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 부르심과 뽑힘

25:1-9; 23; 4:1-9; 22:1-14

 

[앎과 삶]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학자 혹은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의 행동이 결여된 우유부단(優柔不斷)함을 꼬집는 말인 동시에 삶으로 행동으로 실천으로 연결되지 않는 앎은 죽은 지식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시대는 정보 홍수의 시대입니다. 예전에는 책이라도 뒤져야 정보가 나왔지만, 지금은 손 안에 있습니다. 문제는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어느 것이 옳은 정보인지 어느 것이 그른 정보인지를 구별해내는 판단력입니다. 미국의 흑인해방운동가였던 말콤X가 데모를 주도하다 감옥에 가서 영어 사전을 놓고 공부를 하는 중에 우연히 본 black이라고 하는 단어를 통해서 어떤 깨달음을 얻습니다. 사전의 정의에는 캄캄하고 어둡다라는 일반 정의를 넘어서 더럽다라는 가치의 정의 그리고 더 나아가 사악하다나는 윤리와 도덕의 정의까지 기술되어 있었습니다. black은 여러 색깔 중의 하나의 색깔입니다. 다른 색깔과 달리 모든 빛을 흡수하기에 우리 인간의 눈에 검게 보이는 것뿐인데, 백인들이 만들어놓은 사전에는 가치와 도덕까지 포함시킨 것입니다.

 

가장 객관적이어야 할 사전이 객관적이지 않은 것입니다. 여기서 그는 백인의 주도하는 사회가 가르치는 지식 자체가 문제임을 깨닫게 됩니다. 미국의 백인들이 사용하는 yellow에도 이런 가치적 판단이 들어가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사실은 우리도 우리 자신을 도덕적 가치의 기준으로 두는 이런 잘못을 범합니다. 깜둥이 흰둥이라는 차별 용어가 그렇습니다, 황둥이라는 말은 쓰지 않거든요. 저희들이 초등학생 때에는 살구색을 살색이라고 했습니다. 인종마다 살색은 다 다른데, 나의 피부의 색깔을 살색이라고 부르면 다른 인종의 살색 색깔은 잘못되었다는 가치기준을 전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2주 후면 마르틴 루터로부터 시작한 기독교 개혁운동을 기념하는 날인데, 이를 남한에서는 종교개혁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서구에서는 첫 글자를 대문자로 해서 그냥 개혁주일이라고 부르는데, 우리는 일본의 번역을 그대로 받아 종교개혁주일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편협적이고 독선적인 용어입니다. 교회개혁주일 혹은 기독교개혁주일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율법의 근본 정신 회복]

 

예언자들, 세례 요한과 예수 또한 바로 그러한 깨달음을 통해 당시 야훼 하느님의 뜻을 말한다고 하는 모세 율법에 대해 도전을 합니다. 이들은 모세 율법이라고 하는 것이 본래 애굽 제국의 압제에서 해방을 받은 노예들을 향해 다시는 그러한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자유와 해방 그리고 정의와 평등사상에 기초한 말씀임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움직이는 성전 성막 신앙에서 돌에 기초한 예루살렘 성전 신앙으로 굳어지면서 십계명에 기초한 모세 율법 또한 딱딱한 규례로 전환되기 시작합니다. 처음의 의도는 율법을 일상생활에 적용하기 위한 좋은 의도로 시작되었지만, 정치종교권력과 한 배를 탔던 율법학자들은 이 과정에서 자유와 해방의 율법의 근본 사상을 교묘하게 비틀어 백성들을 보다 쉽게 통제하기 위한 통치의 기제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예수는 바로 이러한 정치적 저의를 파악하고 이들과의 대결을 통해 밑바닥 민중들의 역사 주체를 세워나가는데, 이것이 복음서에 나타난 하느님 나라 운동의 핵심입니다. 여기에 나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는 말씀의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언론이 이러한 통치 기제가 되어 있습니다. 사주가 누구 편이냐에 따라 같은 사건을 전하는 언론이 정반대의 결론을 얘기하는 것은 바로 이유 때문입니다.

 

오늘 마태복음 혼인잔치의 비유는 예루살렘 성전 숙청 이후 예수께서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과의 적대적인 관계를 보여주는 세 개의 비유 중 마지막 비유입니다. 이미 우리는 2주전 두 아들의 비유를 통해 말이나 종교적 고백이 아닌 실천과 행동이 중요함을 강조함으로서 사제나 백성의 지도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세리와 창녀들이 들어가고 있음을 말씀하셨고, 지난 주 말씀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얘기를 통해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는곧 하느님의 나라는 세상적 가치가 뒤집히는 혁명의 세계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혼인잔치의 비유는 보다 노골적으로 저들에게 임할 심판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임금은 몹시 노하여 군대를 풀어서 그 살인자들을 잡아 죽이고 그들의 동네를 불살라 버렸다.’ 이는 로마제국에 의한 예루살렘 성의 멸망이라는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만,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를 적대시하는 자들의 말로가 미래에 이와 같이 일어날 것이라고 시제를 바꿔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 비유는 모두 포도원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마태에게 있어 포도원은 이 땅에 하느님 나라의 모형으로서 포도원 주인이란 바로 야훼 하느님을 뜻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세 번째 비유는 앞의 두 비유에 비해 논리적인 비약이 너무 심합니다. 첫째 임금의 아들의 혼인식 초청을 거절한 이유가 그러하고 두 번째 자신이 바쁘면 거절만 하면 되었지, 초청장을 들고 온 종들을 때리고 죽이기까지 했다는 얘기가 그렇고 세 번째는 이에 화가 난 임금이 살인자들을 죽이고 심지어는 동네를 불살라 버렸다는 얘기이며 네 번째는 거리에 있는 나쁜 사람 좋은 사람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잔치 자리에 초청을 한다는 얘기이고 다섯 번 째는 그중의 한 사람이 잔치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데 내어 쫓는 임금의 행위가 그러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비유 말씀은 알레고리적으로 해석을 해야지 이를 만약 문자적으로 그냥 읽었다가는 편견과 독선의 비상식적인 말씀이 되고 맙니다.

 

[왜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임금의 아들의 결혼잔치라면 최고 권력자의 아들로서 조금 있으면 임금의 자리에 오를 사람이니, 이 결혼식에는 너도나도 참가하려고 할 것입니다. 지난 주 이명박전대통령 아들의 결혼식이 모처에서 있었던 모양인데, 가족을 중심으로 백 명으로 그 숫자를 제한하였는데, 그날 결혼식 자리에 들어가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청을 받은 사람의 명단을 일일이 확인하여 들여보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는 후보자 시절부터 박근혜 후보 진영에서 BBK의혹, 도곡동 땅 의혹, 아파트투기를 위한 위장전입, 건강국민보험을 위한 자식 위장취업 등 전과 14범으로 얘기되었던 사람입니다. 서구 같았으면 후보 자격도 되지 않을 사람이지만, 우리나라의 국민 수준이 그러하니 어찌 하겠습니까? 하여간 함량 미달의 사람, 그것도 이미 권좌에서 물러난 대통령 아들의 결혼식에도 사람들은 참석하지 못해 안달이 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권력 지향적인 인간의 실제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옛날에 앞으로 왕이 될 사람의 혼인식 초청을 거부한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속셈으로 그렇게 무례한 일을 행했던 것일까요?

 

본문을 보면 초청받은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가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 종들을 붙잡아 때려 주기도 하고 죽이기도 했다. 그래서 임금은 매우 노하여 군대를 풀어서 그 살인자들을 잡아 죽이고 그들의 동네를 불살라 버렸다.’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구절입니다.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혼인식 초청을 거절하면 거절했지, 초청장을 들고 온 종들을 때리고 죽이기도 할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심판을 전제로 한 비유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혼인 잔치의 비유는 누가복음 그리고 도마복음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전체적 기조는 같지만, 각론에 있어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마태복음에는 초청자가 임금으로 되어 있는데, 누가복음과 도마복음은 어떤 사람입니다. 초청을 거절한 이유는 비슷합니다. 루가는 방금 밭을 샀기에 방금 소를 샀기에 방금 장가를 들었기에... 도마도 거의 비슷합니다. 그러자 주인은 종들을 시켜 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 자리를 채우는데, 여기서 루가는 가난한 사람, 불구자, 소경, 절름발이라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그래도 자리가 남았다고 하니까 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와서 내 집을 채우라고 명합니다. 그리고 결론에서 누가는 처음에 초대받았던 사람들은 잔치 자리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함으로 유대인들의 구원을 배제시킵니다. 반면 도마는 장사꾼들과 상인들은 내 아버지 집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함으로 초청을 거절한 이유를 사적인 자리로 제한합니다. 그런데 마태는 이에 비해 임금이 군대를 보내 모두를 살해하고 마을을 불태우는 극단의 결론으로 치닫고 맙니다. 이점에서 본다면 마태는 결론을 위해 논리적 전개를 무시하는 약간 편집광적인 태도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마태가 사용한 재미있는 단어 하나는 사람들이 초청을 거절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예언자들의 얘기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는 의미이고 예수의 말씀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왜 사람들은 진리의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일까요? 그건 세상적 가치와 판단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대하기 때문입니다. 세 복음서는 모두 그 대표적 인물로 상인을 말하고 있습니다. 상인이란 이익을 위해 일하는 사람으로 눈앞에 일어나는 현실에 판단이 분명합니다. 돈이 되지 않는 일에는 결코 뛰어들지 않습니다. 그에게 있어 미래에 일어날 영원에 생명에 대한 가치는 전연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부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만 있지 주위에서 일어나는 다른 사람의 불행에는 전연 관심이 없습니다. 부자와 나자로의 비유가 이를 잘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불행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납니다. 그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나에게 이런 일이?’ 하고 반문합니다.

 

안산 지역에 사는 세월호 유가족들 대부분은 그동안 사회적 공의를 외치는 신부님이나 목사님들의 얘기에 별로 귀기울여본 적이 없다고 고백하십니다. 그들은 그저 하루하루 생계를 이어가는 일에 충실했다고 말합니다. 정치에 대해서도 별 관심도 없었고, 그래서 부자 만들어주겠다고 하는 이명박후보 찍고 세금 걷지 않고 더 많은 복지혜택 누리도록 해주겠다는 박근혜후보를 찍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본인들이 직접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 그간 뜬 구름 잡던 이야기요,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여겼던 사회적 공의와 정의와 인권의 문제가 바로 자신들의 문제임을 깨닫게 된 것이고 정치가 먼 얘기가 아니라 자신들의 삶의 한부분인 것을 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의 엄마아빠입니다.]

 

[저는 가족대책위 대변인으로 불립니다. 그동안 개인생각과 성질 최대한 죽여 가며 나름 제 역할을 하려고 애써왔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가족들 대부분 잘하고 있다고 해주셨고, 기자들을 비롯한 주변에서도 비슷하게 얘기해 주셨죠. 그런데 다들 어느 순간부터 진짜 정치인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더군요.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 무슨 숨겨진 의미가 있는 것처럼 파고들더군요. 저는 예은이 아빠예요. 제 목숨보다 더 귀한 딸을 너무나 어이없게 보내버린 아빠.... 살려달라고 몸부림치는 딸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아빠.... 우리 가족 모두가 그렇게 아이들을 보내버린 엄마아빠들입니다. 우리 아이들을 생각하면 더 이상 무서울 것 없는, 악에 받힌 엄마아빠입니다. 그런 엄마아빠가 마음껏 울어보지도 못하고 이토록 자제하며 한 목소리, 한 모습으로 6개월을 버텨온게 많이 못마땅했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갑니다. 참사의 진상을 낱낱이 밝혀낼 때까지. 우리는 엄마아빠니까요.

 

유가족? 우리는 남겨진 가족이 아닙니다. 엄마아빠입니다. 영원히 우리 아이들의 엄마아빠입니다. 자식 앞세운 죄를 씻고 단 1%라도 덜 미안하게 우리 아이들을 만나러 가야 할 엄마아빠입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가고 싶지만, 그러면 우리 아이들에게 혼날까봐, 우리 아이들이 남겨준 숙제를 다 해야 눈이라도 마주칠 수 있기에, 살아내려고 버티고 있는 엄마아빠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세월호 희생자, 실종자였다면 여러분의 부모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포기하고 타협하실까요? 그깟 돈 몇 억 받고 좋아하실까요? 만일 여러분 자녀가 세월호 희생자, 실종자였다면 어떨까요? 저 집 자식은 효도하고 죽었네. 이런 말 들을 때 어떠실 것 같은가요? 답은 하나입니다. 이 세상 어떤 부모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 어떤 부모도 타협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 어떤 부모도 내 자식을 돈과 바꾸지 않습니다. 수천조원을 준다 해도. 저희도 여러분의 부모님과 같은 엄마아빠입니다. 저희도 여러분처럼 내 목숨보다 귀한 자녀를 애지중지 키워 온 엄마아빠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엄마아빠입니다. 저는 영원히 예은이 아빠입니다. (유경근)]

 

사실 오늘도 예배에 참석하고 있고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 말씀을 귀로 듣고 있지만, 이 비유의 말씀도 현재의 자신과는 별 관계가 없는 뜬 구름 잡는 얘기로 들리실 분이 많을 것입니다. 타산적 계산이 쉽게 나오는 현실적 판단을 놔두고 왜 구름 잡는 미래 얘기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왜 오지도 않는 미래를 걱정해야 하느냐고 질문합니다. 기회는 오늘, 결단은 지금 해야 한다고 얘기를 해도 소수의 깨인 사람들을 제외하면 대다수는 막상 일을 당하기 전까지는 다음에라는 유혹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사고를 당하여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때, 의사로부터 시한부 인생의 경고를 받은 후에야 비로소 삶이 내 것이 아닌 하늘의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은퇴하면 시간이 많을 것이니 그때 가서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하고 하느님의 일도 그때 가서 하겠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10, 20년 후의 시간이 지금과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의 어느 누가 10년 전에 전철을 타고 가거나 밥을 먹거나 걸어 다닐 때조차도, 심지어는 두 사람끼리의 대화 중에도, 회의 중에도, 예배 중에도 스마트폰을 통해 외부세계를 들여다보고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할 것이라고 상상이라도 해 보신 분이 계시나요? 백 명 이백 명의 사람들이 서로 떨어져 있으면서 동시에 한 공간에서 대화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상상이나 해본 사람들이 계시나요? 10년 후의 세상이 지금과 같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은 착각일 수 있습니다. 할 수 있을 때에 하는 것이 현명한 일입니다.

 

우리는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되는 일을 대수롭게 여기는 시각교정이 필요합니다. 주의에서 이웃에게 일어나는 불행한 사건이 나의 사건으로 대하는 인식 전환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2천년 전 예수 시대에 살았다면 우리라고 해서 혼인 초청을 쉽게 받아들였을까요? 그것이 하느님 나라 초청 자리라고 하는 것을 알았다면 어느 누구도 거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나가고 나면 그게 그렇다는 것이 명확한데, 실상 그 순간에는 그 판단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육신이 아닌 혼이 살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의에 목마른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주역들]

 

다른 두 복음서 저자와 달리 마태는 혼인잔치가 임금의 아들 혼인잔치요 당시 관례에 따라 이미 오래 전에 날을 잡아 1차 초청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은 하나는 밭으로 일하러 가고 장사하러 가고 그날에 맞춰 일부러 결혼을 한 것입니다. 이는 고의로 초청을 무시한 적대적인 행위인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의 초청 곧 자신의 교회 공동체가 유대주류 사회로부터 받는 외면과 냉대를 비유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은 모두 할 일을 갖고 있었던 곧 지위나 부가 있었던 당시의 지배계층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참석을 거부하자 왕은 거리의 사람들로 이 자리를 채웁니다. 정상적인 혼인 잔치자리라면 빈자리로 남겨 두었으면 두었지 거리의 사람들, 거지들과 절름발이들과 소경들로 자리를 채우거나 심지어는 깡패와 같은 악한 자나 선한 자 모두 닥치는 대로 손님을 불러오는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그건 혼인식을 더럽히는 자신의 얼굴을 스스로 먹칠하는 불명예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가 논리적 비약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의 나라는 그 과정이 어쩌든 결론은 지금 사회적으로 소외당하고 업신여김을 당하는 사람들, 지금 우리가 불결하다고 죄인이라고 멀리하는 사람들의 차지가 될 것임을 분명하게 밝힌 것입니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역사 변혁이 전제된 세계임을 분명하게 밝힌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내용들이 상투적인 하늘의 지혜와 도덕적 교훈이었다면 당시 로마제국과 종교권력은 예수를 정치범으로 몰아 십자가에 처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처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예수의 가르침 속에는 현재의 정치종교 체제를 부정하는 구원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부정하는 얘기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왜 비유를 사용하시는가? 우리는 어떤 경우 비밀스런 언어와 은유를 사용합니까? 왜 카톡에서 텔레그램으로 옮겨가고 사이버공간 이동을 망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까? 그건 비유 자체가 갖고 있는 혁명성, 기존의 권력 체제에 대한 비판이 숨겨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실상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알아듣기 쉽게 하기 위해 비유를 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알아듣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이사야의 말을 빗대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비유로 말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810)

 

[서술에서 명령 그리고 순종으로]

 

이제 우리에게 남은 과제 하나는 우리가 오늘의 예수 비유 말씀의 이러한 체제 전복의 혁명성을 인정하고 지금 우리가 불결하다고 여기는 사람들과 업신여기는 사람들의 친구가 될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세상 권력이 지시하는 그 길을 계속 걸어갈 것인지 하는 선택입니다. 여기에 마태가 마지막에 하는 말, ‘부르심을 받은 자는 많지만, 택함을 받은 사람은 적다는 말씀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그냥 믿는다고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값싼 은혜와 값비싼 은혜를 구별할 줄 아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씀에 그치면 값싼 은혜에 멈추고 마는 것입니다. 이 서술에서 우리는 그러기에 원수까지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하는 하느님의 명령을 읽어내고 이를 따를 때에 우리는 본훼퍼목사가 말하는 값비싼 은혜의 수혜자가 되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의 다윗이 고백한 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고백은 그가 겪은 고난에 찬 삶을 볼 때, 결코 값싼 은혜의 고백이 아닌 값비싼 은혜의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에게 보이십시오.’라는 바울의 권면은 그가 평온 가운데서 전한 말씀이 아니라, 그가 믿어온 사람들의 쓰라린 배반을 곱씹으며 감옥에서 전한 말씀임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값비싼 은혜의 가치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오늘의 혼인 잔치 비유 말씀에 담긴 하느님 나라의 놀라운 반전을 생각하시면서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