, 그들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들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세월호에서 죽어간 희생자들을 알고, 그들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들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제 누군가를 그리스도와 한 자리에 두고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힘든 길을 비틀거리며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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