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밖에 다른 신은 없다.”

시편 96:1-5; 이사야 45:1-7; 살전 1:4-7,10; 마태 22:34-46

 

성 정 모 교수

 

무엇보다도 먼저 한굮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향린교회에서 설교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저로서는 한국 교회에서는 처음 설교를 합니다. 한국어로 설교 하지 못함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한국을 1965년도에 떠났습니다. 여덟 살 때였습니다. 한국을 떠나 우리는 브라질로 이민을 떠났고 거기에서 살면서 한국인들과 그리 많은 접촉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모든 공부를 포로투갈어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저의 신학수업도 브라질과 라틴아메리카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에게 스페인어로 설교하게 됨을 용서를 구하고 통역해 주시는 홍인식 박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저는 주어진 성서일과의 4개의 본문을 중심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특히 4개의 본문에서 공통적으로 보여 지고 있는 우상 숭배에 대해서 그리고 이스라엘과 예수의 하느님과 성경이 말하고 있는 사이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주제로 삼아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당시에 모든 사람들은 하느님 혹은 신들의 존재에 대해서 믿고 있었기 때문에 따라서 성서의 핵심적인 관심은 존재에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핵심적인 질문은 참된 신은 누구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무엇보다도 먼저 많은 신들이 존재하고 있음과 그리고 그들 사이에 누가 참된 신인가에 대한 경쟁이 있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있는 신들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이 믿고 있는 신들도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국가 간의 전쟁은 그들이 믿고 있는 신들 사이의 전쟁이었으며 전쟁이 발발하면 자신들이 믿고 있는 신이 자신들에게 적국의 신이 적국의 백성들에게 주는 힘보다 더 강한 힘을 주었다고 주장하면서 백성들을 독려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전쟁에서의 승리는 자신들의 신이 더 강한 신이며 따라서 자신들의 신이 참된 신이라는 것의 증명이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항은 이러한 분쟁에서 중요한 요소는 힘에 대한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강한 신 혹은 전능한 신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군사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승리는 그들의 신이 전쟁에서 패배한 상대방의 신보다 강한 신이며 따라서 참 신이라는 것의 증명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국의 신들은 참된 신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제국의 황제들은 그들의 신의 대표자, 신의 아들 다시 말하면 신적인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예를 들자면 로마 제국에서 시저는 신의 아들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를 향하여 주님, 퀴리오스 라는 호칭이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신을 권력과 승리의 개념과 연관시키는 생각은 오늘날에도 지속적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성서는 오직 한 분의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유일신 사상은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예언자들의 경우에 이들이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하나의 신이 아니라 여러 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과 또 이러한 여러 다른 이름을 가진 신들, 심지어는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이름의 신을 숭배하고 있는 다른 백성들의 존재를 몰랐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도 야훼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었던 우상숭배의 경우도 발견되고 있습니다. 성서에서 우상숭배에 대해서 최초로 언급하는 사건은 금송아지 숭배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부와 권력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금송아지는 이집트로부터 백성들을 이끌어 낸 이스라엘 하느님이라고 불리워졌습니다.(출애굽 32:4)

 

이러한 것은 우리에게 우상은 참된 종교와 거짓 종교의 분별에 대한 종교적 문제가 아님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금송아지를 숭배했던 사건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숭배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서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상숭배는 우리가 종교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영역에서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성서일과 중에서 복음서는 로마 제국에 납부하는 세금 지불에 사용되어지는 동전의 시저와 하느님 사이에서 발생하고 있는 갈등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 동전에는 시저의 얼굴과 더불어서 그는 신성한 존재로 간주되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조금 후에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상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이지만 후에 인간의 삶을 초월하여 절대적인 존재로 자리매김을 하는 것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우상들을 숭배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우상들은 거짓 신이 아니라 참된 신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바로 믿음의 문제와 귀결되어집니다. 그들은 희망을 자신들의 우상에게 둡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인간의 삶을 초월하는 절대적 가치기준을 이끌어 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이루어 줄 것이고 그리고 자신들을 구원으로 이끌어 주는 확실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 자신이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삶에 있어서 선택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절대적 판단기준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치관에 가까운 것들, 자신들을 자신들이 생각하고 있는 절대적 가치관으로 이끌어 줄 것이라고 믿는 그것들을 더욱 더 소유하기 위하여 투쟁합니다. 이것이 그들의 삶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욕망이 도달하고자하는 최후의 목표입니다. 오늘 우리의 가슴이 가장 원하고 있는 것은 오늘 우리가 우리의 삶에 절대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드러내주는 것입니다.

 

우상, 거짓 신들에 대한 성서의 가장 핵심적인 비판은 그들이 추종자들에게 승리와 성공에 대한 보증을 해주는 존재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일 승리와 성공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희생과 죽음이 강요되어져야 한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부와 권력의 축적은 그 사회에서 가장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희생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죽음과 희생은 우상-신이 요구하는 조건이며 따라서 필연적인 것으로 간주됩니다. 우상들은 이러한 것에 대한 의식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작은 자들의 고통은 크게 문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고통을 보면서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한 사회의 가장 가난하고 약한 자들의 고통은 자신들의 반대편에 서 있는 존재들의 패배이며 그리고 그들의 승리는 신들이 자신들의 편에 있다고 하는 것의 증명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권력과 부 그리고 신과의 연결은 오늘의 교회에서 교회의 성장과 혹은 성공을 추구하는 매우 강력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 신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삶의 문제에 있어서 승리와 부 그리고 보호를 약속합니다. 이 약속은 매우 환상적입니다. 특별히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를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던 하느님의 약속인가? 혹은 우상-신의 약속인가?

 

이 질문에 대하여 올바른 답변을 하는 것은 오늘의 기독교회의 복음 선포와 사명과 신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도전적 과제입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에 대한 답변에 의해 세상을 향하여 어떤 종류의 하느님의 영광을 선포해야 하느냐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의 시편이 말하듯이 주의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경배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결정해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하여 선포해야 할 하느님의 영광은 세상의 강한 자들과 유명한 자들의 영광과 같은 종류의 영광입니까? 혹은 우리의 하느님의 영광은 다른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하느님께 드려야 할 영광은 마치 이 사회의 영광과 같은 종류일 것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다만 세상의 권력에게 바치는 영광보다는 크기 면에서 좀 더 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느님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의 권력의 체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존재 일 뿐입니다. 하느님 바로 밑에 세상의 권력자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데 성서는 우리에게 다른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시편은 우리에게 거룩함의 아름다움 안에서 주님을 경배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거룩함은 세상의 가치관과 행위를 따르는 것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가 다른 본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느님의 생각과 길은 세상의 생각과 길과는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이사야 55:8)

 

바울은 오늘 우리가 읽은 데살로니카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우리에게 이 문제를 보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요소들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데살로니카의 기독교 공동체가 많은 환난을 당하면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서 우상을 버리고 하느님에게 돌아왔으며 바울 자신과 주를 본받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이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신도들에게 모범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데살로니카전서 1:6-7)

 

우상을 버리고 예수를 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단순히 한 종교에서 다른 종교로 옮겨가거나 혹은 한 종교예식에서 다른 종교예식으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저가 전능한 것이 아니라 예수, 로마 제국과 예루살렘의 종교제도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주님이며 부활한 하느님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시의 문화와 매우 깊은 균열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지혜 편에서 보면 미친 짓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은 더 이상 정복하고 죽이는 제국의 황제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의 백성들을 깊이 사랑하여 자신의 목숨을 그들을 위해 기꺼이 내어 놓는 사랑의 사람의 모습으로 이 세상으로 오신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삶의 양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자들과 위대한 사람들을 본받는 것과 세상의 가치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그만두고 예수를 직접 알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주님을 본받는 바울을 본받았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은 다른 공동체에 모범이 되었고 이렇게 함으로서 그들을 본받는 공동체들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카 공동체가 예수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임으로서 바울을 본받음으로서 주님을 본받는 공동체가 되었음을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예수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가 그 자신이 말했듯이 우리를 생명으로 이끌어 가는 진리의 길이며 하느님의 메신저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처럼 사는 것이며 예수의 삶을 본받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가 원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고 그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인간은 자신이 본받고자 하는 사람을 그의 삶의 모델로 삼고 그 모델처럼 살아가고자 합니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모른 채 태어납니다. 반면에 동물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면서 태어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본능에 의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도 본능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능의 노예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본능이 말하는 것을 넘어서게 만드는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리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원하면서 살아가는 법을 모르고 태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문화가 제공하는 삶의 모델을 선택하고 받아들입니다. 회심은 우리가 지금까지 우리로 하여금 잘못된 신과 우상을 향하여 나아가게 만들었던 잘못된 인간의 삶의 모델을 추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제 그 삶을 바꾸겠다는 자유를 획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독교적 회심은 예수를 삶의 모델로 삼고 예수가 우리에게 계시해 주었던 하느님을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호심은 바라는 것을 진지하게 바꾸는 것입니다. 전에는 결코 바라지 않았던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회심을 통하여 이제 더 이상 우리는 세상의 권력자들을 본받지 않고 예수를 본받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성공한 사람들, 부자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본받으려고 합니다.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들을 똑같이 소유하고 사고 싶어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우상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들을 갖게 되면 자신들도 그들처럼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 사회에서 좀 더 인간이 되고 또 인정을 받게 될 것이라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서 자신들의 우상과 비슷하게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상이라는 단어는 추종자들에 의해 숭배되는 거짓 신들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팬들에 의해서 숭배 받는 성공한 사람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상 이 단어는 이처럼 두 가지 의미의 숭배의 뜻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한 가지 논리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우상숭배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들이 숭배하는 우상과 비슷하게 보이는 것과 우상들이 소유하고 있거나 혹은 바라는 것들을 소유하는 등 겉으로 드러나는 외형을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오늘의 세계에서 광고는 판매되는 상품의 효율성에 대하여 말하는 것보다 특정한 우상이 그 상품을 갖고 싶어 한다는 것에 집중합니다. 그리고 그 상품을 사람들이 바라는 존재의 모습과 특정한 삶의 스타일과 연계시킵니다. 이같이 광고에서 소비를 영성의 세계와 연계하는 것은 자본주의 내에서 마케팅 전문가들에 의해서 매우 빈번하게 활용되고 있습니다. 이제 광고는 상표의 신비적인 차원에 대해서 말하곤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한없는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비싼 유명 상표를 구입합니다. 그래서 훼라리, 루이스 뷔똥 그리고 그 외 여러 유명 상품들은 자신이 팔고 싶은 판매가격으로 판매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상품을 구입함으로서 마치 자신들이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된 것처럼 보여 지고 그렇게 느낍니다.

 

불행하게도 기독교회가 예수를 향한 회심을 소비욕구와 자신들의 우상을 본받고자 하는 요구를 실현시킬 수 있는 도구처럼 또 선포하기도 합니다. 마치 하느님이 우리의 소비, 권력의 욕구를 위해서 그리고 인생의 어려움 앞에서 보호용품이 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우리의 성서일과는 우리에게 우상들의 거짓을 발견하고 살아계시고 참된 하느님을 향하여 회심하는 사람들은 세상의 우상들을 본받는 것을 그만두고 바울과 같은 사람들을 본받는 삶으로 변화된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삶의 변화는 세상의 신보다 더 강력한 신을 선택함으로서 우리의 승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힘은 세상의 힘과는 전혀 다른 힘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데살로니카 공동체가 많은 고난과 문제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기쁨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고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하느님을 섬김으로서 우리에게 어려움이 줄어들기 보다는 더 많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를 본받고 세상의 우상을 따르는 것을 그만둔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우리가 외형적인 성공의 모습 혹은 겉으로 보여 지는 권력에 의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을 포기하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삶의 태도로 인해 우리는 많은 비판을 받게 되고 많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정신에 저항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참 빛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다른 형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우리는 오직 권력과 성공과 부의 외형적인 모습만 추구하는 삶의 허무함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고자 했던 바리새파 사람들조차 예수는 사람의 겉을 보지 않고마음을 보고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이처럼 바울도 하느님은 사람의 겉이 아니라 마음을 본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은 어떠해야 합니까? 우리들의 마음 안에는 예수의 가르침이 다스리고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과 긍휼의 하느님으로서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에게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 남자와 여자,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구별이 없으십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에 대해 사랑을 받는 존재들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존엄한 삶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가 말했던 내가 온 것은 모든 사람들이 생명, 풍성한 생명을 갖게 하기 위한 것이다.(요한 10:10)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존엄성에 의해 판단되어지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외형과 부로 판단되어집니다. 오늘의 세계에서 체제의 논리는 부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부는 인간 삶을 넘어서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20세기의 대한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일찍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과거의 가치관과의 관계가 심각한 도치 현상을 겪게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삶을 위해 노동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노동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모든 악의 근본은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오늘 우리는 돈을 사랑하는 것은 행복한 삶의 비결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논리와 그의 근본적인 가치관은 하느님의 길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의 축적의 논리와 예수의 하느님의 논리 사이의 근본적인 대치국면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돈은 이제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일찍이 우리에게 경고했습니다.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하느님을 섬기든지 맘몬, 신적인 차원으로 간주되는 돈을 섬기든지 해야 할 것이다.”(마태오 6:24) 예수가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달라고 했던 로마 제국의 동전은 제국의 세금을 납부하는데 사용하는 동전이었습니다. 따라서 제국의 논리에 따라 제조된 것이기에 시저의 형상을 담고 있으며 그가 신성한 아우구스토의 아들이라는 문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정복하고 착취하고 죽이면서 획득한 부의 축적을 모색하던 로마제국을 향한 우상숭배의 상징입니다.

 

예수에게 시저와 하느님을 동시에 섬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는 시저의 나라와 반대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선택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역시 해당됩니다. 우리의 눈으로 오직 소유하고자 원하는 부만을 보게 만들고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보지 못하게 함으로서 그들의 고통 앞에서 우리를 무관심하게 만들고 있는 부와 권력의 외형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세상의 논리에 의해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의 마음을 볼 줄 알고 사회적 지위 혹은 외형과는 별개로 그들의 존엄성에 의해서만 판단하고 또 그의 백성이 마치 목자 없는 양들처럼 유리하는 것을 보고 측은히 여겼던 예수를 따르면서 살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하던 사람들, 그리고 소외된 사람들의 인간적 존엄성을 분명하게 볼 수 있게 하는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를 우리의 삶의 모델과 우리의 구원자로 인정하는 것은 오늘의 세상의 우상이 주는 압력과 유혹에 저항하고 최대이윤의 창출과 부의 이름으로 세상에 의해 존엄성이 거부된 사람들과 연대하는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여기 모여 있는 우리들과 세계의 여러 곳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부, 학위 혹은 사회적 분류에 의한 지위와는 상관없이 모두 하느님에 의해 사랑받는 존엄한 존재라고 하는 사실에 분명한 확신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잉여인간처럼 사람들을 취급함으로서 그들의 존엄성이 거부되는 것이 마치 하느님이 사랑하는 우리의 존엄성이 거부되는 것처럼 간주되어서 윤리적 분노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의 압력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많은 영적 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가 전한 복음은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 공동체의 삶에서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사역에 의해서 살아가게 만들고 사랑과 희망의 일들을 계속 해 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을 주는 것은 성령의 임재입니다.

우리들의 간증은 우리의 교회의 건물의 거대함이나 혹은 우리 공동체의 숫자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인해 예수를 닮아가고 있는 우리의 삶 자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어려움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살아감으로서 우리는 복음이 주는 진정한 기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기독교 공동체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를 향하여 좋은 모범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존엄성과 생명을 사랑하고 돌보는 거룩함의 아름다움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모범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로마제국 하에서 살아갔던 교부, 리용의 이레네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살아있는 인간 존재 자체이다.” 아멘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