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은 성도 자각으로부터

7:9-17; 34:1-10; 1 3:1-3; 5:1-12

 

[‘종교개혁이 아닌 개혁’]

 

오늘은 개혁주일입니다. 497년 전인 1517년 독일의 비텐부르크 성당 정문에 당시 신학교수이자 신부였던 말린 루터가 로마 교황청에서 베드로 성당 건축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면죄부 판매를 하였는데, 이는 성서의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하여 교황청의 잘못을 비난하는 95개의 신학적 선언이 있는 질문지를 붙였는데, 이는 당시 르네쌍스라는 인문운동과 농민개혁운동과 맞물리면서 유럽 사회의 지각을 뒤흔드는 거대한 혁명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이를 흔히 종교라는 말을 붙여 종교개혁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본의 아닌 여러 가지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만약 불교에서 종교개혁의 날을 지정하여 선포하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자연히 아니 종교가 자기 종교 하나만 있는 줄 아나?’ 하고 반발을 하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더욱이 예수께서는 남에게서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하셨으니, ‘종교개혁이라는 말은 이웃종교를 무시하는 말이 되기에 사용을 하지 않는 것이 바른 신앙 태도라 하겠습니다. 서구에서는 the Reformation라 부르지 Religion이라는 단어를 붙이지 않습니다. 일본 학자들이 번역한 종교개혁이라는 단어를 무비판적으로 사용하면서 우리 안에서는 자연스러운 단어가 되었습니다만, 이는 타종교에 대한 모독일뿐더러 특히 개신교의 모태가 되는 가톨릭을 이단으로 보는 자기 정당화의 단어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냥 개혁주일이라고 말하는 것과 종교개혁주일이라고 말할 때의 주는 어감의 차이는 분명합니다. 개혁이라고 말할 때에는 자기 개혁이 우선시되지만, 종교개혁이라고 말하면, 자기는 쏙 빠지고 종교 일반 특히 기독교 그중에서도 가톨릭에 대한 개혁으로 시선이 밖으로 향하게 됩니다. 오늘도 수많은 교회들이 종교개혁주일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면서 말틴 루터와 깔뱅을 얘기할텐데, 그 핵심은 가톨릭에 대한 비판입니다. 물론 교황무오설이나 성모마리아설 등 개신교가 받아들이지 못할 교리는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두 달 전 우리에게 보여준 프란치스코 교종의 개혁적인 행보가 우리의 뇌리 속에 깊게 남아 있는데, 또 다시 가톨릭을 이단으로 말하면 개신교의 몰락을 자초하는 자충수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개혁을 말할 때의 일차적 대상은 개신교회이지 가톨릭이 아닙니다. 타락과 부패가 심각한 쪽은 개신교이지 가톨릭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개혁주일을 통해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초기 개혁자들의 주장]

당시 개혁가들의 주장은 대체로 다섯 솔라(Five Solas)로 요약이 됩니다. Sola Scriptura (오직 성서) 진리냐 아니냐의 최종 권위는 교황이 아닌 오직 성서에만 있다는 뜻입니다.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총을 통해서만이 구원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Sola Fide (오직 믿음) Sola Gratia (오직 은혜) 구원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이 믿음 또한 오직 하느님의 은혜로 오는 것이지 인간의 행위에 기초하지 않는다. Soli Deo Gloria (오직 주께만 영광) 이 주장들은 여전히 오늘 개신교회에서도 유효한 주장입니다. 그러나 모든 주의와 주장이 그렇듯이 그건 그 시대에서 유효한 것이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절대적 주장은 없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의 교리는 당시의 가톨릭의 구원의 교리를 지적하는 일에 효과가 있었지만, 지금은 성찬식의 강화로 말미암아 단지 예배 의식만 놓고 본다면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의 가르침은 가톨릭이 더 강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개신교는 한쪽으로 지나친 이 구원 교리로 말미암아 교권이 더욱 강화되고 이로 인한 부패상은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요한묵시록에 대한 이해입니다. 루터와 깔뱅은 모두 교황의 권력에 저항하기 위해 오직 성서만으로라는 개혁 교리를 가장 우선시했고, 실제로 성서 본문 연구와 주해를 평생의 과업으로 진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오직 은혜를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니 행위없는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말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문서라고 멸시하였고 숫자와 신비로운 이야기로 가득한 요한묵시록은 기독교 문헌일 수 없다고 해서 처음 그의 번역에서 이를 빼버렸습니다. 장로교의 시조라 할 수 있는 깔뱅도 마찬가지입니다. 깔뺑은 평생에 걸쳐 성서 전체를 주해하여 책으로 남겼는데, 요한묵시록과 아가서를 단 한 번도 인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운동적 차원에서도 본다면 루터는 애초 독일 농민개혁운동의 지지자였는데, 후에는 자신을 후원하였던 프리드리히 제후 편을 들게 되어 농민운동에 반대하게 되었는데, 이는 성서가 가르치는 인간평등사상을 스스로 부정하는 모순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중개 신앙에서 만인사제 신앙으로]

 

그래서 서구교회에서도 말틴 루터와 깔뱅의 개혁운동을 지지하면서도 또 다른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the Reformation라는 말 대신에 All Saints 만인성도라는 말로 바꿔 부르고 있습니다. 사실 루터와 깔뱅이 추구했던 개혁의 핵심은 교황과 사제만이 하느님의 대리인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하느님의 자녀이고 그래서 하느님의 대리인이 될 수 있다는 만인사제 신앙에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전 숙청도 같은 이유였습니다. 하느님께 직접 나아가지 못하고 예루살렘의 사제들을 통한 간접대리 신앙 체제입니다. 신학 용어로는 중개인 (브로커)신앙 구조라고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개혁의 핵심 대상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모두 우리가 단순히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라는 말이 들어가 있는 본문들을 선택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요한묵시록의 본문을 가장 먼저 들고 있는데, 이는 루터와 깔뱅의 주장에 대한 매우 의도적이고 도발적인 선택인 것입니다.

 

[시장 종교 욕망]

 

오늘 개혁주일을 맞아 정의평화평신도연대에서는 평신도목회를 지향하는 교회들에게 개혁주일을 맞아 평신도들이 다른 교회에서 하늘뜻을 나눌 수 있도록 제안을 한바 있습니다. 저희 당회는 그 뜻에는 동의하지만, 저희 교회의 일정상 올해는 이를 진행하기가 어렵다는 뜻을 전했습니다. 왜냐하면 3주전 향린공동체주일로 평신도들이 하늘뜻을 나눈 바 있고 지난주에는 브라질의 해방신학자 강성모교수가 말씀을 전했는데, 그분은 가톨릭평신도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에는 이세우목사가 지난봄에 하지 못한 강단교류를 하도록 오래 전에 얘기가 되어 있었기에 이번 주마저 평신도 하늘뜻펴기를 할 경우 교인들로부터 조목사는 여기 있을 필요가 없으니 나가달라는 요구가 있을 수 있어 다음 기회에 참여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초청을 하지는 못하였지만, 다른 교회의 초청을 받아 청녀회장인 윤선주집사께서 지금 박득훈목사께서 시무하시는 새맘교회에서 하늘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 강성모교수의 시장 종교 욕망이라는 책을 소개하면서 이를 읽고 오시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린바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믿음의 근간을 뒤흔드는 것은 500년 전의 중세시대 사람들이 경험했던 면죄부 판매가 아니라, 시장경제구조입니다. 어제도 역사와 해석 성서공부 반원들끼리 그런 얘기가 나왔습니다. 자신들이 결혼할 20년 전에는 4인 가족 중 한사람만 일을 해도 모두가 먹고 살 수 있었지만, 지금은 두 사람이 일을 해도 빠듯할 만큼 소비가 커졌다는 것입니다. 30년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두 사람이 모아야 겨우 아파트 한 칸 마련할 수 있고, 교육비나 의료비 그리고 초등학생 자녀에게도 스마트폰을 사줘야 하는 경제구조에서 우리의 신앙과 구원의 핵심이 달라진 것입니다.

 

요즘 청년들이 결혼을 늦추거나 아니면 아예 혼자 살기로 하거나 결혼을 하더라도 아기를 갖지 않으려는 현상들은 제대로 아이들을 키워낼 수 없다는 경제에 그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요즘 강남에서도 이제는 더 이상 학원이 성행하지 않는데, 그건 아무리 잘 키워봐야 0.5%의 최상위층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차라리 그 돈으로 가게 하나 차려주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있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강남에 사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지만, 지금은 강남에 살더라도 자녀들이 갖는 상대적 열등감도 크다는 애기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지금은 신앙의 주제가 천당이냐 지옥이냐 하는 구원의 교리가 아니라, 인간됨을 억누르는 오늘의 경제구조, 새로운 물건으로 끊임없이 우리의 탐욕을 자극하는 시장자본주의 그리고 경쟁에서 살아남는 자만이 성공한다고 하는 성공지상주의에 대해 교회가 어떤 답을 주어야 한다는 새로운 요구입니다. 여기에 대해 교회가 답을 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오직 믿음 오직 은혜만 외치고 있다가는 교회는 자연 도태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교회가 자기 개혁을 꾸준히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신자유주의라는 현대를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답을 주고자 하는 책이 시장 종교 욕망입니다. 나 혼자 한 눈 팔지 않고 성실하고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성공하는 시대는 아닌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 열심히 살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다 성실하게 살아 왔습니다. 일인당 국민소득 26천불 시대에 산다는데, 그렇다면 4인 가족 평균 1억 이천만원 만약 나이 드신 부모님을 포함하여 6인이 산다면 18천만원의 평균 수입이 있어야 하는데, 서울 사람이면 농촌사람보다 당연히 더 많아야 하니 여러분들은 평균 25천만원정도 벌어야 하는데, 그 돈이 다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제는 나무 하나만을 보아서는 안 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저 멀리서 거대한 홍수가 밀려 내려오고 있는데, 나 혼자 아무리 남보다 깊게 뿌리를 내린다고 해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계를 폭넓게 바라보는 큰 시각을 갖고 연대해서 홍수를 막아내는 거대한 댐을 건설하거나 그 물길을 다른 쪽으로 돌리는 노력을 함께 하지 않으면 모든 개인은 무력하게 쓰러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공동체도 중요하지만, 그것도 세계적 안목을 갖고 해야지 몇 사람이 그냥 함께 모여 산다고 해서 홍수를 피해갈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와 세상의 자녀]

 

오늘 본문은 모두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강조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면 무엇이 좋은가요? 물론 하느님이 계시는 하늘나라 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 얘기하려고 지금 이 얘기를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우리는 더 이상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선언이고 이는 세상 불의함에 대한 저항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주자주 하느님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세상 나라와 정반대되는 질서를 말씀하십니다. 포도원 일군이나 부자 농부의 비유에서와 같이 오후 늦게 한 시간 일한 노동자나 새벽부터 하루 온종일 때약볕 아래서 일한 노동자나 그들이 필요로 하는 하루 생활비를 받아갈 자격이 있다는 말씀이나 크게 늘어난 소출에 만족하며 창고를 크게 짓는 농부를 향해 오늘 밤 네 영혼을 하느님께서 불러 가면 그 모든 소출이 누구의 것이 될 것이냐는 도전을 통해 정작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생명이지 물질이 아니다라는 말씀들은 모두 세상적 가치에 대한 전복인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로마서의 말씀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하느님의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22-23)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과 몸이 해방될 날을 같은 선상에 놓고 있습니다. 몸이 해방될 날이란 사람이 죽어 세상을 떠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날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나라란 외적인 공간 개념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질서가 세워지는 가치 개념이 훨씬 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거하지만 사랑과 정의 평화 그리고 생명 존중이라는 하느님 말씀에 기초한 신앙의 가치를 따를 때에 그는 이미 몸의 해방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의 요한묵시록 말씀은 장례식장에서 자주 들려지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며 옥좌 한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시어 그들을 생명의 샘터로 인도하시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분명 미래에 하늘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묵시록 자체가 세상권력의 핍박 속에서 그 핍박을 잘 이겨내도록 권면하기 위해 쓰인 책임을 감안하면 이 또한 세상에서의 해방을 위한 책이지 사후 세계의 모습을 그리는 종말의 책은 아닌 것입니다.

 

[모든 것의 주체]

 

우리가 개혁주일에 먼저 개혁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은 개인의 신앙입니다. 자기 자신은 세상 가치에 매여 살면서 교회가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따라가는 것이 가능한가요? 이는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교회의 주인은 여러분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주인도 여러분이고 목회의 주체도 여러분입니다. 목사가 아닙니다. 목사는 여러분이 주인 역할을 하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지나가는 손님에게 집안 일을 맡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라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의 주인 또한 우리들 자신입니다. 대통령도 아니고 국회의원도 아니고 대법원 판사들도 아니고 국정원장도 아닙니다. 저들은 모두 임기동안 우리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시민을 위해 일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과 지위 유지를 위해 권력을 남용한다면 당연히 저들을 자리에서 끌어내고 새로운 사람을 앉힐 권리와 의무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나라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들이 하는 일을 잘 감시하고 비판하는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 루터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장로교의 시조가 되는 깔뱅이 추구했던 일은 제네바 시를 하느님의 말씀이 실행되는 그런 신정(神政) 도시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장로들이 실제로 시 행정에 참여하고 재판에도 참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깔뱅의 교리를 가장 잘 따른다고 하는 남한의 보수개혁주의자들은 이런 부분은 아예 무시하고 오직 믿음, 오직 은혜라는 구시대적인 개인영혼 구원교리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2의 을사비밀늑약]

 

우리는 지난 노무현 정부에서 국회 동의를 통해 미군이 갖고 있는 전시작전통제권을 2012년에 돌려받기로 했었는데 이명박정부에서 2015년에 돌려받기로 재협정을 맺었는데, 현재 박근혜정부의 청와대와 군부 장성 몇 명이 작당하여 이를 멋대로 파기하고 무기한 연기하는 한미비밀협정을 맺었습니다. 이건 110년전 이 나라를 일본제국주의에 팔아먹은 을사비밀늑약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도대체 민이 주인이라고 하는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그 협의한 내용도 보여줄 수 없다니 이건 완전히 히틀러의 파시스트 정권 저리가라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우리 목숨을 우리 스스로가 주인이 되어 지키지 못하고 미군 사령관에게 내 맡기고 손님처럼 살아왔는데, 이걸 앞으로도 이십년을 더 가야한다니 정말 분하기 짝이 없습니다. 남한의 국방비가 북의 국방비의 30배요 북조선 나라 전체 예산보다 더 많은게 언제적 얘기인데, 지금도 미군 사령관에게 우리의 목숨을 내맡기고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 되는 얘기입니까? 남쪽의 군사력이 북쪽의 군사력보다 훨씬 강하다는게 군사전문가의 결론인데, 단지 핵을 이유로 미군에게 내 목숨을 맡기는 일에 내 개인의 자존심은 차치한다 하더라도 민족의 자존심상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북은 미국이 대북적대정책과 경제봉쇄정책을 포기하고 군사적 위협이 사라지면 언제든지 핵을 포기하겠다고 말해 왔습니다. 이제 전쟁이 일어나면 핵이 있든 없든 나라 전체는 완전히 잿더미로 변합니다. 현대전에서 승자는 결코 없습니다. 그건 인터넷 게임에서나 있는 상상의 결론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지 전쟁만은 막는 정책을 펴야 하는데, 미국의 전쟁무기나 수입하는 나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직 생산도 되지 않는 전투기, 문제투성이의 전투기를 구매하였습니다. 우리가 땀 흘려 일한 세금으로 우리의 생명을 보호하는 일이 아닌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전쟁무기를 구입하고 있는데, 여러분은 찬성하십니까? 남북대화를 통해 군축을 실시하여 백성들이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 정부가 해야 하는 일이거늘 박근혜정부가 계속 전쟁의 공포를 심어주어 이 나라를 세계에서 유일한 미국의 군사 식민지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기미년의 독립만세에 기독교가 앞장 선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그보다 앞서 을사늑약을 막기 위해 일어서야 했던 것입니다. 병을 고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병이 생기지 않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제국의 지배 정책이 무엇입니까? Divide and Conquer 정책입니다. 같은 편을 갈라서 서로 싸우도록 하는 분열지배정책입니다. 남북은 지난 70년동안 외세의 분할지배정책에 계속 끌려왔습니다. 지금 미국의 주가가 오르고 달러 환율이 오르고 있습니다. 오바마의 경제정책이 씨가 먹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지금 중동에서 이슬람 국가들이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본래 수니파와 시아파와 수백년동안 다투지 않고 평화롭게 잘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하면서부터 이 둘 사이가 갈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지금은 원수가 되었습니다. 지금 싸우는 양 진영에 무기를 대는 나라가 미국입니다.

 

현재 시리아의 동부와 이라크북부지역에서 새로운 이슬람국가를 만들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 IS그룹은 본래 미국이 키운 반군들이고 지금도 여전히 친미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의 군사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반면 이와 맞서 싸우는 시리아의 반군이나 쿠르드민족은 미국으로부터 직접 무기 공급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 저들은 어제까지 이웃으로 잘 지내왔는데, 지금은 어찌된 영문인지 미국제 무기로 서로를 죽이는 전쟁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러니 미국의 군수공장들이 활발하게 돌아가면서 미국 주가가 오르고 달러 환율이 오르는 것입니다. 무기를 팔아 사람의 생명을 담보로 경제를 살리는 일은 악마가 하는 일입니다. 이는 사람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현대판 흡혈귀 드라큐라나 다름이 없습니다. 미국은 오래 전부터 석유매장량이 가장 많은 이라크를 분열시켜 지배하고자 하는 정책을 펴왔고 만약 성공한다면 이라크는 3개의 국가로 나눠질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 평화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미국을 비판하는 일에 대해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이는 정치적 행위이기 때문에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고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영혼 구원만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현재 남북갈등의 소지가 되고 있는 것이 휴전선 부근에서 북을 비난하는 전단지와 달러를 넣은 풍선 날리기입니다. 엊그제는 파주의 주민들이 나서서 이를 막았습니다. 언론에서는 마치 탈북 자유주의자들의 활동으로 보도하는데, 풍선 하나 띠우는데, 최소 백만원이 드는데, 가난한 탈북자들에게 무슨 돈이 있어서 수십 개의 풍선을 계속 띄우겠습니까? 그 돈은 모두 미국정부와 국정원으로부터 나오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북의 인권을 향상하기 위한 일이라고 하는데, 실제에 있어서는 심각한 남북갈등뿐만 아니라 남남갈등을 유발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에 참여하는 것이 비신앙적인 일인가요? 그래서 전쟁 일어나면 너도 죽고 나도 죽어 천당 가면 다 되는 것인가요? 목사의 말만 믿지 말고, 믿음의 주체를 되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국제국내의 복잡한 정치적 현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이 잘 읽는 책은 <잘되는 나> <긍정의 힘> <왕의 기도> <야베스의 축복>과 같은 책들이고 이 내용들은 예수께서는 언급도 하지 않은 삼박자 축복, 오박자 축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 구절을 언급하고는 있지만, 그러나 가난한 자의 복이 아닌 부자의 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신 십계명]

 

강성모교수가 대부분의 신학교에서는 모두 초청을 받아 강연을 했는데, 교회에 초청을 받은 것은 향린교회가 유일합니다. 왜냐하면 교회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무입니다. 그런데 그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인 브라질의 키비츠목사라는 분이 브라질교회에서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주로 30대의 젋은이들로 매주 수천 명이 천막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를 인터뷰한 한겨레의 조현기자가 키비츠목사의 목회 신 십계명이라는 제목으로 정리를 해서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귀담아 들을 내용들입니다.

 

1. 정의는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정의는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 사랑의 실천과 연대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이 슬로건은 이 교회가 지난연말 모금운동을 전개할 때 내세운 것이다. 교회는 40만달러 약 5억원을 모금해 정의를 실현하는 37개 엔지오를 도왔습니다.

2. 반쪽의 복음을 전체적으로 살려내라

복음은 영적인 문제나 죽음 이후만 다루는 게 복음이 아니다. 그는 하느님은 떠다니는 영만 창조한 게 아니다.” “이 땅 위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어떻게 이룰 것인지를 말해놓은 게 복음이다.

3. 현장에 길이 있다

젊은 시절 인디오와 아프리카인들 속으로 들어가 사역을 하면서 복음의 핵심이 현장에 있음을 터득한 그는 신앙인들은 현실과 끊임없이 대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교회가 정치적 입장을 세우지 않을지라도, 신자들이 토론을 해 정치 사회문제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표명해야한다는 것이다.

4. 약자를 죽음으로 내몰지 않는 하느님 나라를 세워라.

키브츠 목사는 일부만 복을 누리고 나머지는 희생되는 계급 사회가 아니라 형제애를 바탕으로 한 사회라며, 약자와 무능력자를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5. 교회 건물이 아니라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신다.

이바브교회는 25년간 부지를 빌려 천막에서 예배를 드려왔다. 교회 신축은 더 이상 이 땅의 임대가 불가능해진 최근에야 이뤄졌다. 헌금의 대부분을 건물에 쓰는 일을 해선 안 되며 세상과 약자를 위해 써야한다는 게 이 교회의 지향이었다.

6. 교회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교회를 세우라

그는 예수님이 새벽마다 교회에 나오라거나 시도 때도 없이 교회서 살라고 하지 않았다면서 예수님이 원했던 것 이상을 원하지 말라고 한다. 그는 교회에서 사는 것은 신앙인의 자세가 아니다교회는 1주일에 한번만 오라고 말한다.

7. 교회 안에 머물지 말고 사람들 안에 머물라

가정과 직장, 마을 일에 충실하며 그곳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게 신앙인이라고 한다. 그는 진정한 복음이란 교회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안에 머물면서 사람들을 바꾸는 것이라고 말한다.

8. 대중성이 아니라 저항력을 길러라.

그리스도교는 애초 대중의 종교가 아니라 강력한 소수의 믿음으로 시작된 종교였다. 예수님도 겨자씨 비유와 늑대 사이의 양 한 마리 이야기를 통해 온 세상을 지배하려는 권력에 대항해 어떻게 하느님의 현존의 모습을 지켜내느냐가 중요하다. 따라서 개 교회를 어떻게 성장시키고, 브라질에서 개신교의 힘을 확대하는 것보다 이 세상과 세속적 욕망의 힘이 커져 가는 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저항의 힘으로 남아있을 것인가가 관건이라고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가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진정한 힘을 잃지 않는 것이다.

9. 다른 교회를 모방하지 마라

키브츠 목사도 처음 목회를 시작할 때는 저 목사처럼 되고 싶다”, “저런 교회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자아를 찾고, 자신만의 소명을 찾아내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단다. 그는 모방이 아니라 자신과 소명을 찾을 때가 목회가 시작되는 시점이라고 말한다.

10. 영성이 깨어날 침묵의 시간을 가져라

키브츠목사는 1주일에 5회 한 시간씩 핸드폰도 두고 홀로 온전한 침묵 속에서 뛴다. 그는 사람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들음으로 성숙되며, 읽는 것보다 침묵 속에서 영성이 기지개를 켠다고 말한다.

 

이와 더불어 향린교우들은 지난 해 우리가 공포한 교회 갱신과 사회 선교 실천을 위한 제안이라는 소책자를 성서와 함께 가까이 두고 읽고 실천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무엇일까요? 황금률이라는 것도 있고, 이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아마 투표를 한다면 산상수훈의 말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마태오 복음의 본문 말씀을 읽어드림으로 제 하늘뜻을 마치겠습니다. 눈을 감고 한번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생각하시고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 가 앉으시자 제자들이 곁으로 다가왔다. 예수께서는 비로소 입을 열어 이렇게 가르치셨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이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이제 우리가 부를 찬송가 두 곡 중 하나는 루터가 작사 작곡한 찬송가이며 다른 찬송가는 당시 운율에 깔뱅이 가사를 붙인 찬송입니다. 저들의 꿈꾸었던 교회와 사회에 대한 개혁운동이 오늘 나와 내가 몸담고 있는 직장과 교회와 그리고 이 세계 안에서 어떻게 계속 이어갈 수 있을지를 함께 생각하며 부르시면 좋겠습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