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이 오면

아모스 5:18-24; 시편 70:1-5; 살전 4:13-18; 마태 25:1-13

 

조 은 화 목사

 

다음주 11월 셋째주는 제가 향린에 온지 딱 1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 11월 둘째주일 전태일 동지 추모주일까지 향린에서의 경험은 모두 늘 처음입니다. 어떤 행사를 하는지 절기는 어떻게 지키는지, 일 년의 각 부서마다 다양한 경험들을 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음주가 되면 작년에 왔던 날을 기억하며 하나의 기억에 새로움을 겹쳐가는 삶을 살게 됩니다. 아쉽고 부족했던 점을 찾아내며 매번 현재 안에서 지난 일년의 삶을 되돌아보며 현재를 살아갈 것입니다.

 

일 년 전 제가 향린에 왔을 때의 생각은 일 년 후에는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였습니다. 무엇인가 새로운 관계로의 전환으로 뻗어가고, 결혼도 하고 더 깊은 차원의 삶을 살고 있으리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어려운 일을 마주 할 때마다 일 년 뒤 그 어느 날을 꿈꾸며 희망의 날을 미래에 두고 지냈던 적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부족한 점이 발견되고 고정화된 생활의 패턴과 습관 등, 계속되는 일과의 연속선상에서 일 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우리의 삶 가운데 믿음의 삶이 현재를 살아가게 하기 보다는 희망하는 미래에 그 어느 날로 초점이 맞춰지지는 않으신지요. 우리는 사실 힘들지만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미래는 지금 내가 여기서 하지 않으면 오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내가 여기에서 하고 있는 모든 생각과 행동이 나의 미래가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는 현재의 지금여기를 제대로 살아가야할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을 마주하며 살아가는 삶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요즘 드는 고민은 사람이 살만한 세상으로, 정의가 펼쳐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은 강자들에 의해 정의가 사라진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바로서는 일보다 강자들이 약자를 힘들게 하는 악의 승리로 가득 찬 세상으로 보입니다. 세월호 유가족을 돕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 속에서도 세월호 특별법 제정은 난항을 겪고 정부는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좌절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은 임금을 제대로 받지도 못하고 계약직에 머물러야 하며 심지어 갑작스런 해고에 가족의 생계를 걱정하며 죽음의 문턱을 오가고 있습니다. 4대강 사업으로 인해 식수의 위험마저 초래하였고, 국가 예산은 우리가 원하지도 않는 곳에 펑펑 쏟아 부으며 정작 서민들에게 필요한 복지예산과 교육예산은 부족하다며 무상보육 무상급식을 이어가지 못하게 만들며 서민을 놓고 정치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온전한 세상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나 자신은 정의로운 삶을 살고 있노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사는 세상 우리는 그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땅위에 주님의 날이 오기까지 분명 우리는 평화와 통일의 세상을 함께 맞이하기를 희망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날이 바로 그날이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전혀 다른 결과로 찾아온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이 결코 옳지 못하다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면 말입니다.

 

[야훼의 날!]

 

하 욤 야훼! ‘야훼의 날의 히브리어입니다. 오늘 아모스 본문은 하 욤 야훼! 바로 주님의 날이 오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깨달음을 줍니다. 이스라엘은 종 된 신분으로 힘없이 살던 백성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통해 해방의 몸이 되고 땅을 갖게 되고 나라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느님의 백성을 구원하는 위대한 구원의 날을 믿었습니다. 그날이 오면 하느님께서 적들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적들을 심판하고 파멸시키는 세계적인 대변혁의 날이 라는 것입니다. 힘없고 나약한 이들을 위해 오신 주님께서 강자들의 틈바구니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시는 날! 주님의 날은 하느님의 민족을 구원하는 위대한 날이며 이스라엘이 갈망했던 날로 아모스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날은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모스는 바로 적들에 해당하는 파멸과 심판이 다른 적국이 아닌 하느님께 선택되었다고 하는 이스라엘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다고 말합니다. 아모스는 우리에게 그날이 오면 이스라엘이 처참할 정도로 심판의 날이 될 것이라 말합니다.

 

아모스가 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아모스의 예언이 있던 시기는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2세 통치 시기와 남유다의 웃시야 시대였습니다. 이 시기는 이스라엘이 정치적으로 안정을, 경제적으로는 부흥을 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조건이 아모스 예언이 나오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이유인 즉은 통치권과 지배층의 부정과 불의가 이스라엘 내부 사회를 지배하여 하층계급 간의 경제적 격차가 더욱 심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무질서는 종교적 부패의 장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쌓은 부를 통해 물질적 봉헌을 하고 공들인 예배의식을 취하며 하느님의 뜻 안에서 약자와 함께 사는 삶이 아니라 자신들의 만족으로 할일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중에 아모스 예언서는 이스라엘이 잘 알고 있는 고대 전승을 이용해 그것을 당시대 청중에게 새로운 메시지로 해석하여 선포하였습니다. 바로 자기만족에 빠져 있던 이스라엘의 억압자들, 강자들에게 아모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주받아라! 야훼께서 오시는 날을 기다리는 자들아. 야훼께서 오시는 날. 무슨 수라도 날 듯 싶으냐? 그날을 빛이 꺼져 깜깜하리라. 그날이 밝은 날인 줄 아느냐? 아니다. 그 날은 다만 깜깜할 뿐 한 가닥 빛도 없으리라.” (5:18-20)

 

야훼의 날의 심판은 이스라엘의 적들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자신들에게도 내릴 것이라는 놀라운 선언입니다. 아모스 예언서가 쓰여질 당시 이미 북이스라엘은 망하고 남유다도 멸망당하여 포로된 삶을 살 때 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왜 망하게 되었는가를 가만히 들추어 보는 가운데, 그들이 지난날 주님의 뜻을 저버리고 약자들을 괴롭히고 부와 사치로 살았던 것이 문제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나라가 안정되어 부의 축적을 쌓을 당시 아모스의 이 같은 예언은 이해할 수 없었으나 나라를 뺏앗겨 포로생활을 하는 중에 그 말이 맞았음을 알게 됩니다.

 

이와 같이 형성된 아모스 예언서는 우리의 삶의 자리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안내합니다. 주님의 날 바로 그날은 결코 자신들의 향락을 위해 자신들의 부를 위해 달콤한 야훼의 날이 와주길 바라는 모습을 보며 기다리는 이들에게는 그동안 알고 있던 야훼의 날 기쁨의 날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물결의 힘]

 

아모스 524절에서 부와 권력에 파묻혀 스스로 잘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이들에게 하고 있는 한탄과 소리침의 메시지를 듣습니다.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하는 마음 개울같이 넘쳐 흐르게 하여라.”(5:24)

 

이 말씀은 그날이 오기까지 제발 현재의 삶 안에서 정의의 삶, 모두를 위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정말 타인을 짓밟으며 쌓은 부로 축제를 벌이고 그 돈으로 친교제물을 바치는 종교생활은 결코 반갑지 않다는 것입니다. 가식적이고 자기 이익만을 위한 제사가 아니라 현실에서 이웃을 향한 정의와 공의를 펼쳐나가야 함을 알려줍니다. 다만 정의가 흐르는 물처럼 흐르게 서로 위하는 마음이 개울처럼 넘쳐흐르게 라는 본문에서 우리는 약자들을 위한 큰 물결의 삶을 살아야 함을 알게 됩니다. 하나하나의 움직임, 그리고 그 움직임으로 그 물결이 되어 강물처럼 흐르도록, 개울같이 넘쳐흐르게 가는 삶입니다.

 

움직임은 살아 움직임입니다. 약한 자들이라 하여 무시하고 짓밟는 삶 가운데 그것이 실패가 아니고 전부가 아니라고 하는 저항의 움직임, 돈으로 사람의 잣대를 삼고 부를 쫓고자 안달이 난 세상에서 그것이 아니라고 반할 수 있는 힘, 그 움직임들이 모아져 물결이 되어 흐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던 이 물결의 힘이 서서히 강한 바위를 무너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물결은 또 다른 곳에 흘러 끊어지지 않는 흐름을 갖게 됩니다.

 

이 시대 진실 된 삶을 살기 더 힘들어 지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진실을 언론으로 막고 뻔한 거짓말로 사람들의 눈을 가리는 이 현실 앞에서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이 쉽지 만은 않아 보입니다. 그리고 혹여 우리 자신도 하느님 앞에 정의로운 삶을 산다고 하지만 정작 약자들의 삶을 위하기보단 자신의 이념에 치우쳐 남의 탓만을 집중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그리고 약자들과 함께 하는 삶보다는 머리로만 하는 운동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봅니다. 세상의 잣대로 그와 같은 눈과 힘으로 싸우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더한 사랑의 힘으로 사람을 살리는 진실 된 삶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분명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세상의 악이 더 이상 이길 수 없도록 우리가 움직여야 합니다. 움직임을 위해서는 우리가 현재의 삶을 민감하게 봐야 합니다. 그날이 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리고 그날이 오기를 바랄 때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준비]

 

우리는 그 미래를 준비해 가는 우리의 현실을 마태오복음서의 슬기로운 처녀와의 관계성 파악할 수 있음을 봅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열 명의 처녀는 밤을 보내며 기다립니다. 다섯 명의 처녀는 지혜롭고 다섯 명은 미련하다는 것을 전제로 그들의 준비성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열 명의 처녀들에게는 모두 등잔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미련한 처녀들은 등잔의 불이 오래 지속할 수 있도록 여분의 기름을 준비할 줄 모르는 우매함을 드러냅니다. 등잔을 들고 밤에 신랑을 맞이해야 하는 일을 맡고 있는 처녀들이 등잔에 꼭 필요한 기름준비를 안하고 있다면 이것이야 말로 미련한 짓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메시아의 오심을 대망한다 하지만 메시아를 맞이하는 데 필요한 준비를 빠뜨리고 있는 사람들의 미련함을 경고하는 마태오복음서의 이야기입니다. 그 준비는 지금 하지 않으면 너무 늦다고 경고합니다.

 

우리가 여기 더 집중해 보아야 할 부분은 막상 신랑이 오자 여분의 기름이 없어 등잔의 불을 유지할 수 없는 처녀들이 기름을 빌려달라고 하지만 지혜로운 처녀들은 그 기름을 나눠주면 너나 나나 서로 등잔을 오래 밝히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기름을 빌려주지 않는다는 것을 봅니다. 기름을 빌려주고 빌려주지 못하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인자가 도래하는 종말적 사건에 대비해 각자가 반드시 준비하여야 할 일이 있으며 준비할 시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남이 대신해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종말의 도래를 대망하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대망에 합당한 준비를 하라는 경고입니다.

 

우리는 악한 세상에 정의를 부르짖고 실현하려 합니다. 그런데 정작 빛을 밝혀야 하는 그 순간에 기름 없다면? 힘을 발휘해야 하는 타이밍에 중요한 것을 챙기지 못한다면 안 될 것입니다. 그날을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는 우리가 대충 살면서 야훼의 날 주님의 날을 기다린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내면을 들여다보고 자기대화를 하며, 나의 이웃의 마음을 보도록 더 확장시키며 준비해야 합니다.

 

아모스는 그날이 오면 결국 심판받아야 할 이들이 쓰러지겠으나 정작 주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약자들 주의 백성에게는

 

허물어진 터를 세워주고 산에서 햇포도주가 흘러 내리고 쑥밭이 된 성읍들을 다시 일으켜 그 안에 살며 제 손으로 심은 포도에서 술을 짜 마시고 제 손으로 가꾼 과수원에서 과일을 따 먹게 되리라.”(9:11-15 요약)

 

라고 마지막에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일으켜주시는 주님은 그날이 오면 억압되어 살던 모든 이들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일상의 삶을 살게 된다고 말합니다. 특별한 성공이나 영광이 아니라 잃어버렸던 것들을 다시 찾아 소소한 일상의 삶을 살게 해주신다는 것. 사람이 사람답게 살도록 이끄시는 주님의 뜻을 우리는 깊이 세겨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전태일 동지 추모주일입니다. 19701113일 평화시장의 어린 소녀 노동자들이 피를 토하며 죽어가던 모습 속에서 자신의 목숨을 다해 근로기준법의 이행을 위해 자신의 몸을 던져 헌신했던 날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사람을 살리는 일, 어린 노동자들의 삶이 더 이상 비참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의 힘으로 행한 전태일 동지의 죽음은 세상의 수많은 노동자들의 현실을 알도록 눈을 뜨게 했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갈 길은 약자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일이 결국 대중을 움직여 갈 것입니다. 약자들의 힘이 미약해서 우스워보일 정도로 하찮게 보이던 그 힘이 결국 끈질기게 버티며 살아와 우리에게 힘을 주고 있듯이, 지금여기를 사는 우리도 악한 세상 속에서 힘겨워하고 있지만 하느님의 정의는 살아서 우리를 살게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주님의 날, 그날이 오면 모든 것이 회복되고 평화의 삶이 될 것임을 믿고 현재를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힘은 거침없는 물결이 될 것입니다. 바위와 싸우기 위해서는 똑같이 바위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 바위를 깎아낼 수 있는 물살이 된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거센 물살을 통해 바위는 깎이다 쓰러집니다. 거대한 물결, 이것은 대중이 약하지만 하나 둘 손을 잡고 일어설 때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 물결이 되기 위해서는 그냥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더욱 깊은 영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하는 일이 어느 자리에서 어떤 마음인지 제대로 간파하는 힘을 갖어야 합니다. 쉽게 상대를 폄하하고 무기력한 나의 삶을 보상받으려는 시도를 내려놔야 합니다. 내 존재를 다해 이것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라면 곧바로 죽을힘을 다해 가는 것입니다.

 

세상에 평화가 깃들고 정의가 바로서는 그날, 여기에 있는 우리가 움직이고 현실과 치열하게 싸우고 고민하고 갈등하는 가운데 내면의 힘은 커 갈 것입니다. 폭력자들을 내리치고 약한 이들을 바로 서도록 하는 그날이 온전히 올 수 있기를 염원하며 우리는 달려 나갈 것입니다. 그리하여 큰 물결이 되어 서서히 강압적인 권력의 힘을 내려놓도록 할 것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